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존 라드에 엄청나게 커다란 투계장이 있다는 말을 들었던 게 생각이 나는데, 아마 그것과 관련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투계장?”
“예. 인간으로 하는 검투가 법적으로 금지된 다음에 생긴 것인데, 닭으로 싸움을 대신하는 겁니다. 인기가 대단한 데다, 존 라드의 투계장은 역사가 오래되어 주민들 생활의 일부가 된 지 오래라고 하더군요. 강한 닭에게는 열광적으로 따르는 사람도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마치 여행 안내인이라도 된 듯이 하스펠이 매끄럽게 설명했다.
닭이라고 하면 시골 마당에서 한가롭게 꼭꼭거리며 걸어 다니거나 조리된 뒤의 맛있어 보이는 이미지밖에 없던 가람으로서는 꽤 신기한 이야기였다.
닭 따위가 싸워 봐야 얼마나 싸우겠나 싶기도 하고, 제법 평화로운 문화로 보이니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구경이나 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투계라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하스펠은 본 적 있어요?”
“없습니다.”
설마하니 자신이 그랬겠느냐는 듯이 하스펠이 딱 잘라 말했다.
그 태도에는 옅은 경멸감까지 섞여 있어서 가람은 하스펠이 도박을 싫어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닭을 싫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보러 갈까 하는데, 하스펠은 어떡할래요?”
“따르겠습니다.”
따른다고 해도 길을 모르는 가람이 앞장을 설 수 있을 리가 없다. 가람은 결국 꽃 파는 소녀에게 길 안내 심부름을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1만 슬링을 주겠다고 하자 반드시 하게 해 달라며 매달린 소녀 덕분에 가람은 퍽 수월히 경기장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 안으로 들어가시면 돼요!”
소녀가 가리킨 ‘이 안’이라는 표현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경기장은 실내에 있었다.
도시 중앙에 위치한 분수대 옆에 세워진 커다란 돌문 안으로 들어서면 한없이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타나는데 그 끝에 도착해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된다는 것이다.
모처럼의 좋은 날씨를 즐기려던 가람은 김이 샐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왕 왔는데 안 들어갈 수도 없어서 가람은 어두컴컴한 계단 아래로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날씨야 뭐, 정 아쉬우면 나중에 주변의 기후를 잠깐 조정해서 하루 정도 맑은 날로 만들어도 상관없고. 그렇게 대수로운 일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시커먼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으니 조금씩 설레기 시작했다. 과연 계단 끝에 어떤 풍경이 놓여 있을지 기대되는 것이다.
아래로부터 불어 나오는 바람으로 가람은 지하에 결코 좁지 않은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치 동굴 안에서 부는 서늘한 바람 같은 것이 뺨을 간질여 왔기 때문이다.
등 뒤의 하스펠도 꽤 기대하는 기색이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내려가니 마침내 멀리에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불빛 가까이 가서 보니 로브를 덮어쓴 남자가 등불을 들고 있었다. 남자의 배경으로 등불에 비친 돌문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도무지 열릴 것 같은 생각이 안 드는 굳건한 문이었다. 가람이 관찰하는 사이 로브의 남자가 손을 내민다.
“입장료 500슬링.”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내밀면서 가람은 눈에 띄게 허전해진 주머니를 깨달았다. 아마 책이 엄청나게 비싼 값이었으니 대부분 서점에서 써 버린 모양이었다.
뭐 그렇게 대수로운 일도 아니다. 여관으로 돌아가면 이번에는 좀 더 많은 돈을 바꾸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럼 행운을 빌지.”
돌을 긁는 것처럼 거칠거칠한 목소리가 로브 속에서 흘러나왔다.
문지기가 뒤로 손을 뻗어 있는지도 몰랐던 도르래를 돌리기 시작한다. 천천히 열리는 돌문 사이로 어른거리는 불빛이 새어 나왔다.
마침내 문이 완전히 열리자 횃불이 주르륵 걸린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어른거리는 불빛은 횃불의 빛이었던 것이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그 공간의 사방에 빽빽하게 자리한 구멍이었다. 문을 들어서서 조금 살펴본 가람은 그것들이 모두 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머리를 들이밀면 희미하게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아 아마 이것들 중 하나를 따라가면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거, 어느 거로 가야 해요?”
