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208화 (208/256)

9화

“농장이군요.”

그 말대로 나뭇잎 사이로 가지런히 심어진 나무들이 보였다.

3∼4미터 정도 되는 키 작은 나무들에 머리통만 한 커다란 연두색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는데, 언뜻 보기에는 마치 야자열매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스펠이 말을 돌린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가람은 일부러 모른 척 넘어가 주기로 했다. 숨기고 싶다면 굳이 캐묻고 싶지 않다.

솔직히 그가 발견된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숨기고 싶은 것이 많은 것은 당연했다.

“근처네요.”

바늘은 어느새 원 안쪽에 있었다. 방향은 정확히 농장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랜 세월 패스를 찾아다닌 감으로 가람은 농장이 목적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농장 주인과 마주치지 않고 패스만 회수해서 떠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생각보다 아담한 규모의 농장이었다.

촘촘하게 박힌 울타리가 농장을 감싸고 있고 그 가장자리에 조그마한 오두막이 있었는데, 그 앞 나무 테이블에서 마침 무언가를 먹고 있던 남자가 가람과 하스펠을 향해 소리치며 손짓했다. 아무래도 가까이 오라는 뜻 같았다.

부르는데 안 가기도 뭣하고, 무턱대고 돌아다녀서 괜한 오해를 사는 것도 껄끄러웠던 가람은 순순히 그가 부르는 쪽으로 다가섰다.

패스만 슬쩍 챙겨 떠나려던 계획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가람을 부른 남자는 노동으로 다져진 굵은 어깨가 근사한 사십 대쯤 되는 털복숭이였는데, 덥수룩한 눈썹과 북슬북슬한 턱, 콧수염으로 뒤덮인 얼굴을 하고 있어서 세수를 샴푸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축 늘어진 눈썹 때문에 사나워 보이지는 않았다.

“부르셨어요?”

가람이 먼저 공손하게 입을 열자 하스펠과 그의 검을 흘끔거린 남자가 가람에게 빙긋 웃어 보였다.

“열매 사러 왔소?”

질문이긴 했지만 남자의 말은 묘한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어쩐지 압박받는 듯한 기분에 가람이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네? 그게…….”

“하하, 그냥 한번 물어본 거요. 농장에 열매 사러 온 게 아니면 도둑밖에 없지. 도둑으로 보이지는 않으니 당연히 열매를 사러 온 거겠지?”

열매를 사지 않으면 도둑으로 취급하겠다고 은근히 내비치는 그 말에 가람은 오해가 깊어지기 전에 거절하려고 했다.

당연하게도 이곳의 화폐가 없기 때문에 무언가를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막무가내로 가람과 하스펠을 자리에 앉히고 나무에서 열매를 따 윗부분을 베어 내고 보여 주었다.

마치 아보카도 같은 질감의 새하얀 과육에 진한 갈색의 엄지손가락만 한 씨앗이 알알이 박혀 있었는데,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과일이 흔히 뿜어내는 달착지근한 냄새가 하나도 없다.

“봐 봐, 씨가 꽉 찼다고. 정말로 잘 됐지?”

“아……. 네. 그렇네요.”

꽉 찬 것인지 어떤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남자가 너무나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람은 얼떨결에 긍정했다.

사실 이게 과일이라면 풍겨 오는 단내가 전혀 없으니 농사가 망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묘하게 필사적인 그의 앞에서 차마 꺼내기 힘든 말이었다.

어쨌든 가람의 긍정에 기분이 좋아진 남자가 크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아, 열매 볼 줄 아는 사람들이군. 아니지, 이럴 게 아니라 일단 맛을 좀 봐. 맛은 더 끝내준다고!”

그렇게 말한 남자는 말릴 새도 없이 열매를 가져다가 오두막 옆에 있던 작은 아궁이 안에 밀어 넣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익혀 먹는 종류의 과일이었던 모양이다. 이쯤 되자 아무래도 좋아진 가람은 달관한 것 같은 얼굴로 가만히 앉아 남자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런 가람에게 하스펠이 슬쩍 질문을 건네었다.

“말리지 않아도 괜찮습니까?”

“저렇게 신났는데 말릴 수 있겠어요?”

어깨를 으쓱인 가람은 아예 본격적으로 가방을 풀어 옆에 내려놓고 남자가 열매를 다 익혀 오기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농장 주인은 간간이 가람을 돌아보며 신중한 기색으로 아궁이를 살폈는데, 열매를 익히는 것에 정말로 열과 성을 다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 열매는 뭐예요?”

처음 보는 열매가 신기했던 가람이 주변을 둘러보며 하스펠에게 질문했다. 탁자 위에는 남자가 먹던 열매가 아직 놓여 있었다. 스푼이 담겨 있는 것을 봐서는 아마 파먹는 종류의 열매인 모양이다.

“스튜 열매입니다.”

“스튜?”

“예. 익히면 내용물이 녹아서 크림처럼 변하는데, 그 맛이 꼭 스튜 같다고 해서 스튜 열매라고 부릅니다. 저도 시장에서 쌓여 있는 것을 사 보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나무에 열려 있는 것은 처음 보는군요.”

“맛있어요?”

“그렇다마다!”

