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218화 (218/256)

19화

“보아하니 두 분께서는 걸어서 여행하시는 것 같은데, 두 다리만으로 돌아다니기에는 세상은 너무 넓지요.

그러니 이 구란사가 선물을 하고 싶습니다. 제 목숨을 구해 주신 값도 다 갚지 못했으니 이렇게라도 은혜를 갚게 해 주십시오.”

“아, 딱히 그러지 않으셔도…….”

가람이 만류했지만 구란사는 막무가내였다.

그는 결국 자신의 축사에서 커다란 오리 한 마리를 끌고 나와 가람의 손에 고삐를 들려 주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유순한 인상의 오리였다.

물론 대부분의 오리들이 순한 표정을 짓고 있긴 하지만, 어쨌거나 약 3미터 정도 되는 커다란 오리가 새카만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자 가람은 조금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키로 따지면 타조보다 조금 큰 수준이었지만 타조가 기다란 목과 다리를 가지고 있는 덕분에 전체적으로 길쭉하고 날씬한 느낌이라면 오리는 통통한 몸에 짧은 다리를 가지고 있어서 비슷한 신장이라고 해도 그 위압감이 비교가 안 되는 것이다.

“이제 열 살 된 암오리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오리 중에 제일 순하고 착한 녀석이죠.

아시겠지만, 암오리는 여행 시 최고의 친구입니다. 물이든 땅이든 가리지 않고 탈 수 있고, 깃털은 포근한 데다 간혹 낳는 알은 먹을 수 있어서 식량을 해결해 주기도 하죠.”

노련한 장사꾼의 면모를 드러내며 물 흐르듯 오리를 자랑한 구란사가 뿌듯한 얼굴로 가람과 하스펠을 돌아보았다.

하스펠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가람은 조금 충격받았다.

“알을 먹어도 괜찮은 거예요?”

“물론이지요. 무정란이라서 상관없답니다. 어차피 품어 봐야 새끼가 태어나지도 않으니까요. 그보다 한번 만져 보시지요. 털이 아주 부드럽답니다.”

그렇게 말한 가람이 귀엽다는 듯이 설명한 구란사가 적극적인 태도로 가람의 손을 끌어다가 오리의 목을 쓰다듬도록 만들었다.

목 부분은 깃털이 아니라 부드러운 솜털로 이루어져 있어서 그의 말대로 아주 부드러웠다. 마치 촘촘한 민들레 홀씨를 쓰다듬는 듯한 감촉이다.

“정말 순하네요.”

가람이 감탄하자 오리가 알아들은 듯이 가람의 뺨에 부리를 문질렀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더니 말똥말똥한 눈으로 가람을 응시했다.

“어디 한번 타 보시지요. 녀석이 타 보라는 눈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까?”

구란사가 권하자 오리가 꽤 귀엽기도 해서 가람은 못 이기는 척 오리의 목 뒤에 앉았다.

늘어뜨린 발에 날개가 덮이자 부드럽고 간질간질하면서 따듯한 온도가 느껴졌다.

엉덩이 아래의 솜털들도 매우 푹신해서 과연 생물을 타고 있는 것이 맞는가 싶은 느낌이다.

말과 달리 안장 없이 고삐만 죄어 타는 방식이라 훨씬 친밀한 느낌이 들었다.

“굉장히 이상한 느낌이네요.”

“오리를 처음 타시면 다들 그런 말씀을 하시지요. 아, 하스펠 님이 타실 오리를 꺼내 오는 걸 깜빡했군요. 잠시 타고 계십시오.”

구란사의 장사 밑천을 공짜로 받을 생각은 없었지만, 귀엽고 폭신한 오리가 꽤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가람은 구란사가 축사로 사라지는 것을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구란사가 충분히 멀어지자 내내 침묵하고 있던 하스펠이 입을 열었다.

대외적으로 남매 관계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말을 하려면 당연히 존대를 생략해야 하는데 그것이 영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스펠은 다른 사람과 있으면 아예 가람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

“오리를 처음 보십니까?”

“아, 그건 아닌데. 이렇게 큰 오리는 처음이에요. 타고 다니는 용도로 쓰는 것도 처음 보고.”

“다른 차원의 오리는 작습니까?”

