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236화 (236/256)

37화

“어떤?”

“당신을 섬기고 싶습니다. 물론, 그 능력을 감히 청하거나 방만히 굴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당신께서는 제게 신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니 부디 섬기는 것을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가람은 허탈하게 웃으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거절한다고 해서 그 마음이 사라지지는 않을 테지.

그리고 은은히 전해져 오는 그의 마음이 굉장히 절박한 것이라서 거절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마음대로 해요. 그걸로 당신이 행복하다면.”

그렇게 흔쾌히 수락하자 하스펠은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가람을 올려다보더니 대단히 만족스러운 듯 활짝 웃었다.

그를 만나고 나서 이렇게나 밝게 웃는 얼굴은 처음 보았다. 그렇게나 기쁜 것인가.

가람은 어쩐지 피곤해지는 기분으로 침대에 다시 들어가며 느슨하게 말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그만 주무세요. 저도 잘 테니까.”

영주가 가람에게 마련해 준 귀빈실에는 호위나 하녀를 위해 마련된 작은 침실이 두 개 정도 더 딸려 있었다. 호위나 하녀를 위한 방이라고 해도 머무는 데 불편함은 없다.

가람에게 짧은 인사를 건넨 하스펠은 순순히 그 방으로 걸어갔다. 매우 뿌듯하고 기쁜 표정이었다.

홀가분한 듯 문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에서 가람은 그를 밤새 뒤척이게 만들 것 같은 설렘을 발견하고 결국 실소하고 말았다.

Chapter 7

가람은 창문에 걸터앉아 리베르튼을 응시하고 있었다. 영주 성은 제법 고지대에 지어진 건축물이었고, 가람이 머무는 귀빈실은 성중에서도 높은 곳에 위치한 방이었다.

그런 이유로 걸어 올라가는 수고가 필요하긴 했지만, 거기서 보이는 경치는 그 수고를 충분히 감수할 만했다.

높이가 꽤 있는 창문에 걸터앉기 위해서는 상당한 담력이 필요했지만 가람은 그저 여유롭게 발밑의 바람을 즐길 뿐이다. 이 정도 높이는 입에 담기도 민망할 만큼 시시한 것이었다.

벌써 영주 성에 머문 지 사흘 정도 지났다.

가람은 슬슬 이 사건이 흘러갈 방향을 생각할 필요성을 느꼈다. 어제 있었던 다과회에서 영주가 비장한 얼굴로 델리움에서 상당한 숫자의 군대를 파견했다는 소식을 알려 왔기 때문이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영주의 말대로 델리움은 리베르튼을 공격할 작정인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소식은 리베르튼 연합을 이루고 있는 도시 국가 모두를 술렁이게 만들었다.

연합이라는 것은 괜히 연합이 아니다. 리베르튼에 대한 적대적 행위는 곧 연합에 가입된 모든 도시 국가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조금 미묘했는데, 델리움에서 리베르튼을 저주에 오염된 도시라고 명명했기 때문이다.

통상적인 분쟁이라면 도시 국가들은 망설임 없이 리베르튼의 손을 들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정말로 리베르튼이 저주받은 도시라면 그에 가담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이겨도 함께 저주에 물들게 된다면 패망은 약속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이나 저주라는 이름은 꺼림칙한 것이다.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 선 연합국들은 결국 리베르튼에 사신을 파견했다. 저주의 실체를 밝히고, 성녀에 대한 정보도 모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덕분에 가람은 무수한 알현 요청을 받고 있었지만 그 모든 요청을 딱 잘라 거절하고 있었다.

성녀의 실체에 대해 알고 싶다는 이야기는 결국 그 기적을 보여 달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제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기적을 펼쳐 보인다니. 그런 광대 노릇을 하는 것은 정말로 사양이었다.

리베르튼의 영주가 정중히 부탁해 오기도 했지만 가람은 그럴 이유도,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거듭 거절했다.

그러자 계속 부탁하기도 힘들었는지 영주는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사실 가장 큰 문제는 연합국이 리베르튼의 손을 드느냐 마느냐가 아니다.

델리움이 리베르튼에 병력을 집중한다는 이야기는 남쪽의 강대국 야탈카를 자극하기 충분한 것이었다.

만약 야탈카가 델리움의 도발에 전면적으로 응대한다면 리베르튼 연합국은 그 사이에서 그저 풍비박산 나는 수밖에 없다.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현재 리베르튼은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모인 뜨내기와 성녀를 모시겠다며 떠들어 대는 사람들, 그리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연합국의 사신과 전투를 준비하며 무장하는 전사들, 야탈카에서 파견한 정찰병 따위로 어수선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영주가 동분서주하고 있긴 하지만 이대로라면 리베르튼은 전쟁터가 되고 만다. 한 번 꼬투리를 잡은 이상 델리움은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야탈카는 그런 델리움을 마냥 좌시하지 않겠지. 두 국가의 병력 사이에 리베르튼이 끼게 되면 그때부터는 처음의 명분이야 아무래도 좋은 것이 될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그저 패스가 충전되는 대로 떠나고 싶었지만 앞날이 불 보듯 뻔한 리베르튼을 내버려 두고 가 버리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좋든 싫든 이 일에는 자신이 연루되어 있었다.

