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분명 광장의 분수대 근처에는 가판대 손님들을 위한 자그마한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엇인지 모를 거대한 동상이 대신 세워져 있다. 게다가 그 근처에는 한창 작업 중인 몇 개의 석상이 더 있었다.
묘하게 익숙한 뒷모습에 불길함을 느끼며 동상을 응시하던 가람은 마침내 마차가 가까워져 그것의 정체를 깨달은 순간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저건…….”
차마 말을 맺지 못하고 기가 막힌 표정을 짓는 가람을 보고 영주와 하스펠이 창문 밖을 내다본다.
그리고 가람이 본 광경을 확인한 하스펠은 묘한 얼굴이 됐고, 영주는 싱글벙글 웃으며 가람에게 쾌활하게 설명했다.
“모르셨습니까? 이미 한참 전부터 성녀의 동상을 세우느라 분주합니다. 이건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고, 저쪽으로 가면 아마 더 훌륭한 것이 있을 겁니다.”
가람은 영주의 웃는 얼굴이 꼭 자신을 놀리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저것보다 더한 것이라니.
가람은 믿을 수가 없어서 창문에 달라붙듯 밀착해 면밀히 거리를 살폈다.
그 결과 옷의 주름까지 하나하나 세밀하게 조각한 자신의 석상 주위로 갖은 금속을 현란하게 사용하여 광휘를 표현한 거대한 작품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건 대체 누가 만드는 거죠?”
묻고 있긴 했지만 가람의 눈은 영주의 소행이라 확정 짓고 있었다.
이렇게 정성스럽게 나에게 엿을 먹이려고 들다니. 조용히 분노하는 그 분위기를 읽고 영주가 손사래 쳤다.
“제가 시킨 게 아닙니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성녀를 모시고 있는 겁니다. 당신은 지금 리베르튼의 희망이니까요.”
그 말에 가람은 다시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확실히, 동상이 너무 충격적이라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일을 하는 시민들은 모두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군이 몰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마냥 태연하기만 하다.
만약 자신이 이 도시를 그대로 떠났다면 이들을 배신하는 꼴이 되었을 것이고, 이 도시는 그대로 멸망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나중에 이 도시에 우연찮게 들러 동상을 발견하기라도 했다면 그 죄책감은 정말로 끔찍했겠지.
이미 이 일은 자신의 손을 떠났다. 가람은 짧게 한숨을 쉬며 불평했다.
“그런데 저 동상 저랑 전혀 안 닮았어요.”
그녀의 말대로 동상은 지나치게 미화된 상태였다. 표정에는 중후함과 엄숙함이 넘치고 팔다리는 가람이 절대로 취하지 않을 자세로 조각되어 있다. 그야말로 그들이 그리는 신의 모습 그대로다.
그렇다고 해서 동상의 얼굴이 영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정말로 닮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스펠과 영주는 그 말에 심히 동감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가람을 심히 괴롭게 만드는 동상들의 거리를 지나 마차는 망루에 도착했다.
가람을 찬양하는 분위기 일색이던 시가지와 달리 망루는 전쟁을 앞둔 긴장과 전력의 차이를 아는 병사들의 절망으로 무거운 분위기였다.
병사들은 이미 살아 있는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몇몇이 마차에서 내리는 가람을 알아보고 짧게 눈을 빛내긴 했지만 그뿐이다.
성벽 안에서 보호받는 시민들과 칼날 사이로 뛰어들어야 하는 병사들이 현 상황에 대해서 체감하는 깊이는 완전히 다르다.
병사들에게 전투는 피부보다도 밀접하게 닿아 오는 현실이었다.
그런 잔혹한 현실 앞에 가람의 치료의 기적은 태풍 속의 촛불과도 같이 덧없는 것이다.
심지어 가람이 망루를 찾아온 것에 대해 불만을 터뜨리는 병사도 있었다. 마차에서 내리던 가람은 그 소리를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영주님, 오셨습니까.”
표정이 반쯤 죽어 있는 병사들 사이로 누군가가 튀어나와 영주의 앞에 허리를 숙여 보인다.
고동색 머리카락 사이로 희미하게 흰머리가 얼비치는 남자였다. 병사들이 두터운 가죽으로 무장한 것에 비해 그의 무장은 꽤 호화로웠다.
옅은 주름이 새겨진 중후한 얼굴이 그가 걸친 검은 갑옷과 제법 잘 어울린다.
“수비대장. 수고하는군. 이쪽은 알다시피 성녀로 알려진 분이네. 델리움의 군대가 보인다는 보고를 듣고 모셔왔다네.”