“아무거나.”
툭 내뱉은 문지기가 다시 도르래를 돌려 문을 닫았다. 어쨌든 아무 곳으로 가라고 하니 가람은 바로 앞에 있는 적당한 굴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자신도 이렇게 좁은데 하스펠은 몸이 끼어 못 들어오는 게 아닌가 싶어진 가람이 뒤돌아보자 어깨가 꽉 끼었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밀고 들어오는 그가 보였다.
“이거 무슨 함정 같은 건 아니겠죠?”
구불거리는 굴을 따라 기어가며 가람은 하스펠에게 보호막을 쳐 주었다. 피할 곳도 없는 좁은 공간이니 기습이라도 당하면 치명적일 것이다.
가람 자신의 목숨이야 아까울 것 없지만 하스펠은 다르다. 그러나 걱정하는 것은 가람뿐인 듯했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요?”
“예. 잘 들어 보시면, 소리가 점점 커지…….”
굴이 꺾이는 부분을 지나는 순간 가람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바로 뒤에 붙어 따라오던 하스펠도 제대로 말을 끝맺지 못할 정도로 놀라 굳어졌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그만큼 놀라게 하기 충분한 풍경이었다.
모서리를 따라 방향을 꺾는 순간 나타난 것은 저 건너편에 있는 사람이 새끼손톱만 하게 보일 정도로 널찍하게 탁 트인 공간이었다.
그 안 가득히 차올라 넘실거리는 열기와 소란이 가람과 하스펠에게 고스란히 쏟아졌다.
굴을 따라 오면서 계속 들린 웅성거리는 소리의 정체는 바로 이것이었던 것이다.
마치 스펀지처럼 공동이 뚫려 있었는데, 덕분에 천장이든 벽이든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와글와글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가람이 고개를 내민 구멍을 밟고 위로 올라가는 사람도 있었다. 누군가가 높게 야유하는 소리와 응원하는 소리, 수다와 외침이 바람처럼 훅 끼쳐 온다.
가람은 안쪽이 생각보다 어둡지 않다는 것에 조금 놀랐다.
벽에 자리한 사람들이 들고 있는 램프가 보이긴 했지만 그 밝기란 것은 매우 하찮은 것으로 그것만으로 이렇게 넓은 곳을 다 밝히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는데, 다가온 하스펠이 손을 뻗어 한 지점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저쪽이 경기장인 것 같습니다.”
하스펠이 가리킨 경기장을 본 가람은 그제야 이 밝기를 납득했다. 경기장은 작은 태양처럼 느껴질 정도로 밝게 타오르고 있었다.
경기장 빼곡히 박혀 활활 불타오르는 거대한 횃불과 그 가장자리에서 타오르는 불들이 그 빛의 근원이었다. 벽에 달라붙어 있는 사람들을 보느라 미처 발견이 늦었다.
어쨌거나 현재 서 있는 위치에서는 높이로나 거리로나 경기를 보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가람은 자신이 있던 굴을 밟고 올라간 사람처럼 위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아래쪽에는 경기가 보이지 않기 때문인지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조금 위로 올라가자 구멍에 걸터앉은 사람들로 빽빽이 차 있어서 올라가는 것도 쉽지가 않다.
위로 올라갈수록 굴의 크기가 커졌는데, 어떤 굴은 십수 명의 사람들이 테이블을 펼쳐 놓고 앉아 쉬고 있을 정도로 넓은 것도 있었다.
간혹 굴 밖으로 다리를 빼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가 툭 치기라도 하면 그대로 떨어져 죽을 텐데, 대단한 담력이었다.
가람이 약 열다섯 개 정도의 굴을 기어 올라갔을 무렵, 갑자기 등 뒤로 함성이 쏟아졌다.
무슨 일인가 궁금해졌던 가람은 그쯤에서 올라가는 것을 멈추고 하스펠이 굴로 들어올 수 있도록 비켜 주었다. 그리고 경기장 위에서 날뛰는 닭의 모습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래, 생각하면 당연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아는 크기의 닭이 중간에서 싸운다고 해 봐야 이렇게나 넓은 공간에 이 먼 거리에서 보일 리가 없다.
