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215화 (215/256)

16화

좋게 타이르고 싶은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가람의 무미건조한 시선이 바닥의 깨어진 그릇과 널브러진 라쇼, 마지막으로 남자를 응시했다.

너무 튀어나온 배 때문에 윗옷이 말려 올라간 탓에 털이 북슬북슬한 배꼽과 아랫배가 드러나 있다.

뒤에서 가람을 가리키며 히죽거리는 놈의 두 동료도 만만치 않게 역겨운 몰골이다.

“어딜 가만히 앉아 있는 거냐? 이 불 도끼 카탄 님이 말씀하시는데. 일어나지 못해? 엉? 아니면 너무 겁을 먹어서 다리가 풀린 건가?”

“어이, 카탄. 상냥하게 대하라고. 겁에 질린 것 안 보여?”

지켜보던 놈들의 동료가 휘파람을 불며 희롱했다. 손을 흔들어 보인 카탄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가람의 얼굴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훅 풍겨 오는 악취에 슬슬 뜨거운 맛을 보여 주는 것이 좋겠다고 가람이 생각하는 순간, 가람과 카탄의 얼굴 사이로 차가운 검날이 끼어들었다.

“잘리기 전에 머리 치우는 것이 좋을 겁니다.”

지금까지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냉엄한 얼굴의 하스펠이 낮게 경고했다. 기겁해서 물러났던 카탄이 스스로의 추태를 깨닫고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이 애송이가? 너 무기를 꺼냈다는 건 제대로 한판 하자는 거지?”

부끄러움을 몰아내기 위해 일부러 기세등등하게 외친 카탄이 등에서 도끼를 끌러 내어 하스펠을 향해 내리찍었다.

하스펠이 나무였다면 쪼개어지고 말았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그쯤 되자 불똥이 튈까 두려워진 손님들이 내던지듯 돈을 지불하고 허겁지겁 가게를 뛰쳐나갔다.

구란사와 그 친구들도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이다. 태연한 것은 접시를 들고 남은 달랑을 맛보는 가람뿐인 듯했다.

“이, 이봐. 오빠가 싸우고 있는데 그렇게 태연하게…….”

“우리도 도망치는 게 좋지 않겠어?”

소벤과 곤차가 안절부절못하며 가람을 재촉했지만 가람은 마지막 하나의 달랑까지 먹어 치웠다.

그 담담함에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 네 사람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조마조마한 얼굴로 사태를 지켜보았다.

싸움이 이렇게나 번졌는데도 주인이 나타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벌써 도망쳐서 경비대를 부르러 간 것일지도 모른다.

“이, 이 자식. 쥐새끼처럼 피하지 말라고!”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도끼가 탁자와 의자를 가리지 않고 박힌다. 남은 사람들은 벽에 붙어 도끼가 날아오지 않기를 노심초사하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때 하스펠이 강하게 카탄을 걷어찼다. 불룩한 배가 쑥 들어갈 정도로 대단한 발차기였다.

“우, 우욱.”

쓰러진 카탄이 토악질하며 바닥을 질질 기어 다닌다. 그가 나가떨어지자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남은 두 놈이 은근슬쩍 합세했다.

정신을 차린 카탄도 다시 덤벼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내리쳐 오는 세 개의 무기를 놀라운 솜씨로 쳐 낸 하스펠이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아예 수준이 다른 몸놀림이다.

눈앞으로 닥쳐오는 검날에 눈을 질끈 감았던 세 남자는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눈을 떴다가 가슴을 적시는 액체에 하얗게 질렸다. 얕게 벤 목에서 피가 흘러나온 것이다.

죽일 수 있지만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그 솜씨 앞에서 더 이상 부릴 만용은 남아 있지 않았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사람을 못 알아보았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살려 주세요. 정말 죄송합니다.”

버리듯이 무기를 내던진 세 남자가 급히 하스펠의 앞에 머리를 박았다. 선명하게 드러난 힘의 고하에 가장 놀란 것은 구란사와 그의 친구들이었다.

곱상한 얼굴에 그리 강하게 보이지 않던 하스펠이 용병질로 잔뼈가 굵은 세 명의 거한을 순식간에 제압한 것이다.

