6화
그리고 잠시 후 믿을 수 없게도 배 속 가득 느껴지는 포만감에 얼떨떨해졌다.
“부빵을 처음 먹어 보나 보군.”
가람의 반응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고한이 엷게 웃으며 말했다. 그제야 하스펠도 가람을 돌아보았다.
“부빵은 야탈카의 전통 여행식이지. 마넹이라는 식물을 빻아 말려 빵을 굽는데, 물에 넣으면 크게 부풀어 오른다네. 이렇게.”
가죽 부대를 꺼낸 고한은 투박한 나무잔에 물을 가득 따르고 부빵 한 조각을 떨어뜨렸다.
조금 기다리자 부빵은 크게 부풀어 올라 컵 밖으로 삐져나올 정도가 되었다.
밀도 없는 부드러운 빵은 마치 구름 같은 느낌으로, 고한이 컵을 움직일 때마다 가볍게 뭉글뭉글 흔들렸다.
“그런데 사실 영양가는 거의 없어. 배도 빨리 꺼지지. 하지만 간편하고 허기를 채울 수 있기 때문에 부빵을 먹고 얼른 잠들면 괜찮다네. 그러니까 가끔은 제대로 된 음식을 먹는 게 좋아.”
고한이 그렇게 충고하는 순간 갑자기 음식 냄새가 훅 끼쳐 왔다. 기사들 쪽에서 슬슬 저녁을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이쪽 모닥불에는 솥은커녕 구워지는 짐승 한 마리 없었는데, 아마도 다들 고한이 말한 그 부빵이라는 것으로 끼니를 때운 것 같았다.
신기한 음식이긴 하지만 어떻게든 허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지혜를 짜낸 것이 엿보여서 가람은 조금 서글픈 음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
엘렌의 품에 인형처럼 얌전히 안겨 있던 제렌이 갑자기 고한의 소매를 잡아 흔들었다.
“왜 그러니, 제렌?”
“나 배고파.”
“이런, 금방 배고파지니 어서 자라고 했잖니.”
“그래서 엘렌 누나한테 안겨서 계속 가만히 있었는데 안 자졌어. 배고파.”
“부빵 하나 더 먹고 얼른 자렴.”
“싫어. 부빵은 이제 질렸단 말이야. 나 저거 먹고 싶어.”
그렇게 제렌이 가리킨 것은 기사들이 준비하는 음식이었다. 부빵으로 어떻게든 식욕을 억누르고 있었는데 냄새가 풍겨 오기 시작하자 견디기 힘들어진 모양이다.
고한이 쩔쩔매며 달래기 시작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어린아이의 욕구만큼 사그라뜨리기 어려운 것은 없다.
누나인 엘렌은 제렌이 부끄러운 나머지 귀까지 발갛게 물이 든 상태였다.
점점 소란스러워져 주변의 시선이 쏠리기 시작하자 곧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눈시울이 붉어진다.
“저거 먹고 싶어. 제대로 된 음식이 먹고 싶단 말이야!”
“리베르튼에 가서 귀리를 팔면 제대로 된 음식을 먹여 줄 테니까, 응? 조금만 참자.”
“싫어! 리베르튼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잖아. 지금 당장 먹고 싶단 말이야!”
고한의 타이름에도 제렌이 전혀 조용히 할 생각이 없어 보이자 걱정스럽게 기사들을 흘깃거리던 엘렌이 울상을 지으며 제 동생에게 간청하기 시작했다.
“제렌, 제발. 소리를 듣고 기사님들이 혼내 주러 오면 어떡하려고 그래.”
“싫어, 싫어! 저거 먹고 싶어! 이제 부빵 싫어! 벌써 한 달 동안이나 부빵만 먹었잖아. 오늘은 리베르튼에 도착한다고 했잖아! 계속 참았단 말이야!”
“제발……. 제렌. 그건 미안해. 중간에 비가 오지만 않았어도 오늘쯤엔 리베르튼에 도착했을 거야.”
엘렌이 울먹이며 말하자 그제야 제 누나의 눈물 고인 눈을 발견한 제렌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소리 없이 어깨를 들썩이며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피곤한 한숨이 터져 나온다.
“제길, 기껏 힘들게 잠들었는데 너 때문에 다 망쳤다. 꼬마.”
사납게 중얼거리며 모닥불가에 털썩 앉은 남자가 제렌을 향해 곱지 못한 시선을 보냈다.
엘렌이 그 시선에서 제렌을 지키려는 듯 감싸 안자 픽 하고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흘린다.
