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그는 성실하게도 수상한 기척을 느끼자마자 잠기운을 몰아내고 검을 뽑아 들었던 것이다. 가람이 들었던 쇳소리는 그의 검과 침입자의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였다.
“누구냐.”
하스펠이 잠에서 막 깬 특유의 거친 목소리로 말하는 순간, 방 안이 확 밝아졌다. 가람이 마법으로 초에 불을 붙인 것이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크게 당황한 침입자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도망쳤다. 그와 동시에 가람과 하스펠은 상황 파악을 끝냈다.
쿠션과 이불이 없었던 것이다. 한밤의 침입자는 도둑이었다.
도둑은 태피스트리로 가려져 있던 구멍으로 침입한 것 같았다. 가람은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는 태피스트리를 밟고 구멍 안으로 뛰어들었다.
도둑이 침입한 구멍은 그리 크지 않은 크기였다. 최근에 뚫은 것인지 표면이 거칠거칠하고 돌가루도 많다.
아마 여관 주인 몰래 벽 장식 뒤로 구멍을 뚫어 도둑질을 해 온 모양이다.
어쨌든 이 작은 구멍으로 오리를 데리고 빠져나갈 수 있었을 리가 없으니 공범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공범은 오리를 훔쳐 달아난 지 오래인 것으로 보이니 눈앞에 나타난 도둑을 잡아 취조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도둑은 대단히 날랜 동작으로 굴의 위로 솟기도 하고, 갑자기 옆으로 꺾기도 하면서 가람을 따돌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방향을 틀어 어딘가로 훌쩍 뛰어들었는데, 따라 들어서고 보니 투숙객이 묵고 있는 다른 여관의 방이었다.
가람과 도둑이 꽤나 소란스럽게 들이닥쳤기 때문에 자고 있던 투숙객이 깜짝 놀라 황급히 검을 빼 들고 가람을 겨누었다.
그리고 가람에게 이목이 집중된 순간, 도둑이 다른 구멍으로 훌쩍 몸을 날린다.
그것을 그냥 두고 볼 가람이 아니었다. 구멍 안으로 뛰어들던 도둑은 갑자기 석상이라도 된 듯 뻣뻣하게 굳더니 그 자세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가람이 마법을 쓴 것이다. 사실 처음부터 마법을 썼다면 뒤쫓을 필요도 없었는데 너무 열심히 잡힐 듯 말 듯 도망치니 약이 올라 생각도 못 하고 뒤쫓고 말았다.
“뭐 하는 놈들이지?”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날카롭게 외쳤다. 묘하게 귀에 익은 음성이었다. 뒤이어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가람은 오해를 바로잡을 필요성을 느끼고 촛불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동시에 뒤쫓아 온 하스펠이 안으로 들어섰다.
“당신들은…….”
갑자기 확 밝아진 실내에 움찔한 투숙객이 가람과 하스펠을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로 공교롭다고밖에 할 수 없는 우연이었다. 도둑을 쫓아 도착한 곳은 얼마 전 가람이 본의 아니게 앞을 막아서서 주의를 주었던 두 남자의 방인 것이다.
상황이야 어떻든 일단 구면이었기 때문에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는 것은 피할 수 있었으나 경계까지 허물어진 것은 아니었다.
키 큰 남자 하나는 여전히 칼을 겨누고 있었고, 다른 한쪽은 언제든지 뽑아 들 수 있도록 허리춤의 단검을 쥐고 있었으며, 도둑은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물론, 도둑의 행동은 경계라고 볼 수 없었지만 최대한 눈을 부릅뜸으로써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자신에게 겨누어진 검에 대해서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신경 쓰지 않고 있는 가람과 달리 하스펠은 그녀에게 무기가 들이밀어지는 것만으로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을 느꼈다.
거의 본능적으로 앞을 막아서고 검을 뽑으려는데, 가람이 그의 팔을 잡아 얼른 만류했다.
상황을 진정시켜야지 같이 검을 빼 들면 어쩌겠다는 건가. 어처구니없는 시선으로 하스펠을 바라본 가람이 한숨을 내쉬고 두 사람을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두 번째로 보네요. 저도 참 난처한데, 본의 아니게 침입을 한 거라서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남자 하나가 날카롭게 소리치자 하스펠이 사나운 시선을 던졌다. 흥분한 그를 진정시킨 것은 그의 일행인 키 큰 남자였다.
