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226화 (226/256)

27화

“글쎄― 잘 모르겠는데?”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도둑은 가람을 얕보고 있었다. 다른 도둑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래서야 끝이 없다. 이럴 때 가장 효과적인 약은 공포다.

가람은 옆에 서 있는 하스펠의 허리춤에서 그의 장검을 꺼내었다. 칼날이 칼집을 미끄러지는 소리에 설마 하는 표정을 짓던 도둑들은 다음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가람이 잡은 검이 망설임 없이 도둑의 복부를 관통했기 때문이다. 짚 인형이라도 쑤시는 것처럼 감흥 없는 손놀림이었다.

“어, 컥…….”

도둑의 눈이 크게 홉뜨였다. 가람은 그대로 검을 뽑아내고 그를 걷어찬 후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옮겨 갔다.

배에서 피를 쏟는 도둑은 손으로 상처를 감싸고 망연한 눈으로 가람의 등을 쳐다보았다.

“라젤! 저년이 라젤을 찔렀어!”

“이 개년이!”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가람은 마치 귀를 막기라도 한 듯 철저한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그녀가 하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질문하고, 대답이 없으면 칼을 썼다.

그렇게 배에 구멍이 뚫린 도둑이 다섯이 넘어가자 이제 욕설을 내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쯤에서 가람은 도둑들의 눈에 공포가 자리 잡은 것을 확인했다. 좌중을 한 바퀴 둘러보자 눈이 마주치는 도둑마다 급히 시선을 피했다.

“흠. 다섯이라니. 생각보다 빠르네요.”

반쯤 쓰러뜨려야 할 줄 알았는데. 태연하게 뒷말을 덧붙인 가람은 발아래의 도둑 앞에 쭈그려 앉았다.

필사적으로 눈을 피하던 도둑은 가람이 한참 동안 떠나지 않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는 가람의 얼굴을 마주하고 기절할 뻔했다.

“훔쳐 온 물건, 어디에 있어?”

“저 뒤쪽 굴을 쭉 따라가서 첫 번째 왼쪽 굴 안으로 들어가면 있어요. 마, 막힌 거 같겠지만 그냥 바위로 감춰 둔 거라 밀고 들어가면 돼요.”

어느새 말투마저 공손해진 도둑이 필사적으로 대답했다. 가람은 도둑을 놓아주고 보란 듯이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굳은 얼굴의 하스펠에게 검을 돌려주었다.

“깨끗하군요.”

검을 돌려받은 하스펠이 조용히 말했다. 그렇게나 많은 복부를 관통했는데도 칼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가람은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솔직히 도둑들에게 칼을 쓰지 않고 명령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이들이 했던 짓을 길잡이 도둑의 머릿속에서 보았던 가람은 그런 평화적인 방법을 써 주고 싶지 않았다.

“남의 물건은 깨끗하게 써야죠. 장소도 알았으니 이제 가죠.”

하스펠은 조금 복잡한 표정이었지만 레커드와 모거스는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곧 물건을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인지 훨씬 밝아진 얼굴의 모거스가 가람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너 정말 대단하다. 아까 그건 어떻게 한 거지?”

“독 같은 거예요.”

이 세계에는 일단 마법 같은 것이 없다고 하스펠이 말했기 때문에 가람은 레커드의 추측을 대충 주워 대답했다.

말을 못 해 줄 이유는 없지만 얼토당토않은 대답을 해서 괜히 말이 길어지는 것은 사양이었다.

“저 도둑들은 언제까지 굳어 있는 거지?”

“글쎄요. 아마 아침쯤엔 풀려날 거예요.”

궁금한 것이 아주 많았는지 모거스는 걷는 내내 질문을 퍼부었다. 가람은 그가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것도 짜증이 아니라 밝은 어조의 말을. 아까 도둑들이 있을 때는 굴에 숨어서 꼼짝도 못하더니, 생각보다 겁이 많고 예민한 성격인 것 같았다.

도둑이 알려 준 대로 한참 걸어가자 완전히 막다른 길이 나타났다.

그러나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앞을 막고 있는 벽과 그 경계에 있는 작은 틈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내내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이 신경 쓰였던 레커드가 돌을 미는 역할을 자처했다.

돌이 끌리는 무거운 소리와 함께 어두운 공간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각자 근처에 있는 횃불을 하나씩 뽑아서 손에 들고 안쪽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훔쳐 온 물건들이 불빛 아래 드러나자 모거스의 눈에 탐욕이 감돌았다.

도둑들이 모은 재물은 어지간한 사람이라도 탐을 낼 만큼 대단한 것들이 많았다.

돈이 한가득 쌓여 있는 상자에서 한 줌을 퍼 올린 레커드가 좌르륵 소리가 나도록 떨어뜨렸다.

모거스는 어디서 찾았는지 모를 커다란 보석 벨트를 허리에 두르고 상자 하나를 뒤지고 있었다.

“많이도 모았군.”

“마음은 알겠지만 가방부터 찾는 게 좋지 않을까요. 다른 패거리가 돌아올지도 모르고.”

