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붙인 남자가 하스펠의 시선을 받고 쪼그라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잠이 부족해 눈 밑이 시커멓게 죽은 하스펠은 본의 아니게 살벌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얼굴이 눈알만 굴려 내려다보면 덩치가 두 배인 남자라도 저절로 심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소.”
순간 자신은 기사가 아니고 가람도 성녀가 아니라는 말을 떠올렸던 하스펠은 그 말을 집어삼키고 담백하게 대답했다.
자신이 기사라는 말은 부정할 수 있어도 가람이 성녀가 아니라는 말은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미 자신부터가 가람을 거의 신적인 존재로 생각하고 있으니.
“저, 여기 저희가 음식을 준비해 뒀습니다. 좀 드십시오. 다른 여관에 가도 텅 비어 있어서 뭘 사기 힘들 겁니다.”
솔직히 준비해 뒀다기보다 먹다가 남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음식들이었다.
하스펠은 반쯤 비워진 스튜 열매와 다리가 없는 구운 새고기, 너덜너덜한 빵 부스러기를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의 의미를 깨달은 남자들이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그중 한 명이 급히 달려 나가 멀쩡한 음식을 가지고 왔다.
사실 그런 의미로 테이블을 바라본 것은 아니었지만 얼떨결에 대접을 받게 되자 하스펠은 그냥 자리를 뜰 수도 없는 애매한 입장이 되었다.
기껏 구해 온 음식을 필요 없다며 마다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게다가 솔직히 배가 고프기도 했기 때문에 하스펠은 그들과 합석하기로 하고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아직 따듯합니다. 이것도 맛이 꽤 괜찮더군요.”
처음 하스펠의 팔을 잡았던 남자가 새로 구해 온 음식을 내밀었다. 두툼한 크기로 썰려진 모습이 먹음직스러운 햄이었다.
묵묵히 그것을 받아 들어 우물거리는 하스펠에게 모두의 눈이 모여들었다. 무지막지하게 부담스러운 시선이다.
목에 걸릴 것 같은 햄 덩이를 간신히 삼키며 하스펠은 새삼 가람의 대단함을 깨달았다.
겨우 이 정도의 시선에도 부담이 느껴지는데 가람은 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무겁고 많은 시선을 받으면서도 시종일관 초연했던 것이다.
“제 이름은 자람입니다. 그, 동생분께서 치료해 주셔서 겨우 살았습니다.”
안절부절못하고 애타는 표정으로 하스펠을 바라보던 남자 중 하나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러자 둘러앉은 남자들이 용기를 얻었는지 너도나도 입을 열기 시작했다. 모두 묻고 싶은 것이 많은 표정이었다.
“저도요. 정말로 대단하신 분입니다. 만약 저분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저는 이대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저도 그냥 죽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런 기적을 내 눈으로 보는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저어,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두 분께서 어떤 사이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 평범한 남매 사이로는 보이지가 않아서 말입니다.”
털이 숭숭 난 굵은 팔을 수줍게 꼬며 남자가 일렁이는 눈동자로 하스펠을 바라보았다. 순간 속이 조금 거북해진 하스펠은 먹던 음식을 내려놓았다.
“남매가 아닙니다.”
더 이상 남매로 여겨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남자들이 일제히 의아한 표정을 짓는 순간 하스펠은 고백했다.
“저도 당신들과 같이 목숨을 구함 받은 입장입니다. 죽어 가던 저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저 따르고 있을 뿐입니다.”
가람과 자신의 사이를 정의한다면 딱 이 정도였다. 하스펠은 자신이 가람의 곁에서 누구보다 가깝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 실감하며 그 사실에 감사했다.
애초에 가람은 그렇게 있을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함께 지낸 시간에 비해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었지만 적어도 그것만은 확실했다.
하스펠은 그제야 자신의 감정을 깨달았다. 가람을 보호하고 경외하고 숭배하며 감히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고 늘 근처를 맴돌았던 그 마음.
방황하면서도 그녀에게만은 이끌려 가던 그 감정의 정체는 바로 신앙심이었다.
그는 초자연적인 존재인 가람에게 깊이 매혹되어 그녀를 믿고 따르고 싶었던 것이다.
동시에 그녀의 기사가 되고 싶었다. 그녀를 보호하고, 음해하는 이들로부터 그 신성이 손상되거나 위엄이 떨어지지 않도록.
어리석은 인간인 자신이 초월적인 존재에게 품을 수 있는 가장 마땅한 감정이었다.
“으음……. 그런 것치고는 두 사람이…….”
“그러게…….”
“너무 닮지 않았어?”
하스펠의 눈치를 살피며 남자들이 낮게 말을 주고받았다. 하스펠은 그들을 버려두고 배를 채우는 데 주력했다.
가람을 보필하려면 체력을 비축해야 한다.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해서 눈앞이 가물거릴 정도였지만 그래도 기적을 베푸는 가람을 내버려 두고 잠이나 잘 수는 없었다.
