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206화 (206/256)

7화

“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여자는 처음이야. 진심으로 청혼하는 거다.”

이곳에서는 사랑이 아니라 식욕에 의해 평생의 반려를 결정하는 문화라도 있는 건가. 가람이 헛웃음을 짓자 하스펠이 얼굴을 굳혔다.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 들 듯이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자 냄비를 긁던 남자들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지켜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서 다 불어 터진 라면이건만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처음 먹어 본다는 표정으로 냄비를 싸고도는 모습이 대단히 우스웠다.

“거절할게요.”

“왜지? 나는 야탈카의 전사다. 결혼하면 아쉬운 생활은 하지 않을 거야.”

“그런데 방금까지 배고파서 어쩔 줄 몰라 했잖아요.”

자신만만하게 말했던 리카도는 그 말에 그대로 침몰했다. 남자의 덧없는 허세가 사라지는 모습에 일동이 장난스럽게 눈물을 훔쳤다.

그렇게 한바탕 웃고 있는데 누군가가 하늘을 가리켰다.

“아, 로투가 핀다.”

그 말에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새 노을도 진 검은 하늘에 새하얀 달이 떠올라 있었다.

특이하게도 마치 구름이 낀 것처럼 흐릿하고 형태가 분명하지 않은 달이었는데, 기묘하게도 가람은 그 달이 조금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놀랍게도 달이 피어났다.

그것은 무어라 말하기 힘들 정도로 신비한 광경이었다. 마치 꽃봉오리처럼 닫혀 있던 둥근 달이 서서히 쪼개어져 꽃잎이 만개하듯 활짝 열린다.

달빛은 더욱 강해지고 향기마저 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늘에 떠오른 거대한 연꽃이 빛을 뿌리는 모습에 가람은 자신이 밤에 밖으로 나온 것은 처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로투가 만개하는 밤에는 절대 나쁜 일을 하면 안 돼. 그러면 운명이 그 사람을 벌할 테니까.”

라나얼이 짐짓 심각하게 말했다. 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리카도가 콧방귀를 뀌며 끼어들었다.

“난 야탈카 출신이야. 그런 미신은 믿지 않지. 그냥 그만큼 밝으니 잘 들킨다는 뜻으로 돌아다니는 말일 거야.”

“쉿, 말조심해. 할라트를 우습게 보지 말라고.”

할라트.

라나얼이 그 단어를 입에 담자 갑자기 금기를 범하기라도 한 것처럼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하스펠이나 고한, 엘렌까지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모두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서로의 시선을 피한다.

즐거운 분위기가 순식간에 씻겨 나가자 그때까지 과일 통조림을 먹고 있던 제렌이 고개를 들었다.

“할라트가 뭐야, 아빠?”

“그건…….”

고한이 막 입을 열려는 찰나 리카도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고한의 뒤쪽으로 접근해 오는 세 명의 기사들을 발견한 것이다.

갑옷이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꽤나 위협적으로 울렸다. 모닥불에 반사된 쇠가 뜨겁게 번들거린다.

“무슨 일이십니까, 귀하신 분들?”

리카도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하스펠은 여차하면 바로 검을 뽑을 수 있는 위치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기사들은 가소로운 얼굴로 둘을 바라보다가 가람을 턱짓했다.

“여자, 아까 보니 신기한 물건들을 많이 가지고 있던데. 내 주인님이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잠깐 같이 가지.”

“아직 어린 아가씨입니다.”

굳은 얼굴로 고한이 가람의 앞을 막아섰다. 무슨 상황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고한이 말리는 것을 보니 이대로 따라갈 경우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거절한다고 순순히 물러나지는 않을 것 같아 보였다. 기사 중 하나가 고한의 가슴을 그대로 걷어찼기 때문이다.

“아빠!”

“아빠아!”

엘렌과 제렌이 그렇게나 좋아하던 복숭아 통조림마저 집어 던지고 나뒹구는 고한에게로 달려갔다.

날아가듯 처박힌 것을 보아 아마도 고한의 가슴팍은 시퍼렇게 멍이 들 것 같았다.

“감히 누구를 막아서는 거지? 나는 칼라일의 기사다.”

오만하게 말한 기사는 그대로 가람의 팔을 향해 손을 뻗었다. 더 대화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그 팔과 목에 각각 리카도와 하스펠의 검이 겨누어졌다.

“칼라일이라고 해도 델리움의 수많은 제후국 중 하나인 작은 나라일 뿐이지. 너무 설치는데.”

