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232화 (232/256)

33화

가람은 다시 화제를 돌리기로 결정했다. 하스펠이 아니라 자신에 관한 것으로. 그러자 하스펠의 얼굴이 한결 풀어졌다.

“아마도…….”

“정말로 그렇다고 해도 순순히 이용당하지는 않을 거예요.”

입 안 가득 술을 머금었다가 꿀꺽 삼키며 가볍게 말하는 가람에게 하스펠의 걱정스런 시선이 날아든다.

“그래도 조심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가람은 대답 대신 그저 소리 없이 웃었다. 이런 상황은 아주 익숙했다.

가람이 보여 주는 능력에 눈이 돌아가 그녀를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이 지금까지 한둘이었겠는가?

그 영주가 아무리 능구렁이 같다고 해도 자신의 상대는 못 된다. 솔직히 가람은 진지하게 상대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사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그 영주가 알몸으로 춤추면서 태어났을 때부터 있었던 일을 모두 다 노래하게 할 수도 있으니까.”

반사적으로 그 광경을 떠올린 두 사람은 동시에 얼굴을 찌푸렸다.

“뭐,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진 않으니까 실제로 하진 않을 거지만.”

가람이 덧붙이며 다시 술을 마셨다. 하스펠은 설마 하면서도 어느 정도 납득했다. 가람이 보여 준 명령하는 능력. 그것이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아, 델리움에 소문이 닿았다는 건 무슨 뜻이죠? 일이 아주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건 또 무슨 말이고? 그 말을 듣고 갑자기 태도를 바꿨잖아요. 돌아가는 상황 설명 좀 해 줘요.”

가람의 능력이 대체 어느 정도일까 하고 하스펠이 고찰에 빠지려는 순간 가람이 적절하게 질문을 던졌다.

아무래도 아는 것이 없으니 가는 동안 하스펠에게 설명을 들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델리움은 신성 제국의 수도이자 북부의 핵입니다. 델리움에 소문이 닿은 것뿐이라면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만, 그들이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면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심각할 것 있어요? 사람들이 아팠고 그냥 나는 치료해 준 건데. 엄밀히 말하자면 내 실수를 그냥 내가 수습한 거지만요.”

완벽하게 자신의 실수는 아니었지만 가람은 어떤 일에 일정 부분 자신의 책임이 있는 이상 바로잡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존재가 될 수 없을 바에는 적어도 피해는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델리움 교도가 아닌 누군가가 강력한 권능을 내보이며 민중을 휘어잡는 것은 그들에게는 큰 문제이지요. 게다가 그 권능이 발현된 곳이 대륙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라면 더더욱 말입니다.”

하스펠은 조금 불편한 얼굴이었지만 대충 가람이 알아들을 수 있게 이야기를 해 주었다.

가람은 그 이야기에서 귀찮아질 것 같은 냄새를 맡았다.

“아아, 그러니까 사람들의 신앙심이라는 파이를 내가 쪼개어 갈까 두렵다?”

가람이 가소로운 얼굴로 코웃음 쳤다. 뭐, 예상하지 못했던 바는 아니다.

“아마도……. 제 예상은 대충 이렇다는 겁니다. 사실은 다를 수도 있지요.”

하스펠은 조금 자신 없는 태도로 말을 맺었다. 가람은 확실히 해 둘까 해서 술잔 속의 술을 빙글빙글 돌리며 툭 질문했다.

“그거랑 리베르튼 영주가 나를 초대한 건 역시 관련이 있겠죠?”

“예.”

흐음 하고 가람이 마차 안에 놓여 있는 쿠션에 깊게 몸을 파묻었다.

리베르튼에 기적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델리움에 닿았다. 그리고 델리움은 그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기사가 전한 말이다. 그리고 영주는 그 일과 관련해서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생각할 수 있는 것 중 가능성이 높은 것은 두 가지다.

어쩐지 심기가 상해 보이는 델리움의 지배자들을 위해서 자신을 붙잡아다가 곱게 바치는 것,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자신을 이용해 패권을 잡으려고 시도하는 것.

후자의 경우라면 정말로 멍청한 짓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리한 생각도 아니다.

영주는 자신을 그저 치료나 하는 무력한 여자로 생각하고 있을 확률이 높으니까. 매질을 하든, 협박을 하든 되는대로 구워삶을 수 있을 거라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 기사들이 했던 말도 신경 쓰였다. 세간에 알려진 소문과 같은 인물이 아니라고 했던가.

