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209화 (209/256)

10화

“왜 우세요? 이런, 눈물 그만 흘려요. 열매 살게요. 제가 다 살 테니까 울지 마세요. 2천 슬링? 아니, 한 개당 3천 슬링에 사 드릴게요.”

“저, 정말?”

북받친 설움을 훌쩍이며 투얼이 천천히 가람을 올려다보았다. 일말의 기대와 희망, 서러움이 범벅이 된 그 얼굴에 가람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물론이죠. 가격을 깎으려던 게 아니라 고민이 좀 있어서 그랬어요.”

“고민?”

“지금 돈은 얼마 없어서, 보석으로 지불해도 될까요?”

가람의 말에 투얼이 무릎의 흙을 털며 부스스 일어났다. 털이 잔뜩 난 손으로 얼굴을 닦아 내자 따로 수건이 필요 없을 정도로 물기가 사라졌다. 손의 털이 수건처럼 눈물을 흡수한 것이다.

그래도 눈썹이 젖어 얼굴에 착 달라붙었는데, 덕분에 가람은 투얼의 순한 녹색 눈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보석? 나 보석은 잘 모르는데.”

조금 불안해 보이는 얼굴로 투얼이 말했다. 혹시 사기라도 당할까 봐 조심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가람이 거래를 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이 더 커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 차마 거절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으음, 여기 농장 전체의 스튜 열매를 사는 대신에……. 자, 이거 드릴게요.”

한참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가람은 최대한 투얼의 불안을 씻어 낼 수 있을 만한 물건으로 한 세트의 장신구를 꺼내었다.

커다란 푸른 토파즈로 만들어진 목걸이, 팔찌, 반지, 귀걸이 세트다.

그러나 평생 보석이라곤 본 적이 없던 투얼이 그 가치를 알 리가 만무했다.

게다가 가람도 이 보석들이 이쪽 세계에서 어느 정도의 가치인지 모르니 흥정의 진도가 전혀 나가지 않는다. 결국 가람은 하스펠을 불렀다.

“하스펠, 이거 얼마 정도의 가치일 것 같아요?”

그러나 기대와 달리 이번만큼은 하스펠도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네?”

“보석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어서…….”

난감한 얼굴로 보석을 내려다보며 하스펠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하긴, 평생 밭만 갈던 농부나 기사가 마치 상인처럼 능숙하게 보석을 감정한다면 굳이 보석 감정사라는 직업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으음, 그럼 어쩔 수 없지. 하스펠이 생각하는 최소 가격을 한번 말해 봐요. 보통 얼마 정도 한다는 건 알고 있지 않아요?”

“예전에 동료 기사 중 하나가 누이에게 선물한다고 그 달 봉급을 모두 써서 목걸이 하나를 샀다고 했습니다만.”

“봉급이 얼마였는데요?”

“300만 슬링이 조금 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럼 그렇게 계산하죠 뭐. 장신구 한 개당 300만 슬링으로.”

대수롭지 않게 말한 가람이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하자 투얼이 안절부절못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그래도 되겠나?”

“어쩔 수 없죠.”

가볍게 대꾸한 가람은 투얼에게 열매의 개수를 물어본 뒤 약 천만 슬링어치의 보석에 두어 개를 더 얹어 주었다.

혹시라도 가람이 준 보석이 영 가치가 낮은 녀석들이라 투얼이 손해 볼 경우를 대비해서 배려한 것이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거래를 하고 있는 것인지 사기를 당하고 있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훨씬 안정된 표정을 지었다.

계산을 끝낸 가람은 이제 거칠 것 없이 농장을 활보하며 패스를 찾기 시작했다. 열매를 딴다는 좋은 핑계가 있었으므로 구차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수레를 밀며 패스를 찾기 위해 눈을 빛내던 가람이 문득 질문했다.

“그나저나 울음은 왜 터뜨린 거예요?”

장대를 이용해 열매를 찔러 떨어뜨리던 투얼이 갑자기 나무토막처럼 굳어졌다. 그리고 목을 시뻘겋게 물들인다.

털에 가려진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가람은 그의 얼굴도 같은 색으로 물들었으리라 짐작했다.

“올해도 가족을 못 본다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린 사실이 새삼 부끄러웠는지 투얼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가람은 자신이 열매를 사는 것과 투얼이 가족을 보는 것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가족이요?”

