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207화 (207/256)

8화

그러자 정말로 거짓말처럼 기사들이 ‘그만’했다. 멀찌감치 서 있던 마스티페까지 마차 안으로 들어가 버렸을 정도다.

그리고 뒤이어 가람이 떠나라고 말하자 정말로 짐을 챙겨 마차를 몰아 야영지를 떠나 버렸다.

야영지에서 빨리 떠나야 하는 사명이라도 받은 사람들처럼 순식간에 짐을 챙겨 사라진 것이다.

“귀신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군.”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마차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비블이 넋 나간 어조로 말했다.

모두가 동감이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가람은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리카도는 허무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서 마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돌아오지 않을까 기대하기라도 하는 모습이다.

“어떻게 한 겁니까.”

모두 마차가 사라진 방향만 망연하게 바라보는 사이 가람의 옆으로 조용히 다가온 하스펠이 작게 물었다.

“봤잖아요?”

마법으로 그릇을 깨끗하게 닦아 내고 가방 안에 챙겨 넣던 가람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당연히 그 대답은 하스펠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가라 한다고 정말로 갈 리가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가네요. 자아,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고 침낭이나 펴 줘요. 슬슬 자야 할 시간이라고요.”

가람이 전혀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자 하스펠은 마지못해 가람을 따라 침낭을 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사람들도 어슬렁어슬렁 다가와 기계적인 동작으로 잘 준비를 했다.

몸은 누울 곳을 마련하고 있어도 다들 머릿속으로는 한 가지를 생각하고 있는 듯이 멍한 표정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어리둥절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딱히 설명할 것도 없이 가람은 그들에게 명령한 것에 불과했다. 패스로 구입한 능력이었는데, 가람이 명령하면 그대로 복종하는 것이다.

비록 한시적인 효과에 많아 봐야 백 명 정도의 사람에게 사용할 수 있는 등 제약이 좀 있긴 했지만, 그래도 귀찮은 질문을 연신 던지는 사람의 입을 막거나 이런 소소한 분쟁을 해결하는 데는 충분하고도 남는 성능을 보여 주었다.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서 누가 나한테 설명 좀 해 줬으면 좋겠군.”

나무둥치에 기대어 검을 지지대 삼아 비스듬히 누운 리카도가 투덜거렸지만 그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바탕 소란이 잦아들자 잊고 있던 피로가 급격하게 몰려오는 모양인지 사람들은 여기저기에 드러눕기 시작했다. 기사들이 모두 떠나 버렸기 때문에 야영지는 널찍하게 비어 있었다.

“진짜 이상한 일이었어.”

모두가 하늘을 보며 눕자 누군가가 불쑥 말했다. 여기저기서 동의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정작 가람을 수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 신기한 일이었다.

가라고 한다 해서 가는 것도 아닐뿐더러 기사들이 자진해서 야영지를 벗어나는 걸 직접 보았으니 가람을 추궁하기도 뭣한 것이다.

어쨌든 행운이라고 생각하며 지친 사람들은 눈을 감았다. 밤새 뜬눈으로 신비한 연꽃 모양의 달을 올려다본 것은 가람뿐이었다.

* * *

“여기서 작별이라니 아쉽구만.”

고한이 가람의 어깨를 토닥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의 뒤에 선 사람들도 눈시울을 붉히지는 않았지만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덕분에 다니는 내내 배부르게 잘 먹었어.”

“나도.”

“아가씨같이 좋은 사람은 처음 봤어.”

소로돈과 벨릭, 그랑이 차례대로 가람에게 인사했다. 가람과 다닌 일주일 동안 그들은 부빵을 단 한 번도 먹지 않았다.

가람이 가방을 털어 온갖 음식을 만들어 먹여 주었기 때문이다.

모든 음식은 폭발적인 반응을 끌어내었고 침이 마를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그 평가는 고스란히 가람의 평판이 되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저 아쉬움 중에는 가람과 헤어지는 아쉬움 외에 음식을 향한 것들도 있으리라.

“이제 그 맛있는 음식들을 먹는 것도 끝이겠지.”

비블의 그 말은 가람의 추측에 확신을 심어 주었다. 다음으로 다가온 것은 리카도였다.

그는 하스펠의 눈치를 살피다가 가람의 손을 잡았다. 거칠고 커다란 전사의 손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은 가람의 손이 마치 어린아이의 것처럼 폭 감싸였다.

“마음 같아서는 따라가서 호위해 주고 싶지만 리베르튼에 들렀다가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 봐야 해서…….”

“괜찮아요.”

가람이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사양하자 그가 답답하다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한층 진지해진 목소리로 고백했다.