가람이 묻는 순간 불쑥 끼어든 농장 주인이 매끄러운 동작으로 열매를 내려놓았다.

앞에 놓인 열매를 들여다보니 과연 하스펠이 말한 대로 내용물이 수프처럼 녹아 농밀한 기포를 터뜨리고 있었다.

언뜻 건더기처럼 보이는 것도 있었는데, 아마 아까 보았던 씨앗인 것 같았다.

“조심해. 뜨거워!”

정말로 수프인가 싶어 손가락을 찍어 맛을 보려는 가람에게 다급하게 경고한 농장 주인은 이어서 하스펠에게도 열매를 내어주었다.

그리고 어설프게 깎은 나무 스푼을 쥐여 준 뒤 그 앞에 앉아 깍지 낀 손을 코끝에 받치고 진지하게 권했다.

“어서 먹어 봐.”

무시무시한 기대가 담긴 시선 앞에서 스푼을 드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가람은 호기심 어린 기분으로 스튜를 한 스푼 떠 올렸다.

야자열매의 안쪽에 크림수프가 들어 있는 느낌이다. 맛을 보니 스튜 열매라는 이름답게 정말로 깊은 감칠맛이 있었다.

고기 스튜처럼 농밀한 맛도 있지만 과실 특유의 기름지지 않은 고소함이 입 안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씨앗은 어묵과 곤약을 섞어 놓은 것 같은 독특한 질감이었는데, 간혹 씹히는 커다란 씨앗은 볶은 쇠고기를 씹는 것 같은 식감과 고소함이 있었다.

“맛있네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맛있었다. 뒤늦게 맛본 하스펠도 이렇게 맛있는 스튜 열매는 처음 먹어 본다며 감탄했다.

“바로 딴 스튜 열매는 정말 맛있지. 따고 나면 그때부터 크림을 양분으로 씨앗을 키우기 시작하니까 시장에서 산 것들은 크림도 적고 씨앗도 질겨서 맛이 없었을 거야. 이렇게 딱 좋은 쫄깃함이 아니지.”

가람의 칭찬에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농장 주인이 기세를 회복하고 자랑하듯 설명했다.

가람은 다시 스튜 열매를 떠서 한 입 맛보았다. 씨앗을 이 사이에 놓고 살짝 힘을 주자 가벼운 탄력으로 반발해 온다.

언제 한번 도시로 간다면 스튜 열매를 사서 먹어 보고 비교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이름은 투얼이야. 야탈카 출신이지. 이제야 소개하는군. 그래, 열매는 얼마나 사 가겠나.”

그 말에 가람은 자신이 잠깐 본래 목적을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손등의 바늘이 황금빛으로 빛나는 것을 보아 패스는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땅속도, 하늘 위에 있는 것도 아니니 아마 손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손쉽게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농장 주인이 협조할 때의 이야기다.

“한 개에 얼마 정도 하죠?”

투얼의 협조를 얻기 위해서는 그의 환심을 살 필요가 있다. 물론 가람은 지금 돈이 없었다. 하지만 보석으로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 열매는 꽤 맛이 좋았기 때문에 가람은 가능한 한 많은 양을 사서 보관해 둘 생각이었다. 냉동시켜 둔다면 아마 꽤 오래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냉동을 시키는 것보다는 열매의 시간을 멈추거나 시간이 멈추는 공간에 보관하는 것이 훨씬 좋겠지만 패스로 시간을 조종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금액이 들었다.

가람의 주관 시간을 기준으로 약 1초간 세계를 멈추는 데에 1만의 패스가 필요하다.

단일 생물의 시간을 멈추는 것은 그것보다는 적게 들긴 했지만 그래도 엄청난 수준이긴 했다.

겨우 음식을 좀 오래 보관하겠다고 그런 대량의 패스를 쓰는 것은 낭비나 다름없었다.

“도시에서 사면 한 개 5천 슬링은 하지. 하지만 한 개 2천 슬링으로 해 줄게. 엄청나게 싸게 해 주는 거야.”

슬링인가.

낯선 화폐 단위에 가람이 잠시 멈칫하자 투얼이 갑자기 눈에 띄게 초조해하기 시작했다. 가람이 비싸서 망설인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돈이 없어? 천오백 슬링으로 깎아 줄 수도 있어. 이 이하는 안 돼.”

가람이 가진 막대한 보물들을 보았던 하스펠은 가람이 가격을 깎으려고 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땀을 뻘뻘 흘리는 투얼이 가엾긴 했지만 가람의 뜻에 반해 끼어들 수도 없었던 하스펠은 의도적으로 그 상황에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렇게 가람은 하스펠에게 말도 안 되는 구두쇠로 낙인찍혔다.

“에잇, 밑지고 파는 거야. 천 슬링! 천 슬링……. 비, 비싸? 오백 슬링? 배, 백 슬링? 한 개 그냥 백 슬링에 가져가. 응?”

고민에 빠진 가람의 얼굴에 가파르게 가격을 떨어뜨리던 투얼이 마침내 바닥에 두 무릎을 꿇고 굵은 눈물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단순히 보석으로 값을 지불해도 될까, 한다면 어떤 식으로 해야 할까, 무슨 보석으로 지불할까를 고민하던 가람은 눈앞의 털보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자 대단히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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