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231화 (231/256)

32화

병사들의 진심 어린 호소가 통했는지, 아니면 협박이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꽤 조용한 행차였다.

가람은 등 뒤의 하스펠이 한껏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 들 듯한 느낌이었다.

설마 하긴 했지만 정말로 영주가 보통 사람들에 섞여 축복을 기다릴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숨죽여 소곤거린다.

아무리 작게 떠들어도 들리지 않을 리가 없는데 영주는 그 모든 수군거림을 묵인하고 있었다.

“다음.”

소곤거리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영주의 차례였기 때문이다. 간간이 영주를 치료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치료가 끝나면 어떻게 태도를 바꿀지 모른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리고 그 의견에는 하스펠도 깊이 동감하는 바였다.

그 모든 우려를 뒤로하고 가람은 천천히 자신에게 걸어오는 영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뺨의 피부가 썩어 치아가 드러나는 것을 보아 이미 저주가 꽤 진행된 모습이다.

보통 이 정도로 진행되면 고통이 극심한 나머지 들것에 실려 오거나 친지에게 업혀 오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영주는 부축도 마다하고 끝까지 제 발로 걸어와 가람의 앞에 마주 앉았다. 그 꼿꼿한 태도가 가람은 꽤 인상적이었다.

“부탁하지.”

영주의 짙은 눈썹 아래로 날카로운 눈동자가 번뜩였다. 가람이 축복을 위해 손을 뻗자 여기저기서 단말마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영주를 치료하면 안 된다는 외침이었다. 그러나 가람은 잠깐의 머뭇거림도 없이 영주를 축복하고 그의 썩은 몸을 깨끗이 아물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었다. 수많은 걱정이 무색하게도 영주는 스스로의 몸을 한 번 돌아보고 가람과 하스펠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떠나기 전, 치료가 다 끝나면 성에 한번 들러 달라는 말을 남길 뿐이었다. 그것도 아주 신사적인 태도로 말이다.

* * *

“가실 겁니까?”

하스펠이 질문했다.

언뜻 불성실해 보이는 자세로 환자들을 축복하던 가람은 고개만 들어서 그를 잠깐 쳐다보았다가 다시 길게 늘어졌다.

반쯤 눕다시피 한 상태로 축복을 내리고 있는데도 가람의 위명이 땅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정말로 신기한 일이었다.

하긴, 목숨을 살려 줬는데 누워서 축복을 내리든, 물구나무서서 축복을 내리든 그게 대수겠는가?

영주를 치료해 준 날로부터 벌써 열흘의 시간이 지났다. 가람은 그동안 정말로 먹지도 자지도 않으며 내내 축복을 쏟아부었다.

그 결과 리베르튼의 인구 중 7할을 치료하는 기염을 토할 수 있었는데, 리베르튼이 대륙의 중심지인 대도시니까 열흘이나 걸렸지 아마 작은 마을이었다면 이틀 만에 모든 사람을 치료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쯤 되자 찾아오는 환자의 숫자도 반 토막이 나서 비교적 수월하게 치료를 할 수 있었다.

대충 상황을 보니 약 이틀 정도만 더 하면 완전히 끝날 것 같았다. 아마 하스펠이 새삼스럽게 영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도 이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사실 가람은 영주의 말을 반쯤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났다고 해도 별로 갈 마음은 없었다.

성가신 일에 휘말리는 것은 사양이고,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수습하고 나면 패스가 충전되는 대로 떠날 계획이었다.

게다가 권력자들은 신기한 것이 나타났다 하면 그것을 이용하지 못해 안달이 나는 고질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성을 방문하는 것은 아마도 대단히 유쾌하지 못한 경험이 될 확률이 높았다.

심지어 가람은 그냥 신기한 정도로 끝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으니 실제로 가람은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바와 다름없었다.

그녀를 열렬히 따르는 추종자만 1만은 넘는 숫자일 테고, 그녀에게 직접 은혜를 입은 사람들과 그의 가족들까지 헤아리면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숫자가 완성된다.

그 숫자에 힘입어 어느새 전설이 되어 버린 가람의 이야기는 확대되고 과장되어 바람처럼 퍼져 나가고 있었다.

이쯤 되면 무슨 종교라도 하나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리베르튼에 성녀가 나타나 도시를 구원했다는 내용의 비교적 명쾌한 사실의 소문은 이튿날 가람이 병마에 목숨을 잃은 사람을 살려 냈다고 과장되었고, 하늘에서 쏟아지는 축복의 비를 보았다는 사람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나더니, 곧 경쟁적으로 스스로가 본 기적을 더욱 과장하여 떠들어 대면서 손쓸 수 없는 지경까지 발전했다.

