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 * *
어두컴컴한 여관 안에서 하스펠은 병마에 찌들어 신음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랬어요?”
걱정스러운 얼굴로 둘러앉은 덩치들을 주욱 둘러본 가람의 질문에 남자들이 일제히 움찔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온몸을 뒤트는 하스펠을 목격한 가람은 그때부터 시종일관 묘하게 무거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물론 오빠가 하루 만에 초죽음이 되었는데 가벼운 분위기라면 그것도 이상하겠지만 가람과 시선을 마주칠 때마다 느껴지는 공포는 정상의 범주를 훨씬 뛰어넘었다.
쉽게 말을 건넬 수 없는 위압감이었지만 그래도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크네프가 더듬더듬 말문을 열었다.
“가람이 그렇게 가고 나서 한두 놈씩 어슬렁어슬렁 기어 나오기에 나는 케이크를 잘라 주고 있었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스펠이 나왔지. 몸이 굉장히 안 좋아 보였어. 나는 숙취라 생각하고 신경 쓰지 않았는데, 너를 찾다가 갑자기 쓰러지더라고.”
간신히 말을 끝맺은 크네프가 슬쩍 뒤로 물러섰다. 가람의 주변으로 공기가 이지러지는 환각이 보이는 것 같았다.
침묵 속에서 누군가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린다. 이 불편한 자리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모두의 머릿속을 공통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한 톨 정도의 의리와 사나이로서의 자존심이었다.
“알겠어요. 이제 제가 돌볼 테니 가 보세요.”
가람의 허락이 떨어지자―엄밀히 말하면 허락은 아니었지만―남자들은 쏜살같이 방을 빠져나갔다. 혹시나 붙잡을까 두렵다는 투였다.
그렇게 모두가 빠져나가고 하스펠과 오리 두 마리만 남은 방 안에서 가람은 죽어 가고 있는 하스펠을 내려다보았다.
하스펠은 병에 걸린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일종의 저주였다. 하스펠의 주변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있는 악의가 그것을 증명했다.
가람은 온몸을 뒤트는 하스펠을 보는 순간 그 저주가 어디에서 왔는지 깨달았다.
바로 얼마 전 자신이 열어 준 그 동그란 알. 그것에 새겨져 있던 세공에서 하스펠처럼 몸을 뒤트는 사람들을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악의는 어느새 크네프와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아직 제대로 활동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저주가 어디까지 번져 갔는지 가람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복수도 할 수 없는 순간이 오면 사용하라고 했던가. 그리고 도시 하나를 멸망시킬 수 있는 힘이 들어 있다고 했던가.
그 말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마치 질병과 닮아 있는 저주는 도시 전체에 순식간에 퍼져 나가고 있을 것이다.
자신은 오래전 스스로에게 걸어 둔 축복 덕분에 저주에 걸리지 않은 것 같았지만 가장 가까이 있었던 하스펠이 대신 희생되었다.
이런 이유로 가람은 사람을 돕는 것을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궁금하니 열어 달라고, 알고 싶어 견딜 수 없다는 사람을 도우려고 그것을 열었을 뿐이다.
그 안에 저주가 들어 있어 이렇게 퍼질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가람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겁고도 무거운 한숨이었다.
어쨌거나 저주가 얼마나 퍼졌든 가람은 그것을 막을 의무가 있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나 다름없으니 그 책임 또한 져야 하는 것이다. 가람은 하스펠을 치료하는 것으로 그 일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아마도 이런 일을 하고 나면 또 소문이 퍼져 나가겠지만 이제 어떻게 할 수도 없다.
소문이 퍼져 온갖 사람들이 매달려 오는 것보다, 스스로의 실수를 외면하는 것이 더욱 싫었으니까.
차라리 책임질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다행으로 생각될 정도였다.
가람이 스스로의 도덕성을 지키는 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가는 말하면 입 아플 정도로 당연했다.
