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223화 (223/256)

24화

“대충 그런 게 있다고 듣긴 했지만…….”

“리베르튼에는 여관이 딱 하나밖에 없어요. 끝없는 여관. 리베르튼의 명물이라우. 저쪽 뒤에 보면 분수대가 보이지요? 저게 광장 분수대인데, 앞에 가면 지키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에게 돈을 주고 들어가면 되지요.”

가람이 고구마를 잔뜩 팔아 주었기 때문인지 상인은 제법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 주었다.

다른 곳에 비해 꽤 공간이 널찍하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이 광장이었던 모양이다.

새삼스럽게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니 중앙에 거대한 분수대를 중심으로 둥그렇고 널찍하게 가판대가 늘어서 있었다. 가판대 주변은 사람들이 붐볐지만, 그렇지 않은 곳은 비교적 한산한 편이었다.

“감사합니다.”

위치를 확인한 가람이 감사 인사를 건네자 고구마 가판대의 상인이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손사래 쳤다.

“뭘, 별말씀을 다. 많이 팔아 줘서 고마워요. 그럼 또 오시우!”

쿠션과 이불이 고구마 서른 개를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기 때문에 가람은 딱히 기다릴 필요 없이 바로 분수대로 향할 수 있었다.

그 뒤로 머리와 어깨가 축축해진 하스펠이 떨떠름한 얼굴로 이불을 끌고 따라붙었다.

가판대의 상인이 말한 대로 분수대 앞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문지기로 보이는 사람이 떡하니 서 있었다.

바로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끝없는 여관’이라고 적힌 거대한 나무 팻말을 들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팻말에는 친절하게도 금액까지 쓰여 있었다. 1만 슬링. 안에 들어가서 숙박료를 또 내야 할 것이 분명했으므로 입장료는 꽤 비싼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자들은 여관에 묵을 수밖에 없다. 싫으면 노숙을 하는 수밖에 없으니까.

2인의 입장료를 치른 두 사람은 문지기가 열어 준 계단 안으로 들어섰다.

횃불이 걸려 있긴 했지만 안쪽을 다 밝히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어두컴컴한 통로를 내려가는 내내 실바람이 가늘게 울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횃불이 점점 줄어들고 어두워졌는데, 쿰쿰한 이끼 냄새와 마른 돌 냄새를 맡으며 눈이 어둠에 적응할 무렵이 되자 정말 이 안에 여관이 있는 것일까 슬그머니 의구심이 솟았다.

그리고 그 생각을 읽은 듯 어느 순간 램프를 든 안내인이 계단 끝에서 나타났다.

그는 가람 일행이 가까워지자 손을 뻗어 옆에 쳐진 두꺼운 가죽 커튼을 젖혀 보였다. 커튼 뒤는 매우 밝은 공간이었다.

덕분에 통로 안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와 모두는 눈을 찌푸리며 갑자기 밝아진 시야에 적응해야 했다.

마침내 그 빛 속의 풍경을 발견하게 된 두 명과 두 마리는 방금 얼굴을 찌푸렸던 것을 새카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감탄했다.

그곳은 끝없이 펼쳐진 축제의 협곡이었다. 뻥 뚫린 공동이었던 존 라드의 투계장과 달리 협곡 형태의 동굴이 높고 구불구불하게 펼쳐져 있었는데 그야말로 끝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여기저기에 산만하게 걸린 램프와 횃불 행렬 또한 끝이 없어 동굴을 낮처럼 밝게 비추고 있었다.

가장 압권인 것은 그 동굴 벽이 모조리 세공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길을 따라 펼쳐진 차양들도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각양각색의 주제로 수를 놓은 화려한 천들이 널찍널찍하게 펼쳐져 그늘을 드리운다. 그리고 그 아래를 지나는 이들을 호객하는 사람과, 구경하는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대단하군요.”

하스펠이 멍하니 감탄했다. 벽과 길거리에 넘쳐 나는 다양한 사람들로 눈이 돌아갈 지경이다.

교역상, 전사, 상인, 광대, 술꾼, 도박꾼, 거지, 무희, 빵 장수 등 잘 차려입은 사람과 헐벗고 더러운 사람들이 마구 섞여 휘몰아친다.

넋을 놓고 있다가는 순식간에 휩쓸릴 것만 같은 풍경이었다.

“이봐요, 좀 비켜 줘요.”

다채로운 풍경을 구경하는 가람과 하스펠의 뒤쪽에서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차 해서 돌아보니 두건 같은 것으로 얼굴을 돌돌 감싸고 눈만 빠끔히 내어 놓은 남자가 짜증스러운 눈매로 가람을 노려보았다.

“지나다니는 길을 그렇게 막고 서 있으면 어떡합니까?”

남자의 일행으로 보이는 또 다른 남자가 점잖게 힐난하자 가람은 그제야 쿠션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눈앞의 놀라운 풍경에 정신을 빼앗긴 나머지 본의 아니게 끝없는 여관의 입구를 막고 있었던 것이다.

