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237화 (237/256)

38화

가람은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하스펠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는 가람의 앞에만 고급스러운 과자를 내려놓은 뒤 그녀의 뒤에 시립했다. 그런 하스펠에게 영주의 신기해하는 시선이 따라붙는다.

“대체 그를 어떻게 길들인 거지?”

“짐승도 아닌데 길들인다는 표현이 듣기 좋진 않군요.”

다소 떨떠름하게 대답한 가람은 단숨에 본론으로 들어갔다.

“들으셨다시피 제 요청은 연합국들이 델리움의 군대를 막아서지 않도록 해 달라는 거예요.”

“불허하네.”

영주는 단칼에 잘랐다. 익히 예상했던 바다. 가람은 찻물로 입을 적시고 느긋하게 덧붙였다.

“만약 군대를 막아선다면 리베르튼이나 다른 대도시라면 몰라도 작은 도시 국가는 개미처럼 짓밟히겠죠.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자는 거예요.”

영주의 깊은 한숨이 테이블 위로 흩어졌다. 그가 들어 올린 찻잔 위로 어두운 얼굴이 얼비친다.

“알고 있네. 희생이 생길 거라는 건. 하지만 우리에게는 시간이 필요해.”

“그 시간을 벌기 위해 중소 국가가 불태워지는 걸 감수하겠다는 건가요?”

가람의 대답에 영주가 차가운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분노에 일그러진 입매가 창날처럼 곤두서 있었다. 그는 결국 테이블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그래! 감수해야지. 감수하고말고. 그들이 무슨 짓을 당할 건지는 아마 아가씨보다 내가 더 잘 알 걸세. 마을은 불태우고, 인간들은 모조리 죽이겠지.

하지만 그러지 않으면 연합국은 완전히 끝장이야. 끝장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기나 해? 평화로운 야탈카 구석에서 자라 온 네가 알 리가 없지!”

격정을 참지 못하고 영주는 다시 빠르게 쏘아붙였다. 찻잔이 엎어질 정도로 영주의 분노는 격렬했다.

쏟아진 찻물이 테이블을 흥건히 적시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을 바라보던 가람이 가볍게 손을 들었다.

혼자서 바로 놓인 찻잔에 허공에 뜬 찻주전자가 찻물을 채웠다. 테이블에 흥건하던 찻물은 어느새 깔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이 신기한 현상에 영주는 치솟던 분노도 잊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모르지 않아요. 리베르튼이 무너지면 연합국은 야탈카와 델리움의 전쟁터가 되겠죠. 사람이 살았던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황폐화될 테고.”

허공에 뜬 채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찻잔을 영주가 얼떨떨하게 붙잡는 것을 바라보며 가람이 차분하게 말했다.

“지지해 오는 연합국은 얼마나 있나요?”

“그렇게 많지는 않네.”

우울하게 대꾸한 영주는 차를 머금었다. 그리고 조금 빠른 어조로 덧붙였다.

“그래도 아주 희망이 없는 건 아니네. 동쪽의 부국인 존 라드가 협조 의사를 알려 왔어.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자네의 소문에 열광하고 있다는군. 대장장이 하나가 자네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는 모양이야.”

짚이는 데가 있었다. 새벽별이 이기면 기적이 찾아와 아버지가 완치될 거라고 믿던 그 아이의 아버지가 대장장이라고 했던가.

이런 식으로 소식을 듣게 될 줄은 몰랐던 터라 가람은 조금 뜻밖이었다. 어쨌거나 대충 눈치를 보아하니 그럭저럭 잘 살고 있는 모양이다.

하긴, 누워 있는 것밖에 할 수 없던 병자가 하루아침에 사지가 멀쩡해져 돌아다니는데 소문이 안 날 리가 없다.

아마 잠결에 비몽사몽 했던 대장장이는 밤중에 찾아와 기적을 베풀고 떠난 자신을 신적인 무언가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그의 나이를 고려해 보면 선술집에서 떠들어 대었을 확률이 높으니 소문은 술꾼들의 입을 타고 도시 전체에 퍼졌겠지.

그리고 그 화약고에 리베르튼의 성녀 전설이 흘러들어 불씨가 된 건가.

“나는 리베르튼을 포기할 수 없어. 길고 긴 전쟁 끝에 두 강대국의 이해관계 사이에서 필사적으로 부활한 땅이야.

참혹한 황무지를 이만큼이나 사람이 살 만한 땅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또 전쟁이라니.

설령 도시 국가 몇몇만 살아남게 된다고 해도 이곳을 전쟁터로 만들 수는 없네. 절대로.”

영주는 가람의 여유로움을 무지와 체념이라고 해석한 모양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오해를 풀 필요가 있다.

“그건 저도 반대예요.”

