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216화 (216/256)

17화

하스펠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가람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딱히 설명해 줄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아, 그런 게 있어요.”

가람과 하스펠의 대화는 대체로 이런 형태였다. 서로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명확한 선을 그어 놓고 절대로 그 안으로는 침범하지 않는다.

마치 헛도는 톱니바퀴처럼 공허한 움직임이지만 그래도 돌아간다는 것에 의미를 두는 그런 것이다.

가람은 하스펠에게 의도적으로 무관심하고, 하스펠은 가람에게 어디까지 다가갈 수 있는지, 다가가도 되는지조차 알 수 없어 헤매고 있다.

한없이 가벼운 가람의 분위기와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능력은 너무나 현실감이 없어서 손을 대는 순간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무서울 정도였다. 마치 꿈속임을 깨달으면 깨어 버리는 꿈처럼.

“슬슬 포기할 법도 한데.”

멀리 보이는 라쇼의 조그마한 얼굴이 조마조마하게 일그러지는 것이 보인다. 울음도 터뜨리지 않고 그저 간절한 열망만을 담은 채 오롯이 기원하는 작은 아이.

그러나 그 기원이 응답받는 일은 없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짧은 시간 만에 새벽별이 패배했다.

또.

“다음에도 또 올까요?”

“아마도요.”

심드렁한 척 하스펠의 질문에 대답하면서도 가람의 시선은 축 처진 어깨로 투계장을 나서는 라쇼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가람의 눈에 담긴 감정은 착각의 여지도 없이 너무나 선명하다. 동정과 안타까움, 그리고 갈등. 하스펠은 가람이 꼬마를 도울 능력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돕지 않고 갈등하는 그녀가 의문스러웠다.

“라쇼를 돕고 싶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어째서 돕지 않습니까? 당신에게는 능히 그럴 능력이 있지 않습니까?”

하스펠은 자신이 선 안으로 들어왔음을 느꼈다. 가람의 고요한 시선.

사람을 압도하는 듯한 시선이 그를 응시한다. 약간의 침묵 끝에 짧은 한숨을 토하며 가람이 씁쓸하게 말했다.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에요.”

가람의 눈이 멀리, 저 멀리 흐릿해진 과거를 향했다.

닥치는 대로 사람을 돕고 또 돕고. 스스로가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은 채 가족이 칼날에 짓밟힌 한 아이를 왕으로 만들었던 적이 있다.

물론 처음부터 아이를 왕으로 만들려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아주 최소한의 도움을 베풀었다. 다친 아이를 치료해 주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가람은 스스로의 고독을 과소평가했다.

오랜 세월 차원을 떠돌며 외로움에 얼어붙었던 가람의 마음은 아이의 작은 손이 주는 체온을 거부할 수 없었다.

아이는 착하고 선량했다. 사람들을 돕고 싶어 했고, 사악한 자들과 맞서 싸웠다. 거리낄 것 없는 싸움이 계속되었다. 싸움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일방적인 학살이 이어졌다.

아주 많은 사람들의 피를 제 손에 묻히고 나서야 가람은 깨달았다. 스스로가 만들어 낸 지옥도 속에서 그제야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짓을 자각했다.

패스로 손에 넣은 가람의 힘은 적들에게는 재앙이었다.

당연한 것처럼 쟁탈한 차가운 왕좌에 가람의 작은 아이가 앉았다. 착하고 선량하던 아이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가람만 있으면 모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고, 만인이 제 발 아래 엎드리는데 동료나 측근 따위 필요할 리가 없다.

분명 아이가 처음 맞서 싸우던 적은 사악한 작자들이었지만 가람은 홀로 수천만을 도륙한 자신과 그들 중 어느 쪽이 더 악귀 같은 작자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가람은 제가 만든 왕을 죽이고 차원을 떠나왔다.

라쇼는 가람이 도왔던 작고 어린 왕을 닮았다.

“간단하지 않을 이유는 뭐가 있습니까?”

“한 번 돕게 되면 아마도 이런 일이 계속될 거예요. 소문이 퍼질지도 모르고, 그러면 여기저기서 저한테 도움을 요청하겠죠.

아마 나는 오래 거절하지 못할 거예요. 그 애원들을 버티지 못하게 될 거고 마구 돕기 시작하겠죠.