“응. 여기서 농사를 짓느라 가족을 못 본 지 오래되었거든.”

“여기에서 내내 혼자 계셨던 거예요?”

“응.”

가람이 아연해져서 입을 다물자 투얼은 간만에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이 생긴 것이 마냥 기뻤던 모양인지 밝은 얼굴로 말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농사를 지은 게 벌써 5년째야. 가족을 못 본 것도 5년. 도시에 못 간 것도 5년.”

“왜 안 가셨어요?”

“안 간 게 아니라 못 간 거야. 자리를 비운 사이에 누가 열매를 다 훔쳐 가거나 상인이 찾아오면 안 되잖아.”

“열매를 수확해서 팔고 나서 가면 되죠.”

투얼이 갑자기 씁쓸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수확할 일이 없었어. 상인이 찾아온 적이 없거든. 아마 너무 깊은 곳에 농장을 만들었던 탓인지도 모르지만. 내가 어리석었어. 나무가 좀 덜 컸을 때 도시에 나가서 어디 상단에 내 농장을 알렸어야 했는데. 그냥 두면 상인이 찾아와서 사 갈 거라고 생각했던 게 안일했지.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스튜 열매는 점점 더 묵어서 크고 질이 좋아지거든. 그래서 더 떠날 수가 없었어.”

“그러면 저희가 농장이 생긴 다음에 찾아온 첫 방문자란 말이에요?”

“응. 정말 고마워.”

그래서 그렇게나 필사적이었던 건가.

가람은 그의 미련함에도 불구하고 차마 웃지 못했다. 그는 5년이나 홀로 열매를 지키며 상인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아마 처음에는 그렇게나 오래 기다릴 생각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1년 정도 바쁘게 일해서 열매가 맺힌 것을 보고 2년째가 되었을 때 이번에는 상인이 올 거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언제나 모든 일이 좋게 풀리지만은 않기 마련이다.

가람은 투얼이 흘리던 눈물을 떠올렸다. 5년 동안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가족을 그리워하며 지켜 온 열매를 버리고 떠나지도 못한 채 내일은 꼭 상인이 찾아올 거라 희망을 가지고 잠들었을 것이다.

그런 마당이니 자신을 놓치는 것이 두려웠을 테지. 다음 상인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니까.

그렇게나 소중하게 여겨 온 열매인데도 불구하고 투얼은 헐값에 넘기려고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5년간의 고독한 생활을 청산하고 싶은 필사적인 마음과 그동안의 수고가 평가 절하당하는 비참함이 그를 울게 한 것이다.

“아, 이 근처에 있어.”

적당한 속도로 열매를 따던 투얼이 갑자기 뛰쳐나갔다. 그가 멈춰 선 곳은 다른 나무들보다 훨씬 크고 두꺼운 나무 앞이었다.

다른 것들이 가람의 허리만 한 두께라면 이 나무는 투얼의 허리만 한 두께였다.

“내가 처음 심은 나무야. 정성을 엄청나게 쏟았지.”

뿌듯하게 말하는 투얼을 내버려 두고 가람은 나무를 쓰다듬었다. 가지 끝, 선명하게 반짝이는 패스가 보인다.

투얼이 다른 쪽을 보는 틈을 타 스스로의 몸을 환영으로 대체한 가람이 몸을 투명하게 만들어 날아올랐다.

그리고 가지 끝의 패스를 흡수했다. 한 차례 빛난 문양이 흡수한 패스의 양을 표시하고 사그라진다.

50패스.

이 농장을 방문한 소기의 목적이 달성된 것이다. 나침반이 충전 상태로 돌아가자 가람은 갑자기 급격히 의욕을 잃었다.

환영을 흩어 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 자리로 돌아온 가람이었지만 하스펠은 민감하게 그 변화를 알아차렸다.

“피곤하십니까?”

갑자기 축 처져 열매를 수확할 생각도 하지 않고 의욕 없이 걸음을 옮기는 가람은 확실히 그렇게 보일 만했다.

가람이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스펠은 종종 습관적으로 발휘되는 자신의 기사도를 억누르지 못했다. 아니, 자각하지 못하는 것에 가까웠다.

“음, 뭐 비슷해요.”

성의 없는 그 대답에 하스펠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는 어렵지 않게 그때가 언제였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며칠 동안 잠에 빠져들어 있던 가람이 바로 그러했던 것이다.