가벼운 가람의 말이 영주는 영 미덥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갑자기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가람을 창문가로 이끌었다.

“보이나? 이 성에서 저쪽 리베르튼의 시가지까지 펼쳐진 숲이.”

가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숲은 어느새 노을에 물들고 있었다. 그 숲을 배경으로 영주가 가람을 응시했다.

“이만한 넓이의 땅이 모조리 군대로 뒤덮일 걸세. 어째서 그렇게 여유로운지는 모르겠지만, 아가씨가 생각하는 것만큼 만만한 일이 아니야.

군대를 최대한 모은다고 해도 이길지 질지조차 확신할 수 없지.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을 걸세. 희생이 따른다고 해도 군대를 모을 때까지 발을 잡는 것이 최선이야.

아가씨가 신기한 재주를 많이 가지고 있긴 하지만, 이걸 막을 수는 없어. 그러니 이제 그만 달콤한 착각에서 깨어나게나.”

“글쎄요.”

가람이 담담히 대답하는 순간 영주는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어쩐지 바람의 방향이 이상했다.

가람의 뒤에 선 하스펠이 얼빠진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한 그는 반사적으로 창문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숲의 허공에 태양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거대한 불덩이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가 느낀 이질적인 풍향은 그 불덩이가 공기를 빨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단히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얼굴에 화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리베르튼에 낙하하기라도 하면 도시의 멸망을 피할 수 없을 정도의 크기였다. 산 너머로 노을을 흩뿌리며 사라지고 있는 태양을 다시 불러들이기라도 한 건가.

시가지에서도 불덩이를 발견했는지 와글와글 소란이 일었다.

“이건 대체…….”

넋이 나간 영주의 중얼거림에 가람이 상큼하게 대답했다.

“저는 이걸 수천 개라도 만들어 낼 수 있어요.”

수천 개. 대륙, 아니, 이 세상 자체를 지워 버릴 수도 있을 만한 힘이다. 아찔함을 느끼는 영주에게 가람은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군대가 무사히 리베르튼에 도착할 수 있도록 힘써 주세요.

혹시나 막아서다가 가엾은 소국이 멸망하기라도 해서 그 빌미를 제공한 사람으로 역사에 남게 되는 것은 사양이니까요.”

한가롭기까지 한 가람의 말에 영주는 몸을 떨었다. 붉은 거짓 태양을 배경으로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는 이 여자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하고 싶은 질문은 많았지만 간신히 입 밖으로 낸 질문은 단 하나였다. 그나마도 그의 용기가 허락하는 최대한도로 만용을 부린 것이었다.

“그들을 모두 불태울 생각인가?”

영주는 도열한 기사들의 머리 위로 시뻘건 태양이 쏟아지는 환각이 보이는 것 같았다. 시체도 무엇도 남지 않을 것이다.

적이라고 해도 끔찍한 최후다. 저 거대한 불덩이 아래에 선 적들과 발길에 짓밟히는 개미들의 입장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런 생각으로 떠는 그에게 가람이 손을 뻗었다.

영주는 가람이 자신에게 손을 뻗는 순간 몹시 두려웠으나 안간힘을 써서 의연한 척했다. 그러나 그 손이 어깨에 닿았을 때 몸이 펄쩍 뛰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영주의 반응이 어떠하든 가람은 애처로울 정도로 떨고 있는 중년 남성의 어깨를 그저 가볍게 두드렸을 뿐이다.

“설마요.”

* * *

하늘에 생긴 거대한 불덩이 사건 이후로 리베르튼이 저주받았다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우세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영주는 이제 그런 소문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

다만 가람의 비위를 거스를까 극도로 조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대하던 말투도 완전히 공대가 된 데다 추종자처럼 따르는 통에 가람은 하스펠이 하나 더 생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제법 호화롭던 가람의 귀빈실은 어딘가의 왕족이 쓰던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화려해졌다.

심지어 매일같이 아침마다 선물을 안겨 오는 통에 안주인이 싫어하지 않느냐 하고 은근히 돌려서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더니 대단히 당당하게도 자신은 독신이라고 알려 왔다.

호의로 건네는 선물을 거절하는 것도 미안하고, 게다가 가람은 호의 앞에서 매몰차지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적에게는 한없이 잔인하게, 그리고 호의를 보이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따듯한 것이 가람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가람의 방은 나날이 보물 창고화 되고 있었다. 문제는 그것 외에도 더 있었다.

“좋아요?”

영주가 선물한 백곰 가죽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던 가람이 문득 하스펠을 내려다보며 질문했다.

그는 가람이 누워 있는 침댓가에 무릎을 꿇고 아까부터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가만히 들어 보니 기도 같기도 하고 고해 성사 같기도 한 말이 고저 없는 음성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한참 동안 중얼대던 하스펠은 경건한 얼굴로 가람을 올려다보며 짧게 긍정한 뒤 다시 기도인지 무엇인지 모를 행동을 이어 갔다.

