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사실 저희는 모두 미혼입니다.”
“우리 셋 다 못 했지.”
“뭐 어때! 저녁마다 술을 마시는 게 마누라보다 훨씬 좋다고!”
풀 죽은 기세를 북돋우려는 듯 곤차가 외친다. 동조하는 대답이 나오긴 했지만 영 기운이 없었다.
결국 다시 쓸쓸하고 슬픈 침묵이 내려앉았고 소벤이 머리를 마구 문지르며 신경질적으로 푸념했다.
“예전에 나도 마음을 바치던 여자가 있었지.”
“그 뚱보?”
쿠블레가 슬쩍 끼어든다. 소벤이 으르렁거리며 테이블을 딱딱 두드려 경고했다.
“뚱보라니. 풍만한 거라고. 이 말라깽이 자식아.”
“그래도 뚱보는 뚱보야. 난쟁이 놈아.”
“비쩍 마른 네놈에 비해서 뚱보가 아닌 여자가 세상에 있을까?”
소벤이 한껏 빈정거리자 쿠블레가 입을 딱 다물었다. 입맛이 쓴 얼굴이다. 어쨌거나 소벤이 다시 이야기를 이어 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열렬히 사랑했어. 아니, 뭐 나만 사랑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제법 예쁜 사랑이었다고. 나는 그때 젊었고, 사랑에 눈먼 멍청이였어. 그녀가 예쁘다고 했던 드레스와 반지, 살림살이들을 눈여겨보면서 우리가 언젠가 같이 살게 될 거라고 믿었지. 다 부질없는 믿음이었지만.”
곤차가 쭈욱 손을 뻗어 소벤의 어깨를 두드렸다. 체격 차이 덕분에 소벤의 어깨에 곤차의 손이 닿을 때마다 그의 몸이 쓰러질 듯이 흔들렸다.
구타와 위로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선 그 행동이 잠시 이어진 후, 소벤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청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어느 날, 갑자기 그녀가 결혼한다고 하더군.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어. 우리 사귀고 있었잖아? 우리는 저녁마다 밥도 같이 먹고, 좋아하는 가게나 싫어하는 사람에 대한 비밀도 속닥거렸다고. 딱히 고백한 적은 없지만 이미 그쯤 되면 사귀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하지만 그녀는 금시초문이라는 얼굴로 나는 그냥 좋은 친구라고 말하더군. 소심한 나는 제대로 고백도 못 하고, 청혼도 못 했어.
어쩔 수 없지. 나는 땅딸보 난쟁이인걸. 나 같은 놈보다는 훤칠하고 부자인 녀석이 훨씬 좋은 남자였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그녀는 잘생기고 돈 많은 데랄드의 넷째 부인으로 들어갔어.”
“내가 좋아했던 여자는 데랄드의 다섯째 부인으로 들어갔지.”
곤차가 히죽 웃으며 손가락을 주욱 펴 보였다. 쿠블레가 입가를 씰룩이다가 씹어뱉듯 말한다.
“내가 좋아했던 여자는 켄트의 셋째 부인으로 들어갔어. 뭐, 어쩔 수 없지. 제국은 일부다처제를 시행하니까.
나 같은 하급 남자들은 평생 여자 구경도 못 해. 위에 놈들이 몇 명씩이나 차지하거든. 말라깽이에 못생긴 쿠블레의 부인이 되느니 부잣집 도련님의 스무 번째 첩이 되는 게 낫다는 거지.”
“저와 같이 살려고 했던 여자는 어느 귀족가의 열두 번째 첩으로 들어갔지요. 우스운 건 그녀의 남편이 아직 열 살밖에 안 되었다는 겁니다. 연하가 좋다고 하더군요.”
구란사의 사연을 마지막으로 네 사람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바닥이 꺼지지 않는 것이 의아할 정도로 깊은 한숨이었다.
침묵 속에서 술이 목구멍을 넘어가는 소리만 연신 이어진다. 우울해하던 곤차가 갑자기 커다란 목소리로 음식을 재촉했다.
그러고 보니 주문한 지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테이블은 구란사의 친구들이 마시던 맥주 세 잔을 제외하면 거의 텅 비어 있었다.
그러자 때마침 좁은 의자들 사이로 접시 하나가 날라져 왔다.
“주문하신 구운 새끼 염소 나왔어요, 일단 술부터 드리고 그다음 볶음 고기국수 가져다 드릴게요. 달랑은 디저트니까 마지막에 드리면 되지요?”