“작죠. 딱 요 정도? 아니, 한 이 정도…….”

가람이 쥐고 있던 고삐를 놓고 손으로 대략적인 크기를 설명하는 순간 오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두 다리로 몸통을 꽉 조였음에도 불구하고 가람은 오리의 몸에서 미끄러지고 말았다. 매끄럽고 동그란 몸통 탓에 말에게 쓰는 기마술이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말로 아차 하는 순간 일어난 일이라 마법을 쓸 틈도 없어 그대로 땅바닥에 구르려던 가람을 하스펠이 급히 받아 냈다.

“아, 놀랐네.”

놀람을 가라앉힌 가람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가람을 제 품에 받아 낸 하스펠은 딱딱하게 굳은 상태였다.

반사적으로 받아서 안긴 했는데,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거머쥐듯 안다 보니 지나치게 꽉 껴안은 상태가 된 것이다. 스스로의 자세를 자각한 그가 공황 상태에 빠진 것은 당연했다.

“죄송합니다.”

잠시간의 정적 후 불에 덴 듯 다급하게 가람을 내려놓은 하스펠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사과했다.

“별말씀을요. 오히려 받아 주셔서 감사하죠.”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한 가람이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데 하스펠이 묘한 시선으로 그런 가람을 응시했다.

“왜요?”

“아니, 그게…….”

한참 동안 우물쭈물하던 하스펠이 숙맥 같은 태도로 툭 고백했다.

“무게가 너무 가벼워서…….”

“아아.”

그제야 가람은 하스펠의 붉어진 얼굴이나 곤란한 표정을 이해했다. 아무래도 이쪽 차원에서도 여성의 몸무게에 대해 운운하는 것은 실례에 속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겨우 그런 것을 이렇게나 힘겹게 말하는 태도가 꽤 귀여운 구석이 있다. 어쨌거나 자신의 비정상적인 무게에 대한 것은 가람도 충분히 자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마 옷 때문에 그럴 거예요. 전에 그 가방 있잖아요. 무게를 줄여 주는 그 가방. 거기에 사용된 천이 제가 입은 옷에도 사용되었거든요.”

“아. 티셔츠나 바지에 말입니까? 하지만 지금 입고 계신 옷은 이곳에서 구입하신 옷으로 알고 있는데…….”

“아뇨, 속옷.”

가람의 폭탄 발언에 하스펠의 얼굴이 순식간에 터질 듯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원래 이렇게 놀리는 것을 즐기는 성격은 아닌데 하스펠의 반응이 지나치게 격한 탓에 답지 않게 장난을 치게 된다.

킥킥 웃는 가람을 보며 뒤늦게 놀림받았음을 깨달은 그가 평소의 담담한 얼굴로 돌아갔다.

그가 무례함을 무릅쓰고 질문한 것에서도 알 수 있지만 그에게 가람의 가벼움은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인간 같지 않은 능력들, 인간 같지 않은 분위기에 그런 현실감 없는 육신의 무게를 느끼니 마치 가람이 정령이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인물 같은 초현실적인 존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평소에도 가람은 그에게 초현실적인 존재였지만 이번만큼 강렬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게다가 그 전날 목격한 기적과 합쳐져 그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여기 데려왔습니다. 음?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축사에서 또 다른 오리를 데리고 돌아온 구란사가 가람과 하스펠의 미묘한 분위기를 읽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 오리가 갑자기 일어서서 제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이런,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구란사가 깜짝 놀라 물었다.

“네. 무사해요.”

“다행이군요. 아마 친구가 오는 걸 알고 그랬나 봅니다. 그러고 보니 녀석도 놀란 기색이군요. 가람 님을 떨어뜨려서 그런 모양입니다.”

구란사의 말대로 가람의 오리는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었다.

자신이 제대로 고삐를 잡고 있지 않았던 탓에 굴러떨어진 것인데 괜히 오리를 놀라게 한 것 같아서 슬쩍 목을 쓰다듬자 오리가 소리 없이 부리를 슬쩍 벌렸다. 마치 웃는 듯한 표정이다.

“벌써 좀 친해지셨군요. 여기 이 녀석은 이제 열두 살 된 오리입니다. 어저께 들어온 녀석이죠. 나이가 조금 많긴 하지만 그래도 힘은 세니 하스펠 님을 태우고도 남을 겁니다.”