그런 상황에서 영주의 요청에 응하는 것은 기름을 끼얹은 짚을 짊어지고 불길에 뛰어드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안 갈 거예요.”

가람의 대답에 하스펠은 조금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경이로운 소문의 주인공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은 정말로 무궁무진하다.

이미 일은 충분히 커졌다. 가람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소문이 사그라질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사람은 의외로 놀라울 만큼 빨리 잊어버리기 때문에 몇 달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마치 없었던 일처럼 화제성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이틀 후 모든 환자를 깨끗하게 치료함으로써 쏟아진 물을 컵에 담는 것에 성공한 가람은 자신을 데리러 온 기사들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안 가요.”

‘미안하지만 못 가겠어요.’라든가 ‘안타깝게 되었네요.’ 따위로 둘러말하지도 않는 확실한 직구였다. 그 거절에 두 기사는 익히 예상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시지 않으면 영주민들에게 큰일이 닥치게 됩니다.”

갈색 머리의 주근깨가 가득한 기사가 조용히 말했다.

협박인가? 가람은 잠시 생각하다가 콧방귀를 뀌었다. 영주가 제 영지의 사람들에게 해를 끼쳐 봐야 영주 본인의 손해다.

가람은 치료하느라 방치해 뒀던 쿠션의 깃털을 손질하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저랑은 상관없는 이야기네요.”

두 기사는 잠시 곤란한 시선을 교환했다. 밤낮없이 사람을 치료한 가람의 소문은 이미 듣고 눈으로 봐서 알고 있었다.

그토록 헌신적인 사람이니 이 말을 꺼내면 순순히 따라가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상황이 영 수월하지가 않다.

“사람들을 구원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사람들이 그대로 목숨을 잃어도 괜찮으시다는 말입니까?”

검은 머리의 기사가 재차 가람에게 호소한다. 그건 아니었다.

저주가 도시에 퍼진 일에 본인의 책임을 느끼고 사람들을 치료한 거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살린 사람들이 남의 손에 죽는 일이 달가울 리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영주가 제 손으로 자기 도시의 사람들을 죽일 리가 없으니 그 말에 넘어가지 않는 것뿐이었다.

“제가 안 가면 사람들을 죽이겠다는 협박을 할 만한 사람으로는 안 보였는데. 실망이군요.”

가람의 말에 기사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잠깐, 무언가 오해하고 계신 것 같은데 협박이 아닙니다. 영주님이 사람들을 해치는 것도 아니고요.”

진지하게 말한 갈색 머리 기사는 문득 하스펠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주근깨가 가득한 콧등을 찡그렸다.

눈을 가늘게 뜨고 무언가 기억해 내려고 노력하던 그는 이윽고 뭔가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가람과 하스펠을 번갈아 보았다.

“그럼 뭐죠?”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읽어 기사들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확인한 가람이 묻자 갈색 머리 기사가 대답했다.

“델리움에 소문이 닿았습니다. 일이 아주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건 아셔야 합니다.”

그렇게 말한들 이쪽 세계의 정세에 무지한 가람이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내내 침묵하고 있던 하스펠이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다. 가람이 눈치채지 못한 무언가를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가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네? 방금까지 반대했잖아요.”

“예. 리베르튼 영주는 계략에 능하고 탐욕스러운 인물이라 조심하는 편이 좋으니까요. 하지만 델리움의 이름이 나온 이상 이 일은 정말로 심각한 일일 확률이 높습니다.”

“계략에 능하고 탐욕…….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렇게 안 보였는데.”

대놓고 제 주인의 험담을 듣게 된 두 기사가 조금 당황하더니 억울한 목소리로 항변해 왔다. 심지어 검은 머리는 조금 울컥한 기색이었다.

“그런 소문이 있긴 하지만 주인님은 정의롭고 명석하신 분입니다. 간혹 도시를 지키기 위해 좋지 않은 소문이 나도록 행동하시긴 하지만, 리베르튼의 영주가 무르고 착한 사람이라고 알려졌다면 벌써 대륙은 전쟁 중이었을 겁니다.”

“흐음.”

가람이 시큰둥한 얼굴로 오리를 쓰다듬자 기사들은 얼굴까지 붉히면서 리베르튼 영주를 변호했다. 둘 다 자신이 모욕받은 듯이 흥분하고 있었다.

“알겠어요. 일단은 하스펠도 저렇게 말하니 따라가죠.”