3일 동안 아마도 끝없는 여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람의 손을 한 번씩은 다 탔을 것이다.
지금 들어오는 환자들은 모두 밖에 있던 사람들이다. 가람이 치료하고 있는 저주는 이미 리베르튼 전역을 집어삼킨 것이다.
처음에는 여관 안의 사람들, 그다음에는 끝없는 여관의 사람들, 그리고 슬슬 여관 밖의 사람들이 쓰러지고 있으니 하스펠은 그다음 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주의 병마가 길거리의 행인에게 달라붙어 영주 성의 하인을 통해 성안에 퍼져 나갔다면 자연스럽게 영주가 찾아오거나 아니면 가람을 성으로 부를 것이다.
리베르튼의 영주는 탐욕스럽고 계산적인 인물이었다.
대륙을 조율하는 중심지를 맡은 사람답게 처세에 능하고 머리가 좋은 데다 무자비한 성격으로 유명한 그가 마냥 우호적으로 행동할 거라고 예상하는 것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이었다.
그래서 하스펠은 잠을 자라는 가람의 말에도 불구하고 배를 채우자마자 즉각 그녀의 곁으로 가서 호위를 섰다.
그리고 그날 저녁 하스펠의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무장한 영주의 병사들이 좁은 치료소로 들이닥친 것이다.
그들의 방문 목적을 모를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치료소는 순식간에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특히 가람의 추종자 중 몇몇은 결연한 얼굴로 칼자루에 손을 대고 언제든지 뽑아 들 기세였다.
“이곳이 병을 치료한다는 치료사가 있는 곳인가?”
병사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무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아 그들의 대장쯤 되는 모양이었다.
가람은 시선도 주지 않고 불안한 얼굴의 환자의 몸에 축복의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다음.”
사실 가람은 이들이 끝없는 여관의 거리에 발을 디딜 때부터 알고 있었다. 멀리서 느껴지는 웅성거리는 기척과 걱정스러운 수군거림으로 예상하던 것이 왔음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뭐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하스펠도 예상했던 일을 가람이 예상하지 못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당신이 치료사로군.”
병사는 가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어두컴컴한 지하 여관에서 가람이 축복을 내릴 때 나타나는 빛은 정말로 눈에 띄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가람은 그 말에도 대꾸 없이 환자를 치료하는 데 여념이 없었고, 결과적으로 병사의 말은 그대로 무시당했다.
“이봐…….”
말로만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된 병사가 가람의 팔이라도 잡기 위해 다가서는 순간 그녀의 주변에 서 있던 남자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쇳소리에 귀가 아플 지경이다. 순식간에 시퍼런 칼날이 여관 안에 꽉 차자 분위기가 살벌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
예상치 못한 적대적인 반응에 병사가 얼빠진 소리를 내며 반 발자국 물러섰다. 그러나 곧 스스로의 행동을 자각하고 얼굴을 시뻘겋게 붉혔다.
명색이 기사인 자신이 어중이떠중이가 집단으로 칼을 좀 뽑았다고 물러선 것이 매우 창피했기 때문이다.
당장에라도 부하들에게 제압할 것을 명령하고 싶었지만 그가 이곳에 온 목적은 싸움이 아니었다.
게다가 싸워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인내였다.
“이보시오. 말도 들어 보지 않고 너무한 것 아니오?”
검을 빼 든 남자들 중에는 병사가 아는 얼굴도 있었다. 치안 관리를 하며 인사를 주고받던 남자도 있고, 관문을 지나칠 때마다 도장을 찍어 주었던 상인도 보였다.
싱글싱글 웃으며 고생한다고 할 때는 언제고, 본론도 꺼내기 전에 날붙이부터 내미는 행동에 병사는 서럽다 못해 배신감까지 느껴졌다.
“말하세요. 다들 검 집어넣으시고. 다른 사람 베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좁은 곳에서 칼을 빼 드시나요.”
병사의 억울해하는 말에 가람이 심드렁하게 사람들을 말렸다. 그러나 그 효과는 대단해서 순식간에 모든 검이 칼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병사가 들이닥쳤다는 소문을 듣고 모여든 사람들이 여관을 포위할 정도로 불어나 웅성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병사들은 사실상 진퇴양난의 위기에 빠져 있었다.
아무리 상대가 어중이떠중이라도 수가 이만큼이나 차이가 나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영주님께서 아프십니다. 저희와 함께 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정말로 맞아 죽겠다는 생각이 든 병사가 말투를 바꾸어 공손하게 말했다. 그 말에 군중들이 대거 야유했다.
그러나 익히 예상했던 반응이기 때문에 병사는 당황하지 않았다. 기껏 살려 놓은 사람들이 영주의 병사들에게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면 가람은 분명 동행할 것이었다.
그녀의 추종자가 많다곤 해도 영주가 무력을 행사한다면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 사람들을 다 버리고 갈 수는 없어요.”
가람은 딱 잘라 대답했다. 그 매몰찬 반응에 병사는 조금 당황했다. 자신을 싸고도는 추종자들을 믿는 것인가?
