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225화 (225/256)

26화

“너희 오백이 넘는 숫자가 있다며. 그러니 대충 몇 놈 잡아다가 물어보면 되겠지. 뭐 혹시라도 어쩔 수 없이 도둑질을 하는 불쌍한 사람인가 했는데 그게 아니라면 살려 둘 이유가 없어.”

도둑은 가람의 심드렁한 반응에 대단히 당황했다. 그리고 다급하게 외쳤다.

“약! 약을 썼어. 냄새를 맡으면 얌전해지는 약을 쓴 거라고!”

“부작용은?”

“어, 없어. 시간이 지나면 풀려나는 거야. 팔아넘길 상품이 상하면 안 되니까 독한 약은 안 써.”

가람은 그 말이 모두 진실이라는 것을 읽어 냈다. 그리고 미련 없이 단검에 힘을 주었다.

처음부터 자신을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도둑이 기겁해서 비명을 질렀다. 그런 그를 구해 준 것은 뜻밖에도 레커드였다.

“아직 죽이면 안 돼.”

갑자기 끼어든 레커드가 가람의 손목을 잡아 단검이 더 파고드는 것을 막았다.

동시에 챙 소리 나게 검을 뽑아 든 하스펠이 레커드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손 놓도록.”

레커드는 얼른 손을 들어 보이며 가람에게서 물러섰다.

“실례했소. 해를 끼칠 생각은 없었으니 검을 좀 거두어 주면 좋겠군. 우리도 이 도둑한테 볼일이 있는데 그렇게 죽이면 곤란해. 게다가 당신들도 오리를 찾으려면 이 도둑이 필요하지 않나? 우리도 물건을 되찾아야 하니 힘을 합치는 게 어떻소?”

“우린 딱히 이 도둑이 필요 없는데요.”

말을 하며 가람은 동시에 하스펠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 의미를 알아들은 하스펠이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검을 집어넣었다.

가람은 레커드에게 잡혔던 손목을 쓰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도둑을 툭 걷어차서 레커드 쪽으로 밀어 주었다.

“필요하다니 죽이진 않을게요. 쓰세요.”

물건이라도 건네는 듯한 말투에 레커드는 새삼 가람이 겉보기와는 아주 다른 인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겉으로는 그냥 좀 예의 바르고 심약한 어린 여자로 보였지만, 심약한 여자가 사람의 목에 망설임 없이 검을 박아 넣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잠깐, 당신들은 오리를 되찾지 않을 생각이오?”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할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 효과가 사라지는 약물을 썼다고 도둑이 이미 고백했으니 이제 걸리는 것도 없다.

눈치를 보니 이불과 쿠션을 도축해서 팔아넘길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에 서둘러야 할 이유도 없어 보였다.

한결 여유로워진 얼굴로 굴을 빠져나가려는 가람을 레커드가 급히 불러 세웠다.

“잠깐,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인데 우리도 끼워 주지 않겠소?”

구멍 안으로 발을 밀어 넣던 가람이 그 자세 그대로 슬쩍 돌아보았다.

“다른 일행은 없어요?”

“우리 둘뿐이오. 우리 둘만으로 물건들을 되찾기는 힘들 거요. 아, 물론 공짜로 도와 달라는 건 아니오. 사례는 충분히 하겠소.”

레커드가 꽤 절박한 얼굴로 매달리는 것을 바라보며 가람은 뺨을 긁적였다.

매몰차게 거절한다고 해도 자신이 오리를 찾으러 간다고 생각하는 이상 계속 주변을 맴돌 것이 분명했다. 이들에게는 그 방법이 최선이기 때문이다.

여차저차 가람에게 합세해서 짐을 되찾아 오거나 그게 아니라면 용병 같은 것을 고용하는 수밖에 없는데 빈털터리가 된 사람들이 용병을 고용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 일들이 성가시기도 하고 딱히 야박하게 굴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가람은 다시 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사정도 딱하니 빨리 찾는 것을 도와주고 헤어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무언의 허락을 알아들은 레커드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고맙소. 내 사례는 섭섭지 않게 하겠소. 아, 이제 한 배를 탔으니 통성명을 합시다. 나는 레커드, 마흔두 살 먹은 고고학자요. 이쪽은 모거스. 서른한 살로 나와 같은 고고학자지.”

“고고학자?”

꽤 특이한 직업이다. 가람이 흥미로워하는 것과 달리 하스펠은 조금 거북한 표정이었다.

사실 말이 좋아 고고학자지, 까놓고 말하면 도굴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남의 무덤이나 땅에 들어가서 아무거나 캐다가 팔아먹고 사는 것이 일상이니 좋게 볼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렇소. 두 사람은 남매요?”

레커드는 하스펠의 표정이 굳은 것을 눈치챘지만 태연한 어조로 질문했다.

“아, 네. 저는 스물다섯, 저쪽은 저보다 두 살 많은 오빠예요. 여행자죠.”

“오빠가 대단한 실력을 지닌 것 같군.”