쿠션과 이불의 커다란 몸통 때문에 그렇게 막고 있으면 아무도 지나갈 수 없었다.

“미안해요.”

가람이 담담히 사과하자 얼굴을 감싼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끝없는 여관에는 처음 온 건가요?”

“아, 네. 대단한 광경이라서 잠깐 넋을 놓고 말았네요.”

“끝없는 여관을 처음 본 사람들은 보통 그렇게들 놀라죠. 여기 계속 서 있으면 별로 좋지 않을 겁니다. 안으로 들어가서 적당한 여관을 찾아 들어가세요. 서두르지 않으면 아주 깊이 들어가야 방을 구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을 마친 그는 그럼, 하고 성큼성큼 걸어 인파에 스며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모습은 완전히 찾을 수 없게 되었는데, 그래도 함께 있던 키 큰 남자의 머리꼭지가 드문드문 보이더니 곧 그마저도 사라졌다.

“일단 우리도 들어가 보죠.”

고삐를 여러 번 손에 감고 단단히 거머쥔 가람의 말에 하스펠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섰다. 길을 뚫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덕분에 가람은 비교적 쉽게 이동하며 주변을 관찰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차양은 그 하나하나가 여관의 간판이나 다름없었다. 차양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간간이 호객을 하며 여행객을 잡아끄는 것이 보였는데, 아까 들은 말대로 입구 근처의 여관은 투숙객이 많은 모양인지 상대적으로 호객이 덜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가람은 물속에 빠진 고깃덩이가 된 기분을 느꼈다.

길 양옆에 놓인 천막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온 호객꾼들이 물고기가 고깃덩이를 뜯어 가듯 가람의 옷자락을 잡아채고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우리 여관은 방이 아주 많아. 지하에 있는 치즈 창고도 대단하다고. 아가씨, 아가씨!”

한 명의 호객꾼이 옆에 따라붙어 떠들다가 가람이 반응이 없자 포기하고 다음 사람에게 달라붙었다.

홀가분함도 잠시, 곧 다른 호객꾼이 가람의 손을 잡아끌었다. 세게 뿌리치지 않았으면 그대로 끌려갔을지도 모를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우리 여관은 음식이 아주 끝내줘. 어, 이봐, 가는 거야?”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도 벌써 질리는 기분이다. 하스펠도 가람과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은 결국 적당히 중간에 멈춰 서서 차양 아래로 들어섰다. 침구를 깨끗하게 빨아 두었다는 말로 유혹하던 호객꾼의 차양이었다.

이 호객꾼을 선택한 이유는 별것 없었다. 그가 존대로 호객을 한 첫 번째 호객꾼이었기 때문이다. 어디든 예의는 중요하다.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요. 하루치 숙박비는 선불입니다. 오리까지 같이 쉴 수 있는 커다란 방을 15만 슬링에 제공해 드리지요.”

웃는 얼굴이 간사한 인상의 남자였다. 확실히 저렴하긴 하다. 존 라드에서 가람이 묵었던 여관은 하루에 100만 슬링이었으니까.

대도시일수록 물가가 비싸고, 리베르튼이 존 라드보다 더욱 큰 도시인 점을 감안하면 정말로 싼 것이었다.

가람이 15만 슬링을 꺼내어 건네자 그가 민첩한 손놀림으로 금액을 확인했다.

“15만 슬링. 딱 맞습니다. 내일 아침에 방을 청소하러 갈 테니 하루 더 묵으실 거면 그때 돈을 더 주시고, 아니면 나가시면 됩니다. 자자. 이쪽으로 오시지요. 방을 보여 드리죠.”

남자는 커다란 가죽이 드리워진 곳으로 가람과 하스펠을 안내했다. 두툼한 가죽을 힘줘서 밀치자 커다란 구멍이 나타났다.

장소의 특성상 경첩을 박아 제대로 된 문을 만들기 힘드니 그냥 가죽을 걸어 문을 대신하는 모양이었다.

사람에게는 충분한 크기의 문이었지만 3미터 높이의 오리가 들락거리기에는 좀 조심할 필요가 있는 크기라서 가람은 쿠션의 머리가 부딪히지 않도록 조심조심 구멍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의외로 제법 널찍한 장소가 나타났다.

여관의 중앙에는 커다란 화로가 놓여 있었는데, 지하라는 특성상 굴뚝을 만들기 힘드니 벽난로를 대체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였다.

어른 하나가 누워도 될 만큼 널찍한 화로 위에는 놀랍게도 커다란 사슴 하나가 통째로 올라가 구워지고 있는 중이었다.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적당히 익은 부분을 잘라다가 소금과 야채를 곁들여서 판매하는 모양이었다.

조금 특이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자나 테이블 없이 그냥 바닥에 대충 앉거나 벽에 기댄 상태로 술과 음식을 먹고 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간간이 자신이 가져온 음식을 화로에 구워 먹는 사람도 있었다. 보통 여관에 비해 비교적 자유로운 모습이다.

