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219화 (219/256)

20화

가람은 필요하다면 인간과 동물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사실 그렇게 대단한 능력은 아니었다.

생각이라는 것은 워낙 빠르고 변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읽는다고 해도 아주 잠깐 표면적인 사고를 읽을 뿐, 그 사람 자체를 파악할 수는 없다.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긴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거짓이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생각을 읽어 본들 거짓임을 알 방법이 없는 것이다.

물론 속으로 ‘제발 속아 줘.’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다면 아주 쉽게 파악할 수 있지만.

그리고 언어의 형태로 생각을 떠올리는 인간과 달리 동물은 언어 체계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어렴풋한 장면이나 기묘한 색과 느낌 같은 형태로 생각이 읽힌다.

그저 단순히 호불호 정도를 파악하거나, 동물이 현재 떠올리고 있는 기억이나 지금의 감정을 읽는 수준으로, 능력을 이용해 인간과 동등한 수준의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가람은 이불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어둡고 냄새나는 금속 궤짝을 볼 수 있었다.

날개를 펼 수도 없을 정도로 좁은 궤짝에 오리들이 몸을 욱여넣고 앉아 호통치는 인간들의 명령에 맞춰 알을 낳고 깃털을 뽑힌다. 이불도 그중 하나였다.

이불은 열두 살의 나이를 먹을 동안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그 궤짝 안에서 보낸 것 같았다.

깃털이 뻣뻣해질 정도로 자란 후에 아마 구란사의 가게로 팔려 간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구란사는 이불을 흔한 여행 오리로 취급했고, 다시 팔려 가고 싶지 않았던 이불은 최대한 얌전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스펠의 손에 고삐가 넘어갔을 때 이불은 체념해 버렸다. 그리고 다시 그 궤짝으로 돌아갈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벌어진 일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불은 세상 밖으로 나왔다.

나무의 초록 잎사귀나 바닥에 깔린 돌, 사료가 아닌 벌레를 맛보고 잡초를 뜯으며, 다리를 움직여 돌아다니는 등의 모든 일들이 이불을 흥분시켰다.

가람의 쿠션이 태어났을 때부터 여행자에게 팔려 돌아다녔던 것에 비하면 이불은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세상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궤짝 안에서 축사로 옮긴 것만으로도 놀라워했던 불쌍한 오리에게 바깥세상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던 것이다.

“으음.”

가람은 이불의 가엾은 사정을 알고 침음했다. 이런 것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불은 잎사귀의 녹음이나 하늘의 넓음과 불어오는 바람이 깃털을 흔드는 모든 일들에 기뻐하고 있었다.

가람과 하스펠이 반쯤 미친 것이 아닌가 했던 그 활달함은 이불의 환희였던 것이다.

가람은 이불에게 최면을 걸어 얌전히 시키려던 선택지를 완전히 폐기시켰다. 처음으로 세상을 본 오리에게 어떻게 최면을 걸 수 있겠는가.

게다가 하스펠의 어깨에 돌을 떨어뜨린 것도 그저 하스펠에게 선물을 하고 싶었던 것에 불과했다.

어쨌거나 하스펠에게는 안된 일이었다. 그래도 그나마 위로할 만한 사실은 이불이 아주 조금씩 얌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마도 환희가 조금씩 가시면서 이성이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존 라드를 처음 떠나왔을 때에 비하면 훨씬 낫군요.”

“아아, 그때. 대단했죠.”

“저는 이 녀석이 날아가려고 하는 줄 알았습니다.”

가람은 웃어 버렸다. 그러는 동안 이불은 점점 더 얌전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타고 갈 수 있을 것 같은 수준까지 정상적으로 변했다.

쿠션에 탄 자신과 걷고 있는 하스펠을 흘긋거리는 이불을 발견한 가람은 고삐를 당겨 쿠션을 멈추고 슬쩍 하스펠에게 권해 보았다.

“이제 타도 괜찮을 것 같은데. 한번 타 보지 그래요?”

하스펠은 조금 삐딱하게 이불을 올려다보았다. 하스펠과 눈을 마주친 이불이 꽉, 하고 단정하게 한 번 운다.