칭찬에도 불구하고 하스펠의 얼굴은 풀어지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가볍게 까딱이고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서 있을 뿐이다.

그 태도에 어지간히 비싼 척한다고 생각하며 레커드는 애써 표정을 갈무리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네 사람이 된 것뿐이잖아. 이 녀석 말로는 오백이 넘는다는데, 무슨 수로 되찾아 와?”

내내 조용히 있던 모거스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는 온몸으로 가람과 하스펠이 미덥지 않다는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면 그냥 포기하던가.”

레커드가 싸늘하게 대답하자 모거스는 돌이라도 삼킨 듯이 입을 다물었다.

실랑이하는 두 사람을 내버려 두고 가람은 반쯤 버려져 있는 도둑에게 다가섰다.

“뭐, 뭐야.”

당한 일이 있는 터라 극도로 경계하는 도둑을 가볍게 발로 차서 넘어뜨린 가람은 도둑의 옷을 찢어 그것으로 손을 뒤로 돌려 묶고, 무릎을 모아 묶었다.

어정쩡하게 걸을 수는 있지만 뛰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자세였다.

이어서 남은 옷깃으로 기다란 끈을 만든 가람은 한쪽 끝은 도둑에게 묶고 반대쪽을 손에 쥐었다.

묶인 것이 인간이라는 점만 빼면 마치 동물을 산책시키는 듯한 모양새였다.

적절한 절차로 포로를 완성한 가람은 도둑이 걸을 수 있도록 일으켜 세워 앞장서게 만들었다.

그 과정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나머지 세 사람은 끼어들지도 못하고 멍하게 서 있다가 가람이 구멍 안으로 포로를 밀어 넣은 후에야 얼떨떨하게 따라붙었다.

“이런 일이 익숙해 보이는군.”

레커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가람은 대답 대신 도둑에게 걸을 것을 명령했다.

무엇인들 익숙하지 않을까. 가람은 저도 모르게 조소하며 걸음이 엉키지 않도록 조심했다.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던 끝없는 여관의 거리와 달리 도둑이 안내하는 굴은 빛 한 점 없었다. 마치 개미굴 안을 돌아다니고 있는 느낌이다.

도둑은 손과 발이 묶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망설임 없이 그 좁은 어둠 속을 걸었다. 얼마나 많이 돌아다녔는지 눈 감고도 훤하다는 태도였다.

도둑을 따라 걸으며 가람은 간간이 천으로 막혀 있거나 나무 수납장 따위의 가구로 막힌 구멍들을 만날 수 있었다.

슬쩍 틈 사이로 내다보면 아무것도 모르고 잠든 여행자들이 보였다. 아마 자신과 하스펠도 저렇게 잠들어 있었겠지.

그렇게 그들을 언뜻언뜻 훔쳐보고 있자, 마치 거울 뒤편의 세계를 걷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 침묵 속에서 여러 개의 신발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만 계속되었다.

도둑은 의외로 매우 순순했다. 소굴에 도착하면 패거리들이 자신을 구해 줄 거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부러 말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가람이 자신의 입을 막지 않은 것을 눈치채지 않도록 조심하는 중이었다.

그는 가람이 제 입을 막는 것을 깜빡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대로 소굴에 도착하기만 하면 소리를 질러서 사람을 불러 모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놈들은 죽은 목숨이었다.

굴을 따라 한참 걷자 저 끝에서 어른거리는 빛이 보였다. 도둑의 소굴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이다.

말은 없었지만 가람은 함께 가는 사람들이 더욱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오백 명까지는 안 되겠지만 쉬울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군.”

하스펠이 작게 소곤거리자 레커드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여기저기에 나무 상자가 잔뜩 쌓여 있고, 보초를 서는 듯한 몇몇이 규칙적으로 돌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벽을 따라 주르륵 켜진 횃불은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는 듯 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여기저기에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나누는 이들을 다 합하면 적어도 오십은 넘어 보인다.

레커드의 실력이 어떤지 모르는 상황에서 정면 돌파하는 것은 무리수였다.

“오리는 안 보이는군요.”

“아마 안으로 좀 더 들어가야 하는 모양이오. 쌓인 상자 뒤로 숨어서 사각지대를 노리면 되겠지. 훔쳐 온 물건이 어디 있는지는 이 도둑이…….”

말을 하며 도둑에게 시선을 준 레커드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내내 숨죽이고 있던 도둑이 레커드와 마주친 눈을 멍하니 깜빡이다가 다급하게 뻗어 오는 손에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재갈이 없는 것을 들킨 것이다.

“입을 막아!”

레커드가 작게 소리쳤지만 손이 입보다 빠를 수는 없는 것이다. 도둑의 외침이 소굴 안을 쩌렁쩌렁 울린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침입자다! 침입자가 나타났…….”

뒤늦게 입을 막았지만 늦어도 이미 한참 늦었다. 마냥 어슬렁거리던 좀도둑들의 시선이 도둑의 입을 틀어막은 레커드에게 못 박힌다.

