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233화 (233/256)

34화

의자 등받이를 잡고 반들반들한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가람이 말했다. 이 많은 음식이라니. 영주의 가족들이 모두 참석하는 걸까?

“생각하시는 바가 맞습니다. 세 분만의 식사가 될 겁니다.”

남자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낭비를 할 것 같은 인상은 아니었는데. 가람이 눈을 가늘게 뜨자 눈치 빠르게 남자가 덧붙였다.

“영주님께서는 이 시간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부족함 없이 준비하라 지시하셨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남자는 가람과 하스펠을 테이블 끝 쪽에 마주 보고 앉도록 권했다. 중간의 가장 상석은 영주를 위해서 비워진 것이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음식을 나르던 하인들도 모습을 감추었다.

가람은 음식이 가득한 테이블 너머로 불안과 긴장으로 얼룩진 하스펠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토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염려가 그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가 스스로 입 열지 않는다면 그것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또 다른 압박이 될 수 있다.

가람은 그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사이 남자는 영주를 데려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가람은 하스펠에게서 눈을 떼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식사 시중을 위해 남은 몇 명의 하인과 입구, 창가에 드문드문 서 있는 기사들이 보인다.

서 있는 자세나 쓸데없이 시선을 흘리지 않는 점으로 봐서 아주 잘 훈련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관찰하며 가람은 멀리서 구두 굽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호쾌하고 거칠 것 없는 걸음걸이다.

영주가 분명했다. 그 걸음 소리가 가까워질 무렵 가람은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응시했다.

“내가 기다리게 했군.”

혼자 불쑥 문을 열고 나타난 영주가 가람과 눈을 마주치곤 조금 겸연쩍게 입을 열었다.

그는 예의 구두 굽이 바닥을 치는 소리를 내며 자연스럽게 상석에 앉았다. 그리고 가람과 하스펠을 번갈아 보며 음식을 권했다.

“자, 격식은 신경 쓰지 말고 먹게나. 부담 가질 것 없네.”

가람은 영주의 기이할 정도로 새파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촛불의 따듯한 색감 때문인지 영주의 인상이 조금 달라 보였다. 진갈색 눈썹 아래의 날카로운 눈은 여전했지만 날은 서 있지 않았다.

“오늘 두 사람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조리장에게 힘을 좀 쓰라고 했지. 먼저 부드러운 호박수프로 속을 달래는 것도 좋겠군. 아, 술 좋아하나?”

“좋은 술이라면 사양하지 않죠.”

가람의 대답에 영주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가볍게 턱짓해 하인들에게 시중을 시작할 것을 명령했다.

하인들이 세 사람의 앞에 호박수프를 덜어 내려놓고 술잔을 채워 준 뒤 물러나자 본격적으로 만찬이 시작되었다.

호박수프는 고소하고 부드러운 맛으로 호박죽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단맛이 전혀 없는 대신 배 속을 진정시키고 식욕을 돋우는 효과가 있었다. 아주 만족스러운 맛이었기 때문에 가람은 깔끔하게 그릇을 비울 수 있었다.

가람이 그릇을 비우는 것을 주의 깊게 살핀 영주는 한결 안심한 얼굴로 엷게 웃었다.

“음식이 입에 맞는 것 같아 다행이군. 다음은 생선을 먹어 보지. 리베르튼의 파암해는 깊고 파도가 거칠어서 배를 띄울 수는 없지만 낚시는 할 수 있지. 아무나에게 허가를 해 주진 않지만, 원한다면 한번 해 볼 수 있게 해 주겠네.”

영주가 선심 쓰듯 말했지만 가람은 고개를 저었고 하스펠은 침묵했다. 영주는 잠시 하스펠을 바라보다가 가람에게 빙긋 웃어 보였다.

“원치 않는다니 아쉽군.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는 일단, 내 도시의 시민들을 치료해 주고 나를 치료해 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리베르튼의 영주로서 깊은 감사를 표하는 바네.”

말을 마친 그는 깊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가람은 느릿하게 입 안의 음식을 씹으며 눈을 깜빡이다가 가볍게 말했다.

“별말씀을요.”

생각보다 예의 바른 태도다. 가람은 영주에 대한 평가를 조금 수정했다. 물론 무뢰한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고압적인 자세로 나올 것을 예상했던 것이다.

처음 기사를 보내 자신을 데려가려고 했던 그의 행동은 그런 인상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그나저나 정말 조용하군. 아까부터 나만 떠들고 있는 것 같은데, 원래 이렇게 말이 없나?”

음식을 나누어 주는 하인들은 마치 유령처럼 조용하고 가람은 짧은 대답만 할 뿐인 데다 하스펠은 그 대답조차 하지 않으니 목청 좋은 영주의 목소리가 대화 속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그는 어울리지 않게도 내내 시답잖은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가람은 입 안의 음식을 천천히 씹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낚시라든가 가람이 시민들에게 얼마나 화젯거리가 되고 있는가 따위를 즐겨 떠들 만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실제로 영주는 그런 사람도 아닐 것이다. 그가 화제를 끌어오는 방식에는 익숙지 않은 사람만이 가지는 특유의 어색함이 있었다.

