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변명도 발뺌도 없이 당당한 태도로 실토하는 그에게 그녀는 기함했다.
언제 늘어져 있었냐는 듯 벌떡 일어나 그대로 하스펠이 쓰고 있던 종이를 낚아챈 가람은 그가 말릴 새도 없이 그것을 읽어 내려갔다.
아마 말릴 틈이 있었다고 해도 하스펠은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숙제를 검사받는 아이처럼 조금 쑥스러운 듯 긴장한 얼굴로 가람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리베르튼은 구원을 받고 평화를 되찾았다. 그분의 자비로움은 하늘보다 넓어 세상에 비할 것이 없어서 피 흘림 없이 적도 감싸 안으시니 이 은혜 안에서 감사히 여겨야 할 것이다.
그분은 자비로운 마음으로 가엾은 농부를 돕고 신묘한 재주로 모두를 도우니 그분의 행보를 최선으로 알고 감히 더 바라지 않아야 한다. 무례히 바라는 자에게는 징벌이 약속되어 탐욕의 대가를 치르리라.
또한 그분은 누워 지내는 것을 좋아하시니 이는 휴식을 중요히 여기시는…….
거기까지 읽은 가람은 차마 더 읽지 못하고 종이를 내동댕이쳤다. 끔찍한 무언가라도 만진 것처럼 그녀의 손은 벌벌 떨리고 있었다.
낯간지러운 수준을 넘어 지독할 지경이다. 가람은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며 어금니를 깨물고 하스펠을 추궁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가람의 낮은 목소리에 하스펠의 얼굴이 불안으로 물들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조심스럽게 주워 갈무리하며 가람의 눈치를 살폈다.
“가람 님의 위업이 삿된 자들의 간사한 놀음에 말려들지 않도록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고, 어리석은 자들이 탐욕을 부리지 않도록 경고하는 의미에서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만…….”
이런 말투를 썼던가? 가람은 하스펠의 어투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지금까지 하스펠은 정중하긴 했지만 그래도 담백하고 군더더기 없는 단어를 주로 사용해 왔다.
그런데 삿된 자라니? 그런 말을 육성으로 듣게 될 줄은 몰랐던 터라 가람은 아연해졌다.
이것은 마치 렉시온이 사용하던 말투와 같지 않은가. 그 사실을 깨달은 가람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스펠, 돌려 말하지 않을게요. 저를 광신하지 마세요.”
그 말에 하스펠은 조금 충격받은 얼굴로 멍하니 가람을 응시했다. 그리고 잠시 시선을 내리깔고 자기 성찰에 빠졌다.
가람으로부터 들은 광신이라는 말은 그만큼 그를 놀라게 했던 것이다. 이미 한 번 광신함으로 인해 스스로의 인생을 망쳤던지라 민감할 수밖에 없는 단어였다.
그렇게 스스로가 광신하고 있는가에 대해 한참 고찰하던 하스펠은 명료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것은 광신이 아닙니다.”
“그러면?”
가람은 팔짱을 끼며 미심쩍은 태도를 버리지 못했다. 무리도 아니다. 잔인한 말이긴 하지만 하스펠은 이미 한 번 광신자였던 적이 있다.
충격으로 인해 개심했다곤 해도 습관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이다. 때로는 자각하지 못한 습관이 스스로의 가장 큰 적이 되지 않던가.
“예전에 저에게 해 주신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만약 하스펠이 정말로 이상해진 것이라면 힘으로 그의 머릿속을 고쳐 놓을 생각까지 하고 있던 가람은 뜬금없는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계속 말해 보라는 듯한 가람의 표정에 하스펠이 차근차근 말을 이어 간다.
“베푼 선의가 탐욕을 불러일으킨 나머지 스스로의 손으로 그들을 단죄했다는 말씀 말입니다.”
“아.”
그제야 가람은 하스펠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하스펠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가람도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었던 그날의 대화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하스펠이 말한 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그런 어감의 내용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하스펠이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는 조금 다른 버전인 모양이었다.
“예. 이야기해 주셨던 그와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저는 글을 쓰는 것입니다.
당신의 위엄을 높여 지배자들이 감히 욕심을 부릴 수 없는 존재로 받들고 그로 인해 분노할 일도 없게 되면 예전과 같은 일은 반복되지 않을 테니까요. 그런 것은 이 땅에도, 당신에게도 비극이지 않습니까?”
가람이 하스펠을 바라보는 눈이 조금 달라졌다. 그저 맹목적으로 자신이 베푼 기적들을 동경할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가람은 하스펠이 자신을 따르는 것이 마치 선망하는 연예인을 따르는 사람들의 것과 비슷한 종류라고 생각했다.
순수하고 아름답고 맹목적이지만 현실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감정. 그런 감정을 기반으로 경솔히 글을 써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다 생각했기에 가람은 불쾌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하스펠은 자신에게 구원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은 눈을 하고 있었다.
아주 미묘한 차이지만 둘은 완전히 다르다. 전자의 것이 애정을 바라는 조름의 성격을 띤다면 후자의 것은 애정을 퍼붓는 것에 가깝다.
“제 행동이 당신을 언짢게 만들었습니까?”
말이 없는 가람이 걱정되었는지 하스펠이 지그시 눈을 마주쳐 왔다.
그 눈 속에 동경이나 선망, 경이가 아니라 애정이 섞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가람은 어쩐지 그를 의심한 사실이 미안해졌다.
생각해 보면 방문자인 자신보다 이 세계 주민인 그들이 더 진지할 수밖에 없는데 자신은 하스펠이 경솔한 동경과 같은 감정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말로 생각이 짧았던 것은 자신이었다.