하스펠은 결국 깊은 한숨과 함께 이불을 앉게 만들고 그 위에 올라탔다.

“괜찮아요?”

“예……. 아직은 괜찮군요.”

떨떠름하게 대답한 하스펠이 아주 살짝 이불을 걷게 만들었다. 아직 무언가를 태우는 데 익숙하지 못했던 덕분에 쿠션만큼 안락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러면 계속 가죠. 이쪽이에요.”

가람이 가리킨 것은 길을 벗어나 펼쳐진 숲이었다. 풀이 무성하지 않은 것을 보아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 보였다.

크게 위험한 동물도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근처에 마을이 있을지도 몰랐다.

숲 안으로 들어서자 발밑에서 잡초가 바삭거리는 소리에 이불이 조금 놀라 날개를 푸드덕거렸다. 잠깐 이불을 돌아본 쿠션이 아무렇지도 않게 앞장서기 시작했다.

가람은 쿠션이 이불을 배려해서 일부러 조금 느리게 걷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쿠션은 상냥한 오리였다.

얼마 걷지 않아 곧게 뻗은 나무 사이로 무언가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패스인가 하고 조금 서둘러 쿠션을 재촉했던 가람은 빛에 가까워질수록 자신이 착각했음을 깨달았다.

일렁이는 빛은 물결에 반사되는 햇살이었다. 나무를 제치고 숲을 뛰쳐나가자 곧바로 탁 트인 커다란 호수가 나타났다.

아름다운 호수였다. 고요한 수면 위로 나무들의 그림자가 비치고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이 호수를 가늘게 흔든다. 물도 아주 맑아서 깊지 않은 곳은 바닥까지 훤히 보였다.

가람이 호수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동안 뒤늦게 하스펠이 합류했다. 하스펠을 태운 이불은 호수를 보자마자 그대로 굳어 버렸다.

반짝이는 물결, 하늘과 구름을 반사하는 커다랗고 아름다운 보석이 펼쳐져 있는 풍경은 처음 세상 구경을 나선 오리를 벅차게 만들기 충분했다.

“아름다운 호수네요. 건너가죠.”

“예.”

별다른 걱정 없이 감탄하는 가람과 달리 어두운 목소리로 하스펠이 대답했다.

땅에서 이불을 타고 가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데 호수를 가로질러 갈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해지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그가 차라리 헤엄쳐서 호수를 건너는 게 어떨까 하고 고민에 빠지려던 차에 가람이 호수 건너편을 가리켰다.

“연기가 피어오르네요. 마을이 있나 본데요.”

멀리 나무 사이로 희미한 연기가 몇 줄기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나라면 몰라도 저런 여러 개의 연기는 마을을 의미한다.

“오늘은 저 마을에서 묵으실 겁니까?”

하스펠의 질문에 가람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곧 노을이 질 듯 하늘이 어슴푸레하게 붉어지고 있었다.

“아니요. 방향을 보니 마을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건 맞지만, 저런 작은 마을은 해가 진 다음에 방문하는 여행객을 좋아하지 않으니 오늘은 호숫가에서 야영을 하고, 내일 아침에 방문하죠.”

“차라리 예전에 썼던 그 이동 방법을 사용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간절함을 숨기고 하스펠이 슬쩍 질문했다. 이불을 타고 호수를 건너는 것은 정말로 사양이었다. 그러나 가람은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전에도 말했던 것 같지만, 패스를 찾는 중에 그런 식으로 이동하는 걸 즐기지 않아요. 그건 제 삶을 너무 건조하게 만들었거든요. 게다가 그런 방식으로 이동했으면 이런 예쁜 호수를 발견하는 일도 없었겠죠. 자, 오늘은 이 아름다운 호수에서 하루 묵자고요. 좋잖아요?”

가람이 신나는 어조로 말했지만 하스펠은 같은 기분이 될 수 없었다. 그는 결국 반쯤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 방법도 없었다.

“그런데 패스라니, 찾으시는 물건의 이름입니까?”

“어……. 뭐 그렇죠. 그럼 먼저 갈게요.”

