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익숙한 몸놀림으로 구멍 밖으로 빠져나간 구란사가 손을 뻗어 가람과 하스펠이 나오기 쉽도록 도와주었다. 굳이 필요한 도움은 아니었지만 가람은 그 손을 사양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스펠은 고개를 젓고 스스로의 힘으로 구멍 밖으로 뛰쳐나왔다.
굴 밖으로 나온 가람은 구란사가 했던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자신들이 나온 곳은 벽난로 아래에 뚫려 있는 구멍이었다.
아까 들었던 무거운 것이 끌리는 소리는 구멍을 덮고 있던 철판을 치우는 소리였던 모양이다.
가람은 구란사가 구멍 위에 다시 철판을 덮어 놓는 동안 그의 집을 가볍게 둘러보았다.
약간 낡은 소파 두 개와 흠집이 가득한 싸구려 나무 식탁이 보인다. 바닥에 깔린 무거운 카펫에는 원래 무늬인가 싶을 정도의 얼룩이 가득했다.
청소를 언제 했는지 알 수 없는 창틀은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큰일이 날 것 같은 높이로 먼지가 쌓여 있다.
“집이 좀 지저분하지요? 원래 오늘 청소를 하려고 했는데 경기장에 가는 바람에……. 어서 가시지요. 가게는 이 뒤편에 있습니다.”
조금 부끄러운 얼굴로 뒤통수를 긁적인 구란사가 가람과 하스펠에게 손짓했다.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노을이 지는 시간이 되어 있었다. 가람과 하스펠은 약간의 해방감을 느끼며 다시 구란사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가 안내한 식당은 후미진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한참은 걸어가야 찾을 수 있는 곳이었다.
퀴퀴한 냄새가 풍겨 오고 여기저기서 욕설이 들려오는 질 나쁜 거리이다.
평소였다면 가람과 하스펠이 이런 장소에 걸음하는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달가운 장소는 아니었다.
“이 집의 음식 대부분이 맛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달랑은 정말 최고입니다. 그 조합이 정말로 천재적이지요.”
주위를 가득 메우는 욕설 사이로 구란사가 상냥하게 말했다. 가람과 하스펠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도 누군가가 길게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가람은 이런 곳이라면 구란사가 갑자기 강도로 돌변한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제대로 된 광원도 없는 어두컴컴한 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구란사가 반가운 얼굴로 멀리 있는 가게 하나를 가리켰다.
어렴풋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자그마한 가게다. 정말로 작은 가게였다. 드나드는 문의 크기가 다른 정상적인 가게들에 비해 절반 수준일 정도다.
“저기입니다.”
갑자기 걸음이 빨라진 구란사가 가게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반가운 인사가 날아든다.
한두 명이 아닌 것을 보니 이 가게를 드나든 지 보통 오래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오, 저기 제 친구들이 있군요. 저쪽에 앉으면 되겠습니다.”
손을 흔들어 오는 사람들에게 마주 인사해 주던 구란사가 한쪽 테이블을 반갑게 가리킨다.
테이블에는 꼬불거리는 수염이 덥수룩한 털북숭이와 볼이 움푹 파인 말라깽이, 테이블에 간신히 걸쳐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키 작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워낙 작은 가게라 비어 있는 테이블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 그것 외의 선택지가 없어 보여서 가람과 하스펠은 순순히 구란사를 따랐다.
“이봐, 친구들. 오늘 새 친구를 두 명 사귀었는데 같이 앉을 자리가 있을까?”
슬쩍 다가간 구란사가 말하자 털북숭이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테이블을 두들겼다. 나머지 사람들은 흥미롭게 가람과 하스펠을 관찰했다.
“하하하,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새로운 얼굴이 필요하던 참이었다고. 완전 환영이지. 안 그래?”
주변의 동의를 구하며 털북숭이가 가람과 하스펠에게 활짝 웃어 보인다. 그러자 남은 두 명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물론이지.”