같은 검사로서, 하스펠이 진심으로 날뛰기 시작하면 자신이 감당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진정해. 모거스. 일단 이야기는 들어 봐야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작은 남자의 이름이 모거스인 모양이다. 아까와 달리 그는 지금은 맨얼굴이었다.
“언제부터 겁쟁이가 된 거야? 레커드. 자는 사람 방에 갑자기 뛰어들었다면 하나밖에 없지! 이 도둑놈들!”
“도둑질을 하려면 그렇게 시끄럽게 뛰어 들어왔을 리가 없어. 놀란 건 알겠는데, 좀 진정하라고.”
레커드라고 불린 남자가 차가운 어조로 일침 했다. 그 말에 희미하게 배어 있는 짜증에 모거스가 움찔하더니 얌전해졌다.
어느 정도 대화를 할 분위기가 조성되었다고 느낀 가람은 먼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도둑의 머리채를 잡고 그대로 질질 끌어다 방의 중앙에 던져 놓았다.
그 거침없는 손속에 모거스가 조금 질린 표정을 지었고, 레커드는 이채 어린 시선으로 가람을 바라보았다.
“자다가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일어났는데, 이 녀석이 있더군요. 그리고 오리가 사라진 상태였고요. 오리를 훔쳐 간 녀석은 이미 찾기 글렀고, 보이는 건 이 녀석뿐이라서 저희도 그냥 무작정 따라온 거예요. 뒤쫓다 보니 여기에 도착했고요.”
“이 녀석이 도둑이라고?”
모거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것에 비해 레커드의 얼굴은 심각해졌다. 그는 그대로 방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그제야 그 시선을 따라 덩달아 방을 살핀 모거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당했군.”
“어, 없잖아.”
그 말대로였다. 두 사람의 방에는 여행용품이나 짐이라고 할 만한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스치듯 보긴 했지만 입구에서 잠깐 마주쳤던 그들은 분명 각자 커다란 가방을 메고 있었는데, 이 방 안에 있는 것은 여관에서 제공한 것으로 보이는 모포가 전부였다. 이들도 털린 것이다.
“그나마 검을 차고 자고 있어서 다행이었군.”
레커드가 담담하게 말한 것에 비해 모거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얼굴로 레커드를 바라보다가 가람과 하스펠을 의식한 것이 역력한 태도로 억지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초조함을 억누르지 못하고 입술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나마 한패를 잡았으니 되찾을 수 있을 거다. 모거스, 진정해.”
얼굴을 바닥에 처박은 채 거친 숨을 내쉬고 있는 도둑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내려다본 레커드가 문득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왜 꼼짝도 못하고 있는 거지?”
“갑자기 허리라도 삐끗했나 보죠.”
이 세계에는 마법이 없다. 그것을 의식한 가람이 대충 대답하며 도둑에게 걸린 마법을 풀었다.
그러자 도둑이 다급하게 헐떡이며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눈알을 굴리는 얼굴이 꽤 볼만하다.
하지만 그가 도망칠 수 있는 가능성은 제로로 수렴되었다. 가람과 하스펠, 모거스, 레커드가 철옹성처럼 그를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끝없는 여관의 굴들을 돌아다니면서 도둑질을 하는 집단이 있다고. 거창하게 이름도 있던데. ‘검은 쥐 소굴’이라고 했던가?”
레커드가 낮은 목소리로 위협하듯 말했다. 도둑은 침을 꿀꺽 삼키며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가 곧 오기 어린 얼굴로 그의 눈을 마주 쏘아보았다.
“그래. 네 물건들은 포기하는 게 좋을걸? 우리는 오백이 넘는 숫자라고. 지금도 너희가 모르는 곳에서 이곳을 감시하고 있지. 살아서 나가고 싶으면 나를 풀어 주는 게 좋을 거야!”
