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권유였지만 사실 반쯤은 강요였다. 가람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돈주머니에서 한 줌의 동전을 쥐어 하스펠에게 내어주었다.
쌀이나 흙이라도 집는 듯한 동작이다. 하스펠은 조금 당황하다가 어색하게 돈을 받아 들었다.
“저는 붉은 닭으로 하죠. 음, 저게 붉은 검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저는 푸른 태풍이 마음에 드는군요. 신중한 전사는 쉽게 지지 않는 법입니다.”
하스펠이 진지하게 말하는 것을 듣고 가람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닭에게 붙여지는 전사라는 말이 조금 재미있게 들렸기 때문이다. 뭐, 그래도 충분히 납득할 만한 말이다.
“베팅을 하려면 아래로 내려가야 하나 봐요.”
공동의 아래쪽, 커다랗게 솟은 첨탑 같은 구조물 주위로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돈과 표를 바꾸어 들고 나오는 사람들이 잔뜩 눈에 띈다.
다른 곳에서 베팅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 보였기 때문에 가람과 하스펠은 인파를 헤치고 아래로 내려가 각자 10만 슬링을 걸고 굴을 따라 다시 기어 올라왔다.
다른 사람들도 가람과 하스펠처럼 돈을 걸고 다시 굴을 기어 올라오는 짓을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마치 개미 떼가 벽을 기어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이따금씩 누군가의 머리를 밟는 일도 생겨서 여기저기서 다투는 고성이 터져 나오기도 한다.
그 와중에 가람과 하스펠은 그 전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자리를 잡는 것에 성공했다.
“확실히 높이 올라오는 게 전망이 더 좋네요.”
아까보다 확연하게 잘 보이는 닭의 모습에 가람이 흡족하게 말하자 하스펠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구멍마다 사람이 가득 차서 결코 쾌적하다고 할 수 없었던 아래쪽과 달리 위쪽은 상대적으로 여유 공간이 널찍했다.
어중간한 높이라면 몰라도 이 정도 높이로 기어오르다가 미끄러지면 죽어도 곱게 죽지 못한다. 그러니 몸을 사리는 사람들은 아래에서 만족하는 것이다.
“그래도 하스펠 대단하네요. 등에 그렇게 커다란 가방을 메고.”
그렇다.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이지만 하스펠은 짐꾼을 자처하며 가람의 방에서 가방을 꺼내어 왔던 것이다.
굴을 기어 다니는 내내, 그리고 암벽을 등반하는 내내 그는 그 커다란 짐을 등에 메고 있었다. 물론 무게가 얼마 나가지 않는다고 해도 부피만으로 충분히 불편할 만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스펠이 겸양인지 자만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가방을 한층 추켜 메었다.
“그나저나 슬슬 배고플 시간 되지 않았나요?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 먹은 것 같은데.”
가람이 묻자 하스펠은 침묵했다. 사실 배가 고픈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람이 별다른 말이 없었기 때문에 그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다.
가람은 짧게 혀를 차고 하스펠에게 가방을 벗도록 한 뒤 이것저것 먹을거리를 꺼내어 바닥에 늘어놓았다.
물론, 그 전에 바닥을 깨끗하게 치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밀폐된 공간이라는 특성상 깨끗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물이 있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누가 먹다 버린 음식의 뼈나 찌꺼기는 충분히 많았다.
공동 안쪽에서는 낮과 밤을 알 수 없어서 가람은 시간 감각을 잃고 있었다.
만약 가람이 배고픔이 사라지게 하는 능력을 구입했다면 밥을 먹는다는 것을 챙기지도 못했을 것이다. 좀 과장해서, 그가 배가 고파 쓰러지고 나서야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람은 배고픔을 사라지게 하는 것보다 둔하게 만드는 능력을 구입했고, 그것이 하스펠에게는 크게 다행인 일이었다.
가람이 가방에서 꺼낸 것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다란 만두 두 개였다. 방금 가방에서 꺼낸 음식이 김이 피어오르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했다.
“이건…….”
조금 멈칫하긴 했지만 하스펠은 별말 없이 만두를 받아 들어 베어 먹기 시작했다. 이제 와서 가람에게 불가능을 논하는 것도 새삼스러웠다.
육즙이 배어 나오는 고기로 속이 꽉 찬 만두는 방금 만든 것처럼 신선했다. 심심했던 가람이 예전에 대량으로 만들어 냉동 보관해 둔 것이다.
만두를 베어 먹던 하스펠은 만두 속에 들어 있는 야채와 당면 따위를 신기하게 바라보면서 천천히 그 맛을 음미했다.
아주 마음에 든 모양인지 아껴 먹는 기색이 역력해서 가람은 아예 서너 개를 더 꺼내어 앞에 쌓아 두었다.
“자, 이것도 마셔요.”