“갑자기 청혼해서 난감하게 만든 건 미안해. 그렇게 맛있는 건 처음 먹어 봐서 너무 놀랐거든.”

어쩐지 조금 측은한 고백이다. 그것이 그대로 표정에 드러났는지 조금 쑥스러워하던 리카도가 가람의 손을 꽉 잡았다.

“하지만 언제든지 나와 결혼할 생각이 생기면 말해 줘. 나는 환영이니까.”

당당하게 말한 리카도가 씨익 웃었다. 야숙으로 더러워진 얼굴이지만 그렇게 웃으니 제법 근사하다.

제대로 씻겨 놓으면 꽤 미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가람이 대답했다.

“절대 그럴 일 없을 거예요.”

부드러운 가람의 말에 기대했던 리카도는 이번에도 처참하게 무너졌다.

‘그, 그렇구나.’ 하고 말을 더듬는 그를 밀쳐 내며 도도독 달려온 누군가가 가람의 다리에 답삭 달라붙었다.

“싫어, 누나 가지 마!”

가람이 건네어 준 사탕 한 봉지로 완전히 그녀의 팬이 되어 버린 제렌이 외쳤다.

“가야 해. 여기서부터는 방향이 다르거든.”

패스는 북서쪽, 다른 사람들은 북동쪽을 향해 가고 있으니 그 갈림길에서 헤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쉽긴 하지만 아쉬움 없는 헤어짐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작은 제렌이 받아들이기에는 그 아쉬움이 너무 컸던 모양이다.

사실 이런 사태를 대비해서 헤어지기 바로 직전까지 제렌에게 알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기도 하지만.

“안 돼! 안 돼! 누나 저 숲으로 가는 거야? 안 돼! 숲에는 위험한 게 많이 살고 있다고 엄마가 그랬단 말이야. 절대로 안 돼에에에!”

연인이 죽는다고 해도 이보다 애절하게 울 수는 없을 것이다.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제렌이 절규했다. 가람은 웃음을 참으며 난감하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제렌, 말을 잘 들어야 착한 아이지?”

“나쁜 아이 할래!”

“나쁜 아이는 매를 맞게 되는데?”

“그냥 매 맞을래요! 안 돼! 누나는 못 가! 이런 게 어디 있어! 그냥 우리랑 가요!”

그렁그렁한 눈물에 뺨이 시뻘겋게 된 제렌은 안쓰럽기도 했지만 참을 수 없는 웃음을 부르기도 했다.

결국 여기저기에서 킥킥 웃는 소리가 터져 나오자 꼬마가 제법 무섭게 눈을 부라렸다. 그렇다곤 해도 웃음을 멈추는 사람은 없지만.

“제렌, 계속 이러면 누나는 제렌을 싫어하게 될 거야.”

차분했지만 가람의 말은 제렌의 귀를 잡아당겨 소리치는 것 이상의 효과가 있었다.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제렌이 충격받은 눈으로 가람을 올려다보았다.

손을 뻗어 다리에 두른 팔을 떼어 내자 힘을 줄 생각도 못 하고 스르륵 떨어진다. 곧 제렌의 두 눈에 눈물이 차올라 뺨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울면 한심한 남자로 생각할 거야.”

그 말에 제렌은 필사적으로 눈물을 삼켰다.

“하, 하지만 숲은 위험하다고 엄마가…….”

“하스펠 오빠가 있잖니. 날 지켜 줄 거란다.”

가람이 옆에 서 있던 하스펠을 가볍게 잡아당기며 대답했다. 굳어진 하스펠은 여전히 오빠라는 호칭이 어색한 모양이었다.

하스펠의 뛰어난 무위를 목격했던지라 제렌도 그 말에는 반박하지 못했다.

울음을 삼키는 제렌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준 가람은 마지막으로 엘렌과 가볍게 포옹한 뒤 한 발자국 물러서서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럼 지금까지 즐거웠어요. 조심해서 가세요.”

깔끔하게 작별 인사를 했지만 누구도 몸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가람이 먼저 뒤돌아 서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황급히 따라붙은 하스펠이 뒤쪽을 흘긋거리며 가람에게 속삭였다.

“안 떠나고 아직 계속 보고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등 뒤에 쏟아지는 시선이 이렇게나 따끔거리는데 모를 리가 있나. 하지만 가람은 돌아보지 않았다.

만남은 길수록 좋고 이별의 순간은 짧을수록 좋다. 아쉽긴 하지만 아마도 잠깐 가람에 대해 떠들다가 곧 잊게 될 것이다.

가람이 그러하듯이. 하지만 하스펠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쉬워요?”