수비대장은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어쨌든 영주가 깍듯하게 모시는 가람을 홀대할 수도 없었던 모양인지 건성으로 가람에게 악수를 청했다.
솔직히 하스펠이라면 모를까, 검과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들 사이에 가람의 존재는 확실히 이질적이긴 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고생하시네요.”
가람은 내밀어 오는 수비대장의 손을 맞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갑옷에 둘러싸인 커다란 그의 손에 비해 가람의 손은 너무나 작고 가냘파 보였다.
그 광경에 가볍게 눈살을 찌푸린 수비대장은 빠른 걸음으로 가람을 망루 위쪽으로 안내했다.
“저쪽 끝을 보시면 됩니다.”
수비대장이 손을 들어 성벽 앞쪽을 가리켰다. 사실 그가 가리키지 않아도 상관없을 만큼 군대의 움직임은 뚜렷했다.
가람은 거센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대충 수습해 귀 뒤로 넘기며 능선을 따라 모여드는 군대를 응시했다.
“느리네…….”
“예?”
가람의 짧은 중얼거림을 들은 수비대장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얼굴로 되물었다.
가람은 움직이는 적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한층 확실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느리다구요. 도착하려면 두 시간이 아니라 서너 시간은 걸릴 것 같은데요. 숫자는 대충 2만 정도 되어 보이는데. 대군이긴 하네요.”
그렇게 말한 가람은 바람 부는 망루에 두 다리를 달랑이며 걸터앉아 너무 일찍 왔다며 투덜거렸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수비대장은 기가 막히다 못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는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가람의 자그마한 등을 바라보다가 그 얼굴 그대로 영주를 돌아보았다.
“그나저나 성녀님이 이곳에 무슨 일입니까?”
전쟁의 전 자도 모르는 새파란 애송이가 망루 위를 어슬렁거리는 것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못마땅했던 수비대장의 어조는 곱지 않았다.
영주는 그의 말에 다 안다는 듯 답지 않게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 이유가 있네. 병사들도 고생했으니 쉬게 하게나.”
수비대장은 영주의 대답에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순간적으로 앞이 캄캄해졌던 그는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수십 가지의 가정이 맹렬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설마, 영주가 리베르튼을 포기한 것인가.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적군을 앞에 두고 쉬라니!”
흥분으로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는 수비대장에게서 영주는 며칠 전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빙긋 웃으며 여유롭게 대답했다.
“적군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어차피 싸울 일은 없을 테니.”
수비대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표정이다. 영주의 배신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간신히 욕설을 퍼붓지는 않았지만 그의 손은 칼자루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의 갈등을 꿰뚫어 본 영주는 은근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며칠 전 성 앞 숲에 떠올랐던 거대한 불덩이를 기억하나?”
수비대장이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바로 저분께서 하신 일이라네.”
유쾌하게 말하며 망루에 걸터앉아 있는 가람을 가리키려던 영주는 황당함에 눈을 깜빡였다. 방금까지 앉아 있던 가람이 사라진 것이 아닌가.
두 사람이 황망하게 주변을 살피는데 사라졌던 가람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바로 성벽 아래에서 솟아오른 것이다.
하늘을 나는 가람을 본 병사들과 수비대장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크게 뜨였다.
그러나 가람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수비대장의 발치에 몇 개의 방패를 던졌다.
“아래에 떨어져 있기에 주워 왔어요.”
던져진 방패가 카캉 하고 쇳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부주의한 병사가 실수로 떨어뜨렸으나 가까워지는 적군 때문에 미처 주워 오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영주와 하스펠을 제외한 망루의 모든 사람들이 바보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멍한 얼굴로 가람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얼빠진 정적은 가람이 결국 망루 위에 발을 딛고 다시 걸터앉은 후에야 끝났다.
망루에 걸터앉은 가람의 등 뒤로 병사들의 환호가 쏟아졌다. 누구도 입에 담지 않던 무언의 절망 속에서 한 자락의 빛을 발견한 사람들의 진심 어린 환희였다.
그 환호는 수비대장이 불덩이를 만든 장본인이 가람인 것을 알리자 더욱 커졌다.
여기저기서 성녀의 이름을 연호하는 외침이 터져 나오고, 병사들의 사기는 단숨에 치솟았다.
하지만 가람은 병사들이 싸우게 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 사기는 사실 불필요한 것에 불과했다.
흥분한 병사들 사이로 성녀가 자신들을 지켜 줄 거라는 말이 퍼져 나가는 것을 들으며 가람은 소문이 또 커지게 될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 눈꼴사나운 동상들을 만드는 사람도 늘어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델리움의 군대를 막아 내고 나면 지금의 소란은 우스울 정도의 추종이 이어지리라.