스스로의 도덕성이 무너지면 그것을 시작으로 결국 모르드레드처럼 혐오스러운 인간이 되고 말 거라는 극단적인 가정이 가람을 늘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람에게 있어서 모르드레드는 패스파인더의 삶이 도달할 수 있는 말로 중 가장 최악의 종착지였다.
“조금 아플 거예요.”
가람은 손을 뻗어 하스펠을 어루만졌다. 제법 거창한 방식으로 퍼져 나간 저주답게 해제는 그리 쉽지 않았다.
마치 생물처럼 숙주에게 기생해서 떨어뜨리려고 하면 숙주를 고통스럽게 만듦으로써 치료를 거부하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가람에게는 상대도 되지 않았다. 가람은 저주를 떼어 내지 않고 그대로 파괴했기 때문이다.
저주가 지르는 단말마에 누워 있던 하스펠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일반적인 저주 파훼가 저주를 말려 죽이는 방식이라면 가람의 방식은 강력한 축복과 압도적인 힘으로 내리눌러 순식간에 폭사시키는 것과 비슷했다.
가람은 저주를 해제하고 하스펠의 몸에 축복을 걸어 부정적인 기운이 스며들 수 없도록 만들었다.
예전에 악몽을 먹고 다니는 악령이 자신에게 달라붙으려고 하기에 구입한 능력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다.
축복이라는 능력의 특성상 그것을 사용하는 가람의 몸이 빛으로 휩싸였다. 한순간의 번쩍임 후 하스펠의 숨이 고르게 변했다.
고통으로 뒤틀리던 육신도 차분하게 제자리를 찾아 안정되었다. 그리고 잠시 뒤 하스펠의 눈이 가물가물 뜨인다.
그 푸른빛 섞인 잿빛 눈동자를 마주함과 동시에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다.
가람은 인정했다. 아니, 사실 원래 알고 있던 것이었다. 자신은 사람을 좋아한다.
차라리 평생 불에 태워지는 것이 나을 것 같은 고통스러운 그리움을 겪더라도 절대로 그만둘 수 없는 일이었다. 하스펠을 죽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가 곁에 있는 것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마시는 잠깐 동안은 갈증이 해소되지만 그 후로는 끝없는 괴로움을 겪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람은 하스펠을 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를 이대로 두면 자신의 곁에서 떠날 테고, 자신은 다시 혼자가 되고, 같이 지낸 시간이 얼마 되지도 않는 전직 기사 양반 따위 금방 잊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도 가람은 하스펠을 살렸다.
스스로의 책임이라고 포장하긴 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하스펠을 살리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가 죽는 것을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것이다. 곁에 두고 잠깐의 달콤함을 즐기고 끝없는 고통을 맛보는,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이다.
“가람…… 님?”
흐릿한 시야로 하스펠은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가람을 마주했다. 가람은 그의 이마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기분은 어때요?”
“훨씬 좋습니다.”
“가람 님은 또 뭐예요? 갑자기. 가람이면 가람이지.”
가람이 슬쩍 핀잔을 주자 하스펠이 민망한 듯 어색하게 웃었다. 괴로움 속에서 보았던 빛에 휩싸인 가람은 신성하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냥 가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사경 속에서 그런 모습을 보면 저도 모르게 경배하는 마음이 솟구치는 것이다.
“숙취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요즘 몸이 약해진 모양입니다. 그런 병에 걸리다니. 제 불찰입니다.”
깨어나자마자 고지식한 소리부터 하는 그 모습에 가람은 실소했다.
“병이 아니었어요. 엄밀히 말하자면 제 탓이니 제가 사과를 하는 게 옳죠.”
자신이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면 저주가 밖으로 기어 나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겉에 쓰여 있던 글자는 경고문이나 다름없었는데도 별생각 없이 열어 버린 자신의 경솔함이 모든 일의 원인이었다.