“어디 아프십니까?”

“아뇨.”

대충 대꾸한 가람은 다시 기계적으로 열매를 따서 수레에 싣기 시작했다. 가람의 상태는 가벼운 우울증 같은 것으로, 패스를 찾은 직후에는 한동안 이런 상태가 계속되곤 했다.

의욕도 무엇도 없는 무미건조한 마음을 패스의 바늘에 의지해 어떻게든 끌어올렸지만 막상 패스를 찾고 나면 그렇게 끌어올린 것들이 녹은 듯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좀 있으면 괜찮아져요.”

자신을 흘끔거리는 하스펠에게 가볍게 말한 가람은 곧 말없이 열매를 따는 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두른 결과 노을이 질 무렵이 되자 산더미 같은 스튜 열매가 투얼의 오두막 옆에 쌓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쯤 되자 투얼은 당연한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수레는 멀리 있나? 이걸 다 어떻게 가져가려고.”

수확한 열매는 거의 4천 개에 달하는 양이었다. 하나하나가 머리만 한 크기이니 쌓아 놓고 보면 거의 자그마한 동산이 생긴 것처럼 보인다.

옮기려면 적어도 열 대의 수레는 필요하리라. 하지만 가람은 간단하게 마법 창고를 열어 그 안에 열매들을 쏟아 넣음으로써 투얼이 경악하게 만들었다.

“대, 대체?”

아마 다른 때였다면 그럴듯한 말로 투얼을 납득시켰겠지만 지금 가람은 그것조차도 귀찮을 만큼 모든 일에서 완벽하게 의욕을 잃고 있었다.

그나마 열매를 버리지 않고 챙긴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 수준이었다.

그런 이유로, 가람은 투얼에게 가벼운 암시를 걸어 처리함으로써 귀찮은 설명을 대신하기로 마음먹었다. 칼라일의 기사들에게 썼던 것과 비슷한 수법이다.

“우리는 멀리 놔뒀던 수레에 열매들을 싣고 밤늦게 떠난 거예요.”

당황하던 투얼이 가만히 가람을 응시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충분히 납득했음을 확인한 가람이 말을 덧붙였다.

“오늘은 열매를 따느라 피곤해서 우리를 보내고 바로 자고 싶어졌어요. 그렇죠?”

“응.”

멍하니 대답한 투얼은 비척비척 걸어 오두막 안으로 들어간 뒤 문을 닫았다. 그리고 잠시 뒤 낮게 코 고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잠이 든 것이다.

“대체 어떻게 한 겁니까?”

“딱히, 해로운 건 아녜요.”

“그건 다행이지만, 정말로 신기한 능력이군요.”

“유용하죠? 사람의 머릿속이나 인지 능력 같은 건 아주 불안정하거든요. 환영을 보고, 스스로의 기억을 조작하고, 환청을 듣곤 하죠. 그냥 그런 현상을 약간 이용한 것에 불과해요.”

이 기술이 미숙하던 시절에는 잘못하면 기억력 저하나 환각, 심하면 기억이 마구 뒤섞이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대상자에게 발생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숙달되어 어지간히 큰 영역을 건드리지 않는 이상 별문제는 없었다.

“그것도 마법입니까?”

“비슷해요.”

가람이 말하는 순간 그 얼굴 위로 노을이 쏟아져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하스펠은 음영이 짙어진 그 얼굴이 매우 지쳐 보인다고 생각했다.

“이 근처에서 텐트를 치실 겁니까?”

도저히 여행을 계속할 것 같지 않아 질문한 것이었지만 가람은 의외로 고개를 저었다. 아주 잠깐 텐트가 들어 있는 가방에 미련 어린 눈길을 주긴 했지만.

“아뇨. 가까운 도시로 가죠. 텐트에 들어가면 분명 또 한동안 나오지 않으려고 할 거예요. 근처 여관에서 하루 자고 나면 기운을 차리겠죠.”

“다행이군요.”

“음. 뭐 아마도 그럴 거예요. 그러길 바라야죠. 그동안은 좀 번거로운 사람이 되더라도 이해 부탁해요. 물론, 짜증 나면 가 버려도 괜찮고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단호한 말에 가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냉큼 떠나겠다고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강하게 거절할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잠시 이채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던 가람은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갑자기 문이 달린 네모난 상자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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