제 어깨 넓이보다도 넓은 접시를 낑낑대며 내려놓은 점원이 또랑또랑하게 주문을 확인했다.
가람은 조금 놀라 점원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사실 점원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작은 남자아이였는데, 아무리 노동 연령이 낮은 세계라고 해도 좀 너무할 정도로 어린아이였다.
여섯에서 일곱 살 갓 넘은, 말이 유창한 것이 신기할 정도로 작은 아이다.
“어, 그래. 오늘은 안됐구나. 라쇼.”
“다음에는 이길 거야. 라쇼.”
꼬마가 테이블에 접시를 밀어 놓는 사이 곤차와 소벤이 알 수 없는 말로 꼬마를 위로했다. 라쇼라는 것은 아마도 꼬마의 이름인 모양이었다.
꼬마는 제법 정중하고 귀여운 모양새로 배꼽 인사를 하더니 다음 접시를 나르기 위해 후다닥 달려갔다.
그리고 한 번에 하나씩 커다란 술잔을 날라서 총 여섯 번의 왕복 끝에 술과 음식을 내려놓는 데 성공했다.
그 나쁜 효율에도 불구하고 테이블에 앉은 누구도 불평하지 않는다.
“너무 어린 것 아닌가요?”
라쇼가 떠나간 후 가람이 슬쩍 입을 열었다. 시선은 부지런히 움직이는 라쇼를 향한 채였다.
워낙에 작아서 저런 꼬마가 있는 줄도 몰랐던 것이다. 정말로, 존재감이 없을 정도로 작은 꼬마라 더 안쓰러운 느낌이었다.
“그렇긴 하지. 하지만 여기 주인 정도 되는 사람이 아니면 써 주지도 않았을 거야. 꼬마는 일자리를 얻었으니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일을 할 만한 나이는 아니지.”
곤차가 약하게 눈시울을 붉힌다. 나머지 남자들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구란사가 갑자기 크게 박수를 치며 적극적으로 음식을 향해 덤벼들 태세를 취했다.
“음식이 식겠습니다. 어서 드시지요.”
그제야 모두가 포크를 집어 들었다. 구운 새끼 염소는 가람의 머리통 세 개만 한 크기였는데,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살에 포크를 대자 힘을 줄 것도 없이 부드럽게 결을 따라 찢어졌다.
향초가 배어든 촉촉한 속살은 소금물에 재어 두었는지 짭짤한 감칠맛이 있었다. 보리의 풍미가 가득한 고소한 흑맥주를 머금고 함께 씹자 입 안에서 어우러지는 맛이 보통이 아니다.
토박이들만 아는 맛있는 식당이라는 구란사의 말대로 정말로 만족스러운 음식이었다.
지금까지 가람이 먹은 산해진미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수준이다.
“자, 이거 드십시오.”
구란사가 염소의 앞다리를 비틀어 가람에게 건네었다. 사양하지 않고 받아 든 가람이 크게 한 입 베어 물자 육즙이 터져 나와 입가로 주르륵 흘러내린다. 그 살코기는 혀로 누르는 것만으로 해체될 정도로 부드러웠다.
어지간한 남자의 주먹보다 커다란 염소 다리를 순식간에 먹어 치운 가람은 만족스럽게 풍미 좋은 맥주로 입을 헹궜다.
“정말 맛있네요.”
한숨 돌린 가람이 감탄을 터뜨리자 염소의 갈비를 집어 뜯고 있던 구란사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뿌듯한 기색이 역력하다.
“여기 염소 앞다리는 부드럽기로 유명하지요. 여기, 뒷다리도 아주 맛있습니다. 양이 많아서 몸 쓰는 사람들이 정말 좋아해요. 여기를 딱 잡고 큰 고깃덩이를 콱 뜯어 먹는 맛이 이만저만 좋은 게 아니거든요.”
그 말대로 하스펠에게 권해진 것은 염소의 뒷다리였다. 그는 가람의 시선을 받더니 어색한 얼굴로 입 안의 염소 고기를 우물거렸다.
가람은 맛있냐고 묻는 대신 흑맥주를 몇 모금 더 마시고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염소의 살을 포크로 발라내어 입에 넣었다.
제법 커다란 염소였는데, 무시무시한 기세로 덤벼드는 여섯 개의 포크 아래 그리 오래 버티지 못했다.