음식을 우물거리며 무료하게 앉아 있던 몇몇이 가람과 하스펠에게 시선을 던졌으나 곧 지친 얼굴로 화로의 온기를 쬐는 데 집중했다. 나머지는 저들끼리 떠드느라 정신이 없다.

짧게 그들을 바라보던 가람은 호객꾼이 어느새 저만치 멀어졌음을 깨닫고 걸음을 서둘렀다.

“이쪽입니다. 이쪽.”

손을 까딱여 가람을 재촉하던 호객꾼은 바로 옆에 있는 구멍으로 쑥 들어갔다.

입구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뚫린 커다란 구멍이었다. 따라 들어가기 전, 가람은 문득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횃불이 잔뜩 걸린 벽에는 존 라드에서 봤던 것과 똑같은 구멍들이 빼곡했다.

위쪽의 구멍에서 상체만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람들도 드문드문 보인다.

구멍마다 음영이 져서 새카만 것이 어쩐지 묘한 기분이었다. 마치 돌로 된 검은 치즈 안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다.

“여기 이 방입니다.”

호객꾼이 안내한 방은 제법 깊숙한 곳에 있는 방이었다. 그가 말한 대로 오리 두 마리와 사람 두 명 정도는 충분히 누워 잘 수 있을 만큼 널찍했다.

바닥에는 지푸라기와 깃털을 넣은 두터운 침구가 두 장 깔려 있었는데, 듬성듬성 짚이 튀어나와 있긴 했지만 그래도 깨끗해 보였다. 아샤의 토사물 냄새가 나던 모포보다는 훨씬 좋다.

한 가지 의외의 사실은 창문도 없는 어두운 굴인데도 별로 답답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제대로 된 문도 없이 그저 뚫린 구멍에 가죽 한 장이 걸려 있는 출입구가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어른거리는 램프의 노란 불빛 덕분인지 기대 이상으로 아늑했다.

벽에 걸린 커다랗고 화려한 태피스트리 때문인지 고급스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직접 나와서 밖에 있는 직원한테 말하시면 됩니다.”

사무적인 태도로 말을 마친 호객꾼이 대충 허리를 숙여 보이곤 물러났다.

가람은 그가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발아래에 깔린 침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벽 쪽에 뻘쭘하게 서 있던 하스펠이 흠칫 놀라 다가왔다.

“어디 아프십니까?”

“네? 아니요.”

가람은 어리둥절해져서 걱정 어린 얼굴의 하스펠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곧 자신이 착각했음을 깨닫고 제 몫의 이부자리에 엉거주춤 자리를 잡으며 말했다.

“갑자기 쓰러지듯 앉으시기에 어디 아프신 건가 했습니다.”

“아. 설마요. 그냥 앉은 거예요.”

“다행이군요.”

가람은 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골목에서 그가 보호 운운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와 조금 비슷한 느낌이다.

어쩐지 낯간지러운 기분에 괜히 뺨을 긁적이는데 두 마리 오리는 어색한 분위기도 아랑곳없이 주변을 탐색하듯 돌아다니다가 입구 근처에 보초라도 서듯 자리를 잡고 앉았다.

멀리서 주정뱅이들이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와 굴을 타고 울려오는 공허한 소음이 적막을 밀어 내었다.

잠을 못 잘 수준은 아니다. 오히려 적당한 소음은 수면에 도움이 되는 법이다.

가람은 부츠를 벗어 가지런히 놓아두고 허리를 죄는 조끼 형태의 가죽 갑옷도 풀어낸 뒤 가벼운 셔츠와 바지만 입은 차림으로 길게 드러누웠다.

자신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는 가람의 태도에 하스펠은 몹시 당황했으나 가까스로 내색하지 않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신을 벗고 자리에 누웠다.

가람은 그가 누운 것을 확인하고 가볍게 손을 휘저어 방 안의 촛불을 모조리 꺼 버렸다. 그러자 금세 새카만 어둠이 찾아왔다.

아늑하고 조용하고 적당한 소음에 완벽한 어둠.

숙면을 취하기에 이보다 좋은 조건은 없을 것이다. 늘어진 몸에 잠기운이 몰려오는 것을 느끼며 가람이 중얼거리듯 인사했다.

“잘 자요.”

* * *

사각사각 무언가를 파헤치는 소리. 긴장에 억눌린 불규칙한 숨소리. 살금살금 발을 땅에 디딜 때 나는 특유의 가벼운 소리들.

가람은 잠에 빠진 상태로 그 기척들을 듣고 있었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기척들이 잠기운을 조금씩 갉아 없애고 있다.

의식이 점점 또렷해지는 것을 느끼며 가람은 잠을 계속 잘지, 아니면 정신을 차릴지 갈등했다.

그러나 선명한 쇳소리가 갈등을 박살 내고 의식을 강제로 끌어내었다. 가람은 눈을 번쩍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기운은 씻은 듯이 사라진 상태였다.

어둠 속에서 대치하고 있는 두 명의 인영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중 하나는 가람보다 먼저 눈뜬 하스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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