그러고 나면 결국 어떻게 될지 알고 있으니까,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좋아요. 이미 저 아이를 도와주는 사람도 있고.”

말하면서도 가람은 스스로가 비겁한 변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은 예전의 과오가 반복될까 두려워하는 겁쟁이처럼 굴고 있다.

라쇼는 그 아이가 아니고, 자신도 그때의 조심성 없던 패스파인더가 아니지만 구름처럼 일어나는 불안과 거부감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걸 어떻게 안단 말입니까?”

“이미 그런 어리석은 짓을 몇 번 반복했거든요.”

하스펠은 그 반복했다는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파악하지 못했지만 어렴풋이 느껴지는 가람의 괴로움이 묻어나는 음성으로 어쩐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스스로가 이미 선을 한참 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깊은 한숨. 가람이 지친 얼굴로 뺨을 쓸어내린다.

“나도 종종 아주 비참한 모습들을 보게 되면 가진 힘을 다 꺼내서라도 도와주고 싶어질 때가 있어요. 정말로 간절히요.”

“하지만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을 배웠으니까요. 선량한 의도를 가지고 한 일들이 꼭 의도한 결과대로 이루어지지만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거든요.

지금도 누군가가 저 아이를 돕고 있듯이, 가만두어도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 이겨 나가게 될 거예요. 하지만 나서게 되면 내 도움이 그런 사람들의 자리를 빼앗는 짓이 될 수도 있죠.”

예전 자신이 만들었던 왕이 누구도 곁에 두지 않았던 것처럼.

“하지만 지금처럼 누구도 도울 수 없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당신이 아니면 도울 수 없는 그런 일 말입니다.”

가람은 침묵했다. 오랜 시간, 다양한 만남, 자신이 저지른 수많은 과오들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웠지만 여전히 확신은 없었다.

강력한 힘은 필요할 때 사용하면 더없이 좋은 도구가 되지만 그 외에는 어떤 것보다 끔찍한 재앙이 된다.

가람은 자신이 그 때를 확실히 구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회의적이었다. 아직도, 확신을 할 수가 없다.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그렇게나 조심하는 겁니까? 누군가를 돕는 일이 나쁠 리가 없지 않습니까?”

가람이 흔들리고 있음을 눈치챈 하스펠이 재차 설득한다. 어째서 그렇게 조심하느냐고?

가람은 오히려 반문하고 싶었다. 어떻게 조심하지 않을 수가 있지? 가람의 행동은 모두 스스로의 의지에 달려 있었다.

법의 집행이나 인간들의 규범 따위는 가람에게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다. 오직 가람 자신의 생각만이 중요했다.

가람은 될 수 있으면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의 인간성을 잃지 않고 선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이미 약간 망가져 버린 가람의 정신은 순수해지기에는 너무나 때가 타 있었다.

그렇다면 악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되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이 무심코 저지르는 일들이 재앙이 되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 가람의 조심성은 결벽적인 수준이었다. 모르드레드라는 훌륭한 반면교사가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런 성격이 형성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에게서 느꼈던 공포와 혐오는 지금도 문득문득 떠올라 가람을 괴롭히는 것들 중 하나였다.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과거의 망령과 자신이 저질렀던 학살의 순간들을 자각할 때면 가람의 자기혐오는 최고조를 찍었다. 그리고 이렇게 강박적인 조심성이 만들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강박이 폭주할 때마다 가람의 성격은 극단적인 양면을 오갔다. 어쩌면 가람은 아주 깨끗한 방식으로 미친 것일지도 모른다.

추위에 떠는 할머니에게 따듯한 차를 대접하는 동시에 거슬리는 얼간이들을 토막 쳐서 부위별로 팔아 치울 수도 있는 잔인함이 솟구친다.

전자는 어떤지 몰라도 후자의 경우는 확실히 정상적인 범주를 넘어섰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광기 속에서 가람은 언제나 홀로 유리되어 있었다.

내면 깊이 숨긴 폭력과 스스로를 옥죄는 자신만의 규범들. 그리고 관계를 형성할 필요조차 없는 생물적인 특성. 아쉬움이 결여된 고독과 상실되어 버린 상실.

가람의 자아는 마치 홀로 썩는 고목나무처럼 그것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렇게나 다른 생물인 자신의 가치관이 과연 다른 사람에게도 옳게 적용될까.