“그렇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요.”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며 간간이 손을 흔들어 주던 하스펠이 조금 머쓱하게 대답했다. 차갑게 생긴 얼굴로 은근히 정이 많은 성격이었다.

“아쉬우면 저 사람들과 함께 가지 그래요?”

농담인가 해서 하스펠이 가람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지만 가람의 얼굴에 장난기는 없었다. 진심인 것이다.

마음 한편이 차갑게 내려앉는 듯한 섭섭함에 하스펠은 한참 후에야 간신히 대답했다.

“왜 그런 말을 하십니까?”

“헤어지는 것이 아쉬우면 함께 가면 되죠. 하스펠은 어디에 묶인 몸도 아니잖아요? 구명의 은혜라는 거 안 갚아도 되니까 언제든지 떠나도 돼요.”

“저와 다니는 것이 싫으십니까?”

“그건 아니지만, 하스펠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떠나도 좋다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당신은 홀로 갈 생각입니까?’

하스펠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가람의 말이었지만 하스펠은 그 말에서 쓸쓸한 상냥함을 느꼈다. 언젠가 가람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제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만나 봤을까요?’

그 말은 가람이 아주 많은 사람들을 만났음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가람은 혼자 있었다.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홀로 걷고 있는 것이다.

하스펠은 가람이 아주 많은 만남과 이별을 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헤어짐의 아쉬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많은 이별을.

만나서 어울리고 웃고 떠들지만 결코 곁은 내어주지 않는다. 하스펠은 자신이 가람의 곁에서 여행하고 있다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깨달았다. 곁, 곁이라니.

가람과의 거리가 가깝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이질적인, 알 수 없는, 베일에 싸인 정체불명의 이방인이니 가까울 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다.

별을 향해 뻗은 손이 별에 닿지 않아 멀다고 느끼는 막연한 감각과 수억 광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실제 거리를 깨닫고 죽을 때까지 간다고 해도 결코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사이에는 결코 깰 수 없는 벽이 있다.

이전 하스펠의 감각이 전자와 같았다면, 이번에는 후자와 같은 깨달음이 선명한 현실감을 가지고 닿아 온 것이다.

“아니요. 안 갑니다.”

“왜요?”

자신에게 허락된 거리. 하스펠은 그것을 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본능처럼 알게 되었다. 그는 뒤를 한 번 돌아본 뒤 담담하게 말했다.

“이미 너무 멀어졌군요.”

가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다른 사람들도 동쪽으로 떠나 버린 덕분에 길 끝에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설픈 핑계였지만 그럴듯하기도 하다.

‘하긴 그런가.’ 하고 별생각 없이 수긍한 가람이 속도를 내어 걷기 시작했다. 패스까지는 아직 꽤 거리가 있다.

부지런히 걸으면 아마 오늘 안에 바늘이 원 안으로 들어올 만큼 거리를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홀로 걷는 것에 익숙한 사람은 걸음을 맞출 줄 모른다. 가람 또한 비슷했다. 하스펠이 함께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 그와 속도를 맞추었지만 그 의식하는 것을 자주 깜빡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하스펠이 신체 능력이 뛰어난 기사가 아니었다면 아마 뒤처져도 한참 전에 뒤처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동 마법은 안 쓰시는 겁니까?”

묵묵히 걷고 있던 하스펠이 문득 질문했다. 가람의 능력이라면 굳이 이렇게 느리고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이동하지 않아도 될 텐데.

텐트를 순식간에 옮겼던 그 놀라운 능력을 쓰면 목적지가 어디이든 순식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람의 대답은 심드렁했다.

“안 써요.”

“어째서 일부러 걷고 있습니까?”

“그냥 걷고 싶으니까요.”

“하지만…….”

“안 그래도 무료한 시간을 더 무료하게 만들 필요가 있나요. 유일하게 내가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 시간이니까 좀 재미있게 다니고 싶다구요.”

할 말이 없어진 하스펠이 입을 다물었다. 편한 길을 놔두고 굳이 불편함을 찾아다니는 가람을 그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약간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가람의 한계가 없을 것 같은 능력들을 보면 아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살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활동조차 하지 않아도 죽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쯤 되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괴로운 모양이다. 텐트에서 무기력하게 누워 있던 가람이 떠오르자 하스펠은 나름대로 납득했다.

“심심한데 이쪽 세계 이야기나 해 봐요.”

걸음을 조금 늦추며 가람이 툭 던지듯 말을 꺼냈다. 어젯밤부터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제야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떤 이야기 말입니까?”