“이런 무례한 태도를 하고 감히 스스로를 기사라고 칭하다니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리카도와 하스펠이 빈정거리자 기사의 얼굴이 순식간에 비열한 빛을 띠었다. 동시에 함께 왔던 두 기사가 검을 뽑았다.

그 모습에 뒤쪽에서 지켜보던 기사들이 작게 휘파람을 분다. 구경거리가 생겼음을 알리는 소리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기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여차하면 합류하려는 듯 검을 만지작거리는 기사들도 있었다.

사실 이들은 기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들로,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용병이었던 작자들이다. 번쩍이는 갑옷과 검을 지급받고 나니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날뛰고 싶어진 것이다.

검을 쥐면 휘두르고 싶고 도끼를 잡으면 내리찍고 싶은 것은 모두가 느끼는 욕구이다.

하지만 그것을 억누를 수 있느냐 억누르지 못하느냐로 악한을 판단하는 것은 꽤 신뢰할 수 있는 기준이다.

“지금이라도 땅에 엎드려 빌면 봐줄 수도 있어.”

스물의 무장한 기사들과 열세 명의 민간인.

애초에 싸움이 되지 않는 구성이다. 그나마 열세 명 중에 두 명은 어린아이이고, 한 명은 여자.

검을 제대로 쓸 수 있는 사람도 리카도와 하스펠 정도로, 나머지는 그냥 산짐승으로부터 스스로의 몸을 지키기 위해 검을 차고 다니는 사람들에 불과했다.

진짜로 시작하게 된다면 일방적으로 학살당할 가능성이 높다.

“전사는 빌지 않는다.”

리카도가 기사의 팔에 겨눈 검에 힘을 주었다.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가 두 눈 가득 이글거리고 있다.

하스펠 또한 얼음처럼 차가운 눈으로 기사를 응시하고 있었다. 둘 다 죽음을 불사하고 싸울 것 같은 기세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걷어차였던 몸을 추스른 고한이 급히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땅바닥에 흡수라도 되고 싶은 듯이 낮게 엎드려 비는 그의 양옆에 엘렌과 제렌이 잔뜩 겁먹은 채 달라붙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 광경에 리카도와 하스펠의 기세가 급격하게 수그러들었다.

“용서? 해 줄 수 있지. 이 시건방진 두 놈이 지금 하고 있는 짓에 대해 제대로 사과한다면 말이야.”

제 목에 칼이 들어와 있는데도 기사는 시종일관 당당했다. 하스펠과 리카도가 저를 해칠 수 없을 거라고 완벽하게 확신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가 베이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정말로 전면전이다. 얼마든지 죽인다고 해도 정당방위라는 명목을 세우면 그만이었다.

“이, 이봐. 사과하게. 그냥 사과해. 저 어린것들이 가엾지도 않나?”

라나얼이 더듬더듬 두 사람을 설득했다. 하스펠은 가람을 흘긋 바라보았다. 가람의 놀라운 능력들. 하지만 그녀의 전투 능력은 완전히 미지수였다.

그러나 그 범상치 않은 능력을 보아 기사들의 요구에 응한다고 해도 그녀에게 크게 해가 되는 일은 생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신 혼자 열 명 정도는 상대할 수 있지만 모두를 지키면서 싸우는 건 불가능했다. 맞서 싸우는 것보다 고개 한 번 숙여서 희생을 줄일 수 있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하스펠이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동시에 리카도의 얼굴이 굳어졌다.

“제법 현명한 놈이군. 하지만 그거로는 부족하지.”

목에 들어와 있던 검이 사라지자 순식간에 기세등등해진 기사가 챙 소리 나게 검을 뽑았다. 칼날은 그대로 하스펠의 어깨를 향해 내리쳐졌다.

“오른팔을 바치는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나?”

리카도가 급히 검으로 방어하려고 했지만 자세가 좋지 못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기사의 검이 허공을 날았다.

놀라운 속도로 뽑힌 하스펠의 검이 그대로 제 어깨를 향해 날아오는 검을 쳐 낸 것이다. 용서를 빌었던 말이 꿈만 같을 정도로 그의 표정은 덤덤했다.

“손아귀 힘을 좀 더 기르는 게 좋겠군.”

무심한 하스펠의 말에 기사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본격적으로 분위기가 험악하게 돌아가기 시작하자 기사 몇 명이 추가로 검을 뽑았다.

여기저기서 쇳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자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고한과 소로돈, 벨릭이 어색하게 칼날을 세웠다.