사실상 이 싸움의 빌미를 제공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리베르튼의 멸망을 방조하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

멸망이라는 말이 비약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한 도시가 얼마나 간단하게 사라질 수 있는지를 알게 된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가람은 손등을 확인했다. 충전은 절반 정도 끝난 상태다. 평소보다 충전 시간이 오래 걸린 덕분에 시간은 충분하다.

어느 정도 사태를 수습할 수는 있겠지. 그들이 싸움을 걸어온다면 피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무차별적 학살을 할 생각도 없다. 본격적으로 사태에 뛰어들 결심을 하며 가람은 조용히 하스펠을 불렀다.

“하스펠.”

“예.”

하스펠은 창문에 앉은 가람의 뒤에서 내내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자신의 하수인이 된 듯 행동하는 그가 가람은 대단히 어색했지만 이틀 정도 지나자 그것도 익숙해졌다.

만류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본인이 그렇게나 원하고 행복해하니 딱히 말릴 수도 없어진 것이다.

게다가 섬기게 해 달라는 말에 그러라고 허락하기까지 했으니 이제 와서 말을 바꾸기도 어색했다.

“영주에게 전하세요. 연합국들은 델리움의 군대에 길을 열라고. 쓸데없이 막아서서 희생을 만드느니 그냥 리베르튼에 도착하도록 내버려 두라구요. 명분이 저주받은 리베르튼의 정화인 이상 괜히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지는 않겠죠.”

“예.”

하스펠은 의아함도 없이 그대로 수긍했다. 당장 리베르튼의 병력을 끌어모으고 다른 도시 국가를 설득할 시간을 벌어도 모자랄 판에 군대에 길을 뚫어 주라는 말이 얼마나 이상하게 들릴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하스펠은 그저 가람의 의견을 수용했다. 가람이니까 무조건 믿는다는 식이다.

그 맹목적인 신뢰가 가람을 매우 부담스럽게 만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을 약간 채워 주는 구석도 있었다.

방을 나가는 하스펠의 기척을 느끼며 가람은 영주의 반응을 미리 추측해 보았다.

그대로 무시할까? 아니면 자신을 찾아올 것인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람은 방문을 부술 듯한 노크 소리와 함께 난폭하게 들이닥친 영주를 볼 수 있었다.

“제정신인가?”

이전의 냉철함이 마치 가면이었던 것처럼 영주는 흥분해 큰 소리로 따졌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 뒤로 영주를 노려보는 하스펠이 보인다.

은은히 살기마저 내비칠 정도다. 확실히 자신의 신이나 다름없는 사람에게 무례하게 소리치고 있는 마당이니, 하스펠치고는 많이 참았다고 해야 할까.

“일단 좀 앉으세요.”

의자를 권하는 가람의 차분한 목소리에 영주는 흥분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가람은 하스펠에게 눈짓해 다과를 가져오도록 만들고, 동시에 그가 영주에게 검을 뽑아 드는 사태를 방지했다. 어쨌거나 내키지 않는 기색의 두 남자는 느릿느릿 가람의 말에 따랐다.

“미리 말해 두자면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자리에 앉아 침착해지려고 노력하던 영주가 다시 울컥하는 표정으로 가람을 쏘아보았다.

리베르튼의 안위를 위해 연일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그로서는 강 건너 불구경하는 듯이 여유로운 가람이 몹시 답답했다.

심지어 도시 국가의 협력을 얻기 위해 사신을 설득하는 것에도 비협조적이었던 가람을 그는 은연중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람에게 호통치지 않는 것은 예전에 보여 준 기묘한 힘의 영향도 있었지만, 가람이 야탈카 출신의 시골뜨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는 철부지 촌것에게 열을 올려 봐야 심력 낭비라는 것이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며칠 후 리베르튼이 불바다가 될지도 모르는데 아가씨는 정말 태연하군. 야탈카 출신이니 도시민이 죽든 말든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건가?”

영주가 차갑게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가람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여유롭게 응수했다.

사실 영주가 자신을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지 가람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의 초조함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영주에게 화내지 않았다.

영주는 멍청한 사람이 아니다. 한 명이라도 자신의 편이 아쉬운 마당에 가람에게 감정을 배출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도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이런 태도를 보인 것도 지금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궁지에 몰렸다는 의미겠지. 솔직히 여태껏 입 밖으로 내지 않은 것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다.

“리베르튼은 불바다가 되지도 않을 거고 죽는 사람도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진정하고 이야기 좀 하죠.”

가람이 상냥하게 말하자 영주는 크게 헛기침을 하고 입을 다물었다. 약간 무안한 듯, 삐친 듯한 표정이다.

따지고 보면 영주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었다. 남하해 오는 대군을 상대로 절대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만큼이나 버티고 있는 것 자체가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도시를 버리고 제 한 몸 건사하고자 하는 지배자가 얼마나 많은가. 그것을 생각하면 가람은 그에게 호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좋아. 이야기해 보게. 무슨 생각으로 적군의 길을 뚫어 주자고 하는 건지 어디 한번 들어 보지.”

영주는 델리움을 완전히 적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하긴, 그에게는 굳이 델리움뿐만 아니라 야탈카도 별로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사이 다과를 가지러 갔던 하스펠이 돌아와 정중한 동작으로 테이블 위로 차를 올렸다. 영주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하스펠을 흘긋 쳐다본 후 짧게 혀를 찼다.

“새벽의 기사를 한낱 차 시중을 드는 데 쓰다니. 보검으로 돌을 캐고 있군그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