아마 처음 이 땅을 밟았던 때의 자신이라면 그렇게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았겠지만, 하스펠과 다니면서 좀 느슨해진 모양이었다.
“병이 아니라면……?”
“저주였어요.”
“저주?”
“예전에 그 도둑 소굴에서 제가 열었던 그 알 같은 둥근 물건 기억해요? 그 안에 저주가 들어 있었나 봐요.
마치 병처럼 퍼져 가는 종류의 저주가. 거기에 쓰인 글귀를 참고하면 다행히 이 도시 밖으로 저주가 번져 나가지는 않는 모양이지만…….”
“퍼진다면…….”
“아마도 하스펠과 어울렸던 다른 사람들도 아직 쓰러지지만 않았을 뿐 저주에 걸린 상태일 거예요.”
가람의 말을 이해한 하스펠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가람은 안심하라는 의미로 가볍게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제가 치료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아, 그렇습니까.’ 하고 안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심지어 하스펠은 방금까지만 해도 저주에 시달린 장본인이었다. 그의 이마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식은땀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걸린 겁니까?”
“최소한 이 끝없는 여관에 있는 사람들 전부이거나 어쩌면 도시 사람들 전부가 걸린 상태일 거예요.”
굳이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하자 하스펠의 표정이 굳어졌다. 가람은 일부러 어깨를 으쓱이며 가벼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누군가가 쓰러졌다느니, 도와 달라느니 하는 겁에 질린 목소리가 굴을 타고 가람에게 전해져 왔다.
“벌써 시작되고 있네요. 쉬고 있어요.”
가람의 말에도 불구하고 하스펠은 힘겹게 비틀거리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차피 저주는 풀렸고 약간 쇠약해지긴 했지만 문제가 있는 수준은 아니니 본인이 뒤따르고자 한다면 말릴 이유는 없었다.
“가람…….”
굴 밖으로 걸어 나가는 가람의 발밑에서 누군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가람이 아는 사람이었다. 몇 번 정도 술잔을 부딪친 적이 있었던 것이다.
“괜찮아요.”
가람의 말에 남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가람의 뒤를 따르던 하스펠은 그녀가 남자에게 손을 뻗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옅은 빛이 가람을 휘감았다.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그 모습이 너무나 신비해서 하스펠은 할 말을 잊고 그저 멍청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어……?”
“괜찮아요?”
힘겹게 숨을 몰아쉬던 남자는 순식간에 멀쩡한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그리고 멍한 얼굴로 가람을 올려다보다가 망설임 없이 그 앞에 머리를 박고 절하기 시작했다.
하스펠은 그의 심정이 완벽하게 이해가 갔다. 그도 사실 반쯤은 그러고 싶었으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가람은 무언가 해명하려고 하다가 일단 치료해야 할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그를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얼마 걸어 나가지 않았는데도 가람은 널브러진 사람들을 잔뜩 발견할 수 있었다.
여관의 화로 근처에 무방비하게 쓰러져 앓고 있는 사람만 십수 명이 넘어 보인다.
갑자기 사람들이 픽픽 쓰러져 나가자 멀쩡한 사람들도 공황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어쩔 줄 모르고 쓰러진 사람을 흔들며 소리치거나, 혹은 여관 밖으로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가거나, 부들부들 떨며 그 자리에서 눈물만 흘리는 등 전체적으로 완전히 혼란의 도가니였다.
가람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바로 쓰러진 사람들에게 달라붙어 치료하기 시작했다.
망연히 자리에 앉아 고장 난 인형처럼 쓰러진 사람을 흔들던 이들의 시선이 가람이 행하는 치료의 빛으로 모여든다.
멍한 그 시선들은 곧 경악에 물든 불신, 환희와 감격, 맹목적인 경외로 물들었다.
“대체 어떻게…….”