염소구이가 덩그러니 뼈만 남기고 제 역할을 마치고 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꼬마가 나타나서 접시를 회수해 갔다.
이어서 등장한 것은 커다란 접시에 담긴 볶은 고기국수였다. 꼬마에게 너무나 버거워 보이는 크기의 접시다.
머리에 지고 오는 모양새가 위태위태하기 짝이 없어서 가람이 저도 모르게 받아 주려 손을 뻗자 꼬마가 요령 좋게 그 손길을 피했다. 그리고 테이블에 접시를 올리고 몸을 돌려 사라졌다.
“으음.”
무안해진 손을 수습하며 가람이 침음하자 구란사가 삐죽삐죽한 이를 드러내며 길게 미소 지었다.
“너무 서운해하실 것 없습니다. 여기 주인이 꼬마를 고용할 때 엄하게 당부했거든요. 음식을 쏟거나 손님을 불편하게 하거나 꼬마라는 이유로 일을 제대로 못 하면 즉시 해고하겠다고 말입니다.”
“그래도.”
“주인도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사실 저런 꼬마가 일을 해 봐야 얼마나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꼬마의 키는 가람의 허리에 채 닿지 못했다. 지금 가람이 앉은 테이블보다도 반 뼘 작다.
음식을 날라 테이블에 놓으려면 그 무거운 접시를 두 손으로 힘껏 들어 올려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면 부러질 것처럼 얇은 팔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여서 지켜보는 사람으로서는 저절로 돕고 싶을 정도로 안타까워지는 것이다.
그런데도 도움을 받으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으니 홀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는데, 당연하게도 다른 사람보다 월등히 일하는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다.
“꼬마의 사정을 다 봐주고 어른만큼의 돈을 쥐여 주니 주인은 할 만큼 다 했어. 저 꼬마는 이미 자기 삶을 잘 살고 있다고. 그냥 나머지는 지켜봐 주면 되는 거야.”
곤차가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그제야 가람은 꼬마로부터 시선을 떼고 고기국수를 덜어 먹기 시작했다.
하스펠이 묘한 눈길로 그런 가람을 바라보았지만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라 가람은 알아채지 못했다.
“볶은 고기국수도 꽤 괜찮지요?”
구란사가 슬쩍 질문하자 가람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볶은 고기국수는 고구마 전분과 밀, 보리, 쌀 따위가 섞인 가루를 육수와 함께 반죽해서 납작하게 밀어 채 썬 면에 무엇인지 모를 고기와 야채를 달고 짭짤한 소스로 볶아 낸 것으로, 염소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맛이 좋았다.
“아가씨 마음도 이해 못 할 건 아니지. 나도 가끔 정말 딱해서 눈물이 날 것 같을 때가 있어.”
국수를 우물거리며 소벤이 말했다. 가람이 묵묵히 듣고만 있자 하스펠이 대신 질문한다.
“괜찮으시다면 저 꼬마의 사연을 좀 들을 수 있겠습니까?”
“아, 뭐 상관없지. 그렇게 정중하게 말하지 않아도 돼. 음. 어차피 이쪽 거리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아는 사연이니까. 어디부터 말할까.”
“저 꼬마 아버지가 몸져누운 것부터 시작해야지.”
“아, 그래. 나보다는 쿠블레 네가 말하는 게 좋겠어. 나는 차분하게 말하는 데 재주가 없어서.”
“물건 팔아먹고 사는 놈이 말재주가 없으면 어쩌냐.”
“시끄러워. 말하기나 해.”
“너 은근슬쩍 나한테 말하게 하고 국수 더 먹으려고 하는 거지?”
“그럴 리가. 내가 곤차인 줄 알아?”
“갑자기 나는 왜?”
투닥거리는 쿠블레와 소벤 사이에 갑자기 말려든 곤차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볼을 부풀렸다.
어쨌거나 잠시 후 입을 연 것은 쿠블레였다. 그는 입 안의 고기국수를 삼킬 생각도 하지 않고 적당히 풀어진 얼굴로 말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저 꼬마에게는 아버지가 하나 있어. 제라드라고 꽤 괜찮은 녀석이었지. 얼굴도 잘생겼어.
엄마는 병으로 죽었는지 뭐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없다는 것만 알아. 그래도 별로 아쉬울 것은 없었는데, 제라드는 제법 실력 좋은 대장장이였거든.
한 3년 공방에서 더 일하고 자기 가게를 차릴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운 나쁘게도 그 일이 일어나고 만 거야.”