수습이 불가능함은 알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사태를 더 키우는 것밖에 없다는 사실에 가람은 깊이 우울해졌다.
그리고 흘긋 본 하스펠의 얼굴이 감출 수 없는 자랑스러움에 물들어 있어서 가람의 우울은 한층 더 깊어졌다. 기쁨의 도가니 속에서 가람 홀로 고립되어 있었다.
병사들은 이제 그녀의 이름으로 찬가를 지어 부르고 있었다.
음정도 제각각에 간혹 멱따는 듯 괴성이 중구난방 튀어나오는 등 엉망이라서 노래라기보다 소음에 가까웠지만 어쨌거나 더 이상 절망하는 병사가 없는 것은 분명했다.
그런 이유로 해 질 녘 노랫소리 높은 리베르튼의 성벽 앞에 열 지어 선 델리움의 군대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언뜻 보기에도 성벽은 수성을 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갈고리를 쳐 낼 준비도 하지 않는 데다 비축해 두었을 화살도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이 북적이긴 했지만 병사들과 민간인이 뒤섞여 노래나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진귀한 광경은 델리움군의 선봉대장을 맡은 철의 기사 렉시온의 미간을 좁히기에 충분했다.
가늘게 뜬 눈으로 실성한 듯 보이는 델리움의 병사들을 응시하던 그가 손을 들어 올려 동요하는 아군을 진정시켰다.
굵은 눈썹과 선이 강한 얼굴이 인상적인 그는 하스펠보다 스물은 많아 보이는 노련한 기사였다.
고집 있게 다물린 입술이 미심쩍게 꿈틀거리고, 융통성이라곤 없어 보이는 딱딱한 눈동자가 예리하게 성벽을 살폈다.
리베르튼은 대륙에서 가장 허물기 힘든 성벽을 가진 것으로 유명했다. 쇳물을 부어 통짜로 만든 커다란 철문은 인간의 힘으로 깨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견고하다.
그러니 농성전은 리베르튼의 전통적인 방어 방법이자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런데 성벽은 그 농성전을 할 낌새가 전혀 없어 보인다.
무언가 함정이 있는가.
고민하던 렉시온은 마음을 단단히 굳혔다. 리베르튼의 성녀 전설이 신경 쓰이긴 했으나 어차피 그것은 민중을 현혹하는 사특한 마녀의 교활한 혓바닥이 만들어 낸 헛소문에 불과할 것이다.
어떤 수를 쓰더라도 저주받은 리베르튼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병력의 숫자가 압도적이라는 걸 제외하고도 정의는 분명히 이쪽에 있었다.
렉시온의 안에서 아군의 패배는 그림자도 없었다. 그만큼 그의 신념은 확고했던 것이다.
한편 가람은 성벽 위에서 성녀를 연호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심란해하는 렉시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의 방향을 확인한 하스펠이 의아한 얼굴로 슬쩍 말을 건네었다.
“너무 멀어서 그렇게 보셔도 아무것도…….”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허공에 하나의 상이 맺혔다. 가까이 서 있는 사람들이 모두 놀라 탄성을 터뜨리는데, 놀란 기색을 금세 갈무리한 하스펠은 가라앉은 눈으로 영상 안의 인물을 응시했다.
심상치 않은 표정에 덩달아 렉시온에게 시선을 던진 가람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는 사람이에요?”
하스펠은 렉시온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철의 기사라고 불리는 렉시온입니다. 집행자 중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인물로, 한때 제가 가장 존경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어제의 동료를 오늘의 적으로 마주한 상황인가. 가람은 하스펠의 무거운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한때라곤 했지만 렉시온이라는 기사의 연배를 봤을 때 아마도 어릴 적부터 하스펠의 우상이었을 확률이 높았다.
게다가 등에 두른 하얀 망토가 어쩐지 낯익다 했더니 처음 하스펠을 구했을 때 그가 걸치고 있던 망토와 똑같은 것이다. 이런, 같은 기사단 출신인가.
“괜찮아요?”
별일은 없을 테지만 입술을 깨무는 하스펠을 보니 어쩐지 위로해야 할 것 같아 가람이 질문하자, 의외로 하스펠은 의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하기도 했고, 저들의 입장에서 저는 변절자이니 최악의 경우 서로 칼을 대고 싸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마음의 정리는 끝난 상태입니다. 그저 실제로 마주하니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하고 헤매는 그에게 가람이 망루 위로 가볍게 뛰어올라 미소 지어 보였다. 허공에 비춰지던 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칼을 휘두를 일도 없을 거예요.”
그 말을 남긴 가람은 그대로 망루 아래로 곤두박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