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210화 (210/256)

11화

무언가가 갑자기 나타나는 정도로는 이제 놀라지도 않게 된 하스펠이었지만 그 물건의 정체에 대한 호기심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라서 가만히 그것을 관찰했다.

“걸어가기도 귀찮으니 엘리베이터 타고 가요. 여기서 제일 가까운 도시가 어디……. 아니, 여관 잡기 좋은 도시가 어디죠?”

괜히 숙박 시설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자그마한 마을로 갔다가 민가를 전전하게 되는 것은 사양이었던 가람은 급히 말을 바꾸었다.

근처에 있는 도시들을 차례대로 떠올려 보던 하스펠은 그럭저럭 적당한 도시를 기억해 냈다.

“근처의 큰 도시는 동쪽으로 황금의 존 라드가 있겠군요.”

“동쪽이라. 일단 타요.”

가람이 가까이 다가가자 엘리베이터라고 불린 상자의 문이 스르륵 열렸다.

자연스럽게 올라탄 가람과는 달리 하스펠은 한참 동안 쭈뼛거리다가 가람의 재촉에 못 이겨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문을 넘었다.

“존 라드에 가 본 적 있어요?”

신기한 얼굴로 엘리베이터 안쪽을 두리번거리던 하스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한 번 들른 적은 있습니다.”

그가 대답하는 순간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벽에 커다란 영상이 나타났다.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물러선 하스펠은 잠시 뒤 그것이 자신이 떠올린 존 라드의 거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깨끗한 도로와 근사한 상점, 호사스러운 고급 여관이 즐비한 부유한 도시. 밤이 되어도 골목마다 불빛이 환하게 밝혀져 불야성이라 불리우는 곳이다.

게다가 돈 많은 여행자들을 위한 즐길 거리도 많기 때문에 하스펠은 지쳐 보이는 가람이 존 라드를 마음에 들어 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는 여관 있어요? 좋은 곳으로.”

무미건조한 어조로 가람이 질문했다.

“이소르베 여관이 꽤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하스펠이 대답하자 벽에 비춰지고 있던 영상이 휙 바뀌었다. 나타난 것은 5층짜리 커다란 목조 건물이었는데, 새어 나오는 불빛이 제법 멋진 느낌이다.

자체적으로 건물 치안을 유지하는 모양인지 입구에는 무장한 병사 두 명이 서서 출입객을 관리하고 있었다.

시정잡배들은 얼씬도 하지 못할 분위기가 입구부터 풍겨 나온다. 여관에서 불필요한 시비 따위에 휘말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가람에게는 딱 좋은 여관이었다.

“정말 괜찮네요. 여기로 하죠.”

다시 영상이 비춘 것은 이소르베 여관의 옆쪽으로 난 좁은 골목이었다. 여관 바로 앞의 대로와 달리 그쪽은 인적이 드물다.

오가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가람이 갑자기 영상 속으로 쑥 걸어 들어갔다.

당황하던 하스펠은 어느새 영상 안에 들어간 가람이 손을 까딱여 부르자 눈을 질끈 감고 벽으로 뛰어들었다. 부딪힐 거라고 생각했지만 각오했던 충격은 없었다.

믿을 수 없게도 하스펠과 가람은 영상이 비추었던 이소르베 여관의 옆 골목에 서 있었다.

누군가 보았다면 가람과 하스펠이 갑자기 벽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더 이상 놀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손으로 자신이 뛰쳐나온 골목의 담장을 더듬던 하스펠이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상점에서 흘러나오는 음식 냄새와 멀리서 와글와글 들려오는 인파 소리, 환하게 밝은 도시의 불빛이 이것이 현실임을 알려 주었지만 그는 마냥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숲에 있었던 게 꿈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다.

“아마 앞으로도 많을걸요.”

심드렁하게 말한 가람이 하스펠에게 턱짓했다. 앞장서라는 뜻이다. 뒤늦게 그 뜻을 알아들은 하스펠이 골목의 어둠을 헤치고 걷기 시작한다.

걷는 내내 두리번거림을 멈추지 않는 모습이 마치 막 도시로 상경한 시골뜨기 같았다.

Chapter 3

여관의 바로 옆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굳이 멀리 가는 수고 없이 가람과 하스펠은 곧바로 여관으로 향할 수 있었다.

입구를 지키던 보초가 하스펠의 검에 눈길을 주긴 했지만 그 정도 무장은 다들 하는 수준이라고 생각했는지 별다른 말 없이 들여보내 주었다.