별로 힘든 기색도 없었다. 사람의 목을 자를 뻔했음에도 불구하고 동요 없는 얼굴은 어찌 보면 냉철했지만 인간미가 없게 느껴질 정도다.

“이대로 경비대에 넘기도록 하지요.”

하스펠의 담담한 처분에 그제야 구란사와 세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주춤주춤 다가와 주정뱅이들을 묶기 시작했다.

가람은 기절한 것으로 보이는 라쇼를 끌어안고 그 몸에 치유의 힘을 불어넣었다. 걷어차일 때 갈비뼈가 부러졌던 것이다.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죽을지도 모른다.

“정말 강하군. 대단해. 이렇게 강한 검사는 본 적이 없어.”

“정말로 대단해.”

소벤과 곤차가 놀람을 감추지 않고 감탄했다. 그 얼굴에는 어렴풋한 동경마저 서려 있었다.

그들의 말에 담담히 겸양한 하스펠은 무사한 테이블에 라쇼를 눕히고 있는 가람에게 다가와 작게 말을 건네었다.

“무사합니까?”

“아, 갈비뼈가 부러지긴 했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그 말에 하스펠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말릴 새도 없이 저벅저벅 걸어가 손이 뒤로 묶인 세 명의 가슴팍을 거세게 걷어찼다.

잔인할 정도로 무도한 발길질이라 나동그라진 세 명은 차마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억억거리는 신음을 삼키기 급급했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놀란 구란사가 눈치를 살피며 뒤늦게 하스펠을 말렸다. 나머지 사람들은 차마 하스펠의 몸에 손을 댈 생각도 못 하고 눈을 피하기 바쁘다. 하스펠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조금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 작은 아이를 갈비뼈가 부러질 정도로 걷어찬 것에 비해 목에 실금이 나는 것은 불합리할 정도로 공정하지 못한 거래다.

하스펠은 공평함과 공정함을 좋아했다. 설령 그것이 폭력에 의해 저울추가 기울어지는 종류의 것이라도 예외는 없었다.

그렇게나 얻어맞았으면 분한 마음에 이를 갈 만도 한데 세 명의 주정뱅이는 매우 조용한 얼굴이었다.

얼굴에 남아 있던 술기운도 온데간데없다. 죽다 살아나니 술이 확 깨는 모양이었다.

옆에서 대충 보았던 가람은 그들이 소금에 재워 놓은 배추처럼 숨죽이고 있는 것이 조금 의아했지만, 아마 가람이 보지 못했던 무언가를 하스펠에게서 보았을지도 모른다.

가람은 새삼스럽게 그의 강함을 다시 고찰해 보았다.

저보다 머리 하나는 큰 덩치 좋은 용병들을 힘들이지 않고 제압하는 것도 그렇고, 예전에 만났던 기사들에게도 별로 기죽지 않고 덤비려고 했었지.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물론 고개를 숙이긴 했지만 다분히 형식적인 느낌이었다. 일반적인 기사들의 강함을 뛰어넘은 느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정체에 대한 말만 나오면 단단하게 입을 닫는다.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고, 알아낼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가람은 그냥 그가 말하고 싶을 때까지 내버려 두기로 했다.

과거의 그가 어떻든 크게 신경 쓰이는 부분도 아니고, 지금 그가 나빠 보이지 않으니 그것으로 된 것 아닌가.

조금 기다리자 경비병을 대동한 주인이 나타났다. 조금 통통한 얼굴의 풍만한 중년 여성이었는데, 잔뜩 기가 죽어 묶여 있는 용병들에게 거침없이 욕설을 퍼부었다.

그리고 그들을 제압해 준 하스펠에게 50만 슬링의 사례를 하고 장사를 손해 본 만큼 용병들에게 보상을 요구하는 것으로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졸지에 거금을 물게 된 용병들이 울상을 지으며 끌려 나가자 남은 것은 테이블과 의자가 엉망으로 넘어져 어수선해진 가게 분위기뿐이다.