나날이 이상해지는구나.

침대에서 반 바퀴 구르며 가람은 짧게 푸념했다. 그가 자신을 신처럼 여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행동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의 행동이 점점 이상한 궤도에 오르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나중에는 성경 같은 것도 만들겠다고 나설지도 모른다.

가람은 문득 그가 자신을 바라보며 종종 무언가 기록하던 것을 떠올리고 잠깐 굳어 버렸다.

솔직히 아주 이상한 짓이라고 생각되지만 하스펠 본인이 저렇게나 좋아하고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 주니 약간 기특한 마음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본인이 그렇게나 원하니 장단을 맞춰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 이유로 가람은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은 뒤 등 뒤로 후광을 만들어 보였다.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생각보다 그림이 나쁘지 않다. 하스펠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탓에 눈앞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상태였다.

아마 고개를 들면 어처구니없어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좋아할지도.

그의 반응을 기대하며 가람이 혼자 푸슬푸슬 웃고 있는데 느닷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워낙 갑작스러운 일이라 가람은 후광을 흩뿌리는 자세 그대로 방문객을 맞이하는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후광을 없애긴 했지만, 이미 볼 사람은 다 본 후였다.

“뭘 하고 계시는 겁니까.”

방문자는 영주였다. 그 외에는 이 방에 이런 식으로 들이닥치는 사람은 없으니 당연한 일이긴 했다.

그는 이상한 것을 보는 듯한 눈으로 가람과 하스펠에게 번갈아 시선을 던지며 무뚝뚝하게 질문했다.

“아니 그냥, 하스펠이 좋아할까 싶어서요…….”

영주의 시선에 어쩐지 굉장히 부끄러워진 가람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변명했다.

그러나 하스펠마저도 어처구니없는 시선으로 가람을 보고 있어서 어색함만 한층 더해졌을 뿐이다.

찌르는 듯한 그 시선 속에서 가람은 애써 헛기침을 하며 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에요? 그렇게 급히 들어오시고.”

그제야 영주는 잠시 잊고 있던 방문 목적을 떠올리고 표정을 수습했다.

“망루의 보초로부터 델리움의 군대가 육안으로 구분할 수 있는 거리로 진입했다는 보고입니다. 아마 두 시간 후면 도착할 것 같다더군요.”

그렇게 말하는 영주는 예전과는 딴판으로 대단히 여유로운 기색이었다.

그래도 초기에는 신뢰하지 못하고 그녀가 떠나거나, 혹은 마음을 바꾸어 리베르튼을 공격하며 날뛸까 불안해하는 모습이었는데 그동안 지켜본 가람이 적어도 미치광이처럼 보이지도 않고, 리베르튼이 전화의 불씨가 된 것에 대해 책임감까지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그녀를 온전히 믿으며 여유를 되찾은 듯했다.

“그래요? 어디로 가면 되죠?”

소식을 전해 들은 가람의 반응도 영주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가람은 느릿느릿 귀찮은 듯 침대에서 내려와 벗어 두었던 부츠를 신으며 가볍게 물었다.

“직접 군대를 보시려면 성벽으로 가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가람이 고개를 끄덕이자 영주가 공손한 태도로 그녀를 이끌었다. 그 뒤로 하스펠이 자동적으로 따라붙는다.

복도로 걸어 나가니 마주치는 하인이 급히 표정을 수습하며 허리를 숙였다.

그도 그럴 것이 마치 하인이라도 된 듯 영주가 굽실거리며 가람을 모시는데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것이 비정상이다.

며칠 전 허공을 불태우던 거대한 화염이 누구의 소행인지 알 리 없는 그들로서는 영주의 태도가 황당할 뿐이었다.

“망루까지 마차로 모시겠습니다.”

영주의 깍듯한 공대에 마부가 기묘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던 영주가 얼른 표정을 수습하고 하인다운 자세로 마차 문을 열어 주었다.

마차는 처음 가람이 이곳에 타고 왔던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구조다. 하스펠이 제일 먼저 타고, 그다음으로 가람, 마지막으로 영주가 올라타자 문이 닫혔다.

리베르튼은 돌과 쇠가 뒤섞인 거대한 성벽을 가진 도시였다. 성벽의 망루는 다른 도시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높았는데, 처음 리베르튼에 왔던 가람이 살벌한 인상을 받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미관상 좋지는 않았지만 덕분에 다른 도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넓이의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

마차의 창문 너머로 멀리 망루가 보였다. 북쪽 망루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시가지를 지나가야 했기 때문에 가람은 오랜만에 창문 밖으로 리베르튼의 번화가를 볼 수 있었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번잡한 풍경 속에서 가람은 기묘한 것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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