“그 일?”
가람이 적당히 추임새를 넣자 맥주로 목을 축인 쿠블레가 잔잔하게 다시 말을 이어 갔다.
“대장간에서는 주로 농기구나 연장을 만들지만 한 번씩 검도 만들어. 대장장이마다 하나씩 주력 분야가 있지.
제라드는 주로 검을 잘 만들기로 유명했는데, 그가 만든 검은 손질을 게을리해도 날이 죽는 일이 없고 균형도 아주 잘 맞았어. 그런데 아가씨도 아는지 모르겠지만.”
거기까지 말한 쿠블레가 문득 하스펠의 허리에 찬 검에 시선을 주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한층 조심스러운 얼굴로 하스펠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검사들 중에는 질 나쁜 놈들도 있거든. 용병이나 이런 놈들. 특히 떠돌이 용병들이 최악이지. 어디서 소문을 듣고 왔는지 떠돌이 용병 하나가 찾아왔어. 그리고 제라드에게 검을 의뢰했지.
그런데 막상 돈을 내려니 아까워진 거야. 제라드는 빨리 가게를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항상 늦게까지 일하곤 했는데, 그날도 제라드 혼자 공방에 남아 있었어. 그리고 검을 찾으러 온 용병이 그대로 제라드에게 칼을 휘둘렀지.”
“이런.”
하스펠이 미간을 찌푸렸다. 나머지는 묵묵히 이제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는 고기국수를 긁어 먹고 있었다.
쿠블레에게 들킬까 봐 조심스럽게 포크를 놀리는 것이 무슨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기사가 따로 없다.
“마침 근처를 순찰하던 경비대가 발견해서 죽지는 않았어. 하지만 피하면서 다리와 팔에 쇳물이 튄 바람에 크게 화상을 입었지.
하필 관절 부분을 거의 담그다시피 해서 오른쪽 허벅지 아래와 오른팔을 못 쓰게 됐어. 그 용병은 그대로 사형당했어.
하지만 제라드는 대장장이 일을 다시는 할 수 없었어. 누구도 승리한 사람이 없지. 성실한 장인 하나가 미친놈에게 걸려서 그 재주를 잃은 거야. 정말로 씁쓸한 이야기지.”
“그러면 그 사람은 아직 살아 있나요?”
“아직 살아 있어. 그러니 저 꼬마가 제 아비의 약값을 벌려고 저렇게 필사적인 것 아니겠나. 하나뿐인 피붙이니까 절박할 만도 하지.
하지만 내가 보기엔 제라드는 빨리 죽어 주는 것이 좋아. 약을 쓴다고 해도 어차피 통증을 가라앉히는 정도고, 점점 상처가 썩어 들어가서 결국 죽게 될 텐데. 살아도 병신을 변치 못하니 새끼만 고생시킬 뿐이지. 게다가.”
쿠블레가 갑자기 입을 딱 다물었다. 의아해하던 가람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소리 없이 다가온 꼬마가 조용히 빈 접시를 회수해 갔기 때문이다.
꽉 깨문 아랫입술에 피가 맺혀 있는 것을 보아 아마 쿠블레의 이야기를 거의 다 들은 모양이었다.
계면쩍은 얼굴로 쿠블레가 입맛을 다시고 나머지도 뻘쭘한 표정을 지었다.
“으음, 쿠블레가 하려던 이야기는 이거야. 저 꼬마는 매일 투계장에 나가. 새벽별이라는 닭이 이기면 기적이 일어난다고 믿는 모양이야.
어쩌면 제라드가 해 준 이야기인지도 모르지. 잡을 것이 없으니 그거라도 잡고 매달리는 거야. 보고 있는 입장으로서는 착잡하지.
새벽별이 계속 져도 저 꼬마의 처진 어깨를 매일 봐야 하고, 새벽별이 이겼는데도 기적이 없으면 그거야말로 슬플 테니까.
그거만 보고 버티고 있는데. 사실 제일 좋은 건 새벽별이 오래 살고 계속 져서 꼬마가 자연스럽게 기적을 믿지 않는 나이가 되는 거라고 생각해.”
라쇼가 멀어진 사이 소벤이 다소 건조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라쇼가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가람은 소벤과 곤차가 라쇼에게 건네었던 위로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새벽별이라는 이름이 제법 낯익다.