게다가 하스펠이 입고 있는 기모 트레이닝복이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재질이었던 것도 한몫했다.

“어서 오십시오. 두 분이십니까?”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보인 점원이 물었다. 백발에 기름을 발라 단정하게 넘긴 노신사다. 가람이 여관 안쪽을 둘러보는 사이 하스펠이 대신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남매이시지요? 2인실로 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일단은 남매로 꾸미고 있으니 긍정을 해야 했지만 가람과 한방을 써도 될지 알 수 없었던 하스펠이 조금 당황했다.

그사이 여관 안쪽을 충분히 관찰한 가람이 하스펠과 점원 사이에 슬쩍 끼어들어 손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마주 손을 내밀어 오는 점원의 손바닥에 루비 금반지 하나를 떨어뜨린 가람이 조용히 말했다.

“이 여관에서 가장 좋은 방으로. 일단은 3일 정도 머물 거예요.”

가람은 자신이 내민 반지가 어느 정도 가치가 매겨질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여관비를 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과연 반지를 확인한 점원의 눈이 놀람으로 크게 부풀어 오른다.

옷차림이 별 볼 일 없어 기대하지 않았는데, 하마터면 크게 실수할 뻔했던 것이다. 떨리는 손으로 반지를 움켜쥔 그가 깊게 허리를 숙였다.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점원은 다른 점원을 불러 입구에 대신 세우고 자신이 직접 가람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 정중한 대우를 받고 있으니 여관이 아니라 마치 어느 귀족가의 저택을 방문한 것 같은 기분이라 하스펠은 조금 어색하게 뒤통수를 긁었다.

이 여관은 이소르베 상단이 운영하는 곳으로 존 라드에서 가장 호화로운 곳 중 하나였다. 경쟁하는 다른 고급 여관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곳은 특별했다.

깍듯한 대우와 품위 있는 접객은 귀족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날 정도로 유명해서 호기심으로 찾아오는 귀족들도 꽤 많을 정도다.

점원은 가람도 그러한 귀족들 중 하나가 아닐까 짐작했지만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점원은 다섯 개의 층계를 올라 가장 꼭대기까지 가람을 안내했다.

특이하게도 5층 계단 끝에는 두꺼운 나무문이 달려 있었는데, 아마 5층 전체가 하나의 객실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가람의 짐작대로 문 앞에 도착한 점원이 고개를 숙였다.

“저희 여관이 자랑하는 최고급 객실입니다. 객실 내의 물품들은 편하신 대로 사용하시고, 용무가 있으시면 문 옆의 줄을 잡아당겨 부르시면 됩니다. 주신 반지는 저희 상단에서 처분해 숙박료를 제하고 거스름돈으로 바꾸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거스름돈은 상단 업무가 종료된 관계로 내일 오후에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딱히 거스름돈을 기대하지 않았던 가람이 조금 의외의 기분으로 대답했다.

그렇게 되면 굳이 보석을 돈으로 바꾸러 갈 필요가 없어지니 귀찮은 일이 덜어지는 셈이다.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문을 열어 객실 안쪽을 보여 준 점원이 그대로 물러나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가람은 말없이 객실 안으로 들어가 몇 개의 방문을 열어 본 뒤 침실을 찾아 그대로 문을 닫고 틀어박혔다.

갑자기 혼자 남은 하스펠은 너무 넓어서 허전하기까지 한 객실을 둘러보다가 일단 등 뒤로 열린 문을 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고단함이 밀려오는 느낌에 얼굴을 거칠게 문지른 그는 그대로 자고 싶은 기분을 외면하고 객실을 좀 둘러보기로 마음먹었다. 모처럼의 고급 여관에 최고급 객실이니 호기심이 솟았던 것이다.

하지만 최고급이라고 해도 어차피 여관이다. 5층 높이에서 내려다보는 존 라드의 야경이 제법 각별하긴 했지만 객실이 많다는 것 외에는 딱히 흥미로운 점이 없었다.

모든 침구가 깨끗하게 세탁되어 있고 커다란 욕실에 꽃잎을 띄운 뜨거운 물이 출렁이고 있다는 것이 그나마 마음에 드는 점이었다.

어쨌거나 욕실을 발견한 하스펠은 무의미하게 식을 물이 아까워서라도 몸을 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방에 들어간 가람이 나올 기미가 안 보이는 것을 보아 아마도 잠든 모양이니 자신이 사용해도 상관없으리라.