그리고 천천히 모여들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검을 뽑는 소리와 수군거림이 퍼져 나갔다.

“저 자식은 뭐야?”

“잡혀 있는 건 줄로바 같은데.”

“줄로바가 꼬리를 달고 온 건가?”

“무슨 상관이야. 다 죽여 버리자.”

차분하고 살벌하게 돌아가는 분위기에 레커드가 입술을 깨물고 가람에게 질책 어린 시선을 던졌다.

“입을 안 막으면 어떡하나! 그런 실수를 하다니…….”

본인도 확인하지 않은 부분이면서 자신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그 말에 가람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리고 엄밀히 따지자면 실수는 아니었다. 가람은 일부러 그가 소리 지를 수 있게 방치한 것이었다.

“빌어먹을, 도망치는 수밖에 없겠어.”

레커드는 잡고 있던 도둑을 확 떠밀고 되돌아가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러나 하스펠은 오히려 가람의 앞에 나서서 검을 곧추세웠다. 그 무모한 모습에 몇몇 도둑들이 이죽거리며 조롱을 던진다.

“이야아, 젊은 놈이 목숨 아까운 줄 모르네.”

“폼을 보니 한가락 하나 본데?”

“나는 저런 놈들이 싫어.”

도둑들은 연신 낄낄거리며 한마디씩 했다. 그러나 하스펠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모든 것들을 받아넘겼다.

그 모습에 갈등하던 레커드는 결국 자신도 검을 빼 들고 하스펠 옆에 섰다.

도망쳐 봐야 소용없을 거라고 생각한 건지, 아니면 하스펠의 강함에 기대 보기로 한 것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가람과 하스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가 아닌 것은 확실했다.

“물러나 계십시오. 위험합니다.”

“자네 정도는 아니지만 나도 칼 밥 먹던 사람이야.”

하스펠이 가람에게 한 경고에 레커드가 대신 대답했다. 아마 그가 여동생인 가람에게 존대를 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탓에 그런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하스펠이 간혹 입을 열 때마다 늘 레커드가 대답하고 있었다. 가람은 그 사실을 눈치채고 홀로 작게 웃었다.

“두 명으로 우리 전부를 상대하겠다는 거냐. 엉?”

뺨에 길게 흉터가 있는 남자가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번들거리는 눈에 광기가 가득한 것이 꽤 흉악해 보인다.

가람은 신속하게 도둑들의 숫자를 세어 보았다. 묶여 있는 줄로바까지 합해 모두 육십 명. 더 잡히는 기척이 없는 것을 보아 이들이 전부였다.

“오백 명이라더니 허풍이었군.”

가람이 말하는 순간 다가오던 모든 도둑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당황스러워하는 표정을 봤을 때 자의가 아닌 것이 확실했다.

일어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으나 다리가 그대로 굳은 듯이 움직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들 전부가 갑자기 절을 하고 싶어진 것은 아니었고, 당연히 가람의 소행이었다.

“이 녀석들 갑자기 왜 이래?”

레커드가 놀라 외쳤다. 그러나 하스펠은 상대적으로 침착함을 유지한 채 가람을 응시했다.

그 시선을 느끼며 가람은 단정한 걸음으로 걸어 나가 가장 선두에 있는 도둑 앞에 멈춰 섰다.

“훔쳐 온 물건들은 어디에 두지?”

도둑은 대답 대신 퉤 하고 침을 뱉었다. 누런 침은 가람에게 닿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으나 도둑의 기세를 북돋는 효과는 있었다.

가람은 도둑들의 용기에 감탄했다. 보통 무슨 원리인지도 모를 수법에 당해서 꼼짝도 못하는 상태가 되면 겁에 질리기 마련인데, 도둑들은 정반대로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뭔지 모르겠지만, 이거 당신들이 한 거?”

굴속에 내내 숨어 있던 모거스가 하스펠에게 질문했다. 하스펠은 그 질문을 그대로 무시했다. 자신이 대답할 만한 사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답이 없어도 상관없었다. 눈을 훤히 뜨고 보면서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할 멍청이는 아무도 없었다.

“무슨 수법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하군. 독이라도 쓴 건가?”

레커드는 긴장이 풀린 듯했지만 그래도 검을 집어넣지는 않았다. 그는 대답 없는 하스펠에게 잠깐 아니꼬운 시선을 던지고 가람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나머지 사람들도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따르지 않은 것은 바닥에 넘어져 구르고 있는 묶인 도둑뿐이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도리질 치며 상황을 부정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우리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 주면 목숨을 살려 주지.”

레커드가 제법 본격적으로 도둑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둑은 그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이죽거리는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바보인 줄 알아?”

레커드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지는 것을 바라본 가람이 다시 제 앞의 도둑을 마주했다.

사실 가람은 도둑을 심문할 이유가 없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엘리베이터만으로도 충분히 오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슬슬 귀찮아지고 있었기에 일을 좀 서둘러 진행하기로 했다.

“물건. 어디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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