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234화 (234/256)

35화

공기가 떨리는 것 같았다. 살벌한 분위기에 기사들이 식탁을 주목했지만 가까이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칫하면 목이 떨어져 나갈 듯한 분위기가 팽팽했다.

“내가 누구와 다닐지는 내가 결정해. 설령 문제가 있더라도 본인과 이야기해서 결정할 일이지 당신이 끼어들 일은 아니야.

덧붙여 댁이 제멋대로 한 결정을 내가 언젠가 이해할 거라고 낙관하는 건 멍청한 짓이라고 말해 주고 싶군. 이해하지 못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나도 모르니까.”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는 가람에게 영주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간신히 침을 삼키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그를 쏘아보던 가람은 순간 모든 기운을 거두고 빙긋 웃어 보였다.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라서 순간 너무 흥분하고 말았네요. 어쨌든, 제 일행에게 손대는 것은 하지 말아 주세요.

예전이야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은 좋은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예전의 그가 나빴던 것도 아니잖아요? 무슨 범죄자도 아니고 집행인이었는데.”

마치 가면을 바꿔 쓰는 것처럼 태도를 휙휙 바꾸는 가람을 영주는 미친 사람 보듯 응시했다.

하스펠은 여전히 안색이 좋지 않았으나 그래도 한시름 덜었다는 얼굴이었다.

“그나저나 저를 여기로 데려온 두 기사가 조금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델리움이 저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리베르튼의 시민들이 위험하다고.

그리고 방금 델리움이 저를 구실로 삼는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된 이야기인지 들을 수 있을까요?”

가람이 천연덕스럽게 질문하자 영주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피곤한 표정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방금 자신이 겪은 일이 꿈만 같다는 표정이었다.

“하. 마냥 치료의 기적만 베푸는 줄 알았더니 이런 힘도 있었군. 정말 대단해.”

실질적으로 가람이 무언가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 두렵고 압도적인 분위기는 조금의 눈치만 있는 사람이라면 범상치 않음을 알고도 남는 종류의 것이었다. 영주의 말에 가람은 싱긋 웃으며 겸양했다.

“천만에요.”

그런 경험을 했으니 겁을 먹을 만도 한데 그래도 영주는 영주인지 그 표정에는 한 톨의 두려움도 없었다. 술을 머금어 목을 축인 그가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사실 나는 아가씨를 걱정하고 있는 건 아니야. 솔직히 아가씨가 어떻게 되든 나와는 전혀 상관없지. 매몰차다고 말하지 말아 주게.

시민들을 치료해 준 것이 고맙긴 하지만 나는 리베르튼의 영주야. 리베르튼을 지킬 의무가 있지. 그것이 무엇이든 리베르튼에 해가 된다고 생각되면 망설임 없이 내칠 수 있어.”

“제가 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처음에는 아니었지. 아가씨는 지금 리베르튼에서 본인이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지 알고 있나?”

알고 있으나 가람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영주는 그 표정만으로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가 공공연히 성녀라고 불린다는 건 알고 있을 걸세. 조금 열성적인 사람은 아가씨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 생업도 팽개칠 정도지.

소문은 엄청나게 빠르게 퍼지고 있어. 인접 도시까지 썩은 몸에서 새살이 돋게 하는 성녀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하다네. 내버려 두면 새로운 종교가 하나 생기지 않을까 싶을 정도야. 아니, 아마 생기겠지.”

“그래서 델리움이 저를 공격한다는 건가요.”

“그래. 본인은 얼마나 자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가씨의 능력은 대단해. 델리움이 가진 기적은 할라트뿐이지. 그나마도 구원이 아니라 징벌적인 기적이지.

사람들은 구원에 목말라 있어. 만약 아가씨를 따르는 종교가 생긴다면 델리움의 교세를 흡수하고도 남을 거라네. 그게 바로 델리움이 아가씨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이유야.”

자신을 섬기는 종교라니. 가람은 실소가 나왔지만 영주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다.

