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가람이 날아오르는 모습을 못 봤던 사람들이 단말마를 지르며 제 입을 틀어막는다.
그러나 가람의 발이 사뿐히 지면에 닿자 폭발적인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 함성을 뒤로하고 가람은 렉시온을 마주했다.
렉시온은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저 허울뿐인 소문인가 했는데 눈앞의 여자는 30미터가 넘는 높이를 계단이라도 내딛는 것처럼 가뿐하게 내려온 것이다.
아무리 마녀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눈앞에서 기이한 일들을 목격하자 얼이 빠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차피 사악한 술수다. 렉시온은 스스로를 다잡고 말을 몰아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것이 일반적인 전쟁이라면 선전 포고를 하겠지만 델리움의 군대는 공식적으로 리베르튼과 전쟁을 하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사악함이 날뛰는 이단자들을 처벌하고 도시의 죄악을 단죄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통상적인 선전 포고 없이 바로 군대를 움직여 온 것이다.
하지만 저 사악한 도시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마녀가 직접 전면에 나선다면 마냥 물러서는 것도 명예롭지 못한 짓이었다.
서로를 향해 다가간 두 사람은 어느새 목소리가 들릴 정도로 지척까지 가까워졌다.
렉시온은 곁에서 따르던 부관에게 눈짓해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게 하고 자신은 말에서 내려 가람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가 생각보다 평범하다는 것에 한 번 놀라고, 꽤 어리다는 것에 두 번 놀랐다.
“네가 리베르튼의 마녀인가.”
얼굴에 어울리는 중후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감탄하며 가람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싱긋 웃어 보였다.
“일단은 성녀라고 부르던데요.”
“말장난을 할 생각은 없다. 우리는 리베르튼을 단죄하러 온 것이다. 스스로 성문을 열고 투항한다면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고 죄를 더 쌓는 것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말에 멀찌감치 서 있던 렉시온의 부관이 그런 조언을 해도 저들은 들으려 하지 않을 거라며 소용없다 작게 외치는 것이 들린다. 가람은 부관에게도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인 후 천진한 어조로 말했다.
“어차피 투항하든 안 하든 리베르튼의 주민을 모두 학살할 거잖아요? 불필요한 희생을 줄인다고 해도 그쪽의 희생을 줄인다는 뜻이겠죠.”
말투와는 달리 그 내용은 매우 냉소적이었다. 멈칫한 렉시온은 눈을 가늘게 뜨고 씹어뱉었다.
“학살이 아니라 정화다. 네가 더럽힌 시민들의 영혼을 정의로운 칼날 아래 구원하여 바른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완전히 벽창호가 따로 없었다. 가람은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다소 쌀쌀맞게 응수했다.
“말이 전혀 안 통하는 사람이네. 뭐 저도 말장난을 할 생각은 없네요.”
“투항하지 않겠다면 남은 것은 하나뿐이군.”
“싸울 생각도 없는데요.”
태평한 가람의 말을 조롱으로 받아들인 렉시온은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하겠다는 듯 검을 뽑아 들었다.
이 자리에서 마녀의 목을 치고, 그것을 시작으로 저주받은 도시를 계도한다.
마녀가 앞으로 어떻게 혓바닥을 놀리든 자신을 흔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 그는 확신했다.
“나는 철의 기사 렉시온. 너를 막을 사람이다.”
그가 선언하는 순간 쿠웅 하고 강한 압박감이 사방을 내리눌렀다.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무게였다. 옴짝달싹도 하기 힘든 그 분위기 속에서 노을 지던 하늘이 순식간에 시커멓게 물들었다.
잿빛의 칙칙한 구름이 해를 가리자 마치 밤이 찾아온 듯 컴컴해졌다. 이 이상한 현상에 델리움의 병사들은 물론이고 망루의 군중들마저 두려움으로 술렁거린다.