가람이 뚜껑을 딴 병맥주를 건네었다. 하스펠로서는 정체불명의 물건이라 그저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으니 가람이 직접 마시는 시범을 보여 주었다.
그제야 어색하게 맛을 본 하스펠이 단숨에 병 하나를 비워 버린다. 마침 목이 마른 참이어서 시원한 맥주가 아주 반가웠던 것이다.
“고기 빵이 아주 맛있군요.”
가람이 추가로 건넨 맥주와 두 번째 만두를 집으며 하스펠이 담담하게 칭찬했다.
“만두라는 음식이에요.”
“그렇군요. 이렇게 반죽이 부드러운 고기 빵은 처음 먹어 봅니다.”
가람이 정정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스펠은 계속 만두를 고기 빵이라고 불렀다. 이곳에도 빵에 내용물을 넣어 굽는 음식이 있으니, 아마 그것의 한 종류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틀린 말도 아니라서 다시 정정해 주는 걸 포기한 가람은 제 몫의 만두를 크게 베어 물었다.
마침 그때 가람이 자리한 굴의 입구에 손 하나가 턱하니 걸쳐졌다. 용기 있는 누군가가 또 여기까지 기어오르는 것에 성공한 모양이었다.
이변을 알아챈 것은 하스펠이 먼저였다. 어깨까지 올라왔던 팔이 갑자기 쑥 미끄러진 것이다.
튕기듯 몸을 날린 하스펠은 가까스로 그 손을 낚아채는 데 성공했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놓치고 말았을 것이다.
그대로 쑥 끌어 올렸더니 하얗게 질린 얼굴의 남자가 멍하니 하스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하스펠의 질문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한동안 혼이 빠진 얼굴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정신이 든 듯 하스펠에게 반쯤 우는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건네었다.
“살려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잇몸을 뛰쳐나가고 싶어 하는 듯이 자유분방한 치열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멍하게 하스펠을 응시하던 그는 뒤늦게 자신을 구란사라고 소개했다.
그는 존 라드에서 오리를 팔아서 먹고사는데, 종종 취미로 투계를 즐긴다는 것이다.
그쯤 되니 가람도 그냥 입을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간단하게 여기저기를 구경하고 다니는 중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면 두 분은 여행자라는 말씀이시군요.”
깍듯한 어조로 구란사가 눈을 반짝였다. 대충 고개를 끄덕여 대답한 가람이 슬쩍 만두를 권했다.
처음에는 손사래 치며 사양한 구란사였지만, 여러 번 거절하는 것도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는지 엉거주춤하게 만두를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투계장에는 처음 와 보십니까?”
“네. 신기하네요. 굴이 이렇게나 많이 뚫려 있는 것도 그렇고, 지하에 이만한 공간이 있는 것도 그렇고.”
마치 스펀지처럼 빽빽한 구멍이 들어찬 공간을 휙 둘러본 가람이 맥주를 마시며 말했다.
그 말에 구란사가 엷게 웃는다. 삐뚤삐뚤한 이가 입술 사이로 삐죽 드러나서 별로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오래된 곳이죠. 예전 야탈카와 델리움이 전쟁을 할 때는 이 리베르튼 연합 전체가 격전지였지 않습니까?
그래서 피난을 위해서 집집마다 땅에 굴을 파기 시작했는데, 도시 아래가 온통 암반이라 나중에 바닥이 온통 굴로 빼곡해지고 말았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얼기설기하던 곳을 다 부숴서 이렇게 거대한 공간으로 합쳐 버렸더니 이런저런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결국 경기장이 되고 말았죠.
존 라드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에도 이런 식으로 생기게 된 지하 굴이 많아요.
사실 여기는 그렇게 유명한 편은 아니고, 리베르튼의 끝없는 여관이 제일 유명하지요.”
“구란사 씨 댁에도 파 놓은 굴이 있어요?”
“있고말고요. 집집마다 침대든 어디든 숨겨진 굴이 다 하나씩은 있어요. 제 집에는 할아버지가 뚫어 둔 굴이 벽난로 아래에 있지요.
평소에는 철판을 덮어 놓고 그 위에 재를 쌓아서 가려 놓는데, 어릴 때 들어가서 놀다가 많이 혼났어요. 실수로 어머니가 불을 떼기라도 하면 아주 큰일이 났을 테니까요.”
가볍게 웃는 얼굴로 구란사의 어릴 적 악동 같은 모습이 슬쩍 겹쳐지는 것 같았다.
하스펠은 별로 신기할 것 없다는 얼굴이었다. 하긴 그는 이쪽 세계 사람이니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광장 중앙에 있는 분수대로 들어왔는데.”
“아아, 그쪽은 여행자들을 위해서 특별히 개방해 둔 곳이에요. 아마 들어올 때 입장료를 받을 겁니다. 하지만 토박이들은 굳이 돈을 내고 들어올 필요 없이 자기 집에 있는 굴을 쓰지요.”