“뭐, 좋아요. 델리움이 저를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까지는 그렇다고 쳐요. 하지만 무슨 명분으로 저를 공격하겠어요? 사람들을 치료했기 때문에 너를 단죄하겠다, 라고는 못 할 테고?”

“그들에게 리베르튼은 이미 이단들의 집결지라네. 앞으로 있을 일을 예상하자면, 아마 이곳을 봉쇄하고 전부 죽이려고 들겠지.

호시탐탐 남하하려고 하는 델리움이니 이참에 리베르튼이 오염되었다는 명분으로 이곳을 정복하고 다시 전쟁을 재개하려고 들 수도 있고.”

“오염이라고요? 무슨 명분으로 리베르튼이 오염되었다고 할 수 있죠?”

영주는 말없이 가람을 응시했다. 그리고 잠시 식탁의 모서리로 시선을 내렸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델리움의 기사가 전한 보고에 따르면 지금 리베르튼은 저주를 내렸다가 물린 마녀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는 도시라네.”

저주.

그 단어에 뜨끔했지만 가람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표정을 갈무리했다.

“마녀?”

“리베르튼의 시민들은 아가씨를 성녀라고 생각하지만, 델리움 사람이 아닌 성녀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신성 제국의 입장이지.”

가람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하 하고 짧게 웃었다. 그리고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눈을 꾹 감았다.

델리움이 진짜로 그 질병이 저주라는 것을 알아낸 것인지 아니면 넘겨짚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 일에 자신의 책임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

가람은 갑자기 피곤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그 사소한 부탁을 들어준 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 된 것인가.

“어쨌든 아가씨가 마녀라면 마녀의 손을 탄 이단들은 모조리 죽어 마땅하다는 것이 델리움의 입장이 될 테지. 그리고 순순히 죽어 줄 수 없으니 우리는 싸워야 한다네.

나는 그 싸움에 아가씨가 힘이 되어 줬으면 하네. 아가씨를 찾는 사람들을 외면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말끝을 흐린 영주는 기대 어린 시선으로 가람을 바라보았다. 가람은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늘 이런 식이다. 자그마한 일이 어느 순간 눈덩이처럼 불어나 버리는 거다.

자신이 그 단지를 열지 않았다면 도시에 저주가 퍼지는 일도 없었을 테고, 치료함으로써 성녀가 되지도 않았을 거고, 델리움이 리베르튼을 집어삼키려고 들지도 않았으리라.

어쨌든 이 일에 자신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외면할 수는 없게 되었다. 가람은 결국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마지못한 수락에 영주는 대단히 기쁘게 웃었다.

이번에는 진심 어린 웃음이었다. 입가에 주름이 푹 패도록 미소 지으며 영주는 가람의 손을 꽉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잘 생각했네. 부디 리베르튼을 위해 그 신비한 힘을 써 주길 부탁하겠네. 억울하게 죽어 갈 가엾은 리베르튼의 아이들을 위해서.”

영주의 눈은 진지했다. 가람은 생각지 못한 그 눈빛에 조금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신과 영주는 이미 한배에 탄 것이라고 했다. 리베르튼의 운명이 자신의 운명이고, 자신의 운명이 곧 리베르튼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물론 순전히 영주의 착각이었지만, 어쨌거나 자신의 손을 감싸는 영주의 손은 뜨거운 유대감으로 불타오르는 듯했다.

“그리고 밖에서는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니 내 성에 머물러 주겠나? 아가씨를 위한 귀빈실을 마련해 두었네.”

영주는 손을 맞잡은 채 다정하게 청했다. 시커먼 굴에서 잠을 청하는 것도 슬슬 질리던 참이니 반가운 요청이었다. 한 가지 신경 쓰이는 점을 제외하면.

가람은 하스펠을 흘끔 바라본 뒤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좋아요. 하지만 하스펠과 같은 방을 쓰겠어요. 보아하니 하스펠을 위한 방 같은 건 마련되어 있지 않아 보이고, 괜히 다른 방에 두었다가 저 몰래 감옥으로 끌고 갈까 신경 쓰이니까요.”