게다가 온천 지역이 아닌 이상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뜨거운 물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장작과 물을 떠서 데우는 등의 수고가 필요했고, 목욕 한 번 하자고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게 옷을 탈의한 하스펠이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다. 상냥한 온기가 피부에 달라붙어 지친 근육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온다.

기사였던 시절에는 종종 숙소에 있는 단체 욕실에서 몸을 담그곤 했지만 워낙 많은 기사들이 사용하는 곳이기 때문에 이렇게 깨끗하지 않았다. 이렇게 조용하지도 않았다.

적막은 상념을 부른다.

하스펠은 두 손으로 뜨거운 물을 떠서 얼굴에 끼얹고 몸을 푹 잠기게 만들었다.

요 며칠간의 자신을 떠올리자 마치 다른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쯤 죽었다 깨어난 후 하스펠은 스스로의 성격이 변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있던 충성심 깊은 기사는 사라졌다. 그때 죽어 버렸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남은 것은 확신 없이 방황하는 갈 곳 없는 칼잡이뿐이다. 믿음이 허상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자신의 미래는 산산조각 났다.

앞으로 무엇을 할지, 어디로 갈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나는 것이 전혀 없었다. 빛나던 계획들은 그 빛을 잃은 지 오래되었다.

이렇게 꿈을 꾸듯이 부유하다가 아차 하는 순간 어디론가 흘러가 버릴지도 모른다. 그나마 가람이 자신을 잡아 주어 다행이었다.

가람.

그녀는 그가 지금까지 만나 온 사람들 중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니, 사람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보여 주는 범상치 않은 능력들. 연거푸 겪은 놀라운 일들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어딘가에 홀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다. 하지만 그녀가 악한 존재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악하면 어떤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가람은 무심하고 의욕 없는 성격이었지만 하스펠은 그녀의 무심함이 고마웠다. 그 무심함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벌써 그를 떨쳐 내고 떠나 버렸을지도 모른다.

가람은 그가 곁에 있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아니, 내버려 둔 것에 가깝겠지만 그거로도 하스펠은 감지덕지했다.

하지만 그뿐, 그녀는 하스펠에게 흥미를 가지지도 않고 질문을 던지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 무심한 상냥함에 하스펠은 구원받는 기분이 들었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스펠은 문득 자신의 배를 더듬어 보았다. 뼈를 부수고 살을 꿰뚫었던 상처는 어렴풋한 흉터만 남긴 채 완전히 아물어 있었다.

이것이 그렇게 큰 상처였다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완벽한 치유였다. 명치 아래에 박혀 거의 골반까지 주욱 이어지는 기다란 흉터.

그 윤곽을 더듬듯이 쓰다듬으면서 정말로 통증이 전혀 없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는데, 갑자기 욕실 문이 벌컥 열렸다.

누군가 들어올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었던 하스펠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문을 연 사람은 가람이었다. 침대에 누워 뒹굴다가 뒤늦게 뜨거운 물에 몸이라도 담글까 하고 욕실을 찾아왔던 것이다.

제 배를 더듬던 어정쩡한 자세로 가람과 시선을 마주친 하스펠이 뒤늦게 몸을 깊이 담갔다. 꽃잎이 가득 찬 욕조라서 그렇게 하면 몸을 숨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람은 이미 그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다 본 후였다. 정확히는 그의 손이 잠긴 채 아랫배 쪽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할 수 있었다.

꽃잎이 잔뜩 들어찬 욕조 안에서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는 하스펠에게 어딘가 망설이던 기색의 가람이 결국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저기, 몸 쓰는 분들 혈기 왕성한 것 이해는 하지만 다 같이 사용하는 물건이니까 욕조 안에서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무엇을 하지 말라는 건지 영문 모를 말에 하스펠이 어리둥절해하는 동안 가람은 좋은 시간 보내라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문을 닫은 뒤 떠났다.

자신이 무슨 오해를 받았는지 알 길이 없었던 하스펠은 조금 찜찜한 기분으로 목욕을 마쳤고, 가람은 투숙하는 내내 절대 그 욕조를 이용하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하스펠이 물어도 어색한 얼굴로 대답을 회피할 뿐이었다.

* * *

“모자랐겠네.”

숙박비를 제한 거스름돈을 받은 가람이 문득 입을 열었다. 점원이 건네어 준 주머니에는 루비 반지의 감정서와 10만 슬링의 거스름돈이 들어 있었다.