“미안하네. 괜찮다면 이거라도…….”
고한이 눈치를 살피며 부빵이 든 주머니를 내밀었다. 남자는 가볍게 손사래 쳐서 거절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 꼬마가 우는 것도 이해는 가. 먹긴 먹는데 금방 배가 꺼지고 맛도 없으니 한 달이나 그걸로 때웠다면 울 만도 하지. 하지만 다들 지쳐서 자는데 그렇게 소리쳐 대면 어떡하냐. 요 녀석아.”
갑자기 팔을 쑥 뻗는 남자를 엘렌이 다급히 경계했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제렌의 뺨을 꼬집어 흔들었다.
말투가 거칠긴 해도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서 가람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시선을 느끼고 가람을 흘긋 쳐다보더니 곧 하스펠이 허리에 찬 검에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어? 형씨 검사인가?”
“그렇소.”
하스펠이 조금 불편한 얼굴로 긍정했다.
“몸을 보아하니 꽤 강해 보이는데. 한판 붙어 볼까? 어때?”
“거절하겠소.”
상대도 하기 싫다는 듯 하스펠이 딱 잘라 거절했다. 그의 몸에 배인 절도 있는 표정이나 행동은 그가 기사의 갑옷을 입지 않고 있더라도 기사처럼 보이게 해 주는 효과가 있었다.
그에 비해 남자는 잘 쳐줘야 시정잡배처럼 보인다. 부스스한 짧은 머리카락 아래로 이마에 둘러진 화려한 장식 끈과 복잡한 의복이 약간 이국적으로 느껴지긴 했지만 그렇게 강해 보이지는 않았다.
“뭐야, 비싸게 구는구만.”
하스펠이 대응하지 않자 그가 그대로 푹 퍼져 비스듬하게 기대었다.
그런데 마침 기댄 곳이 가람의 등이라 하스펠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람의 눈치만 살폈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도발적인 시선으로 하스펠을 응시하며 히죽 웃어 보인 남자가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여동생한테서 떨어지라고 하면서 검이라도 뽑을 줄 알았더니. 에잉, 됐어. 안 해. 배 꺼져. 안 그래도 배고픈데.”
남자는 곧 몸을 일으켰다. 계속 기대어 있다가는 하스펠이 진심으로 검을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그리고 입맛을 다시며 기사들이 한창 식사하고 있는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사실 그뿐만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사들이 먹는 음식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몇은 입에 고인 침을 삼키느라 정신이 없다. 심히 애처로운 광경이었다.
결국 가람은 보다 못해 하스펠에게 손을 뻗었다. 그렇게나 쏟아지는 시선을 받으면서도 전혀 나누어 줄 생각을 하지 않는 기사들의 야박함이 정말로 감탄스러울 지경이다.
“가방 이리 줘요.”
하스펠은 자신을 오빠로 소개한 가람 때문에 아직도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태였다.
장단을 맞추어 동생처럼 대하기에는 가람은 너무나 범상치 않은 인물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처럼 대하자니 누가 봐도 이상한 남매 사이라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것이다. 그는 결국 말없이 어색하게 가방을 건네었다.
가방을 넘겨받은 가람은 과일 통조림과 고기 통조림, 빵과 라면 따위의 음식을 꺼내어 줄줄이 늘어놓았다. 그리고 모닥불에 솥을 올리고 물을 채운 뒤 끓이기 시작했다.
통조림을 꺼낼 때까지만 해도 영문 모를 얼굴로 가람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그녀가 빵과 하스펠이 만든 고기파이를 꺼내어 놓자 그제야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이런, 가람이라고 했나? 이러지 말게. 식량을 이렇게 낭비하면 나중에 어쩌려고…….”
걱정스럽게 가람을 만류하던 고한이 제렌의 강렬한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제렌은 곧 뜨거운 눈으로 고기파이를 바라보기 시작했는데 어찌나 열렬하던지 차갑게 식은 고기파이가 저절로 데워지지 않을까 기대될 정도였다.
“저 아저씨 말 듣는 게 좋지 않아? 다음 마을까지는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다고.”
마냥 가볍게 보이던 남자마저 진지하게 가람을 말리기 시작하자 제렌은 제 편 하나 없이 적지에 떨어진 병사처럼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어린아이 주제에 진심으로 심각한 표정을 짓는 것이 꽤 웃겨서 가람은 끓는 물에 라면을 풀어 넣고 계란을 깨어 넣으면서도 비실비실 웃었다.