항간에 퍼진 성녀라는 소문으로 마냥 착하고 상냥한 여자를 상상했던 병사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어쨌거나 거절한 이상 계속 권한다면 군중들의 분노만 불러올 뿐이다.
파견단으로서 최소한의 병사들만 끌고 온 것이었기 때문에 지금 전투를 치르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나기로 결정했다.
“뜻이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영주님에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의외로 꽤 신사적인 태도였다. 감히 이렇게 나오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는 식의 협박 정도는 할 줄 알았던 가람은 병사들이 순순히 물러나자 그에 대한 평가를 조금 수정했다.
“보내면 안 됩니다.”
막상 병사들이 물러나려고 하자 내내 침묵하고 있던 하스펠이 입을 열었다. 어수선하게 길을 터 주던 사람들이 그 말에 멈춰 섰다.
애매모호한 대치 상황 속에서 하스펠이 날카로운 눈으로 병사들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보내면 지원군을 데려올 겁니다.”
“괜찮아요. 그냥 가라고 하세요.”
“지금이라면 몰라도 지원군이 온다면 손쓸 수 없습니다.”
“괜찮아요. 가게 둬요. 갈 수 있다면 말이죠.”
가람의 의미심장한 말 속에 무언가 있다고 생각한 하스펠이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귀 기울여 듣던 군중들은 가람이 보내 주라고 거듭 말하자 주춤주춤 물러서 길을 터 주었다.
그리고 병사들이 물러난 후 다시 지루한 치료가 계속되었다. 줄 지어 들어오는 환자들에 발맞춰 축복의 빛이 이어진다.
“가서 주워 오세요.”
묵묵히 치료를 이어 가던 가람이 불쑥 입을 열었다. 하스펠은 알 수 없는 말에 어리둥절해하다가 가람이 여관의 입구를 턱짓하자 얼떨결에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그는 여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쓰러진 몇 명의 병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순간 군중들에게 구타당하기라도 한 건가 하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 본 하스펠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영주가 걸릴 정도로 깊숙하게 침투한 저주가 병사들에게 손을 뻗지 않았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스펠은 식은땀을 흘리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닥을 기어 다니는 병사들을 바라보며 그제야 주워 오라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이럴 수가.”
아연하게 제 수하들을 내려다보는 대장에게 흘긋 시선을 던진 하스펠은 쓰러진 병사를 둘러메고 치료소로 옮기기 시작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그 모습을 바라보던 다른 병사들도 눈치를 살피다가 치료소 안으로 따라 들어왔다.
그렇게 순식간에 동료가 쓰러질 줄은 몰랐는지 병사들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차마 말을 못 하고 쭈뼛쭈뼛 눈치를 보는 병사들을 가람이 눈짓으로 불러 세웠다.
그녀의 반응에 병사들은 큰 다툼 없이 원만하게 물러났던 것을 새삼 다행으로 생각했다.
만약 협박과 싸움으로 상황을 해결하려고 했다면 절대로 치료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가람은 아무 말도 없이 고통스러워하는 병사들을 모두 치료해 주었다. 축복을 내리는 데 필요한 시간은 2초도 되지 않아서 크게 부담되는 일은 아니었다.
가람은 1분에 약 여섯 명의 환자를 치료할 수 있었고, 그나마도 그 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환자가 옮겨 오고 떠나가는 동안의 시간이었다.
“굉장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고통에 병사가 얼빠진 감탄사를 터뜨렸다.
다른 환자들을 치료하는 모습을 볼 때는 그래도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기적을 직접 체험하고 나니 경이로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음.”
가람의 말에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는 병사를 옆에 서 있던 사람들이 끌어냈다.
마침내 여관 안에 있던 모든 환자들의 치료가 끝나고 다음 환자들이 들어오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생기자 가람은 멀쩡하던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왜…… 그러십니까?”
겉으로만 공손하던 말투는 확연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오자 가람은 멀쩡한 병사들에게도 손을 뻗어 축복을 걸어 주었다.
“아직 증상은 안 나타났지만 당신들도 이미 걸려 있었어요.”
병사들은 며칠 전부터 묘하게 무거웠던 몸이 한결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단순히 피로라고 생각했지만 자신들도 걸려 있었다니.
한순간에 쓰러지던 동료들의 모습이 떠오른 그들은 섬뜩함과 안도를 동시에 느꼈다.
“치료는 했으니 이제 걱정 안 해도 돼요, 그리고 영주가 죽기 전에 데려오는 게 좋을 거예요.”
영주의 죽음이라는 말은 경이로움에 젖어 넋을 빼고 있던 병사들을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기 충분한 말이었다.
급히 감사 인사를 한 병사들이 서둘러 성으로 돌아가는 동안 가람은 다시 밀려오는 환자들에게 축복을 쏟아부었다.
간간이 하스펠이 걱정스런 시선으로 여관 문을 바라보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가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영주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