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대화가 뚝 끊어졌다. 가람은 하스펠에게 달이 어떤 것인지 설명을 해야 할까 하는 고민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이곳의 달은 가람이 아는 달과는 다른 상식으로 움직이고 있을 수도 있었다.
가람은 결국 설명하는 대신 핫도그를 한 입 더 베어 먹는 것을 선택했다.
차원 이동은 기본적으로 가람이 생각하는 세상으로 그녀를 이끈다.
가람의 첫 차원 이동이 용과 마법, 중세의 분위기가 물씬 나는 세계가 된 것은 그녀가 차원 이동 전에 읽었던 책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가람은 그 세계를 떠올리며 비슷한 곳으로 가기를 원했고, 문은 그 소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그 생각이 구체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고,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가람의 의식이 미치지 못하는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작위였다. 이번의 피어나는 달처럼.
그러니 세상이 재미있는 것이다. 가람은 그런 세상을 돌아보는 것을 즐겼다.
종종 새로운 세계를 둘러보는 것 자체가 지겨워지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패스를 찾으러 돌아다닐 때의 의욕적인 상태에서는 그런 상황에 빠지지 않았다.
마법을 써서 찾으러 다니면 훨씬 빨리 패스를 찾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굳이 두 발을 이용하는 것은 그런 즐거운 상태를 오래 유지하고 싶은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향수였다. 예전의 자신, 권태롭지 않았던 시절, 그리운 그때를 추억할 수 있고 아주 잠깐이나마 그때의 자신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영원의 고독도, 그 무게도 몰랐던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한때, 패스만 찾아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이동하는 능력으로 충전되기가 무섭게 패스를 찾아 나서 손에 넣고, 다시 충전되기만을 기다리는 것을 반복하던 나날.
건조하고 메마른 시간이었다. 패스를 가리키는 바늘이 사슬처럼 가람을 휘감고 오직 패스를 찾는 기계처럼 살도록 만들었다. 모든 것은 패스를 갈구하는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가람은 많은 패스와 많은 능력을 얻었고, 동시에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삶을 살던 인간인지를 잃었다.
불가능도 사라졌다. 그 외에도 아주 많은 것을 잊었다. 불가능이나 절망 앞에서 서로를 배려하는 선량함 같은, 그런 아름다운 것들을 아주 오랫동안 잊었었다. 그렇게 망가지던 시절이 있었다.
“로투는 델리움 사람들이 오랫동안 섬겨 온 신입니다.”
하스펠의 조용한 말이 가람이 상념에서 깨어나게 만들었다.
“로투요?”
“저 달의 이름입니다. 야탈카 사람들도, 델리움 사람들도 모두 로투라고 부르죠. 아주 옛날부터 그런 이름이었습니다.”
타오르는 모닥불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하스펠이 묵묵히 말을 이어 갔다.
가람은 잠시 하스펠의 얼굴을 바라보고 모닥불이 장작을 검게 베어 먹는 것을 응시하다가 문득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하스펠도 델리움 출신이라고 했었죠.”
“예. 델리움 출신입니다.”
“음, 그 로투라는 거 야탈카 사람들은 섬기지 않나 봐요.”
“믿긴 합니다만, 섬기지는 않습니다. 전에 말씀드렸던 전쟁 기억하십니까? 리베르튼 연합국이 생기게 된 계기 말입니다.”
“아, 네. 기억나요. 야탈카와 델리움의 오랜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완충 지대를 만든 게 리베르튼 연합국이라고 했죠.”
“하지만 왜 그렇게 오랜 전쟁을 했는지는 말씀드리지 않았죠.”
“네. 그렇죠.”
하스펠은 긴장한 얼굴로 심호흡을 했다. 얼굴이 잠시 갈등에 물들었다. 고민하던 그는 확신 없는 표정으로 다시 설명하기 시작했다.
“델리움에서 로투는 특별합니다. 만물을 바라보며 징벌하는 가혹한 주시자이자 절대자. 양 떼를 지키는 개와 같이 모든 율법의 수호자입니다.
델리움의 백성은 모두 로투를 믿고 그 교리를 따릅니다. 커다란 북쪽 땅의 모든 사람들이 교황의 말에 복종하고 그의 말을 법으로 살아갑니다. 원래 델리움은 그렇게 커다란 제국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로투를 섬기는 성도인 델리움만이 있을 뿐이었지요. 하지만 주변의 국가들이 로투를 섬기기 시작하면서 하나의 제국으로 탄생한 것입니다.”
가람은 굳이 하스펠에게 로투를 믿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그도 델리움 출신이니 믿겠거니 하고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하스펠은 맥주로 목을 축이고 곧바로 말을 이어 갔다.