두 번째 오리는 가람의 오리보다 약간 더 덩치가 크고 머리에 옅은 회색 털이 나 있는 오리였다.

가람의 오리가 순하고 장난스러운 인상이라면 두 번째 오리는 조금 차분하게 가라앉은 느낌이다. 많이 팔려 다닌 모양인지 이런 상황에 익숙한 모습이었다.

“자, 여기 앉아 보십시오. 짐은 여기 가슴걸이에 걸면 됩니다.”

구란사가 가람을 태웠던 것과 같이 적극적으로 하스펠을 탑승시키고 오리의 가슴에 달린 걸쇠에 짐을 거는 것을 도왔다.

고리는 오리의 목과 날개 아래, 몸통을 감싸듯 이어진 고삐의 일부였는데 몸통 전체에 무게가 실리는 구조라서 딱히 목이 졸리거나 할 걱정은 없어 보였다.

어쨌거나 가람도 하스펠도 오리에 올라타고 나자 그제야 구란사가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잘 어울리시는군요.”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이걸 그냥 받고 싶지는 않아요.”

“그냥이라니요? 저를 구해 주신 데 대한 보답입니다.”

가람의 말에 구란사가 펄쩍 뛸 기세로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가람의 태도는 강경했다.

“보답은 맛있는 식사를 대접받은 걸로 이미 다 하신 거예요. 게다가 이런 좋은 오리도 소개해 주셨잖아요. 이 이상은 저희도 마음이 불편하니까 그냥 돈을 받아 주세요. 큰맘 먹고 이런 결정 해 주신 것만으로도 고마운걸요. 구란사에게 폐를 끼치는 건 정말로 싫어요.”

그렇게까지 말하자 구란사도 더 이상 거절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조금 겸연쩍은 얼굴로 오리값을 알려 주었다.

“그러면 700만 슬링만 주십시오. 두 마리를 매입할 때 썼던 금액이니 그 정도면 저도 딱히 손해가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정상적으로 판매한다면 얼마인 거예요? 데려와서 먹이고 돌보면서 들었을 돈도 있잖아요.”

“그 이상은 두 분에게 강매를 하는 것 같아서 못 받겠습니다. 그냥 그 정도만 주십시오.”

“나중에 오리를 데리고 다닐 수 없어져서 다른 곳에 팔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 가격이 정말 맞아요?”

두 마리에 700만 슬링이라고 해서 그 가격에 팔면 그 오리 장수만 좋은 일을 시켜 주는 셈이다.

실랑이 끝에 구란사는 긴 한숨과 함께 진짜 가격을 알려 주었다. 가람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그가 알려 준 제대로 된 가격을 지불했다.

오리는 각각 700만 슬링으로 총 1천400만 슬링의 가격이었다. 아무리 생명의 은인이라고 해도 이만한 가격의 물건을 떠나는 사람에게 건네는 정도의 배포는 확실히 놀라운 것이다.

“동생분이 정말로 보통이 아니시군요. 놀랐습니다.”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돈을 챙기던 구란사가 하스펠에게 슬쩍 말했다. 하스펠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을 뿐이다.

어쨌거나 계산도 끝났고, 짐도 다 걸었으니 슬슬 떠나 볼까 하던 가람이 문득 구란사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우릴 부르러 온 사람이 놀라운 일이 생겼다고 하던데, 무슨 일 있어요?”

“아.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가람의 말에 구란사가 뒤늦게 깨달은 얼굴로 제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그의 어깨에 쌓이는 비듬을 모른 체하며 가람이 뒷말을 재촉하자 그제야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이거 들으시면 정말로 놀라실 겁니다.”

가람은 반사적으로 어젯밤 찾아갔던 라쇼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벌써 소문이 퍼진 것인가.

정말로 하룻밤 사이에 소문이 이렇게나 퍼졌다면 그야말로 감탄할 만한 일이다. 어쨌거나 모른 척 듣고 있자 구란사가 말을 이었다.

“새벽별이 오늘 낮의 경기에서 이겼다지 뭡니까.”