가람이 건네어 준 반지에 박힌 루비가 꽤 알이 굵은 것이었는데도 판매가는 겨우 310만 슬링에 불과했다.

거기에서 하루 100만 슬링의 3일 치 숙박비를 공제하니 10만 슬링이 남고 만 것이다. 굳이 거스름돈까지 챙겨 준 정직성을 보아 크게 떼어먹거나 한 것 같지도 않았다.

“모자라다니요?”

바닥에 앉아 검을 문지르던 하스펠이 관심을 보였다. 소파에서 검을 닦다가 소파를 자르기라도 하면 큰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굳이 그 불편한 자세를 고수했다.

“스튜 열매 팔던 투얼 씨요. 한 개 300만 슬링은 받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계산해서 줬는데 살 때보다 팔 때 더 가격이 내려간다는 걸 생각을 못 했어요.

목걸이에 박힌 토파즈가 좀 크긴 했지만 반지는 제가 판 루비 반지보다 못한 물건이었는데, 그나마 두어 개 더 준 게 다행이었네요.”

“개당 3천 슬링으로 계산해서 쳐준 것이었으니 그가 처음 불렀던 2천 슬링으로 팔았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모자라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얹어 준 장신구가 꽤 비싸 보였으니까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제법 장사꾼 같은 태도로 하스펠이 대답했다.

“그런가. 뭐 어쩔 수 없죠.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이 세계에서 가람의 보석들은 생각보다 크게 고평가받지 못했다. 그냥 깎기만 해도 영롱한 빛을 내뿜는 질 좋은 광석들이 많아서 보석의 가치가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람이 가진 물건들은 그 입수처가 동네 금은방인 만큼 희귀한 큰 보석들이 없어 크기로 평가받지도 못했다.

하지만 아쉬울 것은 없었다. 어차피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화폐만 있으면 되니까.

하지만 10만 슬링은 너무 적은 금액이다. 이 여관이 고급 여관임을 감안하더라도 하루치 식사값도 되지 못하니 가람은 보석을 좀 더 팔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보석 가게를 찾아갈 생각은 아니었다. 가람은 점원을 다시 불러 장신구 몇 개를 더 건네었고, 상점이 문을 연 시간이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2천만 슬링의 화폐로 바뀌는 것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쯤 되면 돈에 얽매이지 않을 것 같은데 그렇지도 않군요.”

하스펠의 말에 돈주머니의 동전들로 탑을 쌓던 가람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이에요?”

“그러니까, 적당히 어디 가서 집어 오거나 전에 봤던 그 능력으로 사람을 조종하면…….”

하스펠이 곤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사실 가람이 어딘가에서 정당하게 물건을 사 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하스펠은 장신구를 팔아 돈을 세고 있는 가람의 모습이 좀 충격적이었다.

어딘가 초월적인 분위기가 만연한 사람이니 그녀가 가진 물건들도 아마 어딘가에서 적당히 집어 오거나 했을 거라고 으레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금액이 맞나 확인이라도 하는 듯이 짤그랑거리며 돈을 세고 있다니.

“제가 무슨 악당인 줄 알아요? 뭐, 저에게 돈이나 이런 물건들의 가치가 별 의미가 없는 건 사실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아니잖아요?”

너무나 상식적인 대답이라 하스펠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가람은 별 싱거운 사람 다 본다는 듯이 그를 스윽 내려다본 후 다 센 돈을 다시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2천만 슬링. 정확히 딱 맞다.

“돈이 생겼으니까 물건이나 사러 가요. 단벌 신사님.”

텐트를 떠난 후 하스펠이 줄곧 입고 있는 옷을 가리키며 말한 가람이 성큼성큼 방을 나섰다.

하스펠이 뒤늦게 방을 나서려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방으로 돌아와 가람의 커다란 가방을 챙겼다. 물건을 사러 간다고 했으니 필요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스펠의 생각과 달리 그 가방이 활약할 기회는 없었다.

가람이 구입하는 물건의 양이라는 것이 가방 따위가 감당할 만한 수준이 아니기도 했고, 가람이 묵고 있는 고급 여관이 고객의 편의를 위해 짐꾼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물론 짐꾼이 동행하는 것은 아니고, 상점에서 물건을 구매한 뒤 묵고 있는 곳을 말하면 상점에서 그 여관의 짐꾼을 불러서 투숙객의 방까지 나르게 하는 식이었다.