가람은 자신을 감싸는 라나얼의 뒤쪽에서 흥미롭게 이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죽어 갈 때 배에 칼을 두 자루나 박고 있기에 형편없는 실력인 줄 알았더니 하스펠의 검은 기대 이상이다.

하긴, 실력이 있으니 그곳에서도 제일 끝까지 살아남아 있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잘난 척이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는지 보겠다.”

주춤주춤 바닥에서 검을 주워 든 기사가 합류한 네 명과 함께 하스펠과 리카도에게 달려들었다.

5 대 5로 숫자는 맞았지만 고한과 소로돈 등은 전력 외라고 함이 옳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세 사람은 순식간에 나가떨어졌다.

사실 너무 겁을 집어먹은 나머지 도망친 것에 가까웠다. 결국 싸움은 5 대 2의 양상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쪽이 필사적인 것에 비해서 기사들은 재미있는 여흥거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나무 따위에 비스듬히 기대어 내기 돈을 주고받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스펠이 순식간에 다섯 기사들의 검을 날려 버리고 그중 둘의 허벅지를 베어 버리자 그 분위기도 끝이 났다.

동시에 열 명 정도의 기사들이 검을 빼 든 것이다. 귀족의 마차를 지키는 최소한의 인원만 제외하고 모두 덤벼들 태세였다.

2 대 15.

패배밖에 생각할 수 없는 절망적인 수치였지만 하스펠은 여유롭게 리카도에게 말을 건네었다.

“이봐, 내가 열 명 정도 처리할 테니 다섯을 맡아 주겠나?”

“내가 열을 맡을 테니 그쪽이 다섯을 맡지그래? 배도 두둑해서 지금 아주 힘이 넘치는 상태라고.”

히죽 웃으며 대답한 리카도는 커다란 환도를 위협적으로 휘둘러 기사들의 접근을 차단했다. 바람 소리가 일 정도로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패도적인 힘과 변칙적인 수법으로 아차 하는 순간 목이 날아가기 딱 좋아 보이는 검술이다.

그에 비해 하스펠의 검은 빠르고 정확하고 정직했다. 딱 그의 성격을 닮아 있는 검이다.

하지만 차마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피할 수 없을 만큼 정확한 덕분에 오히려 리카도의 것보다 압도적인 면이 있었다.

갑옷의 이음새를 정확하게 노리는 것이 깔끔함에도 불구하고 살기가 넘친다.

“겨우 두 놈 가지고 뭘 하는 거냐? 부상까지 입다니! 여자만 남기고 다 처리해.”

갑자기 외친 사람은 전신에 고급스러운 옷감을 휘감은 통통한 남자였다.

두터운 어깨와 복부를 보아 젊었을 때 검을 휘두르다가 나이가 들자 그 근육이 그대로 살이 된 체형으로 보였다.

“죄송합니다. 마스티페 님.”

비굴한 얼굴로 급히 고개를 숙인 기사가 살기등등한 얼굴로 하스펠을 향해 다가왔다. 아마도 그가 대장인 모양이었다.

“수다 떠는 것도 여기까지로군.”

열다섯 명의 기사에 포위된 두 사람은 전혀 기죽지 않은 상태로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곧 격돌하는 그들을 지켜보던 가람이 라나얼을 제치고 걸어 나갔다.

좀 더 지켜볼까 싶었지만 밤이 깊어지고 있어 더 늦기 전에 엘렌과 제렌을 재워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상당히 별것 아닌 이유였지만, 그것이나 저 전투나 가람에게는 둘 다 비슷비슷한 무게였다.

아니, 오히려 엘렌과 제렌의 수면 쪽이 좀 더 중요했다. 수면 부족으로 칭얼거리는 아이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것은 정말로 사양이다.

“자아, 여기 좀 주목해 주세요.”

당연한 말이지만 목숨을 건 싸움 중에 한눈을 파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가람이 다시 한 번 말하자 마치 마법처럼 모두가 그대로 멈춰 섰다.

“시간도 늦었으니 이쯤 하고 그만 끝내죠.”

하스펠과 리카도를 포함해 그 자리에 있던 모두를 어처구니없게 만드는 말이었다. 험한 꼴이라도 당할까 걱정된 소로돈이 급히 가람을 말리기 위해 다가섰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만 끝내자고 해서 그만할 리가…….”

손바닥을 뻗어 소로돈이 다가오는 것을 저지한 가람이 미소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강경하고 묘한 울림이 있는 목소리였다.

“그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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