그 말에 갈색 머리 기사는 또 한 번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무언가 질문하려는 듯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그냥 몸을 돌려 마차로 가람을 안내했다.

영주가 보내 준 마차는 여섯 마리 말이 끄는 커다랗고 근사한 것이었다. 마차의 안쪽에는 누울 수 있을 정도로 길고 넓은 의자가 붙어 있었는데 희고 푹신푹신한 털가죽이 깔려 고급스럽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한쪽에는 호사스러운 술과 음식이 놓여 있었다.

가람은 굳이 사양하지 않고 술병을 따서 마시기 시작했다. 도수가 낮은 과실주로, 제법 맛이 좋았다.

“안에 있는 음식은 가시는 동안 드시라고 준비……. 아, 이미 먹고 계시군요.”

마차의 창문을 통해 가람에게 말을 건네던 검은 머리 기사가 술잔을 흔들어 보이는 가람을 보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가람에게 축복을 받아 저주에서 풀려난 사람 중 한 명이었지만 저주가 발동하기 전에 받은 것이라 약간 신기하다는 감정이 있을 뿐 그녀의 추종자는 아니었다.

마차 안에서 뒹구는 가람을 보며 그는 가람이 절대로 귀족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마차에 쿠션과 이불을 묶고 출발할 준비가 끝나자 말들이 걷기 시작했다.

잘 만들어진 마차인지 창밖을 보지 않으면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덜컹거림이 없었다.

하긴, 흔들리는 마차에서 술을 마시길 권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싼 모피에 술을 쏟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무슨 걱정 있어요?”

잔에 술을 따라 내밀며 가람이 질문했다. 델리움이라는 이름을 들은 이후부터 하스펠은 시종일관 어두운 얼굴이었다.

그는 술잔을 받아 들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웃음이라기보다 안면 근육의 기능을 확인해 보는 느낌이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건 바보였다. 하지만 가람은 구태여 캐물어 그를 불편하게 하지 않기로 했다.

숨기고자 한다면 숨기고 싶은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것이 가람에게 크게 해를 끼치지 않는 일이라면 당사자를 존중해 주는 것이 좋다는 게 가람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 세상에 가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일은 얼마 되지 않는다.

때가 되면 말하겠거니 하고 가람은 술을 맛보는 데 집중했다. 달콤한 과실주라서 꽤 취향에 맞았다.

하스펠도 마찬가지로 술을 마시고 있긴 했지만 가람과 달리 그의 표정은 매우 씁쓸했다. 홀로 다른 술을 마시고 있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리베르튼 영주에 대해서 꽤 확고한 견해를 가지고 있던데 아는 사람이에요?”

좋지 않은 생각은 깊게 하지 않는 편이 좋다. 하스펠의 얼굴이 먹구름이 끼다 못해 천둥 벼락이 칠 것처럼 우중충해지는 것을 발견한 가람은 일부러 그를 배려해 적당한 질문을 던졌다.

솔직히 별로 궁금한 것은 아니었다.

“아주 모르는 사이는 아닙니다.”

잠시 망설이던 하스펠은 애매하게 대답했다. 얼굴은 여전히 심각한 상태였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마시고 있는 술보다 좀 더 강한 것이 필요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

“친하지는 않다는 이야기군요.”

“그렇습니다.”

담담히 긍정하는 하스펠에게 가람은 옆에 놓여 있던 치즈를 잘라 내밀었다.

“사이가 나빠요?”

“그런 것을 논할 정도로 교류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스펠은 가람이 내민 치즈를 받아 들고 내려다보았다. 치즈를 향해 시선을 두며 심각하게 말하는 모습이 조금 우스꽝스러웠지만 가람은 웃지 않았다.

“그런 것치고는 평이 아주 박하던데. 탐욕스럽다고 했었나요?”

치즈를 입 안에 던져 넣은 하스펠은 잠시 그것을 우물거리며 대답을 미루었다. 그리고 마지못한 얼굴로 가람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저 항간에 알려진 소문에 따르면 그렇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굉장히 껄끄러워 보이는데요.”

질문하며 가람은 문득 생각했다. 자신이 지금 캐묻고 있는 건가?

“딱히 그와의 사이 때문은 아닙니다. 신경 쓰이게 해서 죄송합니다.”

내가 캐묻고 있었군. 애매모호한 하스펠의 대답에 가람은 깨달음을 얻었다. 아닌 척하면서 하스펠은 대답을 계속 피하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스펠은 영주와 자신이 관련된 이야기를 불편해했다. 정도가 심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달가워하는 기색은 아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음. 만약 소문 그대로라면 저를 이용하려고 하는 거겠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