그런가, 하고 가람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 하스펠이 경기장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시작하는군요.”
그 말대로 여유롭게 산책을 하는 것 같던 닭들의 기세가 일변해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인 경기장을 바라보며 구란사가 손안의 종이를 꽉 움켜쥔다. 경기장을 향해 눈을 떼지 못하던 그는 문득 가람과 하스펠에게 질문했다.
“두 분은 어디에 거셨습니까? 저는 푸른 태풍이 걸었습니다만.”
“붉은 검.”
“푸른 태풍.”
가람의 대답에 조금 실망하던 구란사가 하스펠을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생명의 은인인 하스펠이 저와 같은 닭을 응원하는 것이 반가운 모양이었다.
갑자기 하스펠의 옆에 달라붙어 푸른 태풍의 장점을 열변하기 시작했는데, 가람이 소외감을 느낄 정도로 신이 난 모습이다.
하스펠은 무뚝뚝한 얼굴로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뿐이었다.
“아, 날았다.”
붉은 검이 홰를 치며 날아올라 맹렬한 기세로 푸른 태풍에게 꽂혀 든다. 맞붙을 때마다 굉장한 소리와 엄청난 양의 깃털이 흩날렸다.
사람 하나 정도는 우습게 쪼아 죽일 만한 살벌한 부리와 발이 부딪힐 때마다 마치 도끼가 나무를 찍는 것 같은 육중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다음으로 덤벼든 것은 푸른 태풍이었다. 크게 몸을 부풀리고 쏟아지듯 돌격하면서 붉은 검의 눈을 노린다.
그러나 날렵한 움직임으로 피한 붉은 검이 적의 목을 노리고 크게 울었다.
공방을 주고받은 두 마리 닭은 날개를 활짝 펼쳐 서로를 응시하며 경기장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적의 약점을 찾는 눈이 매의 날카로움에 뒤지지 않는다.
푸른 태풍의 날개가 조금 더 컸는데, 이름에 걸맞게 홰를 칠 때마다 경기장 위로 거센 바람이 불어 빠진 깃털들을 휘날리게 만들었다.
이어지는 격돌마다 관객들의 함성이 터져 나온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승기가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중반부에 푸른 태풍의 부리에 눈을 쪼인 붉은 검이 급격히 의기소침해졌다.
결국 승리한 것은 붉은 검의 가슴을 두 발로 날아 찍고, 쓰러진 붉은 검의 목에 부리를 가져다 댄 푸른 태풍이었다.
단숨에 난 승부에 가람은 아쉬웠지만 구란사와 하스펠은 즐거운 표정이었다.
그래도 응원하는 내내 긴장되고 즐거운 기분이었기 때문에 가람도 만족스러웠다.
푸른 태풍보다 붉은 검에 걸린 배당금이 훨씬 많았기 때문에 하스펠은 10만 슬링의 세 배인 30만 슬링을 손에 넣었다.
구란사는 30만 슬링을 걸었던 덕분에 90만이라는 거금을 손에 쥘 수 있었는데 묵직해진 주머니가 행복해서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걸로 오늘 경기는 끝입니다. 닭들은 일찍 자기 때문에 해가 지면 경기를 못 하거든요.”
싱글싱글 웃으며 구란사가 말했다. 다음 닭은 정말로 이기는 녀석을 고르겠다고 다짐하고 있던 가람으로서는 조금 아쉬운 소리였다.
“잃고 끝나니까 아쉽네요.”
“내일 또 와서 하면 되지요. 자, 이럴 게 아니라 제가 크게 땄으니까 한턱내겠습니다. 토박이들만 아는 아주 맛있는 식당을 알고 있으니 안내하지요. 목숨도 구해 주시고, 대접도 받았는데 그냥 있을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괜찮으시다면 가시지요.”
구란사가 간절한 눈으로 하스펠을 바라보았다. 반사적으로 가람을 흘긋 쳐다본 하스펠은 딱히 꺼리는 기색이 아닌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담담한 수락이 구란사를 뛸 듯이 기쁘게 만들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면 제 굴로 가시지요. 이쪽, 이쪽입니다.”
가람과 하스펠은 앞서가는 구란사의 등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엉덩이를 보며 굴을 따라 기었다.
투계장을 떠나고 있는 사람이 그들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에 얽히고 교차된 굴의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머리를 들이밀어 댄다.
덕분에 구란사는 네 번이나 다른 방향에서 들어오는 사람들과 머리를 부딪혔다.
마치 교통 통제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개미굴 같은 모양새로, 별로 쾌적하다고는 할 수 없는 장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람은 이곳이 아주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거의 다 왔습니다.”
숨을 몰아쉬며 구란사가 힘겹게 팔을 들어 올린다.
곧이어 무언가 무거운 것이 끌리는 소리가 나더니 곧 굴의 끝에서 어슴푸레한 빛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