자각도 못 한 사이 어딘가 비틀려 모르드레드같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차라리 최대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것이 가람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끝없는 의혹이었다.

“가끔은 나쁠 때도 있어요.”

가람의 시선이 아래를 향한다. 대답에는 기운이 없었다. 어느새 주도권은 하스펠에게로 넘어가 버린 상태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저를 살려 주었지 않습니까?”

“그건, 그냥 변덕이었어요.”

“하지만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지 않습니까? 저는 당신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가람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역시 행동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녀는 자신 앞에 당당히 서서 설득을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전직 기사를 바라보았다.

사실 이 사람을 도와주었을 때 이미 운명의 실 안으로 스스로의 손가락을 집어넣은 거였다. 그에게 함께 다니도록 허락했을 때부터 실이 엉켜든 것이다.

가람은 더 버틸 수 없어서 두 손을 들어 보이며 고개를 내저었다. 항복 표시였다.

“알았어요. 이제 그만해요. 라쇼를 도울게요. 돕는다구요.”

가람이 그렇게 말하자 하스펠은 어쩐지 자신이 도움을 강요한 것 같아 조금 머쓱해졌다. 그리고 그런 하스펠에게 가람이 확인 사살의 말을 던진다.

“그리고 아무 일도 생기지 않긴 뭐가 생기지 않아요? 제가 살린 기사가 지금 저를 이렇게 열심히 설득하고 있잖아요. 그리고 결국 돕게 만들었고.”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당신이 선량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이 이상해서…….”

“아아, 맞아요. 제가 복잡하게 생각하긴 했죠. 하긴. 뭐 복잡하게 생각할 거 있겠어요?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 거지. 저 아이가 나중에 자라서 폭군이 되어 수천 명을 학살하기라도 하겠어요? 물론 그런 일이 생겨도 내 알 바 아니죠.”

“예?”

갑자기 고삐가 풀리기라도 한 듯이 홀가분해진 가람의 말에 하스펠이 얼떨떨하게 반문했다. 가벼운 얼굴의 가람과 달리 그는 그녀의 말을 결코 흘려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가람은 어깨를 으쓱하고 손바닥을 부딪치며 본격적인 자세를 취할 뿐이었다. 그리고 도전적으로 으르렁거렸다.

“좋아요. 지금부터 기적을 일으키러 가 볼까요.”

* * *

창을 넘어온 햇살이 잠든 하스펠의 코끝에 내려앉는다. 점점 길어지는 해가 그의 뺨을 넘어 눈꺼풀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피부가 달아오르기 시작할 무렵 하스펠이 손을 들어 눈두덩을 덮는다. 동시에 깨어났다.

그리고 창문을 바라보며 두어 번 눈을 깜빡이다가 깜짝 놀라 일어나 앉았다.

쏟아지는 햇살은 아무리 봐도 정오의 그것이다. 하스펠은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이 정오까지 늦잠을 자다니.

물론 간밤에 있었던 사건은 며칠 동안 잠을 설친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뭐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 사실에 위로받기엔 그는 너무 고지식했다.

하스펠은 간밤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놀라운 방법으로 순식간에 투계장 밖으로 자신과 하스펠을 이동시킨 가람은 곧 저 멀리 걸어가는 작은 라쇼를 뒤쫓았다.

허공에 둥둥 떠서 쫓아간 덕분인지, 아니면 두 사람의 몸이 투명해진 상태라서 그런지 몰라도 라쇼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작은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지붕에 앉아 기다리니 눈이 벌겋게 달아오른 꼬마가 문밖에서 숨죽여 울다가 골목을 따라 터덜터덜 사라졌다. 아마도 일터로 간 모양이었다.

그렇게 집이 비고 나자 가람은 투계장을 빠져나올 때 사용했던 수법으로 집 안으로 이동했다.

하스펠로서는 앗 하는 순간 스스로가 서 있는 공간이 휙휙 바뀌어서 도무지 어떤 원리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가람이 바닥에 내려선 순간, 침대 쪽에서 돌을 긁는 듯한 불쾌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아버지가 타 죽을까 염려되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초가 비싸기 때문인지 집 안은 빛 한 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람의 걸음은 거칠 것 없이 침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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