말을 하면서 도둑은 점점 기세등등해졌다. 사실 이쯤에서 가람은 그냥 손을 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쿠션과 이불을 포기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비록 추적 마법을 걸어 두지는 않았지만, 도둑을 취조하는 귀찮은 짓을 하지 않고도 충분히 오리들을 되찾아 올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 정도도 할 수 없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것이리라.
잠에서 깨어난 직후에야 도망치니 얼떨결에 뒤쫓았고, 빠져나가려고 하니 마법을 걸어 붙잡았지만 슬슬 머리가 완전히 깨어나 냉정해지고 나니 솔직히 이 도둑이 그냥 떠나게 내버려 둬도 전혀 상관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뭐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손쉬운 것은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것이다.
존 라드에 갈 때와 이곳으로 올 때 공간 이동 용도로 사용했던 엘리베이터지만, 사실 엘리베이터는 가람이 찾고 싶은 사람이나 장소를 수월하게 찾기 위해 얻은 마법 물품이었다.
지금은 주로 장소를 떠올려 그곳으로 이동하는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엘리베이터는 가람이 알고 있는 사람이나 동물도 추적할 수 있었다.
그러니 엘리베이터에 타고 오리를 떠올려 되찾아 오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신경 쓰이는 점은 오리가 사라지는 동안 너무나 조용했다는 것이다.
오리들이 무슨 인형도 아니고, 낯선 놈들이 나타나서 자기를 끌고 가려고 하는데 얌전히 따라갔을 리가 없다.
분명 모종의 술수를 사용했을 텐데 그것이 무엇일지 조금 신경 쓰였다.
“궁금한 게 있는데, 내 오리들 어떻게 데려간 거야?”
“내가 왜 그걸 대답해야 하지?”
가람의 질문에 도둑이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그 건방진 태도에 가람은 조금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보복이 두려워서 자신을 어쩌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확실했다. 착각도 좋지만, 지금은 그 착각을 받아 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글쎄?”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가람은 그대로 도둑을 걷어찼다. 배가 푹 들어갈 정도로 강한 발차기였다.
도둑이 숨 막히는 소리를 내며 그대로 주저앉자, 가람은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도둑의 머리채를 붙잡고 홱 젖혔다. 그리고 무심한 손놀림으로 뺨을 두어 대 후려쳤다.
잠시 뒤 어느 정도 정신을 추스른 도둑은 자신이 여자에게, 그것도 자신보다 한 뼘은 작은 어린 여자에게 걷어차여 주저앉은 것이 치욕스럽기 짝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분노가 가득한 시선으로 가람을 노려보았지만 솔직히 머리채가 붙잡힌 상태라서 별로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네년은 내가 반드시 죽여 버…….”
도둑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가람이 그대로 뺨을 후려쳤기 때문이다. 가람은 그가 입을 열려고 할 때마다 뺨을 쳤다.
하스펠과 레커드, 그리고 모거스는 가장 폭력을 사용할 것 같지 않던 사람이 뜻밖의 모습을 보이자 말릴 생각도 못 하고 허수아비처럼 서 있었다.
“자, 대답하는 거야. 오리한테 무슨 짓을 했어?”
질문을 받으면 반사적으로 정답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도둑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가람을 묶어 놓고 채찍질하는 모습이었다.
화가 꽤 많이 났는지 상상이 마치 현실처럼 선명했다. 그것을 그대로 읽은 가람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도둑의 생각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스펠의 목을 자르고, 가람을 알몸으로 기게 만드는 추잡한 영상이 연이어 떠오른다.
“이거 아주 나쁜 놈인데. 그렇지?”
가람의 질문에 도둑이 킬킬 웃었다. 가람은 도둑이 떠올린 과거를 보았다.
어린아이를 때리고 무도한 사람에게서 물건을 갈취하고 그러다 수틀리면 칼로 죽여 버리는 등의 일들.
그 속에서 도둑은 늘 즐거운 기분으로 서 있었다. 인간 같지 않은 삐뚤어진 그 모습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든다.
가람의 기분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가라앉았다.
스릉, 하고 가람이 단검을 빼 들어 그대로 도둑의 목젖 아래에 가져다 대었다. 도둑은 조금 흠칫했지만 비열하게 속삭였다.
“오리를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