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가람은 놀라울 만큼 담백한 태도로 침대의 이불을 휙 들추었다. 알싸한 약과 고름의 냄새가 훅 끼쳐 왔다.
들은 대로 침대에 누운 사람은 한쪽 다리의 허벅지 아래와 팔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그에게 가람은 딱 한 가지 질문을 했다.
‘당신이 라쇼의 아버지? 입을 다치진 않은 것 같은데.’
‘그, 그렇소. 당신은 대체?’
‘좀 자 두는 게 좋겠네요.’
그 말을 들은 남자는 그대로 축 늘어져 잠에 빠져들었다. 잠이 아니라 정신을 잃은 것에 가까워 보였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잠든 그의 몸에 가람이 손을 가져다 대자 기적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하스펠은 가람이 자신의 상처를 어떤 식으로 치유했는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잘려진 다리와 팔의 단면에서 뼈가 자라나고 살이 붙어 없던 손과 발을 만들어 내는 모습은 기적이라는 말 외에 달리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막연히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과 기적을 실제로 목도하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하스펠은 여관으로 돌아오는 내내 경이로운 마음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대했던 가람이 신성하게까지 느껴져서 심장의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는다.
덕분에 새벽까지 잠을 못 이루었고 결국 그것이 늦잠이 된 것이다.
다시 떠올려도 어쩐지 현실감이 없는 일이라서 하스펠은 일단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부자리에 있으니 어쩐지 더 꿈만 같은 느낌이다. 아마도 가람을 다시 보지 않는 이상 이 느낌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거실로 나간 하스펠은 소파에 반쯤 누워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자신의 손등을 쳐다보고 있는 가람을 발견했다.
가슴팍이 약간씩 오르내리지 않았다면 그대로 굳어진 것이 아닌가 의심했을 것이다.
보아하니 꽤 오랫동안 소파에서 이러고 있었던 것 같다. 하스펠은 가람이 기묘하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인사를 건네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은 좀 늦게 일어나셨네요.”
하스펠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꼼짝도 하지 않은 상태로 가람이 입만 움직여서 대답했다.
“예. 어쩌다 보니……. 오늘은 투계장에 안 가십니까?”
“슬슬 지겨워서요. 충전이 거의 끝나기도 했고.”
“충전…….”
가람과 다니면서 꽤 여러 번 들었던 이야기다. 그러고 보니 여행을 떠나기 전에도 충전이 다 되었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했었던가.
어제도 질문했다가 단칼에 거절당했지. 하지만 이렇게나 자주 듣게 되면 역시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하스펠은 물어도 될까 망설이다가 모험하는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충전이라는 건 뭡니까?”
“그런 게 있어요.”
용기가 무색하게도 가람이 쳐 놓은 선이 하스펠의 질문을 단숨에 쳐 내 버린다.
어제 제법 깊은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했던 하스펠로서는 다시 둘 사이에 놓인 벽을 통감하는 순간이었다.
어쨌든 충전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전의 경험에 빗대어 보면 아마도 오늘이 도시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일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오히려 늦잠을 잔 것이 시간을 잘 때운 셈이 되었다.
가람은 대화를 거부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으니 하스펠이 할 수 있을 만한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책을 읽는 취미는 없고, 그렇다고 여행 전에 검을 휘둘러 괜히 힘을 빼는 것도 멍청한 짓이니 남은 것은 배를 잔뜩 채워 기력을 보충해 두는 것뿐이다.
하스펠이 음식을 주문하기 위해 하인을 부르는 끈을 잡아당기려는 차, 마치 지켜보고 있기라도 한 것마냥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반사적으로 가람 쪽을 흘긋 본 하스펠은 자신이 나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람이 여전히 손등에서 광활한 우주라도 발견하려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크 소리가 두 번 정도 더 이어진 후 하스펠이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서 있는 것은 처음 여관을 방문했을 때 안내를 맡았던 점원과 처음 보는 청년이었다.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선 애매한 외모의 그는 하스펠을 보고 바짝 긴장해서 몸을 꼿꼿이 세웠다.
“무슨 일입니까?”
잠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스펠의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다.
그런 관계로 본의 아니게 위협하듯 으르렁거리고 말았는데, 동시에 청년의 목울대가 꿀꺽하고 움직였다.
“두 분께 심부름을 왔다고 해서 안내했습니다. 모르시는 분이신지요?”
미묘한 분위기를 느끼고 점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가람과 하스펠은 여관에서 가장 큰 손님이었다. 그런 만큼 비위를 거스르지 않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습니다만.”
하스펠이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 청년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어찌나 급했는지 첫마디가 괴상할 정도로 높게 나왔다.
“저, 저는 구란사 님의 오리 가게에서 일하는 직원인데, 구란사 님께서 날씨도 좋은데 오늘 투계장에 안 가셨으면 한번 방문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놀라운 일이 있다고…….”