가람의 말에 레커드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거스는 여전히 보석을 챙기는 데 여념이 없다. 레커드가 돌아다니는 것을 흘긋 보긴 했지만 같이 찾을 마음은 없는 것 같았다.

“이불과 쿠션을 찾았습니다.”

어디론가 사라졌던 하스펠이 겹겹이 쌓인 상자 너머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이불과 쿠션은 목과 다리가 묶인 채 바닥에 꽂힌 말뚝에 매어져 있었다.

두 마리 오리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다가 뒤늦게 가람과 하스펠을 알아보고 기쁨으로 짧게 울었다.

하스펠이 오리들을 풀어 주는 동안 가람은 근처에서 오리들이 매고 있었던 가방을 발견했다.

그것들을 다시 매어 주고 밖으로 나오자 다분히 예상했던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어디선가 찾아낸 수레에 금은보화를 쓸어 담고 있던 레커드와 모거스가 기가 막힌 표정의 가람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오리들은 찾았어?”

“네. 찾으시던 건 손에 넣으셨나요?”

가람은 수레에 담겨 있는 금은보화에 대해 언급하는 대신 가장 중요한 부분을 질문했다.

“응, 찾았어. 덕분이야. 이거 정말로 크게 신세를 졌군.”

레커드는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으며 낡은 가죽 가방을 들어 보여 주었다. 그리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가방을 뒤져 주먹만 한 알 같은 것을 꺼내어 보여 주었다.

“이것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야. 우리가 찾은 것들 중에서 제일 그럴듯한 물건이지. 자, 가까이 와서 봐 봐.”

레커드는 불빛을 가까이 대고 가람이 그것을 더 잘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것은 금으로 만든 캡슐처럼 생긴 금속 단지였다.

위아래가 단단히 맞물려 닫힌 구조였는데 아마 안에 무언가 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복잡한 세공으로 봐서는 보석 상자처럼 생겼는데, 가람은 도저히 보석 상자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단지에서 은근하게 풍겨 나오는 음울한 분위기가 범상치 않은 느낌이었다.

꽤 흥미가 생긴 가람은 단지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세공 사이에 숨어 있는 낯선 글자들을 발견했다.

“이 안에 복수를 가두었다. 승리를 바라볼 수 없고 명예로운 패배도 불가능하다면 이것을 사용하라.”

가람이 글자들을 읽자 레커드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무슨 말이야?”

“여기에 써져 있는 말이에요. 이 글자들…….”

“뭐? 너 이걸 읽을 수 있어?”

놀란 레커드가 황급히 묻자 옆에서 보물을 쓸어 담던 모거스까지 경악해서 다가왔다.

“읽었다고? 그게 정말이야? 진짜 이거 읽은 거야?”

“그러면 혹시 이거 열 수도 있나?”

가람은 레커드에게 단지를 건네받아 다시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단지의 아래쪽에는 기괴하게 뒤틀린 자세의 인간들이 난잡하게 뒤얽힌 형상이 세공되어 있었고, 위쪽에는 몇 개의 도형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둥근 도형이 반복되는 것을 보아 아마 작동 원리를 표시해 둔 것 같았다.

“할 수 있는 것 같네요.”

가람의 담담한 대답에 레커드와 모거스의 얼굴에 환희가 스쳤다. 두 사람은 가람의 앞에 정중하게 무릎을 꿇었다.

“제발 열도록 도와줘.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어.”

“부탁하겠네!”

턱을 긁으며 두 사람과 단지를 번갈아 보던 가람이 문득 질문했다.

“왜 부숴서 열어 보지 않았어요?”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도 모르는데 부쉈다가 파손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사실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닌데, 그래도 여는 방법이 있을 것 같아서 델리움으로 가던 중이었어. 거기 있는 기록 보관소의 사제라면 이걸 알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어서. 하지만 사제씩이나 되는 사람을 쉽게 만날 수는 없을 테니 반쯤은 포기하고 있었는데…….”

“여기 새겨진 글을 읽어 보니 별로 좋은 게 들어 있는 거 같지도 않은데 그만두는 게 좋지 않아요?”

두 사람은 그저 부탁한다는 말만 반복했다. 가람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이렇게까지 하는 것을 보자 더는 거절하기가 힘들어진 것이다.

“도와줄게요.”

레커드와 모거스가 벌떡 일어나 두 손을 맞잡고 희열에 떨었다. 차마 말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기뻐하는 그 모습에 가람은 가볍게 웃어 버렸다.

“하스펠도 괜찮죠?”

병풍처럼 서 있던 하스펠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사람이 동의하자 가람은 본격적으로 작업에 착수했다.

도형들을 해석하고 이런저런 시도를 해 보는 지루한 시간이 이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람은 여는 법을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단지의 위와 아래를 지그시 누른 상태로 세공을 일정한 규칙으로 쓰다듬으면 양각으로 새겨져 있던 세공이 덜컥 하고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동시에 차르륵 하고 무언가 풀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세공의 틈이 갈라져 마치 별처럼 화려하게 활짝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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