어쩌면, 아주 정말로 말도 안 되게 희박한 확률로 그가 정의롭고 선하고 속이 시커멓지 않은 권력자 중 하나라서 그냥 단순히 자신에게 위험을 알리고 도시의 사람들을 치료해 준 것에 감사하기 위해 초대를 하는 것일지도.

가람은 피식 웃어 버렸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영주는 악당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선량하고 착한 인물도 아닌 것 같았다.

초대의 목적은 아마 높은 확률로 자신을 이용하는 것이겠지. 뭐, 진짜 그가 어떤 목적으로 이런 일을 벌였는지는 식사 시간이 되면 알 수 있겠지만.

가람은 창문 틈으로 보이는 풍경에 시선을 던졌다.

멀리 성이 보였다. 한참 온 것 같은데도 아직 성이 저렇게나 작다니. 리베르튼이 커다란 도시이기는 한 모양이다.

가람이 조금 무료하다고 생각할 무렵, 내내 침묵하고 있던 하스펠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마차 안이 아주 조용했기에 망정이지 평소라면 듣지 못했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그리고 하스펠을 보는 순간 가람은 앞으로 있을 일을 눈치챘다. 저건 뭔가 고백하려고 하는 표정이군.

“제가?”

하스펠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혀를 내밀어 입술을 적셨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모양이었다.

대체 얼마나 거창한 말을 하려고 하기에 그러나 싶어서 가람은 담담하게 기다려 주기로 했다.

“제가 만약 가람이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어쩌시겠습니까?”

질문은 가람을 조금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솔직히 가람은 하스펠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었다.

잠깐잠깐 그의 과거나 정체에 대해서 추측해 보긴 했지만 별로 진지한 것은 아니었다.

가람이 대답 않는 것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해서라 해석한 하스펠이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덧붙였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사람도 아니고, 정의롭지도 않은. 오히려 악한에 가까운 사람이라면…….”

말이 이어질수록 대화가 점점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멀어지고 있는 것을 깨달은 가람이 급히 입을 열었다.

“어. 잠깐잠깐, 하스펠. 잠깐만요. 전 당신을 정의롭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예?”

독설에 가까운 직설에 하스펠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멍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하스펠에게 가람은 다시 친절하게 또박또박 말해 주었다.

“당신을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 없다구요.”

“그러면…….”

“당신에 대해서 뭔가 생각한 적도 솔직히 거의 없어요. 이렇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관심도 없구요. 그러니까 내 앞에서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돼요.”

“어…….”

하스펠은 할 말을 잊어버린 얼굴이었다. 예상했던 것과 너무나 다른 반응이라 머리가 멈춰 버린 모양이었다. 가람은 그가 다시 쓸데없는 생각을 하기 전에 쐐기를 박듯 덧붙였다.

“그리고 내가 악마라고 생각하면서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거래를 하려고 했던 사람을 뭐라고 생각할 거라고 기대한 거예요?”

약간의 한심함까지 담긴 가람의 말에 하스펠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그런데도 제가 따르는 것을 허락해 주신 겁니까?”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의 눈동자는 격랑 속을 헤매는 조각배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가람은 술잔을 들어 보이며 가볍게 으쓱였다.

“허락이고 뭐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런 거에 신경 안 써요.”

“제가, 제가 정말로 그런 악한이라도 저를 버리지 않으실 겁니까?”

버리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가람은 주운 적도 없다고 대답하려다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침묵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가람은 배에 칼을 꽂고 있던 하스펠을 주워 온 것이 맞다. 그 침묵을 긍정으로 생각한 모양인지 하스펠은 감동 어린 표정으로 가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결 홀가분해진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는 진정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어쩐지 초점이 조금 안 맞는 대화를 한 것 같았지만 가람은 하스펠의 얼굴에서 먹구름이 사라진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지나치게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조금 신경 쓰이기는 했으나 딱히 묻지는 않았다.

대충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뭔가 낯간지러운 소리가 돌아오겠지.

“뭐……. 잘됐네요.”

가람이 떨떠름하게 대답하는 순간 마차의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이 멈췄다. 가람은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갈색 머리 기사가 문을 열고 정중한 태도로 허리를 숙였다.

“도착했습니다. 내리시면 저희가 안내하겠습니다.”

가람은 그가 내미는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날은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검을 꽂아 놓은 듯이 날카로운 성탑 꼭대기에 별이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근사한 성이네요.”

성벽 곳곳에 세심하게 내걸린 등불과 성을 만드는 데 쓰인 재료 중 금속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외양을 훑어보며 가람이 칭찬했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맛은 없지만 그 웅장함만으로 충분히 멋진 성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쪽 세계에 와서 성을 방문하는 것은 처음이다.