그 순간 가람이 ‘됐다!’ 하고 짧게 외쳤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청년이 히익 하고 문에서 두 걸음이나 물러섰다.
구란사로부터 하스펠에 대해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스펠을 어딘가의 산적 두목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반응이었다.
그에게 일일이 놀랄 것 없다고 말하려던 참에 어쩐지 평소와 같은 상태로 돌아온 가람이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음? 누구예요?”
“구란사 씨가 보낸 심부름꾼입니다. 투계장에 안 가셨으면 한번 방문해 달라고…….”
“그래요? 마침 잘됐네. 안 그래도 나가려던 참인데. 아, 여관 분도 계시네요. 여기 오늘 치까지 계산해 주세요. 지금 방 뺄 거예요.”
“지금 말입니까?”
당황하는 점원에게 가람은 아예 주머니를 풀어 돈을 쥐여 주었다. 그 와중에도 점원이 얼추 돈을 세어 보고 거스름돈을 내어준다.
그렇게 여관의 정산이 끝나자 가람은 대충 짐을 챙겨 구란사의 심부름꾼을 재촉했다. 몰아치는 듯이 진행되는 상황에 심부름꾼은 얼떨떨해하면서도 제 본분을 잊지 않았다.
가람이 안내된 곳은 도시의 서쪽에 있는 커다란 시장이었다. 동쪽의 시장이 주로 생필품과 식품을 취급한다면 서쪽은 말과 같은 대형 동물을 거래하는 곳이나 공방이 빽빽하게 밀집되어 있는 지역이었다.
가까이 갈수록 짐승 배설물 특유의 구린내와 쇠 두드리는 소리, 무두질에 쓰는 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리고 어렴풋이 시장이 보일 때쯤 되어서 가람은 구란사의 직업과 오리라는 생물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이쪽 세계에 와서 가람은 오리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사실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리라는 것이 흔치 않은가 보다 싶기도 했고, 딱히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보통 흔히 먹곤 하는 오리 통구이 같은 요리가 없는 것에 대해서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람은 마치 말처럼 부리에 고삐를 매고 사람을 등에 태운 채 노란 두 발로 걸어 다니는 거대한 하얀 오리 같은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누가 상상할 수 있겠는가.
가람은 멍하니 제 앞을 지나가는 두 마리 오리를 보았다. 새하얀 깃털에 노란 부리, 콕 찍어 놓은 것 같은 새카만 눈까지 완벽하게 오리다.
그 크기가 호수에서 발을 굴려 타는 오리 배에 필적할 만한 크기라는 것만 제외하면 나무랄 데 없는 오리였다.
그래, 이렇게나 크니까 오리 통구이 같은 메뉴가 없을 만도 하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볼 수 없었던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이런 게 길에 마구 돌아다니면 어린아이 정도는 가볍게 밟혀 죽을지도 모른다.
“구란사 님의 가게는 좀 안쪽입니다.”
가람의 동요를 눈치채지 못한 심부름꾼이 안내를 이어 간다. 시장은 말과 오리, 사람이 뒤엉켜 완전히 엉망이었다.
그 사이에서 가람이 심부름꾼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하스펠 덕이었다.
가람이 슬쩍 한눈을 판다 싶으면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그녀의 옷깃을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오,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내 문밖을 서성거리다가 하스펠을 발견하고 반갑게 뛰어나온 구란사가 싱글벙글 웃으며 가게로 안내했다.
사실 가게라고 해도 별것 없는 것이, 마치 마구간처럼 지어 놓은 축사와 그 앞에 딸린 작은 나무 상자 같은 건물이 전부다.
어쨌거나 그가 그렇게 반갑게 맞이하는 동안 심부름꾼이 어딘가로 사라진다 싶더니 차가운 음료 네 잔을 내어놓고 다시 사라졌다. 꽤 교육이 잘된 직원이었다.
“혹시 오늘 도시를 떠나실 생각이었습니까?”
하스펠이 짊어진 커다란 가방을 눈여겨본 구란사가 슬쩍 운을 뗀다. 가람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천만다행이라는 표정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제가 때를 잘 맞췄군요. 어쩐지 오늘따라 손님이 영 없어서 두 분이 생각나지 뭡니까. 공교롭게도 떠날 무렵에 제가 사람을 보낸 거군요.”
“네. 우연이네요.”
가람이 담담하게 대답하자 구란사의 얼굴이 아쉬움으로 물들었다.
“두 분은 이제 여기를 떠나면 다시 안 오실 예정이십니까?”
“으음, 딱히 계획은 없어요.”
“아마도 여행자시니 같은 곳을 두 번 오시지는 않겠지요?”
“그렇지 않을까요.”
“그러면 오늘이 두 분을 보는 마지막이라는 말이군요.”
눈물이라도 흘릴 것같이 슬프게 말한 구란사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섰다.
그의 시선은 하스펠이 짊어진 커다란 짐 가방에 못 박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