“뭐 국가나 나라나 대륙 같은 거. 그리고 아까 그 칼라일? 그 기사단은 뭐예요?”

“델리움의 제후국인 칼라일 왕국의 기사단입니다. 마스티페라는 사람은 아마 왕국의 귀족 중 한 명일 겁니다.”

“델리움? 아, 그러고 보니 리카도라는 사람 어디의 전사라고 하던데. 거기도 델리움의 제후국이에요?”

“야탈카. 남쪽에 있는 거대한 부족 국가입니다. 델리움이 제후국으로부터 충성을 받는 것과 달리 야탈카는 많은 부족들로 이루어져서 연합을 이룹니다. 원래는 부족 간의 다툼이 많았지만 델리움과의 전쟁으로 통합되어서 어엿한 국가가 되었죠. 아까 만나 본 리카도와 같이 자유분방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외에도 있어요?”

“크게 나누자면 델리움과 야탈카, 그리고 그 사이의 리베르튼 연합국이 있습니다.”

“리베르튼 연합?”

“예. 야탈카와 델리움의 경계에 있는 연합 국가입니다.”

이어진 말에 따르자면 이 대륙은 커다란 모래시계의 형태를 하고 있다.

그리고 모래시계가 가장 잘록해지는 중앙에 리베르튼이 있고, 그를 중심으로 중소 왕국이 모인 것을 리베르튼 연합국이라고 한다.

모래시계의 위쪽에는 델리움이 있고, 아래쪽에는 야탈카가 있었는데 지형적인 특성상 대량의 군대가 이동하는 것이 용이하지 못했던 탓에 오랜 기간 동안 지루한 장기전이 이어졌고 결국 휴전 협정을 맺게 되었다.

그렇다곤 해도 워낙 사상과 문화가 달랐던 탓에 번번이 협정이 폐기되곤 했다.

협정과 협정 폐기가 반복되는 역사 끝에 결국 두 국가는 크게 양보해서 대륙의 중앙, 리베르튼을 중심으로 비무장 지대를 형성하기로 협의했는데, 서로 국경을 마주 대지 않음으로써 긴장이 고조되는 것을 막고 기습 공격을 예방하기로 한 것이다.

덕분에 야탈카의 국경에서 델리움의 국경까지 군대를 이끌고 가려면 리베르튼을 지나야 하고, 그 사이에 델리움은 전쟁 준비를 할 수 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바다를 이용한 기습도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 방법은 정말로 효과적이었다.

리베르튼의 양옆에 움푹 파인 바다는 파암해라고 불릴 정도로 파도가 높고 조류가 거센 지역이었다.

바위를 부술 정도로 사나운 바다이니 배를 끌고 들어가면 물귀신이 되기 딱 좋다. 그것은 서파암해와 동파암해 모두 공통적이었다.

즉, 전쟁을 하려면 리베르튼 근처에 모인 중소 국가를 뚫고 들어가 리베르튼 성벽을 허물고 다시 중소 국가를 뚫고 가서야 서로의 국경에 닿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흐응, 결국 두 나라가 대륙을 갈라 먹고 있고, 중간에 리베르튼이 끼어 있다는 뜻이군요.”

“정확합니다.”

“그런데 두 나라 중에 어느 쪽이 더 커요?”

“그건 잘 모르겠지만, 아마 거의 비슷한 수준일 겁니다. 제 생각에는 델리움이 조금 더 크지 않을까 합니다만.”

“그래요? 하스펠은 어느 국가 소속이에요?”

무심코 던져진 질문에 하스펠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앞을 보며 걷고 있는 가람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델리움 출신입니다.”

“그러고 보니 하스펠도 기사였죠? 예전에 그 칼라일 기사단인가 하는 사람들이랑 아는 사이 아니에요?”

“델리움은 수많은 제후국이 있습니다. 땅도 어마어마하게 넓어서 끝에서 끝까지 가는 데 반년도 넘게 걸립니다. 같은 제후국이라고 해도 권력에 따라 계급이 나뉘고 왕이라 해도 다른 제후국의 왕을 다 못 볼 정도입니다.”

“모른다는 거군요. 하긴, 알았으면 그렇게 싸울 리가.”

지난번 있었던 작은 다툼을 떠올리며 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칼라일은 최근 들어서야 기사단을 꾸리고 있다고 들었으니 그중 아는 얼굴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대부분 신입이라서?”

“예.”

“그러면 하스펠은 어느 기사단이에요?”

하스펠이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대답은 한참 동안 나오지 않았다.

그것에 이상함을 느끼고 가람이 다시 질문하려던 차, 그녀의 입을 막듯이 하스펠이 앞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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