치료를 받고 정신 차린 남자는 기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이 놀라운 일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가람은 그에게 대답하는 대신 바로 옆의 사람에게 다가갔다. 생각보다 저주가 퍼지는 속도와 진행 속도가 빨랐다.
여유를 부리다가는 시간이 부족할지도 모른다. 말이야 저주가 모두 해제된 다음 해도 늦지 않았다.
다음 사람, 그리고 다시 다음 사람으로 치료의 물결이 이어진다. 가람은 역시 사람이 좋았다.
비록 홀로 남겨지는 것이 두려워 멀리할 때도 있고, 이제 기억하는 사람도 없는 추억이 떠오를 때마다 슬픔에 젖지만 그래도 미숙하고 어리석은 자신이 해를 끼칠까 한없이 조심스러워 소극적으로 행동하다가도 결국 스스로가 정한 선을 빈번하게 넘을 정도로 사람을 좋아했다.
차마 눈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랗게 굴러가는 세상의 규칙 속에서 스스로의 행동이 어떤 반향을 불러올지 몰라 자제하려고 노력하면서도 눈앞에 우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지나치기 힘든 것이다.
수많은 나쁜 결과들 속에서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학습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참다가도 기꺼이 어리석어지는 길을 택하고 만다.
사실 스스로의 행동을 책임지기 위해 사람들을 치료하고 있다곤 하지만 자신에게 책임이 없다 해도 어떻게든 핑계를 만들어 이 사람들을 치료했을 것이 분명했다.
가람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신은 아직 멀었다. 그들의 삶과 자신의 삶이 확연히 다르므로 한 발짝 물러나서 시련을 이기도록, 혹은 시련에 무너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존중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역시 내버려 두기 힘든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마도 계속 힘들 것이다. 스스로의 인간성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치료가 이어질수록 가람을 둘러싸는 사람은 점점 많아졌다. 간간이 가람의 얼굴을 이미 아는 사람들이 놀라 입을 열었지만 행해지는 기적을 목도하고 그대로 침묵했다.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 수 없는 거룩한 침묵이 좁고 어두운 여관 안에 가득 들어찼다.
여관 안의 모든 사람을 치료한 가람은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었지만 나가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감히 그 앞을 가로막지 못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물러섰기 때문이다.
문밖으로 나간 가람은 길거리에 마구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제대로 걸어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가람은 말없이 치료를 이어 갔고, 그 뒤를 따라 걷는 사람은 점점 늘어났다.
그러나 마침내 그들이 치료에 방해가 될 정도로 많아지자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아파지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 모두 흩어지세요. 환자들을 데려와 주면 더 좋고요.”
가람의 그 발언은 즉석에서 간이 치료소를 만드는 결과로 이어졌다.
가람이 일일이 찾아가 사람을 치료하는 방식이 영 효율이 나쁘다고 생각한 누군가가 모두 흩어져 쓰러진 사람을 찾아오자고 제안했고, 가람의 손에 목숨을 구한 여관의 주인이 기꺼이 자신의 여관을 치료소로 제공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 결과 가람은 여관에 앉아 사람들이 데려오는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사실 불만은 없었다. 어차피 저주가 퍼진 일에 자신의 책임이 컸기 때문이다.
일차적으로 그 알을 열어 달라고 요구한 레커드에게도 책임이 있긴 했지만 가람은 자신의 책임을 무시할 수 없었다.
* * *
“좀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
가람의 뒤에 서 있던 하스펠이 조심스럽게 권했다. 가람은 대답도 하지 않고 눈앞에 있는 환자의 저주를 깨트리고 축복을 걸어 주었다.
벌써 몇 번이나 권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한결같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스펠은 가람에게 휴식을 권하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가람이 잠도 자지 않고 치료에만 매달린 지 벌써 3일이 지났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쓰러지시겠습니다.”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으음…….”
기계적으로 축복을 불어넣으며 가람은 조금 신경 쓰인다는 얼굴로 하스펠을 흘긋거렸다.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존댓말을 일삼는 것을 보아 남매놀이는 여기까지인 모양이었다.