대충 얼버무린 가람이 쿠션을 타고 훌쩍 호수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덩그러니 남겨진 하스펠은 멀어지는 가람을 망연하게 바라보다가 이불의 머리를 올려다보았다.

이불은 쿠션이 호수로 들어간 것에 충격을 받은 모습으로 우두커니 서 있다가 곧 조심스럽게 물가로 다가가 발을 담그는 것을 시도했다.

노란 물갈퀴 위로 차가운 물이 찰방찰방 차올랐다. 그 차갑고 묘한 느낌에 이불은 전율했다.

물이 어떤 것인지는 알고 있었다. 몇 년 동안 씻지 않은 더러운 구유에 차 있던 구정물을 내내 마셔 왔으니까.

그러나 이렇게 구름과 나무가 비친 아름다운 호수는 그와 같은 물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워서 이불은 한참 동안 묘한 느낌으로 물 위를 찰방였다.

튀어 오른 물방울들이 하스펠의 하의를 흠뻑 적실 때까지 그 행동은 계속되었다.

하스펠은 반쯤 득도한 표정으로 이불이 실컷 물장난을 치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자신을 끌고 와서 호수에 처넣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마우니 바지가 좀 젖는 것 정도는 참을 수 있다는 태도였다.

그는 언젠가는 가겠지 하는 마음으로 이불이 그 행동에 흥미를 잃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인내가 결실을 맺어 마침내 이불이 호수로 들어가 헤엄치기 시작했다.

쿠션보다 훨씬 느린 속도였지만 쿠션이 이불을 배려한 속도로 느긋하게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따라잡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생각보다 힘들지 않겠구나 하고 하스펠이 생각하는 순간, 쿠션이 근처에 다가온 물고기 한 마리를 부리로 집어 삼켰다.

그 광경을 목격한 이불의 물갈퀴질이 뚝 멈추었다. 하스펠은 불안감을 느끼고 고삐를 세게 움켜쥐었다.

쿠션의 고기잡이에 깊은 인상을 받은 이불의 눈이 강하게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불안은 결국 현실이 되었다. 이불은 호수를 건너가는 짓을 그만두고 고기잡이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쿠션에 비하면 이불의 실력은 그야말로 형편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이불은 번번이 헛입질을 했다.

그러나 마침내 피라미 한 마리를 부리에 가두는 데 성공했다. 부리 밖으로 삐져나온 물고기가 필사적으로 지느러미를 파닥거린다.

아마 이 호수에서 가장 멍청한 물고기가 잡힌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하스펠이 의미 없이 고삐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이불은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고삐를 잡아당겼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스펠의 이불이 호수 중앙에서 빙글빙글 돌며 고기를 잡는 동안 쿠션은 가까이 온 물고기들을 손쉽게 삼키면서 어느새 호수를 다 건넜다.

물 밖으로 나온 쿠션이 가볍게 물기를 털어 내고 총총 걸어가 마른 땅에서 털을 고르기 시작한다.

가람은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하스펠을 잠시 바라보다가 야영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가람은 노을 아래에서 마른 나무를 모아 불을 피웠다. 따듯한 불의 온기에 쿠션이 이끌리듯 다가와 자리를 잡고 앉는다.

가람은 그런 쿠션에게 기대어 고군분투하는 하스펠을 구경하고 있었다.

밤이 되기 전에 이불을 물 밖으로 끌어내고 싶은 모양인지 발로 물장구를 치기도 하고, 이불의 엉덩이를 두드리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하는 하스펠이었지만 처음으로 맛본 물고기에 흠뻑 빠진 이불에게는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았다.

결국 하스펠이 호수에서 나온 것은 노을이 다 지고 땅거미가 몰려오는 초저녁 무렵이었다. 하의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얼굴에는 피로가 역력했다.

그는 굴러떨어지듯 이불에서 내려와 비척비척 모닥불가에 앉아 피곤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슬쩍 쿠션과 가람을 바라본 이불이 만족스러운 트림을 하고 하스펠에게 다가와 기대어 앉는다.