“반면 야탈카는 로투를 섬기지 않습니다. 야탈카의 백성들은 기본적으로 스스로를 믿고, 자연 전체를 숭배하면서 전사의 힘을 사랑하지요.”
“그래서 델리움이 야탈카를 침략했군요. 이교도라고.”
“그렇습니다. 잘 아시는군요.”
하스펠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가람을 바라보았다.
“흔한 일이니까요.”
가람은 맥주 캔을 흔들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하스펠의 얼굴이 약간 어두워졌으나 찰나였기에 가람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나저나 꽤 신기하네요. 교권이 그렇게나 강력하다니. 사실 강력한 교권은 그만한 능력에서 나오기 마련인데. 교황이 꽤 신령한가 봐요?”
“교황은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다만 계시를 받을 뿐입니다. 교황은 할라트를 받아야 할 자를 찾아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할라트?”
“예.”
“전에도 한 번 들었던 것 같은데, 그게 대체 뭐예요?”
하스펠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가람은 대답을 재촉하는 대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하얗게 빛나는 달이 어느새 만개해 빛을 뿌리고 있다.
저 달을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니, 어쩐지 현실감이 없었지만 원래 종교라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니던가.
어쨌거나 대륙 북쪽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종교를 믿는다니, 확실히 무언가 있긴 한 모양이다.
“할라트는 로투가 내리는 징벌의 이름입니다.”
한참 동안 고민하던 하스펠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달은 그냥 달일 뿐이다.
아무리 섬김을 받는다곤 하나 달이 징벌을 내린다는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없었던 가람이 의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저 달이 정말로 징벌을 내린다는 말은 아닐 것 같은데.”
“아니요. 내립니다. 할라트를 받은 악인은 그대로 갈기갈기 찢어져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허공에서 그대로 찢겨 죽지요.
악인의 최후에 어울리는 죽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투는 심지어 인간이 절대 알아낼 수 없는 비밀스러운 악까지 찾아서 심판하지요.
아주 많은 사람들을 괴롭혔던 잔인한 왕이나 살인마 등, 로투가 찾아내지 못한 악인은 없었습니다. 아무리 위선으로 겉을 포장해도 로투는 결국 심판합니다.”
하스펠이 가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언했다.
“꼭 직접 보기라도 한 것 같은 말이네요.”
가람의 말에 하스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고 남은 맥주를 모두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밤이 깊었다. 하스펠은 자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대화는 여기까지 하고, 그만 자죠.”
하스펠은 말없이 이불의 깃털에 몸을 묻었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눈으로 로투를 바라보다가 힘겹게 잠을 청했다.
* * *
노숙이라는 것은 결코 늦잠을 자기에 좋은 환경이 못 된다.
차가운 흙바닥과 머리카락을 축축하게 적시는 이슬, 그리고 귀청을 울리는 달갑지 않은 새소리가 거칠게 수마를 쫓아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에게 오리가 있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가람은 쿠션의 포근한 날개깃에 감싸여 한참 동안 꿈지럭거렸다. 숨 쉴 때마다 여린 속 깃털이 팔랑팔랑 뺨을 간질이고 따듯한 체온이 닿아 온다. 옅게 들려오는 심장 소리는 수면제가 따로 없을 정도다.
어지간해서는 잠을 자지 않아도 상관없는 가람이었지만 아침마다 이런 행복을 포기하는 것은 정말로 손해 보는 기분이라 그녀는 오리가 생긴 후 꼬박꼬박 잠을 청하고 있었다.
덕분에 가람이 마을을 향해 출발한 것은 정오가 가까워지는 시간이었다.
평소 동이 터 오는 푸른 아침에 길을 떠나던 그녀를 생각해 보면 정말로 늦은 시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저와 함께 다닐 거예요?”
가람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하스펠의 표정이 굳어졌다.
“제가 따르는 것이 싫으시다면…….”
가람은 고개를 저었다. 싫은 것은 아니었다. 하스펠이 없었다면 어제의 그 호수도 홀로 감상해야 했을 것이다.
잠깐이나마 쓸쓸함을 느끼지 않게 해 준 것에 대해 오히려 감사할 지경이다. 하지만 동시에 가람은 하스펠과 자신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을 걱정했다.
그가 있는 것을 편안하게 여기게 되고, 그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될수록 다시 혼자가 되었을 때 그만큼 더 괴로울 것이다.
그 괴로움은 오로지 가람이 홀로 감당해야 하는 것이고, 처음 있는 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고통스럽지 않은 일도 아니다.