잠시 생각해 본 결과 낮의 투계장에서 검은 닭과 맞붙어 싸운 뒤 패배한 닭의 이름이라는 것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사이 각자의 앞에 음식 접시가 놓여졌다.
“드디어 달랑이 나왔군요. 먹어 보십시오.”
지금까지 흘러나온 어두침침한 화제를 모두 씻어 보낼 듯이 발랄한 어조로 구란사가 권했다.
모두 하던 말을 잊고 접시에 집중하기 시작했는데, 그만큼 맛있는 음식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외견은 별 볼 일 없었다.
얇은 무언가를 층층이 쌓아 만든 덩어리가 스무 개 놓여 있을 뿐 도무지 무슨 음식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빵도 아니고, 고기도 아니다.
가람이 요리를 관찰하는 사이 하스펠이 거칠 것 없는 태도로 음식을 맛보았다. 그의 턱이 움직임과 동시에 눈이 크게 뜨인다.
“대단하군요. 이렇게 맛있는 달랑은 처음 먹어 봅니다.”
진심으로 감탄한 목소리로 하스펠이 요리를 칭찬했다. 무뚝뚝한 그가 음식에 이렇게 놀라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갑자기 식욕이 돌아서 가람도 제 앞의 접시에서 달랑 하나를 집어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한 입 씹는 순간.
“……!”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먹어 보지 못한 음식의 맛이 났다. 혀로 겹겹이 쌓인 것들을 문질러 흐트러뜨리니 식감도 맛도 다양한 수십 종류의 식재료가 느껴졌다.
마치 육회와 같은 쫄깃한 식감의 것도 있고, 과일처럼 아삭하게 씹히는 것, 어렴풋이 후추 같은 향신료 냄새가 나는 것도 있었다.
무어라 할 수 없는 다양한 맛이 입 안에서 조화롭게 어울려 그야말로 대단했다. 이런 것은 처음 먹어 본다.
“굉장하지요? 보통 달랑이 네, 다섯 가지 재료로 만드는 거에 비해서 여기는 거의 스무 종류가 넘는 재료를 쓰는 것 같더군요. 게다가 조합도 천재적이라서 먹는 사람마다 감탄을 아끼지 않아요.
사실 이 정도 양에 10만 슬링은 정말 미친 것처럼 비싼 가격이지만, 맛이 돈값을 하니까 어쩔 수 없지요.”
구란사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스펠과 가람이 말을 잊을 정도로 놀란 것이 아주 흡족한 모양이었다.
나머지 남자들은 거의 눈물을 흘릴 듯이 감동적인 얼굴로 달랑을 음미하고 있었다.
아마 자신도 저런 얼굴로 음식을 먹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가람은 다음 달랑을 입에 넣었다.
씹을 때마다 감탄스러운 맛이었다. 대량으로 구매해서 생각날 때마다 먹고 싶었지만 신선도가 중요한 음식 같아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렇게 여섯 명이 무언의 감동 속을 헤엄치고 있을 때, 갑자기 가게 한편이 소란스러워졌다.
와장창하고 테이블과 의자, 식기 따위가 나뒹구는 소리가 난다 싶더니 주정뱅이의 고성이 터져 나왔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린 가람의 눈에 한창 흥분해 난동을 부리고 있는 세 명의 남자가 보였다.
우락부락한 근육과 허리에 찬 대검과 등에 멘 도끼에서 흉흉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한 접시에 10만 슬링이라고? 겨우 요게 10만 슬링이란 말이냐!”
줄기줄기 내뿜는 살벌한 분위기에 누구 하나 감히 끼어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가게를 휘 둘러보는 사나운 시선에 머리를 숙이기 급급하다. 구란사와 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곤차의 주먹이 가늘게 떨리고 있긴 했지만 그것이 분노에 의한 것인지 공포에 의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 분위기가 주정뱅이의 기세를 더욱 살려 준 모양이었다. 바닥의 그릇을 밟아 우그러뜨리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던 그가 거슬린다는 듯 라쇼를 걷어찼다.
거의 제 몸통만 한 커다란 발에 걷어차인 라쇼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본 가람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녀가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을 발견한 구란사가 기겁해서 뒤통수를 눌렀지만 주정뱅이의 시선은 이미 가람을 발견한 후였다.
혀로 입술을 핥으며 번들거리는 눈으로 가람을 응시하던 놈이 천천히 접근한다.
“이거 참, 너 꽤 내 입맛에 맞는 얼굴을 하고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