그 혼란 속에서 가람이 천천히 걸었다. 그 모습에 렉시온은 가람이 이 모든 일들의 주범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공기가, 세상이 떨리는 듯한 느낌이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공포의 색이 진해진다.
렉시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망치지 않았다. 그러나 단지 도망칠 수 없었을 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뱀 앞에 얼어붙은 쥐처럼, 그저 가람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볼 뿐이다. 미칠 듯한 두려움을 애써 외면하며.
“그래.”
마침내 렉시온의 앞에 선 가람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조금 쾌활한 듯 철없는 어린아이 같던 여자가 감히 쳐다보기도 힘들 정도의 위압감을 내뿜는다.
이를 악물고 자신을 노려보는 렉시온에게 나른하게 웃어 보이며 가람은 그가 뽑아 든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걸로 나를 막겠다고?”
렉시온의 검은 최고의 기사에게 주어지는 것인 만큼 아주 훌륭한 물건이었지만, 예리한 칼날이 무색하게도 가람의 손가락이 닿자 숯처럼 검게 변색되어 바람에 푸슬푸슬 흩날렸다.
그 광경에 렉시온이 완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히려는 순간, 외마디 고함과 함께 그의 부관이 가람을 향해 쇄도했다.
미친 듯이 휘둘러진 그의 검은 안타깝게도 가람에게 닿을 수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빛의 화살이 그의 검을 쳐 내고 두 조각으로 나누어 버렸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실력 좋은 검사인 만큼 두 사람은 그 광경을 놓치지 않고 똑똑히 보았다.
“이, 이 마녀가!”
렉시온의 부관이 부들부들 떨며 분을 참지 못하고 외쳤다. 그가 절반밖에 남지 않은 검을 고쳐 잡고 다시 달려들자 빛의 화살은 그대로 검을 박살 내고 부관의 목에 들이대어졌다.
목에 구멍이 뚫릴 위기에 처한 것은 렉시온도 마찬가지였다.
“죽일 테면 죽여라. 하지만 우리에게는 2만의 병사가 있다. 그들이 우리의 복수를…….”
빛의 화살 앞에 비장하게 말하던 렉시온의 목소리가 순간 흐려졌다. 눈앞의 광경을 외면하고 싶은 듯 그의 갈색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함성이 가득하던 리베르튼의 망루도 아까부터 조용해진 상태였다. 적막 속에서 렉시온은 시야를 가득 메운 빛의 화살들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마치 허공에 멈춘 빛의 폭우처럼 보였다. 시커먼 먹구름 사이를 뚫고 나온 것들이라 더욱 극적으로 보였다.
그 아래에는 2만의 병사들이 자리해 있었다. 무거운 정적 끝에 리베르튼의 성벽에서 세상을 쪼갤 듯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델리움의 군대는 침묵의 바다에 빠진 것처럼 고요했다.
“말도 안 돼.”
완전히 넋이 나간 렉시온이 홉떠진 눈으로 중얼거렸다. 빛의 화살 하나가 자신의 부관을 가지고 놀듯 상대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시야를 가득 메운 이것들이 얼마나 손쉽게 자신의 군대를 부술 수 있을지는 명료했다.
어떤 방법을 써도 전멸을 피할 수 없으리라. 그는 참담한 심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러니까 싸우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공포로 부들부들 떨면서도 끝까지 자신을 노려보는 렉시온에게 가소로운 시선을 던지며 가람이 상냥한 척 말했다.
절망에 빠진 그에게 가람의 그런 태도는 조롱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이만한 마녀가 세상에 나타나다니. 신은 우리를 버리시는가. 그는 비통하게 외쳤다.
“어서 죽여라.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마녀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짓 따위는 절대로…….”
기세 좋게 시작된 렉시온의 말은 가람이 손을 슬쩍 들어 올리는 것만으로 뚝 끊겼다.
그저 떠 있기만 하던 빛의 화살이 무언가를 겨냥하듯 일제히 각도를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미처 죽음을 각오할 시간도 없이 화살은 쏘아졌다.