“구란사의 친구라면 우리들의 친구인 거나 마찬가지야. 잠깐 있어 봐! 내가 의자를 가져오지.”
그렇게 말한 것은 키가 작은 남자였다. 가람의 허리께에 올 정도로 자그마했는데, 그는 그 작은 체구를 이용해서 붐비는 식당 안을 날쌔게 돌아다녔다.
그리고 돌아온 그의 손에는 두 개의 의자가 쥐어져 있었다.
구란사와 털북숭이, 말라깽이가 박수를 치자 보란 듯이 으쓱이며 ‘짜잔’ 하고 뽐내는 자세를 취해 보인다.
아주 유쾌한 성격인 것 같았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유쾌해 보였다.
“앉으시지요.”
마치 기사라도 된 것처럼 과장된 정중함으로 자리를 권한 남자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가람과 하스펠이 자리에 앉고 나자 구란사가 본격적으로 소개하기 시작했다.
“여기 이 털 많은 녀석은 곤차, 마른 녀석은 쿠블레, 아까 의자를 가져다 줬던 녀석은 소벤입니다. 곤차, 쿠블레, 소벤. 인사해. 경기장에서 추락사할 뻔한 나를 잡아서 살려 준 가람, 하스펠 님이시다.”
“님, 까지야…….”
가람이 어색하게 입을 여는 순간 곤차가 너무나 놀랐다는 얼굴로 불쑥 끼어들었다. 안 그래도 커다랗던 그 눈이 빠질 듯이 부릅떠졌다.
“추락사할 뻔했다고?”
“아, 높은 곳에서 보려고 올라가다가 조금 미끄러질 뻔했거든.”
구란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지만 곤차는 여전히 놀람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는 곧 걱정스러운 듯이 구란사를 뜯어보기 시작했다.
“괜찮은 거냐? 다친 곳은 없고?”
“괜찮아. 괜찮아. 멀쩡해.”
“놀랐잖아. 사람 놀라게 좀 하지 말라고.”
구란사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 바퀴 휘 돌아 보이자 곤차가 그제야 투덜거리며 앞에 놓인 술을 들이켠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잔소리가 터져 나왔다.
“넌 너무 조심성이 없어. 구란사.”
쿠블레가 미간을 모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소벤도 한마디 했다.
“어쩌자고 그 나이에 거기까지 올라가려고 한 거야? 네 몸이 예전 같은 줄 아는 거냐?”
“알았어. 알았어. 나도 실수였다고. 다음부터는 조심할 테니 내 새 친구들과 인사 좀 해. 무안해하시잖아.”
잔소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인지 모르겠지만 구란사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는 하스펠과 가람에게 주의를 돌렸다.
구란사의 세 친구는 조금 미련이 남은 얼굴로 미적거리다가 곧 하스펠과 가람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나는 곤차. 무두장이야. 내 친구를 구해 줘서 정말 고맙군. 좋은 가죽이 필요하면 말해. 잘해 줄 테니까.”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진지한 얼굴의 곤차였다. 곧바로 쿠블레가 순서를 이어받았다.
“나는 쿠블레. 신발을 만들지. 곤차와는 협력 관계야. 곤차의 가죽으로 신발을 만들어 팔거든. 이 친구 무두 솜씨는 정말 좋아. 인기가 워낙 많아서 손에 넣으려면 몇 달 전부터 기다려야 할 정도지. 내 신발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필요하면 말해.”
“쿠블레는 겸손이 너무 심하다니까. 쿠블레의 신발이 편하고 좋다는 건 이미 알 사람은 다 알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야. 그에 비해서 나는 그냥 나무 상자를 만들어다 파는 사람이지.”
소벤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구란사와 쿠블레, 곤차가 일제히 야유했다.
“무슨 그냥 나무 상자냐? 저 녀석이 만든 나무통에 술을 보관하면 절대 새지 않고 상하지도 않아. 심지어 잘 부서지지도 않고, 비를 맞아도 썩지 않지. 아주 좋은 장인이야.”