결국 하스펠은 왜 가방을 들고 나왔냐는 가람의 질문에 도둑맞을 것이 걱정되었다는 식으로 둘러대었다.

“그래도 고급 여관이니까 감히 도둑이 들지는 않을 것 같은데.”

입구에 서 있던 무장 경비를 떠올린 가람이 중얼거리자 하스펠이 은근슬쩍 그녀의 팔에서 대량의 책을 넘겨받으며 대답을 피했다.

“구입하는 책은 이게 마지막입니까?”

여관을 떠난 가람이 제일 먼저 들른 곳은 서점이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곳이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스펠은 짐꾼을 자처해서 가람을 따라다니며 책을 나르고 있는 중이었다.

“으음, 아직 좀 더 둘러보고요.”

책장을 향해 몸을 돌리는 가람에게 하스펠은 차라리 서점을 통째로 사는 게 어떻겠냐고 말할 뻔했다. 그만큼 가람이 구입한 책의 양이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역사, 전문서, 소설, 수기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책장을 휩쓸던 가람은 결국 서점이 보유한 책의 절반을 주문한 후에야 가게 문을 나섰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옷가게였다. 하스펠은 가람의 텐트에서 보았던 거대한 옷방을 떠올렸다.

하루에 한 벌씩 입고 버린다고 해도 그 옷을 전부 입으려면 100년은 넘게 걸릴 것 같았는데, 그런 어마어마한 양의 옷을 두고도 또 옷을 사는 가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하스펠의 불가사의해하는 시선을 받으며 가람은 실크로 만들어진 셔츠와 호사스러운 옷가지, 여행용 옷과 하스펠을 위한 남성복을 몇 벌 구입한 뒤 다시 길거리로 나왔다.

“구입한 옷, 다 입으시는 겁니까?”

결국 참지 못한 하스펠이 질문했다.

“딱히 그렇지는 않은데.”

“그러면 왜 사는 겁니까?”

“글쎄요.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서일까.”

활기차게 돌아다니는 행인에게 시선을 주며 가람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깨끗하게 정리된 거리로 뽀얀 햇볕이 쏟아진다.

돌아다니기 좋은 날씨였다. 책도 옷도 다 샀지만 모처럼 좋은 기분이니 도시를 좀 더 활보하는 것도 좋겠지.

하지만 어디로 가는 것이 좋으려나 하고 가람이 생각하는 순간 눈앞으로 무언가가 불쑥 들이밀어졌다.

“꽃 사세요. 아주 향기가 좋아요.”

노란 데이지 같은 꽃에 연보라색 풀꽃을 엮어 만든 작은 꽃다발이었다. 풋풋하면서도 싱그러운 향이 풍겼다.

꽃을 내민 사람은 가람의 가슴께에 오는 자그마한 여자아이였는데 장사가 신통치 않은 모양인지 바구니에는 팔리지 못한 풀꽃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귀여운 동생분께 꽃을 선물하세요.”

소녀는 가람에게 꽃을 내밀고 하스펠에게 영업을 했다. 제법 괜찮은 영업 수완이다. 그나저나 어떻게 봐도 하스펠과 자신은 남매로밖에 보이지 않는 건가.

뭐 연인으로 보여서 괜히 어색한 것보다는 낫지만 영 낯선 상황이라 가람은 조금 묘한 기분을 느꼈다.

“어, 음. 미안하지만…….”

소녀의 간절한 눈동자에 하스펠이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새삼스럽게 말하기도 뭣하지만 하스펠은 여전히 빈털터리였고, 계속해서 빈털터리일 것이며, 아마 그것은 그가 가람과 헤어져 돈을 벌기 전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런 마당이니 덥석 꽃을 사거나 하는 짓을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하스펠의 가난을 눈치챈 가람이 소녀에게 질문했다.

“하나 얼마니?”

“500슬링이에요.”

“두 묶음 주렴.”

소녀가 활짝 웃으며 꽃을 내민다. 가람은 1천 슬링짜리 동전과 꽃을 맞바꾸어 들었다.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한 소녀는 가람에게 행운을 빈다는 말을 남기고 다른 사람에게 꽃을 팔기 위해 총총히 떠나갔다.

“행운을 빈다고?”

축복하는 말치고는 묘한 어감이다. 가람이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하스펠이 문득 떠오른 얼굴로 입을 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