“딱히 걱정 안 해도 돼요. 음식은 충분하니까. 빵 한두 조각에 야박하게 구는 것도 좋지 않으니까요.”
실제로 가람의 커다란 짐 가방은 거의 대부분이 식량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정말로 식량이 떨어진다면 적당히 아무 곳에나 텐트를 치고 조달해 오면 그만이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남자와 고한은 걱정과 기대가 뒤섞인 눈으로 가람을 응시했다.
끓는 물에 스프를 찢어 넣고 면을 넣어 휘젓자 기사들의 음식 냄새 정도는 가볍게 압도할 만한 강력한 향신료의 냄새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사실 기사들의 음식이 화려하다고 해도 기껏해야 절인 고기와 치즈, 말린 야채 따위를 넣고 끓인 것에 불과하니 현대 식품 공학의 결정체인 인공 조미료를 이길 수는 없는 것이다.
하물며 라면은 한 집에서 끓이면 그 층 전체에 냄새가 퍼져 나갈 정도로 강한 향을 가진 음식이다.
예전에 멋모르고 숲에서 라면을 끓였다가 종종 그 구역의 모든 몬스터를 끌어모으곤 했던 가람은 이번에는 야영지 전체에 가벼운 결계를 쳐서 냄새가 퍼져 나가는 것을 방지했다.
덕분에 냄새는 결계 안쪽에서 맴돌게 되었고 당연하게도 평소보다 더욱 진한 향을 자랑했다.
먹음직스러운 냄새에 멀찌감치 서 있던 기사들마저 가람이 앉아 있는 모닥불 쪽을 흘깃거릴 정도다.
“자. 한 그릇씩 떠서 드세요.”
만류하던 고한도, 심드렁한 척 가람을 제재하던 남자도 막상 음식 냄새가 피어오르기 시작하자 더 참기 힘들어진 모양이었다.
라면 한 그릇을 퍼 올린 가람은 맨 먼저 하스펠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그릇을 받아 든 하스펠이 무심결에 그렇게 말하자 가람이 멈칫했다. 그리고 슬쩍 주변을 살펴보았다.
하스펠의 목소리가 작기도 했고, 모두 음식에 정신이 팔려 있는 덕분인지 다행히 들은 사람은 없어 보였다.
「말 놓으세요. 일단 남매 사이라고 했으니까 그런 깍듯한 존대를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대신 저도 말을 놓을게요.」
갑자기 머릿속으로 울리는 목소리에 하스펠이 깜짝 놀라 굳어졌다.
“하지만…….”
무언가 항의하려는 하스펠을 그대로 무시하고 가람은 엘렌과 제렌, 고한과 남자에게도 라면을 한 그릇씩 떠서 건네었다.
기대 어린 표정으로 라면을 받아 든 제렌은 낯선 음식의 모습에 조금 망설이다가 곧 냄새에 이끌려 한 입 맛보았다.
“……맛있어!”
감탄을 터뜨린 제렌이 곧 침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맛이야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너무 매웠던 모양이다.
뒤이어 조심스럽게 한 입씩 라면을 맛본 남자와 고한이 동시에 탄성을 터뜨렸다.
“이거 정말 맛있군.”
“굉장해. 이거 뭐지? 이런 음식은 처음이야!”
두 사람이 연신 감탄을 터뜨리는 모습에 곧 모닥불가에 누워 잠을 청하던 다른 사람들도 비실비실 일어나기 시작했다.
차마 말을 하지는 못하고 뜨거운 시선만 보내는 그 얼굴에 가람은 선선히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음식이야 모두가 먹고도 남을 정도로 충분한 양이니 나누어 주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마침내 기사들 일행을 제외한 모든 굶주린 사람들이 음식을 받아 들고 모닥불가에 둘러앉게 되었다. 모두가 라면의 맛에 흠뻑 빠져서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다소 낯선 맛이었지만 그래도 뜨거운 국물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법이다.
“가람이라고 했나? 난 리카도야.”
맨 처음 다가왔던 남자가 그제야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자 뒤늦게 이 작은 파티에 합류한 사람들도 앞다투어 제 이름을 외쳤다.
“난 벨릭! 아가씨, 음식 잘 먹겠네.”
“소로돈이야. 이거 정말 맛있군.”
“좀므라고 한다네.”
“비블.”
“멀록이야.”
“그랑.”
“라나얼.”
벨릭, 소로돈, 좀므, 비블, 멀록, 그랑, 라나얼.
하나같이 남루한 행색의 남자들이다. 그에 비해 지금은 반짝이는 눈동자와 포만감으로 느긋하게 늘어진 얼굴이 아주 보기 좋다.