허언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 계속해서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고 있다면 그 이유는 하나뿐이다.

본론이 없거나, 혹은 본론을 꺼내는 것이 아주 불편하거나. 영주가 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는 것에 가람은 지금 마시는 술을 걸 수도 있었다.

“과묵해 보이셨는데 의외로 말이 많으시군요.”

가람의 담담한 말에 영주의 표정이 설핏 굳어졌다. 그런 말은 태어나서 처음 들어 본다는 표정이었다.

잠시 아연해하던 그는 가람의 냉정한 시선을 발견하고 뚝 멈춘 듯이 침묵했다. 그리고 돌연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 나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배짱이 아주 두둑한 아가씨로군.”

그가 웃거나 말거나 가람은 하인이 덜어 준 달랑을 맛보고 있었다. 존 라드의 뒷골목에서 맛본 달랑에 비교하면 실망스러운 수준의 맛이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맛은 있었다.

다만 너무 새콤했다. 가람은 더 먹지 않고 남은 달랑이 놓인 접시를 한쪽으로 밀어 두었다.

“그래, 젊은 아가씨라 수다를 좋아하지 않을까 했는데 내 오판이었군. 사과하지.”

영주는 가람을 똑바로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그가 이런 식으로 웃어 보인 것은 벌써 두 번째다.

그리고 두 번 다 눈가에 웃음기라곤 없었다. 입매만 움직여 웃는 모양을 만들어 보인 것이다. 그 웃음은 송곳니를 감추기 위한 것인가.

“별말씀을.”

가람이 짧게 대답하며 하인이 달랑을 가져가고 새로운 음식을 앞에 놓아 주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럼 피차 시간 낭비 하지 말고 본론을 꺼내는 게 좋겠군.”

영주는 깍지 낀 손을 괴고 그 너머로 가람을 지그시 응시했다.

손이 입을 가렸기 때문에 가람은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집요한 시선만으로 충분했다.

“자네에게 아주 궁금한 게 많아. 일단은, 그래. 어디 출신이지? 외모를 보면 델리움 사람인데, 행동을 보면 그게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하긴, 델리움에서 태어나 야탈카로 거처를 옮기는 일이 드문 것은 아니지.”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군요.”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가람은 영주의 반응을 살폈다. 아마도 불같이 화를 내지 않을까 예상하며 그 반응을 기다리는데 뜻밖에도 영주는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였을 뿐이다.

“말하기 불편하다면 어쩔 수 없지. 음, 그러면 그 힘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 그대가 밤낮없이 사람들을 치료했던 그 인간 같지 않은 힘. 그 힘은 언제부터 가지고 있었나?”

“그것도 대답해 주기 힘들군요.”

순간이었지만 영주의 턱이 굳어지는 것을 가람은 보았다. 아마 꽤 인내심을 끌어모으고 있는 모양이다.

하긴, 성격이 좋은 사람이라도 이런 대답을 들으면 기분이 상하기 마련인데 영주라는 신분을 차치하더라도 새파랗게 어린 여자가 툭툭 던지는 말로 대화를 다 잘라먹는 상황에서 화가 나지 않을 리가 없다.

영주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가 입을 다물어 버리자 적막 속에서 분위기는 이를 데 없이 가라앉았다.

한참 후 영주가 이를 악물고 사나운 미소를 지으며 가람을 노려보았다.

“좋군. 좋아. 비밀이 많은 아가씨로군. 그러면 그 기사님은 어떨까? 어째서 새벽의 기사와 함께 다니고 있는지 이야기해 줄 수 있겠나?”

그 순간 하스펠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침착한 척 식사를 계속하고 있긴 했지만 과연 맛이나 느끼고 있을까 싶은 표정이었다. 가람은 하스펠에게 시선을 준 채 되물었다.

“새벽의 기사?”

하스펠의 눈이 덜컹하고 흔들렸다. 뺨이 파리하게 질리고 포크를 쥔 손이 가늘게 떨린다. 그는 눈을 들어 가람을 잠깐 바라본 후 영주를 쏘아보았다.

“이런, 전혀 모르는 표정이군.”

하스펠의 시선에 영주는 도전적인 얼굴로 그를 마주 노려보았다. 어쩐지 불꽃이 튀기는 듯한 느낌에 가람은 슬쩍 몸을 뒤로 빼고 두 사람이 으르렁거리는 것을 방관했다. 영주는 하스펠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의도적으로 숨긴 것인지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지금이 진실을 알아야 할 때인 것 같네. 특히나 델리움이 리베르튼의 성녀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때라면 더더욱.”