닭 두 마리가 싸우는 경기장치고는 너무 크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런 의구심은 멀리서도 확연하게 보이는 거대한 닭을 보는 순간 납득으로 바뀌었다.
그렇게나 거대하면 이미 닭이라고 부를 만한 수준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람은 그 거대한 괴조를 닭이 아닌 다른 것으로 부를 수 없었다.
노랗고 뾰족한 부리나 갈기처럼 치렁치렁한 벼슬, 주황빛의 날카로운 발이나 묘하게 다채로운 빛깔의 깃털이 완벽하게 닭이었다.
좀 크다는 것만 제외하면.
경기장에는 검은 닭과 흰 닭이 한창 대치 중이었다. 흰 닭의 깃털이 군데군데 피로 젖어 붉은 것에 반해 검은 닭은 말끔한 모습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검은 닭이 우세해 보이는 판국이었다.
“오, 가라고! 새벽별! 받은 걸 되갚아 줘!”
가람의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주먹을 휘두르며 외쳤다. 그에 지지 않겠다는 듯 다른 곳에서도 응원의 소리가 튀어나왔다.
“지지 마라, 검은 안개! 너한테 한 달 생활비를 다 걸었어!”
숨을 고르던 흰 닭이 몸을 단단히 굳히더니 세상을 가를 듯한 기세로 돌진했다.
맹렬한 그 모습에 사내들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그 사이에 서 있으니 마치 열기가 옮겨붙기라도 한 듯이 가람의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도 사내들처럼 소리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흥미진진하게 경기를 지켜볼 정도는 되었다.
새벽별이라고 불리는 흰 닭의 돌진은 안타깝게도 무위로 끝났다.
그뿐만이 아니다. 공격하느라 텅 빈 새벽별의 뒤로 검은 안개가 달려들어 그대로 목을 쪼았던 것이다.
깃털이 다 뜯겨 나갈 만큼 거센 공격이었다. 한 번씩 맞붙을 때마다 깃털이 마구 날린다.
그러나 경기장 바닥을 뒤덮은 것은 대부분이 새벽별의 새하얀 깃털이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는지 새벽별의 기세가 급격하게 수그러들었다. 공동 안은 온통 검은 안개를 연호하는 외침뿐이다.
결국 경기를 완전히 포기한 새벽별이 바닥에 벼슬을 늘어뜨리고 항복하자 검은 안개가 거대한 날개를 펼쳐 한껏 과시하는 자세를 취해 보인다. 뒤이어 우렁찬 계명성이 터져 나왔다.
“굉장하네요.”
가람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커다란 동물이 돌격해서 맞붙는 것이 대단한 박력이다.
닭인데도 불구하고 진지하게 싸움에 임하는 자세가 마치 전사의 그것과 같은 느낌이라,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그렇군요.”
하스펠이 깊은 인상을 받은 얼굴로 가람의 말에 동의했다. 그사이 경기장은 다음 경기 준비로 분주한 모습이었다.
검은 닭과 흰 닭이 모습을 감추고 여기저기서 튀어나온 사람들이 경기장 바닥의 커다란 깃털을 수거한다. 그리고 깨끗해진 경기장 위로 새로운 두 마리 닭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불꽃처럼 화려한 깃털을 가진 붉은 닭과 반들거리는 검고 푸른 깃을 가진 닭이었다.
두 마리 닭은 경기장 가장자리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날개를 펼치기도 하고 이따금씩 높이 뛰어올라 홰를 쳤다.
“오늘은 붉은 검이 좋아 보이는걸? 푸른 태풍은 좀 기운이 없어 보이는데.”
“아니야. 차분하게 기세를 가다듬는 거야. 막상 경기가 시작되면 태풍처럼 몰아칠 게 틀림없어.”
옆에 앉아 있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가람은 닭들이 돌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움직이는 닭의 모습을 보며 자신이 돈을 걸 곳을 결정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와서 참가하지 않는 것도 섭섭한 일이라, 가람은 돈주머니를 가볍게 흔들어 보이며 하스펠에게 권했다.
“우리도 한번 해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