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어쩐지 미심쩍어 확인차 묻는 가람의 말에 남자는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마침 누군가가 휴식 시간을 알렸다.
남자는 개를 안은 팔에 힘을 단단히 주고 목공소 옆의 작은 오두막을 턱짓했다.
“저기가 제 쉼터입니다. 개를 찾아 주신 것도 고마우니 차라도 한잔 대접하게 해 주십시오.”
아무래도 무언가 사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기껏 찾아다 준 개와 주인이 별로 기뻐 보이지 않자 이유라도 알고 싶어진 가람은 흔쾌히 그 요청에 응했다.
오두막은 나무판으로 대충 비바람만 피하도록 지어 둔 허술한 건물이었다.
바닥재도 없이 그냥 흙바닥에 탁자와 의자, 간이침대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다.
남자는 가람에게 의자를 권하고 문을 닫은 뒤 투박하게 깎은 나무 컵에 찻물을 따라 앞에 내려놓았다.
“믿지 못하시는 것 같지만, 저는 레오의 주인이 맞습니다.”
찻물로 입을 적신 남자는 품에 안은 개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레오?”
“이 녀석 이름입니다.”
가람은 반사적으로 개를 보았다. 레오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탁자와 남자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그러더니 곧 남자의 품을 뛰쳐나가 여기저기에 코를 들이밀고 킁킁대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건지 사정을 들을 수 있을까요?”
남자는 가람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던 것처럼 긴 한숨과 함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펠로드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3년 전까지만 해도 꽤 행복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부인은 아름답고 착했고, 아들은 장난이 심하긴 했지만 그래도 좋은 아이였다. 그리고 레오는 그 아들이 졸라 기르게 된 강아지였다.
그는 제법 실력 있는 목수였기 때문에 개 한 마리를 기르는 것 정도는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처음 강아지를 기르는 날 아들의 행복한 얼굴을 잊을 수 없다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그 행복을 시기한 듯 불행이 찾아왔다. 부인과 아들이 할머니의 얼굴을 보기 위해 처가로 떠나던 날, 그는 급한 주문이 들어와 따로 가기로 하고 열심히 나무를 다듬었다.
레오도 부인과 아들이 데려갔으니 주문을 마치면 챙길 것도 없이 그대로 말을 타고 출발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그에게 비보가 찾아왔다. 좁은 낭떠러지 옆길을 지나던 마차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는 것이다.
“뒤늦게 달려갔지만 살아남은 것은 레오뿐이었습니다. 부인과 아들은 이미 참혹한 모습이었죠.
너무 슬픈 나머지 그대로 죽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레오를 보면 기뻐하던 아이의 얼굴이 떠올라서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살기로 마음먹은 뒤 시간이 좀 지나고 나서 레오가 이상하다는 걸 알게 됐지요.”
“으음. 정확히 어떻게요?”
펠로드는 가람의 빈 컵에 차를 더 채워 주었다.
그동안 레오는 점점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으로 사방을 돌아다니다가 결국 문을 긁으며 낑낑대기 시작했다.
“저를 못 알아보더군요. 처음에는 저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조금 멍하다가, 매일 돌아다니는 동네의 길을 잊어서 집에 못 오거나 하는 정도였지요.
하지만 점점 심해져서 이제 제가 눈앞에 있어도 못 알아보고 밖으로 나가기만 하더군요.
그리고 마치 무언가를 찾듯이 사방으로 냄새를 맡고 다니더니 결국 한 골목에 앉아 한참을 기다리더군요.
아들이 제 친구들과 함께 자주 놀던 곳이었습니다. 아들이 죽고 나서 3년간 가지 않았던 곳이지요.”
펠로드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억눌린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배경음처럼 레오가 낑낑거리는 소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제가 일하는 목공소에도 찾아가고 제가 자주 갔던 술집에서도 내내 앉아서 기다리더군요.
예전에는 제가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술집 밖으로 나오면 레오가 늘 기다리고 있다가 함께 집에 가곤 했었습니다.
레오는 저를 기억하면서 동시에 잊어버린 겁니다. 레오의 기억은 박살 났어요.
제게 남은 가족은 이제 레오뿐이지만 저를 기억하지도 못하고, 치료하려고 가둬 두면 이가 다 부러지도록 창살을 물어뜯으니 그냥 풀어 두는 수밖에요.”