순간 눈을 질끈 감았던 그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합창하는 듯한 파열음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일단 무장 해제.”
상큼한 가람의 말대로 병사들의 검과 갑옷은 산산조각 나 고철의 형태로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 일어난 일이다. 렉시온이 들었던 파열음은 검과 갑옷이 쪼개어지는 소리였던 것이다.
그들은 어안이 벙벙한 나머지 하늘을 가득 메웠던 먹구름이 어느새 사라진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병사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한 시선을 교환하는 순간, 더욱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별안간 델리움군 병사들의 발밑이 쑥 꺼졌다. 갑자기 치솟은 땅이 그들을 집어삼킨 것이다.
순발력 있는 사람은 팔을 허우적거리며 급히 피하려고 했지만 범위가 넓었던 탓에 남들과 다른 묘한 자세로 파묻히게 되었을 뿐이다.
어쨌거나 그 재앙은 말이나 인간, 대장과 병졸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공평하게 베풀어졌다.
그 말인즉, 렉시온도 땅에 파묻히게 되었다는 뜻이다.
2만의 병사가 머리만 내밀고 땅에 묻힌 진귀한 광경은 리베르튼의 망루에서 사태를 지켜보던 구경꾼들이 자신의 턱이 어디까지 벌어질 수 있는지 알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아연하게 만든 가람은 자신이 조경한 인간들의 밭을 감상하며 잘 심겨 있는 렉시온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나는 그쪽 같은 학살자가 아니라서 사람을 죽이는 게 정의라고 믿지 않아요. 일단 거기에서 머리나 좀 식히고 있어요.”
대단히 화가 날 만한 말인데도 불구하고 렉시온은 그저 멍한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리베르튼의 망루로 날아가는 가람을 바라볼 뿐이었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비현실적인 일이 연달아 닥치니 머릿속이 완전히 멈춰 버린 것이다.
사실 그는 가람이 한 말을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그의 정신세계는 끊임없는 부정만을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려갔던 것만큼 가뿐하게 성벽으로 올라온 가람은 경이로운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수백 쌍의 눈을 맞이할 수 있었다.
너무나 대단한 신위에 단체로 벙어리가 되어 버린 모양이었다. 감탄을 감추지 못한 영주가 주춤주춤 다가왔다. 과연 지도자로서의 관록이 엿보인다.
“포로 획득했어요.”
가람이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보고하자 영주는 전율하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감히 가람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며 끊임없이 그녀를 찬양했다.
내버려 두면 즉석에서 찬송가라도 지어 부르며 춤이라도 출 기세였다. 심히 고지식하던 첫인상을 떠올리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가람은 사람의 첫인상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말을 확신하며 망루 아래를 턱짓했다.
“그만하고 저 사람들 처리나 해 주세요. 아, 죽이지 말고.”
그제야 영주는 온몸으로 내뿜던 찬사의 물줄기를 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돌아서 지시를 내리려던 그는 문득 가람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왜 하필 저런 꼴로 만드신 겁니까?”
“2만의 포로를 수용할 공간 있어요?”
명쾌한 반문에 영주는 깨달음을 얻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한 가지 더 걸리는 점이 있었다.
“저는 델리움 군대를 그대로 죽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시뻘건 불덩이를 들이대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던 가람이 이런 평화적인 방법으로 사태를 마무리할 줄은 몰랐던 터라 영주는 안심하면서도 의문이었다. 그러나 가람은 픽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내가 사람을 막 죽이는 그런 존재였으면 좋겠어요?”
“절대 아닙니다.”
“그럼 됐잖아요. 일단 적당히 간이 수용소 짓는 대로 저 사람들 하나씩 뽑아다가 옮겨요. 아, 수확 다 끝나면 말하고, 최대한 죽이지 않는 방향으로 처리해 주세요.”
영주는 수확이라는 가람의 표현이 대단히 마음에 들었다. 그는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델리움군을 내려다보며 뿌듯하게 말했다.