가람의 당돌한 말에 영주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네.”

그 목소리는 마치 한숨처럼 옅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하스펠의 존재가 몹시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하긴, 무리도 아니다. 변심할 여지가 충분하고도 남으니까.

솔직히 가람도 하스펠을 믿는다기보다 그가 변심해도 얼마든지 책임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가 나쁜 사람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애초에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아는 것도 아닌데 무작정 믿는 것도 만용이다.

게다가 사람의 마음이란 언제 바뀔지 모르는 불안정한 것이 아니던가.

가람 본인만 해도 세상의 모든 비극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과 무조건적으로 돕고 싶은 마음이 휘청거리며 간신히 균형을 잡고 있는 상황이니, 하스펠이 지금이야 구원을 받았다는 둥 한다고 해서 나중에도 자신을 향해 마녀라고 손가락질할 일이 없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어쨌거나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하스펠 한 명 정도에 한해서라면 구해 준 목숨을 되돌려 받든, 아니면 세뇌를 하든 책임을 질 수는 있을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 볼 테니까요.”

안심하라는 의미로 말했지만 영주는 영 미덥지 않은 얼굴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을 들어 가볍게 휘젓는 동작으로 하인을 부르며 조용히 말했다.

“밤이 깊었으니 그만 쉬게.”

* * *

“그럼 편히 쉬십시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하녀는 밖에 있을 테니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부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잠시 가람의 대답을 기다린 후 기품 있는 동작으로 조용히 방을 나갔다.

그녀는 제냐라는 이름의 제법 나이가 있는 하녀로, 말이나 행동에서 묻어 나오는 분위기를 보아 적어도 10년 이상 영주 성에서 근무한 베테랑임이 분명했다.

아마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부르라는 말도 그냥 빈말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준비한 방은 정말로 완벽했기 때문이다.

가람은 테이블에 준비된 먹기 쉬운 과일을 몇 개 집어 따듯하게 데워진 침대에 스며들 듯 파고들었다.

침대 옆의 작은 탁상에는 가람의 짐 가방 외 읽을 만한 책들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가람의 취향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인지 책의 종류는 꽤 다양한 편이었다.

침대의 따스함을 즐기며 자연스럽게 책으로 손을 뻗어 그중에 한 권을 집어 든 가람은 멈칫하고는 어정쩡하게 일어나 앉았다. 문가에 서 있던 하스펠이 음울한 얼굴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촛불의 음영이 하스펠의 얼굴에 길게 미끄러졌다. 죄악감에 물든 복잡한 표정이 흔들리는 불빛에 이지러진다.

하스펠은 그대로 한참 동안 서 있었다. 가람과 그 사이에 자리한 침묵이 부드럽게 기다림을 지탱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가람은 그 입에서 나올 말을 어느 정도 예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늦게 말씀드리게 되어 정말로 죄송합니다. 영주에게 들으셨다시피 저는 델리움의 교황 직속인 델리움 기사단에서 새벽의 기사라고 불리던 사람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하스펠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공기 대신 돌멩이를 들이마시기라도 하는 듯 그의 숨은 힘겹고도 불규칙했다.

“영주가 한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그리고 제가 지금껏 당신께 한 말도 모두 사실입니다. 저는 고아 출신으로 델리움 기사단에 입단했습니다.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린 나이에. 그리고 성장해 한 사람의 기사가 된 후에는 할라트를 받은 죄인의 가족들을 죽이고 그 영지를 불태우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하스펠의 얼굴은 어느새 일그러져 있었다. 가람은 그가 필사적으로 울음과 격정을 참아 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든 가람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아마 이제껏 거듭 말한 말들로 하스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이야기를 굳이 꺼낸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이 이야기를 들어 줬으면 한다는 거겠지.