이쯤 되자 도저히 술을 마실 맛이 나지 않아서 여섯 명은 적당히 자리를 파하기로 했다.

“이것 참, 마지막이 이렇게 되어서 면목이 없습니다.”

가게를 나온 구란사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하늘에는 어느새 만개한 달이 꽃잎을 활짝 펼치어 빛을 뿌리고 있었다.

“별말씀을요. 덕분에 잘 먹었는걸요. 신경 쓰지 마세요. 구란사 씨 탓도 아니니까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혹시 투계장에 또 가실 일이 있으시면 오늘 있었던 그 굴에서 절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패스가 충전될 때까지 마침 할 일도 없던 참이고, 첫 경기를 패배로 마무리한 것이 아쉬웠던 가람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내일 갈 생각이었어요. 이대로는 너무 아쉽잖아요?”

“그러면 저도 내일 가겠습니다. 저희는 여기 정리를 좀 도와주고 가야 할 것 같군요. 이 가게 주인과는 그래도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서. 두 분은 먼저 들어가십시오.”

깍듯한 태도로 구란사가 고개를 숙이자 뒤에 서 있던 그의 친구들도 어설프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들 하나하나에게 눈을 마주쳐 준 가람은 하스펠이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는 것을 확인하고 몸을 돌렸다.

굳이 정리를 함께 돕겠다고 나설 생각은 없었다. 가람도 여관으로 돌아가서 할 일이 있었던 것이다. 일단은, 낮에 샀던 물건들을 좀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 * *

“오늘도 나왔네요.”

구멍의 가장자리에 엎드려 아래를 내려다보던 가람이 무언가를 발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가람의 시선을 따라 그것을 확인한 하스펠이 고개를 끄덕였다.

“새벽별의 경기가 있는 날에는 꼭 나타나는군요.”

“그러게요.”

두 사람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얼마 전 식당에서 보았던 라쇼라는 꼬마였다. 워낙 작은 체구라 구멍을 기어오를 능력이 없는 탓인지 늘 바닥에서 경기장을 기웃거리는 것이 꽤 안쓰러웠다.

가람이 투계장을 드나든 십수 일 동안 라쇼는 새벽별의 경기가 시작할 때쯤 어김없이 나타나서 맘을 졸이는 얼굴로 경기를 지켜보다가 끝나면 맥 빠진 얼굴로 쓸쓸히 이곳을 떠나곤 했다.

돈도 걸지 않으면서 누구보다 간절히 새벽별의 승리를 기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새벽별은 이길 수 없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며칠 동안 투계장에 머무르며 가람이 주워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새벽별이라는 그 하얀 닭이 이길 확률은 거의 없었다.

승리하기에는 새벽별은 너무 늙었다. 왕년에는 당할 자가 없는 강자였던 모양이지만 이제는 새파란 애송이 하나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노쇠해 버린 것이다.

그래도 한때 날렸던 분위기와 풍채가 있어서 투계장을 처음 방문하는 외지인들이 종종 돈을 걸긴 하지만 그뿐이다.

딱 거기까지가 새벽별의 역할이었다. 멋모르는 이방인들의 주머니를 터는 것. 그리고 승리하지 않는 것.

가람도 처음에는 새벽별에게 돈을 걸었다. 그리고 매번 잃었다. 사실 한동안 가람은 투계에 푹 빠져 살았다.

여관에서 눈을 뜨자마자 투계장을 찾아왔고, 하스펠이 마지못해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가람이 내내 돈을 잃은 것에 비해 하스펠은 주머니가 제법 두둑해졌다는 것이다.

그 사실에 가람이 농담을 던지면 하스펠은 고지식한 얼굴로 분석과 냉정함이야말로 승리의 비결이라고 대답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충전될 때까지 이거나 하고 노는 것도 좋겠네.”

가람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나른하게 늘어졌다. 아래에서는 새벽별의 경기가 한창이었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경기. 제대로 지켜보는 사람도 이제 거의 없다.

꼬마가 믿는 기적은 그저 다음 경기가 시작될 때까지 시간을 때우기 위한 용도의 시시한 시합에 불과했다.

“충전……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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