“이봐, 내가 상자만 20년을 만들었는데 그 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렇게 네 사람은 서로를 칭찬하는 건지 욕하는 건지 모를 말로 한참을 떠들었다. 앞에 앉은 가람과 하스펠을 거의 잊어버린 모습이었다.
덕분에 꽤 오랫동안 대화를 지켜볼 수 있었던 가람과 하스펠은 더 이상 소개가 필요 없을 정도로 그들에 대해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곤차는 흉악하다고 할 수 있는 외모에 비해 잔걱정과 눈물이 많은 성격이고, 쿠블레는 깐깐하고 조용하게 핵심을 짚는 성격, 소벤은 성실하고 생각이 깊은 성격이고, 마지막으로 구란사는 새로운 사람을 좋아하고 누구든 데려와서 대접하기를 즐기는 성격으로 보였다.
“이봐, 주문 안 할 거면 나가!”
잊혀져 가는 가람과 하스펠을 구해 준 것은 불친절한 얼굴의 가게 주인이었다. 멀리서 외친 소리인데도 불구하고 가게를 부술 듯이 쩌렁쩌렁한 울림이다.
그 말에 구란사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가람과 하스펠을 돌아보았다.
“이렇게 죄송스러울 수가. 정말 사과드립니다. 저희끼리 대화해서 당황하셨지요? 배고프실 텐데 기다리게 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이어서 소벤과 곤차도 어색하게 사과했다. 쿠블레는 사과보다 쫓겨나지 않도록 음식을 시키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는지 돌아다니는 점원을 불러서 이것저것 주문하기 시작했다.
그가 술 여섯 잔과 요리 두어 개를 주문하자 구란사가 끼어들어 추가 주문을 넣었다.
“달랑도 여섯 접시.”
옆에서 듣던 소벤이 깜짝 놀라 끼어든다.
“여섯 접시나?”
“괜찮겠어?”
“한 접시에 10만 슬링이나 하는 요리를 여섯 접시나 주문하다니.”
세 사람이 걱정하는 것과 달리 구란사는 마냥 태연했다.
“내 목숨을 구한 좋은 날인데 이 정도는 써야지. 게다가 두 분께도 이 가게의 달랑을 맛보이고 싶기도 하고.”
그 말에 소벤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충분히 동의한다는 얼굴로 쿠블레가 입을 열었다.
“하긴 여기 달랑이 끝내주긴 하지. 여기 달랑을 먹으면 다른 곳 달랑이 음식 쓰레기처럼 느껴질 정도니까.”
하지만 곤차는 구란사의 주머니 사정이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그건 그렇지만, 구란사 내 몫까지 주문한 거라면 안 그래도 돼.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이봐, 내가 죽다 살아난 걸 축하하고 싶지 않은 거야?”
짐짓 엄한 어조로 구란사가 으르렁거리자 곤차가 순식간에 입을 다물었다. 어물어물거리는 그에게 피식 웃어 준 구란사가 보란 듯이 돈주머니를 흔들어 보였다.
“어차피 오늘 30만 슬링 걸어서 90만 슬링으로 땄어. 공돈이 60만 슬링 생겼으니 딱히 무리도 아니야. 게다가 두 분이 구해 주지 않았으면 따지도 못하고 저승에서 울고 있었을 텐데 뭐. 자, 재미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달랑 여섯 접시.”
구란사가 마지막으로 못 박자 점원이 고개를 숙이고 사라졌다. 그리고 음식이 나오는 동안 가람과 하스펠에게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남매지? 아주 닮았는데.”
“그렇습니다.”
대답 없는 가람을 대신해서 하스펠이 곤차의 질문을 받았다.
“여행하는 중이라고 하시더라고.”
구란사가 슬쩍 덧붙인다. 모두가 아, 하고 탄성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묵고 있는 여관은 있어?”
조금 걱정스러운 어조로 곤차가 질문했다. 만약 없다면 제집이라도 내어줄 표정이었다.