그러나 스스로 그를 밀어내고 적극적으로 혼자가 되는 것 또한 괴로운 일이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가람은 미련을 가지게 될 것이 분명했다.
가장 좋은 것은 하스펠 또한 모든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자신의 삶을 찾아 가람을 떠나는 것이다. 그러면 쓸쓸함은 남을지언정 미련은 없을 테니까.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당신이 얼마나 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여러모로 자신의 삶을 준비해야 하지 않나 싶어서요. 아마도 당신은 곧 나이를 먹고, 늙고, 죽겠죠.”
“그렇게 빨리 죽지는 않습니다.”
하스펠이 어이없는 얼굴로 가람을 바라보았다. 가람은 자신을 마치 하루살이라도 되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문득 치미는 의구심을 참지 못했다.
“마치 본인은 나이를 먹지 않는 것처럼 말하는군요.”
“그럴 리가요. 저도 나이를 먹는걸요.”
“그러고 보니, 제 나이는 말했지만 당신 나이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스물다섯이에요. 아니, 이제 스물여섯인가?”
영원히 다시 시작하는 스물다섯.
나이 먹고, 늙고, 죽지만 가람은 늘 다시 스물다섯, 모든 것이 멈춘 그 베이스캠프에서 눈을 뜬다.
가람은 다시 눈 뜬 그때를 기준으로 자신의 나이를 세었다. 그런 이유로 가람은 자신의 나이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천 살은 살았을 것이라는 거다. 중간에 생을 그만둔 것을 빼고 제대로 늙어 죽은 것만 열 번은 넘었으니.
“저와 비슷하군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떨떠름하게 대답하는 하스펠에게 가람은 그저 어깨만 으쓱여 보였다. 어쨌거나 육체의 나이가 스물여섯인 것은 사실이었으니.
“뭐, 그렇죠. 언제까지 저와 다닐 건가요? 대답을 아직 듣지 못했는데.”
“아직은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알겠어요. 편하신 대로 하세요.”
그것으로 대화는 끝이었다.
가람이 능숙하게 쿠션을 몰아 앞서 나가자 하스펠이 멍하니 그 등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따라붙었다. 어제와 달리 이불이 반항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어젯밤, 서로 무언가를 나누었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가람은 여전히 매몰차게 자신을 밀어내고 있었다.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면 어김없이 떠날 것을 이야기하는 가람 덕분에 하스펠의 마음에 찬바람이 불었다.
침묵 속에서 묵묵히 걸은 결과 가람과 하스펠은 정오가 좀 지날 무렵 마을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작은 마을이었다.
아담한 성벽 너머로 굴뚝과 단정한 지붕들이 보였다. 돌과 나무를 쌓아 만든 집들이 약 200가구 정도 되어 보였다.
입구에는 자경단으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이 서 있었는데, 가람이 다가서자 제법 훈련된 움직임으로 창을 교차해 막아섰다.
“낯선 얼굴이군.”
수염도 나지 않은 새파란 애송이가 짐짓 거만하게 말했다. 가람보다 두어 살은 어려 보인다.
그 옆에 있던 남자는 그래도 좀 나았다. 그는 하스펠이 차고 있는 검을 주의 깊게 살피며 애송이보다 약간 정중한 태도로 추궁했다.
“어디에서 오는 길이오?”
“존 라드에서 오는 길입니다.”
하스펠이 나직하게 대답했다.
“아샤에는 무슨 일로 방문하는 거요?”
아샤라는 것은 마을의 이름인 모양이다. 호수의 안개에 감싸인 아름다운 도시에 꽤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하스펠이 머뭇거리며 대답하지 못하자 가람이 끼어들었다.
“식량이 떨어져서요. 그리고 여관에서 씻고 싶기도 하고.”
“여긴 여관 같은 것은 없소. 잔다면 민박을 이용해야 할 거요. 식량은 우물가 근처에서 살 수 있소.”
한층 누그러진 태도로 보초가 대답했다. 퉁명스럽긴 해도 은근히 친절한 대답이었다.
가람의 대답에 수상한 구석이 없었던 모양인지 그가 창날을 치워 지나갈 수 있게 해 주었다.
마침내 마을 안으로 들어선 가람은 텅 비어 있는 길거리를 발견했다.
시간이 시간이니 집에 있기보다 밭이나 일터로 간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덕분에 가람은 비교적 수월하게 마을을 둘러볼 수 있었다.
“이쪽이에요.”
가람은 쿠션에서 내려 손등을 바라보며 걷기 시작했다. 바늘의 길이로 보아 패스는 바로 근처에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람은 바늘의 끝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자경단이 말한 우물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