가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투계장에 가지 않았으면 들러 달라던 이유가 그거였나. 투계장의 소식을 전해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가람의 갑작스러운 웃음에 영문을 알 수 없어진 구란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는 설명하는 대신 작별 인사와 함께 오리를 출발시켰다.

새벽별이 이기면 기적이 일어난다. 그 순서야 어찌 되었든, 소년의 바람은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며칠 뒤 작은 라쇼와 그의 아버지가 차린 대장간에 새벽별 대장간이라는 간판이 달렸다.

불타는 황동 모루 위에 주석 별이 빛나는 예쁜 간판이었다.

Chapter 4

가람은 오리가 마음에 들었다. 하얗고 동그란 머리에 새까맣고 순진한 눈이 깨처럼 콕 박혀 초롱거리는 것이 아주 귀여웠다.

이따금씩 즐겁게 꽉꽉거리는 것이나 미소 짓는 것처럼 소리 없이 벌어지는 노란 부리가 매우 사랑스럽다.

새하얗고 보드라운 털은 최고급 침낭조차도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따듯하고 포근했다.

밤이슬에 식은 몸을 슬쩍 기대면 오리는 커다란 날개로 가람을 덮어 주었다. 그 따듯함만으로 여행자들의 최고의 친구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을 정도다.

게다가 앞서 걷고 있는 오리의 궁둥이가 흔들리는 모습은 절로 사람을 미소 짓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정말 귀엽네요.”

“그렇습니까.”

가람이 자신의 오리를 쓰다듬으며 말하자 하스펠이 건성인 것이 역력한 어조로 대꾸했다.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탄 오리와 고군분투하느라 대화를 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람의 오리가 매우 순하고 협조적인 것에 비해 하스펠의 오리는 조금 산만한 성격이었다.

게다가 호기심도 많아서 갑자기 달려가 나무뿌리에 부리를 박거나 머리통만 한 돌만 보이면 부리로 뒤집어서 벌레를 먹어 댔다.

심지어 날갯짓을 해 나무 위로 올라가려고 든 적도 있었다.

그런 난리 통에도 한 번도 땅에 구르지 않은 하스펠은 정말로 대단한 솜씨의 기마, 아니, 기압술을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이름을 뭐로 지으면 좋을까요. 계속 오리라고 부를 수는 없고.”

사실 조금 타다가 팔아 버릴 생각이었지만 가람은 오리가 아주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이름을 지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하스펠에게는 결코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이걸 계속 타고 다니실 겁니까?”

하스펠이 절망적인 얼굴로 가람을 돌아보았다. 그의 오리는 길에 깔린 돌마다 물갈퀴를 들이대며 밟아 대는 특이한 방식의 걸음걸이를 고수하고 있었다.

좁게 걸을 때도 있고, 갑자기 껑충 뛰기도 해서 탑승감이 최악이었다. 가람은 현대 세계의 초등학생들이 비슷한 짓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같은 색의 보도블록만 밟거나 횡단보도의 흰 선만 밟고 건너는 것 따위와 아주 흡사하다.

“내 오리는 아주 마음에 드는데요. 하스펠도 좀 잘해 봐요.”

“훈련이란 걸 아예 받은 적이 없는 말도 이 오리보다는 나을 것 같습니다. 제가 잘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닐 것 같군요.”

드물게 투덜거린 하스펠이 결국 오리에서 내려 고삐를 쥐었다. 타고 가느니 끌고 가겠다는 태도다.

그러나 이번에는 오리가 자리에 서서 버티기 시작했다. 힘겨루기 놀이라도 하는 듯이 즐겁게 꽉꽉거리는 것이 천진난만하기 짝이 없다.

하스펠이 한참 동안 오리를 끌고 가려 시도했지만 3미터에 무게만 300킬로그램이 넘는 짐승을, 그것도 근육의 힘으로 버티는 짐승을 끌고 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그는 지친 얼굴로 고삐를 내던지다시피 놓아 버렸다.

“정말, 만약 이름을 짓는다면 저는 이 오리의 이름을 멍청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저 오리와 정말로 어울리는 이름이지 않습니까?”

“이런, 진정해요.”

하스펠의 오리는 고삐를 놓아 버리자 즐겁게 울며 주변의 잡초를 뜯어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실소한 가람은 하스펠이 무섭게 굳은 얼굴로 오리를 노려보는 것을 발견하고 표정을 갈무리했다.