“이소르베 여관에서 묵고 있습니다.”
“오, 거기 굉장히 비쌀 텐데.”
“맞아. 제일 안 좋은 방에 묵는 게 하루 10만 슬링이더라고. 뭐, 그만큼 깨끗하긴 하지만.”
“안전하기도 하고.”
“돈이 충분하다면 괜찮겠지.”
가람이 묵고 있는 이소르베 여관은 주로 돈이 좀 있는 여행자들이 묵는 곳이었다.
다른 보통 여관은 하루 묵는 데 5만 슬링 정도의 금액으로 충분했고, 모르는 사람과 얽혀 자는 방은 2만 슬링에서 3만 슬링으로 더욱 저렴했다.
돈을 아껴야 더욱 오래 여행할 수 있는 여행자들로서는 주로 2만 슬링짜리 여관을 이용했다.
그런 마당이니 가람이 100만 슬링짜리 방에 묵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분위기가 매우 어색해질 것이다.
그 사실은 눈치 없는 사람이라도 알 만한 수준의 이야기라서, 가람은 재빨리 하스펠에게 머릿속으로 주의를 주었다.
「10만 슬링짜리 방에 묵고 있는 것으로 해요.」
하스펠이 보일 듯 말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여행자들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하루 10만 슬링 정도를 지출하고 일반인은 5만 슬링 정도를 쓴다.
도시에 따라 약간의 편차가 있긴 하지만 제국 수도가 아닌 이상 큰 차이는 없는 수준이었다.
수도의 경우 숙박비도 물가도 훨씬 비싸서 하루 먹고 자는 데 최소 20만 슬링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만큼 벌어들이는 수입도 많아서 별로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존 라드에서 숙련된 무두공이 공방에 고용되어 일할 경우 한 달 300만 슬링의 임금을 받는다.
견습 무두공은 50에서 80만 슬링을 받고, 일반 무두공은 100에서 200만 슬링을 받을 수 있다.
곤차처럼 공방에 고용되지 않고 스스로의 가게가 있는 경우는 훨씬 많은 금액을 벌었다.
당연히, 장사가 되지 않으면 벌이가 못한 날도 있긴 했지만 그래도 고용되어 일하는 무두공보다 훨씬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다.
물론, 풍족하다고 해서 가람이 묵고 있는 1박 100만 슬링의 방에 고민 없이 묵을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여동생도 있으니까 안전한 게 최고지. 좋은 오빠인걸.”
“아주 상냥하셔. 그 높은 데서 몸을 날려서 날 구해 주셨다니까.”
곤차의 말에 구란사가 소리 높여 하스펠을 칭찬했다. 당시에는 곤두박질치느라 바빠 하스펠의 모습을 보았을 리가 없을 텐데 마치 직접 본 듯 당당한 말이다.
“얼굴도 잘생겼고, 인기도 많을 것 같아.”
“여동생도 오빠를 닮아서 아주 미인이야.”
“허리에 검을 차고 있군. 검사인가?”
쏟아지는 칭찬에 슬슬 민망해지던 하스펠이 눈을 빛내며 소벤의 질문을 붙잡았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듯이 필사적인 태도다.
“네. 검을 씁니다.”
대답한 하스펠은 적극적인 모습으로 허리의 검을 풀어 보여 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소벤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하게 칭찬했을 뿐이다. 상자 제작꾼인 그로서는 검이 좋은지 안 좋은지 알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네 분은 이렇게 늦게까지 술을 마시면 부인께서 싫어하지 않으십니까?”
하스펠의 질문에 떠들던 네 사람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이 분위기가 식어 버리자 하스펠은 매우 당황했다.
쏟아지는 칭찬을 좀 막아 볼까 해서 아무 질문이나 던진 것이었는데 별로 좋지 못한 질문이었던 모양이다.
약간의 어색한 침묵 끝에 구란사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쑥스럽게 고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