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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파인더-221화 (221/256)

22화

우물가에는 우물을 중심으로 고기와 야채 따위를 파는 가판대가 둥그렇게 늘어서 있었다.

마을의 규모가 규모인지라 제대로 된 시장은 없고, 이런 식으로 가판대를 모아 놓고 물건을 사고파는 모양이었다.

우물가에는 가판대 외에도 빨래를 하거나 야채를 다듬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겸사겸사 근처의 가판대에서 장을 보는 것 같았다.

오리를 이끌고 가람이 우물가로 다가가자 빨래하던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져 왔다.

아무래도 갑자기 커다란 오리 두 마리를 이끌고 나타난 이방인이라는 것은 좋은 이야깃거리였다.

그들이 자신의 오리와 옷차림, 그리고 정체를 유추하며 수군거릴 동안 가람은 우물가를 둘러보며 패스를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패스는 보이지 않았다. 가판대마다 돌아다니며 뒤져 보고 사방을 어슬렁거려도 패스의 끝자락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결국 남은 것은 한 곳뿐이다. 가람은 우물가로 다가서려고 했다.

“이봐, 멈춰. 외지인은 우물에 가까이 가면 안 돼.”

근처에 앉아 빨래를 두드리던 여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가람을 막아섰다. 나머지는 경계 반, 흥미진진함 반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람의 편을 들까 하던 하스펠은 그녀가 짧게 눈짓하는 것을 보고 오리의 고삐를 잡은 채 묵묵히 기다렸다.

“그냥 물을 좀 마시려고 했을 뿐이에요. 안 될까요?”

가람이 점잖게 요청하자 여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콧등에 가득 내려앉은 주근깨가 여자의 표정에 따라 이지러진다.

“물은 내가 떠 줄 테니 우물에서 떨어져.”

여자는 두레박을 아래로 늘어뜨려 넘칠 만큼의 물을 퍼 올렸다. 가람은 어색하게 두레박을 건네어 받아 물을 마시며 슬쩍 아래를 들여다보았다.

새카만 우물 안, 찬란하게 반짝이는 무언가가 확실하게 보인다. 패스였다.

“다 마셨으면 가 봐.”

여자가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패스를 바로 앞에 두고 발길이 떨어질 리가 없었다.

가람이 우물쭈물 망설이자 사납게 다가선 여자가 힘줘서 가람을 밀었다. 꼴사납게 넘어지진 않았지만, 가람은 비틀거리며 밀려났다.

“헬렌, 너무 심한 것 아니야?”

보다 못한 누군가가 슬쩍 입을 열었다. 옅은 갈색 머리를 두건으로 말아 올린 심약해 보이는 인상의 여자였다.

“심하긴 뭐가. 이방인들은 조심해야 한다고. 세상에 이상한 놈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우물에 독이라도 풀면 어쩌려고 그래?”

“하지만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

헬렌이 딱 잘라 말하자 심약한 인상의 여자는 더 말하지 못하고 가람을 흘끔거리다가 묵묵히 빨래만 두드렸다.

가슴을 떠밀린 순간 울컥 화가 치밀었던 가람이지만 헬렌의 말을 듣자 순식간에 화가 가라앉았다.

뭐, 틀린 말도 아니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 하지만 무턱대고 공격적인 태도는 화를 부르는 법이다. 그러나 그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자신일 필요는 없었다.

어쨌거나 주변에서 보는 시선도 많고, 모습을 감추고 안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빨래하고 물을 퍼 가는 사람들이 수시로 두레박을 사용하니 여의치가 않다.

패스가 어디로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급할 것도 없으니 가람은 일단 밤이 되기를 기다려 패스를 찾기로 결정했다.

“어서 가라고.”

“알았어요. 갈게요.”

가람이 순순히 우물에서 물러서자 여자의 표정이 약간 머쓱해졌다. 하지만 금세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돌아가 빨래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가람은 우물을 뒤로하고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막 늘어선 가판대를 지나려던 참에 가판대의 주인 하나가 불쑥 말을 걸었다.

“여어, 헬렌에게 한 소리 들었군. 너무 마음 상해하진 말라고. 나쁜 사람은 아니야.”

하얀 턱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남자가 가벼운 어조로 위로했다. 코끝이 붉어서 그런지 어딘가 산타클로스 같은 인상의 남자였다.

그는 고깃덩이가 주렁주렁 매달린 가판대에 서 있었는데, 푸줏간 주인인 모양이었다.

“뭐 그럴 수도 있죠.”

가람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남자가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었다.

“성격 좋은 아가씨군. 여행자면 식량을 사려고 하나 본데, 좋은 절인 고기가 있어. 좀 줄까? 사슴 고기인데, 딱 맛있을 때야.”

“좋아요.”

가람의 흔쾌한 말에 남자가 신이 나서 도마 위에 커다란 고깃덩이를 올려놓았다.

재빠른 몸놀림으로 보아, 가람이 오리를 끌고 우물가에 나타났을 때부터 준비했던 것이 분명했다.

“얼마나 줄까?”

“이거 절반 정도요.”

“좋아, 원래 15만 슬링인데, 마지막 손님 같으니 14만 슬링만 받을게.”