“감사합니다. 영주님은 안쪽에 계십니다.”

마차에 걸려 있던 등불을 떼어 손에 든 갈색 머리 기사가 은근히 재촉했다.

그 말에 걸음을 옮기며 가람은 검은 머리가 서둘러 성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아마도 영주에게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검은 머리가 안으로 들어가자 소식을 들은 하인들이 줄 지어 밖으로 나와 가람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마치 기사처럼 도열한 하인들은 가람이 그 사이로 걸어 들어오자 일제히 허리를 숙여 정중하기 짝이 없는 인사를 했다.

그 모습에서 가람은 영주가 자신을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지나가듯이 한번 들러 달라고 하기에 반쯤 빈말인 줄 알았는데 꽤 의외였다.

하긴, 기사들을 보내온 것부터가 빈말이 아니라는 뜻이겠지만.

활짝 열린 내성의 입구로 들어선 가람이 가장 먼저 본 것은 흠 하나 없이 깨끗하게 깔린 푹신한 고동색 카펫이었다.

밟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고급품이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 가람은 기꺼이 지저분한 신발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카펫 위로 발자국을 찍으며 걸어 들어가자 등 뒤로 문이 닫히는 기척이 느껴졌다.

무거운 문이 끌리는 소리와 쿵 하고 울리는 감각이 마치 가두어진 것 같은 압박감을 느끼게 한다.

가람은 돌아보는 대신 정갈한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꽤 고급스러운 하인복을 입은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다른 사람들보다 나이가 있는 편이다.

어쩌면 영주와 비슷한 연배일지도 모른다. 가람이 고개만 끄덕여 알겠다는 뜻을 내비치자 남자는 기사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영주님께서 대식당으로 안내하라고 하셨습니다.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낮부터 내내 기다리고 계셨답니다. 융숭한 대접을 위해서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니, 부디 맘에 드셨으면 좋겠군요.”

남자는 자기소개도 생략하고 서둘러 걸으며 본론을 꺼냈다. 남자의 등을 따라 걸으며 가람은 묵묵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와 걷는 내내 사방에서 흘긋거리는 시선이 날아들었다. 앞의 남자 때문인지 대놓고 보는 사람은 없었지만 살짝 열린 복도의 문틈이나 계단 위쪽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한두 개가 아니다.

가람의 방문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영주뿐만은 아닌 것 같다. 힐긋거리는 시선은 아마도 성내에 있는 가람의 추종자일 것이다.

시선이 성가시긴 했지만 가람은 일부러 벽에 걸린 명화와 검들을 보며 모르는 척했다.

그림은 모조리 전쟁이나 전투 장면을 그린 것들이고, 검은 장식적인 용도임에도 불구하고 모두 날이 세워져 있는 것들이다.

이 땅이 어떤 시간을 견뎌야 했는지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었지만 하스펠은 날 선 검들이 주르륵 늘어선 길을 걷는 것이 몹시 불편한 기색이었다.

“괜찮아요?”

하스펠이 굳은 얼굴로 땀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에 가람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딱히 덥지도 않은데 얼굴이 다 번들거리도록 땀을 흘리는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다. 앞으로 있을 식사에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이다.

“괜찮습니다.”

“내키지 않으면 그냥 돌아갈까요?”

하스펠은 가람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이 조금 놀란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리고 앞서 걸으며 그 대화를 모두 듣고 있던 남자의 어깨가 조금 굳어졌다.

“아닙니다.”

하스펠의 거절에 가람이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조금 조급한 기색으로 앞에 선 남자가 끼어들었다.

“도착했습니다.”

말하는 동시에 그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입구로 다가가 두 손을 마치 방향 표지판처럼 들어서 안내했다.

가람은 하려던 말을 삼키고 남자가 안내하는 방향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분주하게 음식을 나르던 하인들이 가람을 눈치채고 급히 허리를 숙여 보인다.

가람은 묘한 기분으로 그 인사를 받으며 만찬이 준비되고 있는 식탁 앞으로 걸어갔다.

식탁은 스무 명은 앉을 수 있을 정도로 길고 널찍했다. 줄 지어 놓여 있는 은촛대에는 새 양초가 타오르고 있었다.

식탁 위에는 온갖 과일과 조리된 고기, 빵, 국물이 있는 음식, 볶음 요리가 놓여 있다. 언젠가 먹어 보았던 달랑도 겹겹이 쌓인 그 모습 그대로 접시 위에 놓여 있었다.

“저는 저희 셋만 모이는 건 줄 알았는데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