“음, 나쁜 오리는 아니에요.”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이불을 바라보는 하스펠에게 가람이 작게 말을 건네었다. 하스펠은 손으로 얼굴을 길게 쓸어내리며 힘없이 대답했다.

“말과는 정말로 다르군요. 기사들의 마구간에 왜 오리가 없는지 알겠습니다.”

“그래도 이불이 하스펠을 아주 마음에 들어 하나 봐요. 지금도 찰싹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데.”

“오리는 원래 붙임성이 좋으니까요. 예전에 점잖은 아가씨들이 즐겨 타는 걸 많이 봤습니다. 드레스와도 꽤 어울리는 동물이고. 솔직히, 그냥 뛰어내려서 헤엄쳐 올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잖아요.”

“예, 야영 준비를 도우려고 했는데 이미 끝내셨더군요. 좀 느긋해지기로 했지요.”

“느긋하려던 사람의 몰골이 아닌데요.”

하스펠은 소리 없이 엷게 웃었다. 가람은 마법으로 그의 옷을 말려 주고 가방에서 음식을 꺼냈다.

딱히 요리를 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아서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소시지와 캔 맥주, 약간의 과일을 꺼내고 맥주는 그대로 따서 하스펠에게 건네었다.

“이건 뭡니까?”

어색하게 캔 맥주를 받아 든 하스펠이 그 생소한 모양새에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병맥주야 먹어 보았지만 캔 맥주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맥주예요. 이거랑 먹죠.”

가람은 소시지를 그대로 모닥불에 굽기 시작했다. 꽤 고급인 소시지라서 별다른 소스가 없어도 입을 즐겁게 해 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소시지가 익어 가기 시작하자 아주 근사한 냄새가 모닥불을 감돌았다.

가람과 하스펠은 곧 양손에 차가운 맥주와 소시지를 들고 오리에 기대어 식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조금 싱겁긴 하지만 차가워서 좋군요.”

맥주를 맛본 하스펠이 담담하게 평가했다. 맥주는 그럭저럭 괜찮은 모양이었지만 소시지는 아주 마음에 든 표정이었다.

직화로 구웠기 때문에 겉껍질이 약간 바삭하게 타서 씹을 때마다 톡 터지는 듯한 탄력과 함께 짭짤한 육즙이 배어 나와 맥주와 함께 먹기엔 그만이다.

가람은 마른 빵 몇 개와 머스터드를 꺼내서 빵에 소시지를 끼우고 머스터드를 발라 즉석에서 핫도그를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가람이 하는 양을 보고 하스펠이 곧 따라 핫도그를 만들었다.

어쨌거나 밤의 호수에 모닥불을 피우고 오리에 기대어 하는 식사는 제법 운치가 있는 것이다.

가람은 등으로 느껴지는 깃털에 더욱 몸을 파묻으며 호수로 시선을 던졌다. 새카만 호수에 만개한 연꽃 모양 달이 하얗게 비치는 모습이 묘한 느낌이었다.

멀리서 들리는 짐승의 울음소리와 풀벌레, 바람이 나무 사이를 스치는 소리가 호숫가를 일렁인다.

“이 세계의 달은 정말로 이상해요.”

불쑥 입을 연 가람이 핫도그를 크게 베어 물었다. 그리고 작은 나무를 모닥불에 던져 넣는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나무가 모닥불 안에 들어갈 때마다 불똥이 튀어 오른다. 이불의 빛나는 눈이 그 불똥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이상하다니요?”

소시지 하나를 홀랑 먹어 치운 하스펠이 의아하게 반문했다.

“저게 이상하지 않나요? 달이 꽃 모양이라니. 처음에는 동그랗지만 밤이 깊어질수록 마치 부서진 것처럼 파편이 생기잖아요.”

하늘의 달을 올려다보며 가람이 눈썹을 모은다. 아무리 봐도 저건 달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파편이 아니라 피어나는 겁니다.”

“그것도 이상해요. 저건 움직일 수 없어요. 저렇게 오므라들었다가 펼쳐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구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주 옛날부터 달은 저랬으니까요.”

“얼마나 옛날부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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