영주의 진지한 말에 하스펠은 손에 든 나이프로 영주를 살해하고 싶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가람은 그런 얼굴의 하스펠을 처음 보았다. 늘 점잖고 깔끔한, 검을 휘두르긴 해도 언제나 귀족적인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이 남자와 얼마나 가까운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많이 가깝지 않기를 바라네. 놀라운 사실이겠지만, 이 남자는 델리움에서 가장 유명한 기사들 중 하나라네.”

그렇게 말한 영주는 놀라기를 기대하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실력이 보통 아님은 원래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고 당연히 어느 정도의 명성은 있으리라 생각했던지라 가람은 새삼 놀랍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래요?”

영주는 조금 당황하다가 곧 가람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눈치챘다.

델리움에서 유명한 기사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지만, 간혹 델리움에서 아주 먼 야탈카의 시골에서는 모르는 사람도 있긴 했다.

그는 가람이 야탈카 출신이라는 것을 확신하며 상냥한 어조로 설명을 덧붙였다.

“델리움에서 가장 유명한 기사라는 것은 가장 유명한 집행자라는 뜻이지. 아가씨도 할라트라면 들어 보았겠지?”

예전에 호수에서였나. 하스펠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가람이 고개를 끄덕이자 영주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할라트라는 이름으로 신벌이 내려오면 그 당사자는 몸이 갈기갈기 찢겨서 죽게 되지.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야. 할라트는 아주 사악한 짓을 한 사람에게만 내려지는 벌이거든.

혼자 그런 흉악한 짓을 꾸몄을 리가 없으니 동조자가 있지 않겠나? 동조자는 가족일 테고, 그들도 단죄를 피할 수 없어.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할라트를 받은 죄인의 가족이나 인척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치게 되는데, 여기서 그들을 잡아들이고 죽이는 것이 집행자. 델리움의 기사들이야.”

“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가람은 조금 흥미로운 기분으로 영주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앞에 앉아 있는 하스펠은 이제 거의 숨도 쉬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이 멈추기를 간절히 바라는 표정으로 하스펠은 무력하게 대화를 지켜보았다.

“델리움에서는 집행자라고 부르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그들을 이렇게 부른다네. 델리움의 사냥개. 할라트의 관련자들을 모조리 사냥하는 사냥개라고. 저 남자는 그 개들 중에서도 뛰어난 축에 속했어.”

영주의 말 덕분에 가람은 그간 하스펠이 했던 행동들을 조금 이해할 수 있는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엄청난 비밀이라도 이야기하는 것처럼 음흉하게 소곤거린 것치고는 꽤 시시한 이야기다. 가람은 포크를 내려놓고 영주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죠?”

“저 남자는 델리움의 개야.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마을을 불태웠지. 어쩌다가 같이 다니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델리움은 아가씨를 위험 요인으로 보고 있어.

그러니 델리움의 하수인인 저 남자를 가까이해 봐야 좋을 것 없다는 이야기야.”

그러고 보니 종종 기사들이 묘한 얼굴로 하스펠을 보거나 하는 경우가 있었지.

가람은 지난 기억을 떠올리며 하스펠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는 그 시선을 차마 맞받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마치 죄라도 지은 모습이었다.

“뭐, 적어도 저와 다닐 때는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요.”

가람의 태연한 말에 영주는 답답하다는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조금 강압적인 어조로 말했다.

“그게 얼마나 안일한 생각인지 모르는 모양이군. 델리움은 아가씨를 적대할 거야. 그리고 아가씨가 리베르튼의 성녀라고 불리는 이상 리베르튼 또한 똑같은 전철을 밟겠지.

호시탐탐 남하할 구실만 찾는 델리움에게 아가씨는 구실이 된 거야. 우린 좋든 싫든 이제 한배를 탔어. 그러니 나는 리베르튼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저 남자를 가둬야겠네.”

“그는 이 도시에서 잘못한 것이라곤 없는데요.”

가소로운 마음을 감추며 가람이 눈을 가늘게 떴다.

“예전이라면 리베르튼은 중립을 지켜야 하는 위치이니 나도 이렇게 하진 않았을 걸세. 아가씨도 나중에는 내 결정을 이해하게 될 거야.”

나중에는 이해하게 될 거야. 너를 위해서 하는 거야. 이런 말을 입버릇처럼 입에 담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가람이 가장 싫어하고 끔찍하게 여기는 존재였다. 지금은 모르드레드보다 훨씬 많은 나이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가람의 악몽이었다. 영주의 말은 그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해하게 될 거라고?”

가람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약간 무심하고 가벼운 인상의 아가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서릿발처럼 차가운 사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가람을 중심으로 공기가 얼어붙는 듯한 위압감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그 기운에 촛대의 촛불이 흔들리고 사방이 어두워지는 기분마저 들 정도다. 영주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로 빼고 눈을 크게 떴다.

“이봐.”

가람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다시는 나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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