가람은 이런 분위기가 좋았다. 다른 무언가를 나누는 것보다 이런 식으로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은 어쩐지 더욱 각별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음식을 나누는 것이 가람이 생각하는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음식을 나누는 것은 어떤 문화권이나 어떤 세계에서도 늘 옳다.
한 그릇의 음식과 한 줌의 고기파이, 통조림에 든 고기로 사람들은 오랜만에 신이 난 모습이었다.
아까까지 지쳐서 널브러져 있던 사람들과 동일인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밝고 활기차다.
가람은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음식에 대해 떠드는 중년 아저씨들을 바라보다가 엘렌과 제렌에게 과일 통조림을 까 주었다.
“이건 뭐예요?”
고기파이와 라면 한 그릇으로 가람에 대한 경계를 완전히 풀어 버린 제렌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가람을 쳐다보았다. 엘렌도 마찬가지였다.
“과일 통조림이야. 먹어 보렴.”
라면과 고기파이로 가람이 주는 음식은 무조건 맛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된 제렌이 제일 먼저 캔의 국물을 홀짝였다. 그리고 그 단맛에 놀란 나머지 말을 잃어버렸다.
그것은 기대 어린 얼굴로 캔의 복숭아 한 조각을 살짝 베어 먹은 엘렌 또한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벙어리가 된 두 아이는 곧 정신을 차리고 캔에 얼굴을 박았다. 가람이 그것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불쑥 질문했다.
“그나저나 두 사람은 어디로 가는가?”
소로돈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였다. 체구가 커다랗고 털이 많아서 마치 곰 같은 인상의 사내다.
“음, 일단은 북서쪽이에요.”
손등을 살핀 가람이 대답하자 비블이 고개를 기울이며 미심쩍은 어조로 끼어들었다.
가느다란 눈매가 의심이 많아 보이는 외모였는데 실제로도 그런 모양이었다.
“북서쪽? 무슨 말이 그래. 여기서 북서쪽이면, 아무 도시도 없을 텐데? 다들 북쪽에 있는 리베르튼으로 가 버려서 그 부근은 전부 숲이라고. 동쪽으로 좀 가면 존 라드가 있긴 하지만.”
지도를 좀 보고 올 걸 그랬나. 가람이 가볍게 후회하며 하스펠에게 눈짓했다.
용케 알아들은 하스펠이 슬쩍 대화에 끼어든다. 그 모습을 보며 가람은 의외로 그가 유용하다고 생각했다.
“리베르튼을 가기 전에 들러야 할 곳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어디에?”
“부모님의 데람입니다.”
비블이 입을 딱 다물었다. 데람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으로 어째서 그곳으로 가냐고 묻는 질문은 사라졌다.
대신 가람은 안쓰러운 시선을 잔뜩 받게 되었는데 세상에 다시없을 불쌍한 사람을 보는 듯한 시선에 찜찜해진 가람이 결국 하스펠에게 소곤거렸다.
“데람이 뭐죠?”
“부모가 죽은 곳입니다.”
가람은 기가 막혀서 순간 말을 잊었다. 하스펠 덕분에 순식간에 고아가 되고 말았다.
물론 그렇게 다를 바도 없지만 그래도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무덤이란 말이에요?”
“무덤? 그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무덤은 귀족들이나 가진 것이니까요. 그냥 말 그대로 부모님이 돌아가신 장소입니다.”
“그런 말을 그렇게 태연하게 해도 돼요?”
“어차피 저는 고아니까요.”
하스펠의 담담한 고백은 가람을 조금 놀라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하스펠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기사였으면 꽤 자랑스러웠을 삶일 텐데도 절대 자신의 삶에 대해 떠들어 대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반대로 가람에게도 처음 방에서 눈 떴을 때를 제외하곤 거의 질문을 하지 않았던 탓에 두 사람은 같이 지낸 시간에 비해서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하스펠은 가람이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질문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가람을 편안하게 해 줌과 동시에 가람도 하스펠에게 질문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마치 암묵적인 규칙처럼.
“이봐, 가람이라고 했나?”
고기파이를 베어 먹던 리카도가 슬쩍 가람에게 다가와서 앉았다. 어느새 하스펠에게 싸움을 걸던 가벼운 남자는 사라지고 진지한 얼굴의 사내가 되어 있었다.
“네, 가람이에요.”
제법 상냥한 척 가람이 대답하자 리카도가 돌연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나와 결혼해 주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