“음…….”
가람의 안타까운 목소리에 펠로드는 코를 훌쩍였다.
“소원이 있다면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레오가 저를 알아봐 줬으면 좋겠습니다.
가족들이 살아 돌아오는 건 이제 바라지도 않아요. 그냥 레오가 죽으면 저도 홀로 살다가 죽으면 그뿐이겠지요.”
소원치고는 소박한 소원. 하지만 이루어지기는 힘든 소원.
가람은 말없이 일어나 끙끙 앓는 레오를 쓰다듬었다.
펠로드의 얼굴과 아이의 얼굴, 그리고 평화로운 어떤 때의 풍경이 엉망으로 뒤엉켜 알아보기 힘든 형태로 개의 머릿속을 굴러다녔다.
개의 망가진 정신을 깁고 추스르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절대 불가능한 기적이겠지만 가람에게는 아주 쉬운 일이었다.
가람은 개를 끌어안고 쓰다듬으며 기억을 다듬었다. 치료하고, 보듬었다.
그리고 마침내 가람이 레오를 품에서 놓아줬을 때, 개는 잠시 어리둥절한 듯 두리번거리다가 펠로드를 보고 딱 멈춰 섰다.
그리고 자지러질 듯 깨갱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너무나 기쁘고, 동시에 슬프고 감격한 감정이 확실하게 닿아 왔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꼬리를 흔드는 개는 기억보다 너무 늙어 버린, 기억 속에서 잃어버렸던 주인에게 안겨 한참을 울부짖었다.
펠로드는 그대로 레오를 얼싸안고 굳은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개의 눈에서도, 펠로드의 눈에서도 눈물이 쏟아졌다.
가람은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오두막을 나섰다. 이야기를 듣는 사이 어느새 저녁이 가까워져 있었다.
지나쳐 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람은 한껏 쓸쓸해졌다.
방금 있었던 일은 감동적인 일임에 분명하지만, 가람은 겨울의 길가에 서서 창문 너머의 난로를 바라보는 사람처럼 추위를 느끼고 있었다.
사람을 돕고 그들이 행복해지는 것을 볼 때마다 가람은 따스함과 동시에 추위를 느꼈다.
그들이 벅찬 표정을 지을 때마다 텅 빈 공허함을 느꼈다. 그런 격렬한 감정이 싹트기에는 자신은 너무나 메말라 있었다.
고통스러운 느낌은 아니었다.
가람은 그대로 길에 우뚝 멈춰 섰다. 이대로 또 다른 차원으로 떠나도 상관없을 것이다.
이 차원과의 링크는 끊어질 거고, 아마도 그곳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 끝없는 방황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사실 가람도 알고 있었다. 이것은 답이 없는 문제다.
인간이 결코 스스로의 죽음에 대한 답을 알 수 없듯 패스파인더인 자신이 어째서 이런 삶을 살아가는지도 결코 알 수 없다.
어째서 세상이 이런 모양인지도, 어째서 세상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다.
자신이 어째서 존재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있는가?
어떻게 존재하는 것인지는 대답할 수 있지만 그 목적에 대해서는 죽을 때까지 방황하기 마련이다.
영원히 답이 주어지지 않는 문제라면 때로는 스스로가 답을 만들어야 한다.
이미 결론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가람은 여전히 어려웠다.
정말로 어려운 문제였다. 있는 답을 찾는 것보다 답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아직 자신에게 인간성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언제 꺼져 버릴지 모를 위태위태한 인간성이라도, 언젠가 사라져 버려 인간을 연기하며 살게 된다고 하더라도 가람은 최소한 모르드레드처럼 살 생각은 없었다.
그를 여전히 싫어한다는 것도 가람의 위안거리 중 하나였다.
그리고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펠로드를 가엾게 여긴 나머지 저승의 문을 열어 그의 가족들을 모두 되살려 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런 멍청한 짓을 하지 않게 된 것만으로 자신은 성장한 걸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자 어쩐지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찾았다!”
누군가가 가람을 잡아챘다. 펠로드가 따라온 건가 했지만 가람의 손을 잡은 것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북슬북슬한 털에 곰처럼 거대한 체구의 사내. 다급한 얼굴의 크네프가 가람을 잡아끌며 외쳤다.
“하스펠이 쓰러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