가람은 고개를 끄덕이고 남자가 고깃덩이를 커다란 나뭇잎으로 꽁꽁 싸매는 동안 14만 슬링을 꺼내 가판대 위에 내려놓았다.

“혹시 주변에 묵을 만한 곳이 있을까요?”

가람의 질문에 남자는 고기를 싸던 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음, 이 마을에 딱히 여관은 없는데. 딱히 민박을 하지도 않고. 어쩌면 선술집에 빈방이 있을지도 모르지. 자, 고기 다 됐다. 한 달은 썩지 않을 거야.”

가람은 남자가 건네는 고기를 받아 다시 하스펠에게 건네었다. 그가 고기를 가방에 집어넣는 동안, 가람은 선술집의 위치를 자세히 물어보았다.

“저쪽, 야채 파는 로리 씨 가판대 옆에 골목 보여?”

남자가 가리킨 것은 양배추와 감자 따위가 가득 쌓인 가판대 옆 골목이었다. 가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여요.”

“저 옆 골목 안으로 쭉 들어가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다섯 번째에 보이는 집이야. 간판에 ‘인생의 호미 선술집’이라고 적혀 있지. 가다가 모르겠으면 다른 사람한테 한번 물어보던가, 아니면 다시 와서 물어봐.”

가람이 고기를 사 주었기 때문인지 남자는 아주 친절하게 굴었다. 가람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가 알려 준 골목으로 향했다. 그리고 골목으로 들어서자 하스펠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보호가 필요해 보입니다.”

뜬금없는 말에 가람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하스펠은 진지했다.

오리에서 굴러떨어지는 가람을 받아 내었을 때도 느꼈던 거지만 이번 우물가의 일로 그는 확신했다.

가람이 가진 치유력이 기적과도 같은 수준일지라도 그녀가 가진 전투력은 아주 미약했다.

내버려 두면 그 기적 같은 힘이 불한당들의 손에 스러질지도 모른다. 가람에게는 보호가 필요했다. 자신과 같은 기사가 말이다.

“보호요?”

지금부터 시작한다고 해도 노을이 지나기 전에 이 행성에서 숨 쉬는 생물을 모두 제거할 수 있는 가람을 상대로 하스펠은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약 지금 이 순간 가람이 하스펠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았다면 폭소를 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가람에게는 동행자의 머릿속을 스토킹하는 취미가 없었다.

“당신은 그런 취급을 받을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취급? 아아, 무슨 말인지 알겠다. 방금 우물가에서 떠밀린 것 때문에 그런 거예요?”

“예.”

잠시 생각하던 가람은 나름대로 납득했다. 아마도 생명의 은인인 자신이 그런 취급을 당한 것이 기분 나쁜 모양이다.

자신을 생각해서 그런 말을 했으리라. 기분이 썩 흐뭇했다.

“걱정해 준 건 고맙지만 괜찮아요. 제 문제는 제가 해결할 수 있어요. 그리고 하스펠이 저를 보호한다고 나서도 그 상황에서 뭘 할 수 있었겠어요? 주민을 때려 주기라도 하려구요?”

가람이 웃음기를 담아 농담을 던졌다. 하스펠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그저 침묵했다. 그리고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확실히 가람은 검을 휘두르거나 사람을 위협하는 강력한 무력은 없지만 말 한마디로 칼라일의 기사들을 떠나게 만드는 능력이 있긴 했다.

그렇다면 자신은 가람이 보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가람을 보호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정확히는 가람이 자신을 필요하다고 여겨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고 하스펠은 조금 당황했다.

언제든지 떠나 버리라고 말하는 사람이 자신을 필요로 해 주었으면 하다니.

별로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스펠은 자신이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만두려면 그녀를 당장 떠나는 방법밖에 없는데, 그거야말로 하스펠이 가장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뭐 더 할 말 있어요?”

“아닙니다.”

복잡한 심경을 감추며 하스펠이 조용히 대답했다.

“싱겁긴. 저기 저게 선술집인가 봐요. 가 보죠.”

가볍게 웃은 가람은 길 끝에 보이는 건물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인생의 호미 선술집은 조금 낡은 단층 목조 건물이었다. 오리들 때문에 하스펠은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손님이 거의 없었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입구에서 나른하게 앉아 있던 주인이 시큰둥하게 반겨 주었다.

“어서 오쇼. 술 마시게?”

대충 자른 더벅머리에 늘어진 주름이 불독 같은 인상의 중년 남자였다. 반개한 눈을 끔뻑거리는 것이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묵을 방이 있나 해서요.”

술집 안을 둘러보며 가람이 말했다. 여관과 선술집을 겸하는 경우 1층에서는 술을 팔고 2층을 여관으로 내어주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 선술집은 한눈에 보기에도 여관으로 제공할 만한 공간이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여긴 여관이 아니야. 술주정뱅이를 위한 방이 있긴 하지만 오래 머물긴 힘들걸?”

퉁명스럽게 말한 주인은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다랗고 무거운 엉덩이가 사라지자 그가 앉아 있던 의자가 삐꺽이는 한숨을 쉬었다.

“따라와. 방은 안쪽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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