솔직히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으나 가람은 멈추라고 말하는 대신 묵묵히 그의 말을 경청했다.

“제가 새벽의 기사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 집행이 주로 새벽에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새벽 동틀 녘에 추적을 재개한 뒤 익숙지 않은 도주로 지친 그들에게 형을 집행했지요.

잠에 덜 깬 그들이 비몽사몽 하는 동안 처결하는 것이 효율적이었기 때문에 저는 그렇게 했습니다.

누구보다도 부지런하게 움직여서 새벽의 기사라는 위명을 얻게 된 저는 스스로가 정의를 행하고 있다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저는 정말로……”

뒤로 갈수록 하스펠의 목소리는 점점 떨렸다.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한참 동안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토해 내듯 말했다.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충분히 예상한 내용이다. 가람은 하스펠이 눈물도 흐느낌도 없이 오열하고 있다고 느꼈다.

소리 없는 격정에 허우적거리던 하스펠은 간신히 감정을 수습하고 말을 이어 갔다.

“할라트의 죄인은 씻을 수도 용서받을 수도 없는 극악한 죄를 저질렀고, 그 죄가 너무나 큰 나머지 그 죄악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는 것만으로 죄가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집행자들은 할라트를 받은 사람들이 정확히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릅니다. 그저 교단에서 지시하는 것을 믿을 뿐이지요.

의심을 품는 것은 이단의 증거입니다. 그래서 저 또한 맹목적이었습니다.”

하스펠은 씁쓸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가람은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다.

어떤 감정도 온도도 없는 시선에 하스펠은 오한이 오는 것처럼 잠시 몸을 떨었다. 그리고 조금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영광은 어느 날 갑자기 끝났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그런 결과를 맞이했지요. 죽음 말입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말로입니다. 도망치는 입장도 필사적이니 추적에 위험이 따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하지만 델리움의 기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정의를 행한 기사들은 모두 따스하고도 아름다운 장소에 도착하게 된다고 가르침을 받으니까요. 저도 죽음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약속된 구원이 저를 찾아올 거라고 믿었죠.”

하스펠은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 말을 끊었다.

마치 발밑에 그날의 자신이 누워 있기라도 한 것처럼 초점 없는 눈으로 아래를 바라보던 그가 다시 말한다.

“저는 비교적 천천히 죽음을 맞이한 편입니다. 저는 계속 기다렸습니다. 언제쯤, 언제쯤 그 구원이 찾아올지.

손끝이 식어 가고 몸의 감각이 돌멩이처럼 무뎌지면서 끔찍하고 차가운 추위가 속수무책으로 저를 삼켜 갔습니다.

저는 점점 초조해졌지요. 빨리 그 구원이 찾아오면 좋을 텐데 하고 정말로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 차가움은 너무 무서웠거든요.

허세 따위를 부릴 생각은 없습니다. 그 감각은 공포 그 자체였으니까요. 살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던 종류의 두려움이었습니다.”

내내 미동 없이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가람은 손에 쥔 과일을 입 안에 던져 넣었다. 적막 속에 아삭 하는 과일을 씹는 소리가 울린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그 감각. 차고 두려운 그 감각. 그것이 죽음이었습니다. 영광스럽고 따듯한 죽음 같은 것은 이 세상에 없었어요.

지금까지 저는 속아 왔던 겁니다. 거짓 천국에 눈이 멀어 어리석은 칼날을 휘둘러 왔던 거죠.”

그는 다시 숨을 고르다가 짧게 덧붙였다.

“할라트도 사실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가람이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하스펠은 말을 이어 갔다.

“깨달음과 동시에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믿음과 신앙심이 모두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지금까지 제가 한 일들에 대한 담백한 사실뿐입니다.

저는 정의를 집행한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람을 죽인 겁니다. 달콤한 말에 속아서 평생을 바쳤던 겁니다. 심지어 제가 죽인 자들 중에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그 작은 아이를 어리석고 영웅심에 물든 제가.”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던 그든 마침내 작게 울부짖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