“리베르튼 사상 최고의 풍년이군요.”
2만의 사지 멀쩡한 포로.
그것을 빌미로 델리움으로부터 몸값을 얼마나 받아 낼지 생각하면 벌써부터 속이 든든한 느낌이었다.
혹여 델리움이 협상에 응하지 않고 추가 군을 보낸다고 해도 가람이 있으니 걱정할 것은 하나도 없다.
그는 가람이 이 문제를 자신의 책임이라 여기고 있으며, 능력이 닿는 한 그 책임을 피하지 않을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영주가 기뻐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가람은 감격에 휩싸인 하스펠에게 다가갔다. ‘이런 기적을 내 눈으로 목격하다니.
이제 죽어도 좋아.’라고 말하는 듯한 그의 반짝이는 눈빛이 심히 부담스러웠으나 그에게 맡길 일이 있었던 것이다.
“하스펠.”
“예. 말씀하십시오.”
지나칠 정도로 빠른 대답에 가람은 한층 부담스러움을 느끼며 망루 아래의 렉시온에게 시선을 던졌다.
“저 사람 아는 사람이라고 했죠?”
“예. 그렇습니다.”
하스펠은 약간 불편한 듯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잘해 봐요.”
그 말만 남긴 가람은 시원스럽게 망루를 떠나 마차를 타고 영주 성의 귀빈실로 떠나 버렸다.
남은 하스펠은 대체 무엇을 잘해 보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가람이 명한 일이므로 어쨌든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앞으로 만들어질 수많은 찬가와 동상을 피해 귀빈실에 틀어박히기 위해서 모든 일을 떠넘겼다고는 절대로 생각지 못했다.
어쨌거나 모두가 리베르튼의 멸망을 점쳤던 전쟁은 어처구니없을 만큼 싱겁게 끝나 버렸다.
수많은 추종자와 그에게서 비롯될 노래와 책, 성물을 약속하며.
* * *
리베르튼의 성녀가 델리움의 2만 군대를 순식간에 포로로 만들었다는 소문은 과장되고 부풀려지고 극적으로 각색된 후 여러 버전으로 주변 도시에 퍼져 나갔다.
덧붙여 그 위명이 높아짐에 따라 가람의 칭호는 성녀가 아니라 여신으로 격상되었다.
리베르튼은 여신이 처음으로 강림한 성도가 되었으며, 델리움의 징벌적인 행위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앞다투어 델리움을 악의 화신으로 포장하고 가람을 그 델리움을 징벌하기 위한 하늘의 사신으로 추대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심지어 리베르튼에서는 가람의 행보를 기록한 최초의 성서가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그렇게 가람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착실하게 대륙을 구원할 신이 되어 가고 있었다.
대체 어디부터 잘못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지, 저렇게나 행복한 얼굴의 사람들을 굳이 바로잡을 필요가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던 가람은 결국 드높은 찬가를 피해 귀빈실에 스스로를 감금했다.
가람이 세상의 모든 관심을 부정하며 침대에서 가벼운 우울증을 앓고 있는 동안 하스펠은 충실히 그 곁을 지키며 내내 무언가를 끼적였다.
처음에는 그가 무엇을 적고 있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던 가람이지만 지나가던 하녀들의 수다에서 리베르튼에 퍼져 가는 성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로는 하스펠이 무엇을 쓰고 있는지 매우 신경 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성서가 대단히 사실적이고 흥미로워서 인기가 굉장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흥미롭다는 부분은 그러려니 하겠지만 사실적이라니? 귀빈실에 틀어박힌 자신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다고 사실적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런 미심쩍은 생각은 결국 자신의 곁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의심의 화살을 돌리게 만들었다.
“하스펠. 지금 뭐 적어요?”
가람이 은근한 어조로 질문했다. 하스펠은 집필에 몰두한 나머지 가람의 분위기를 읽지 못하고 담담히 대답했다.
“가람 님의 위대함을 알리는 글을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