하스펠의 두 눈 가득 저 멍청한 짐승을 길들이겠다는 의지가 이글거리는 것 같았다.

“흠, 일단 여기서 간단한 음식이라도 먹으면서 이름을 지어요.”

“알겠습니다.”

억눌린 목소리로 대답한 하스펠은 곧 미친 듯이 날뛰는 오리를 잡아 간신히 가방에서 음식을 꺼내는 데 성공했다.

가람은 그가 오리의 목에 매달려 헝겊 인형처럼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다가 혀를 차며 바닥에 천을 깔았다.

“마실 것은 꺼내지 못했습니다. 음식은 이걸 가져왔는데, 괜찮습니까?”

전의 말끔하던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엉망이 된 하스펠이 헐떡이며 보여 준 것은 마른 빵 두 개였다.

가람은 딱한 시선으로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맞은편 자리를 턱짓하고 허공에서 스튜 열매 두 개를 꺼내었다.

자리에 앉던 하스펠은 그 모습을 보고 망치에 맞은 것 같은 깨달음을 얻고 조금 늙었다.

가람은 스튜 열매 두 개를 쥐고 손바닥 안에서 뜨겁게 가열했다. 내용물이 버터처럼 천천히 풀어지면서 김을 피워 올리기 시작하더니 곧 완전히 녹아 버렸다.

그렇게 준비된 스튜 열매와 오렌지주스 한 컵, 그리고 빵 한 덩이를 메뉴로 식사가 시작되었다.

“여기, 드세요.”

“감사합니다.”

가람이 건넨 음식을 받아 든 하스펠이 말없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아주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하긴, 편안히 타고 왔던 가람과 달리 그는 온몸으로 자신의 오리와 씨름했으니 배가 고플 만도 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가람의 오리가 얌전히 풀을 뜯고 있는 것에 비해 하스펠의 오리는 머리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괴상한 자세로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가람이 말문을 열었다.

“확실히 하스펠의 오리가 좀 활발하긴 하네요.”

“활발? 미친 것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입니다.”

코웃음 친 하스펠이 드물게 격한 말투로 씹어뱉듯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라서 가람은 어색하게 웃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처음에 봤을 때는 꽤 차분한 인상이었는데. 놀랍네요.”

가람은 구란사에게 오리를 처음 소개받았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차분한 기색으로 눈을 마주쳐 오던 오리가 이렇게 변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솔직히 외모로 보면 오히려 가람의 오리가 장난기가 넘쳐 보이지만 정작 가람의 오리는 매우 순하고 얌전했다.

어쨌거나 가람은 불만스럽게 빵을 씹는 하스펠을 바라보며 화제를 돌릴 필요성을 느꼈다.

“그나저나 이름 말인데, 폭신폭신하고 부드러우니까 쿠션이라고 짓는 게 좋겠어요.”

“저는 멍청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멍청이라. 설마 진심이었던가. 전혀 번복하지 않는 것을 보아 진심인 모양이었다.

가람은 그래도 그것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슬쩍 만류했다.

“그러지 말고 제대로 된 이름을 지어 줘요.”

그러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하스펠이 한숨과 함께 수동적으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불이라고 부르지요.”

가람의 오리가 쿠션이니 대충 이불이라고 부르겠다는 투다. 그 성의 없는 작명에 가람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슬쩍 꼬집었다.

“이불이라니 그게 뭐예요.”

“쿠션도 그렇게 정상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면 가람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오리의 이름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폭신폭신하고 부드러운 것이 딱이라는 생각이 드는 데다 여전히 가람의 작명 실력은 보잘것없었기 때문이다. 쿠션 이상의 좋은 이름을 생각해 내기 힘들었다.

“뭐 그럼 좋아요. 하스펠의 오리는 이불, 제 오리는 쿠션.”

“예.”

말은 마친 하스펠은 다시 열심히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가람은 보통 하루 한 끼에서 두 끼 정도를 먹었고, 그나마도 배가 고파서 먹는다기보다 반쯤 습관적으로, 혹은 심심해서, 마침 먹을 만한 장소가 나타나서 먹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니 먼저 무언가를 먹자고 말을 꺼내지 못하는 성격의 하스펠은 배가 고파도 내내 참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충분히 배를 채워 두는 것이다.