가람은 자신의 신분을 어떻게 세탁해야 할까 고민하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는 여자에게 축복을 내려 주었다.
비교적 초기에 발견되었던 하스펠이 그저 모든 통각이 자극받는 듯한 극심한 통증과 발열에 그친 것에 비해 저주가 깊어진 환자들은 피부가 문드러지고 몸이 드문드문 썩어 들어간 사람까지 있었다.
물론 초기의 고통이라고 해도 온몸을 뒤틀 만큼 극심한 것이지만 썩은 몸을 긁어 대는 사람들에 비해서는 극히 양호하다고 할 수 있었다.
가람이 방금 치료한 여자도 뺨과 손등이 문드러지고 있는 상태였다. 처음에는 통증을 동반한 열이 나고 나중에는 피부가 따끔거리면서 문드러진다.
그리고 천천히 썩어 들어가는데, 그쯤 되면 온몸이 간지러워서 그 썩고 문드러진 상처를 손으로 후벼 파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긁힌 상처가 어떤 형태일지 상상해 보면 저주에 의한 고통을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가람은 단순히 저주를 해제하는 것뿐만 아니라 썩은 상처를 다시 아물게 해 주는 치료까지 겸하고 있었다.
내버려 두면 어디 한 군데 잘라 내야 할 상처들이니 이왕 치료하는 김에 확실하게 하기로 한 것이다.
눈앞에서 피가 멎고 새살이 돋는 것을 목도한 사람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열광적이었다.
뼈가 보일 정도로 극심한 상처가 깨끗하게 사라지는 광경은 광신도를 만들기에 충분한 광경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치료소에 모인 부류는 환자와 가람을 광적으로 따르는 집단, 그리고 하스펠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환자는 들끓는 열과 고통 속에서 가람의 손길이 자신에게 닿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이었고, 치료가 되면 가람을 열렬히 숭배하며 광적으로 따르는 집단에 자연스레 편입되었기 때문에 뭐 굳이 두 부류로 나눌 필요도 없긴 하다.
“감사합니다. 아아. 신이시여…….”
주변에서 쏟아지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황홀해하는 시선을 받으며 가람은 묵묵히 치료를 이어 갔다.
환자들과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치료할 때마다 탄성을 내지르는 것이 꽤 민망했지만 그래도 벌써 3일이나 되니 그냥저냥 할 만했다.
게다가 간간이 들리는 성녀라는 호칭도 양심이 따끔거리긴 했지만 적당히 받아넘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어쩔 것인가? 자신은 이미 미끄러지는 수레에 올라탔다. 그 끝이 어디일지는 이미 제 손을 떠난 문제였다.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싶으면 적당히 해결하고 다른 차원으로 떠나면 그만이다.
“뭔가 드시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괜찮아요. 하스펠이야말로 가서 좀 쉬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전혀 안 괜찮아 보여요. 가서 쉬어요.”
가람이 단호하게 말하자 어물거리던 하스펠이 결국 못 이기는 척 물러났다.
하긴 그도 슬슬 한계이긴 했다. 가람이야 3일은커녕 한 달 동안 잠을 자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하스펠은 다르다.
보통 사람에 불과한 그가 가람과 똑같이 잠을 자지 않고 그 옆에서 호위를 선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연신 치료의 빛과 탄성이 터져 나오는 그곳을 뒤로하고 걸어 나오던 하스펠은 문득 누군가에게 팔이 잡혔다.
입구 근처에 놓인 테이블에 앉은 사람이 하스펠을 알아보고 붙잡은 것이다. 우락부락한 생김새였지만 거친 손길은 아니었다.
그는 조심스럽기 짝이 없는 얼굴로 하스펠을 올려다보았다. 같은 테이블에 그와 함께 앉아 있던 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성녀님의 기사님이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