“배가 고프면 먼저 말하지 그랬어요.”

허겁지겁 먹는 그가 측은해진 가람이 그에게 조용히 말했다. 사실 이 말을 하는 것도 처음이 아니었다.

하스펠은 그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그러겠다고 하긴 했지만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꽤 오래 같이 다녔지만 하스펠은 여전히 가람을 어려워했다.

당연한 사실이긴 하다. 사실 어렵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불구의 팔다리를 순식간에 재생하고, 반쯤 죽었던 자신을 되살려 내는 데다 심심찮게 기상천외한 것들을 보여 주니 편히 대할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가람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렇게나 불편하고 어렵고 수상한 존재인 자신을 어째서 하스펠이 떠나지 않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솔직히 기사를 그만두었다고 해도 어디 마을에 숨어서 정착한다거나 검술을 가르치거나 하다못해 마을 치안이라도 유지시키거나 하면서 살 수도 있을 테고, 사냥꾼이니 뭐니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수단은 널리고 널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굳이 자신을 따라다녔다.

뭐, 어쩌면 그냥 자신이 가진 신기한 물건과 재주들이 재미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물론 하스펠의 성격을 생각하면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 것이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 봐서는 모르는 법이니까.

혹시 또 모르지, 자신의 힘이나 사용하는 도구들을 볼 때마다 속으로는 즐거움과 신기함에 춤을 추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고 무뚝뚝한 척 구는 걸지도. 그렇다면 조금 귀엽겠는걸.

“오늘은 여기서 야영하실 겁니까?”

빵으로 스튜 열매의 안쪽을 문질러 적시며 하스펠이 문득 질문했다. 가람은 고개를 저었다. 야영을 꾸리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다.

“아니요, 일단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죠. 노을이 지기 전까지는 걸을 거예요.”

하스펠은 고개를 끄덕이고 남은 빵 조각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단숨에 주스를 마신 뒤 비장한 걸음으로 이불을 향해 걸어갔다.

가람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뒷정리를 마치고 쿠션에 올라탔다.

“타고 가는 건 무리겠지만 끌고 가는 건 어떻게든 가능할 것 같습니다.”

쿠션의 목을 쓰다듬으며 출발 준비를 하고 있는 가람에게 이불을 끌고 온 하스펠이 비장하게 말했다.

이불은 입 안 가득 돌멩이를 물고 있다가 하스펠의 어깨에 와르르 뱉어 놓았다. 졸지에 돌 우박을 맞게 된 하스펠의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다.

가람은 그의 힘겨운 앞날을 예견할 수 있었지만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쿠션을 출발시켰다. 길들이는 것은 그의 몫이다.

“그러고 보니, 하스펠도 기사였으니 전용 말 같은 게 있지 않았나요?”

“기사단의 말은 기사단의 소속이고, 딱히 주인을 정하지는 않아서 제 전용 말이라고 할 것은 없었습니다.”

이불의 고삐를 갈무리하며 하스펠이 대답했다. 이불은 조금 얌전해져서 그가 이끄는 대로 걷고 있었다.

“으음, 전용 말이 있다면 말을 길들이는 데 익숙할 것 같아서 그걸 참고해 길들여 보면 어떨까 했는데.”

고삐를 느슨하게 잡고 쿠션의 등에 몸을 파묻으며 가람이 말했다.

“말은 이런 미친 짓을 하지 않습니다.”

하스펠이 터무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딱 잘라 말했다.

“미친 짓이요?”

“길바닥의 벌레를 콧속에 집어넣거나 주인의 어깨에 돌멩이를 내려놓거나 땅바닥을 구르면서 가랑이 사이로 머리를 집어넣고 꽉꽉 우는 짓들 말입니다. 만약 그런 말이 있다면 그냥 제 다리를 쓰는 편이 나을 것 같군요.”

덤덤하게 말하고 있긴 했지만 하스펠은 꽤 쌓인 것이 많은 모양이었다.

이렇게 모아서 듣고 보니 확실히 정상적인 오리로 보이지는 않는다.

설마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가람은 이불이 정말로 미친 오리일 가능성도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녀는 슬쩍 이불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