그래, 이 상황이 그런 행복한 방향으로 향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동상이 줄줄이 세워진다 한들 무슨 대수겠는가.
게다가 하스펠은 학살을 벌였던 그녀의 고통을 헤아려 이런 일을 한 것이다. 그 깊은 배려에 가람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뇨…….”
가람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하스펠은 조금 안심한 얼굴로 엷게 미소 지었다.
“당신이 방랑자의 기질이 있다는 것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이 땅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도요. 하지만 저는 되도록 오래 이곳에 머물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가람은 그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연속으로 얻어맞는 기분이다.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끼며 가람은 다시 침대로 걸어가 털썩 앉았다. 그리고 하스펠에게 충동적으로 질문했다.
“왜요?”
“당연히 당신이 좋으니까요.”
하스펠이 담백하게 대답했다. 가람은 묘한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하스펠이 부드럽게 쏟아 내는 애정은 비록 연정과 달리 격렬한 뜨거움은 없었지만 적당히 따스한 상냥함으로 가람을 어루만졌다.
그 차이를 가람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하스펠이 가람에게 품는 애정은 결코 육욕으로 화할 수 없는 경건한 애정이다. 가람의 입술이 아니라 발끝에 입 맞추는 그런 애정.
지금까지 가람이 이성 간의 사랑을 경험한 적이 없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가람은 언제나 외로움 속에서 따듯함에 굶주려 있었으니까.
게다가 가람은 꽤 매력적인 존재였다. 그녀가 가진 강력하고 경이로운 힘과 모든 것을 가지고도 스러질 듯 덧없는 분위기에, 그 그림자를 붙잡고자 하는 남자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그리고 그들이 퍼붓는 뜨거운 애정은 고독에 지친 가람의 마음을 쉽게 기울도록 만들었다.
결론적으로 그런 감정들은 가람에게 별로 유익하지 못한 것들이었다.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행복한 시간들은 마치 달콤한 지옥처럼 그녀를 옭아매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사랑이라고 해도 영생의 무게에 비할 것이 못 된다.
격렬한 사랑일수록 빠르게 식었고, 가람은 그때마다 지독한 배신감에 시달려야 했다. 홀로 행복했던 순간을 기억하며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곱씹는 것이 가람이 잠시 가졌던 행복한 시간들의 대가였다.
퇴색되지 않는 사랑은 없다. 그것이 연심이 아닐지라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가람은 하스펠의 고백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흘려보내며 그가 자신을 배려했다는 사실만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받은 애정에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그 애정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에 화를 느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음. 그나저나 말투는 왜 그랬어요? 꼭 그 렉시온이라는 사람처럼.”
가람은 일부러 가벼운 어조로 말해 무거워진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하스펠은 그 질문에 스스로의 말투를 곱씹은 뒤 대답했다.
“글을 쓰다 보니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된 모양입니다.”
하긴, 머릿속이 그런 형태의 문장으로 꽉 차 있었다면 말을 걸었을 때 무심코 그렇게 대답할 수도 있었겠지. 대충 이해한 가람은 다시 입을 열었다.
“으음, 그런데 꼭 그런 문장으로 써야 해요? 낯간지럽게.”
“좀 더 읽기 쉬운 문체를 사용할 수도 있지만 사람들은 어려운 것에 권위와 무게를 느끼니까요.”
대단히 명료한 대답이었다. 더 할 말이 없어진 가람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저 작업은 어쩌면 가람이 해야 하는 일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가람은 문제가 생기면 이 차원을 떠날 거라는 생각으로 손을 놓아 버렸다.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그런 수고를 들일 만큼 어떤 차원에 애착을 가지기도, 의욕을 느끼기도 힘들었던 것이다.
만약 지금보다 사태가 더 악화된다면 다소 극단적인 방식으로라도 상황을 마무리하려고 들지도 몰랐다. 사람들의 머릿속을 모조리 뜯어고친다거나 하는 방식 말이다.
어쨌든 그런 자신 대신 하스펠이 일해 주고 있으니 가람으로서는 그를 기특하게 여김이 옳았다.
그러나 가람은 하스펠이 너무나 진지한 표정으로 작업에 임하고 있는 것을 보자 놀려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책이 밖에서 성서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거 알아요?”
“그렇습니까?”
하스펠은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이었다. 그는 그저 글을 적어 영주에게 건네어 주었을 뿐이다.
그가 그렇게 덧붙이자 가람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면 성서라는 이름을 붙이며 굳이 자신을 신격화시키는 작업은 영주의 작품이라는 건가.
아무래도 영주는 리베르튼에 거룩한 도시라는 뜻의 성도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싶은 모양이다.
하스펠이야 가람이 자신을 구원해 주었으니 그녀가 이 차원에서의 마찰 끝에 떠나 버리는 일을 막기 위해 글을 쓴다지만, 영주는 단순히 가람을 팔아먹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영주의 입장이 난처해진 데다 그간 마음고생을 많이 했으니 가람은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관대함과 귀찮음이 뒤섞인 결론이었지만 어쨌든 영주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그리고 가람이 다시 아무도 주워 가지 않을 듯한 모습으로 침대 위를 뒹굴려던 차 누군가가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영주님이 오셨습니다.”
며칠 사이에 제법 익숙해진 목소리다. 귀빈실에 딸린 하녀인 제냐가 공손한 말투로 영주의 방문을 알렸다.
가람은 미동도 없이 집필 작업을 이어 가는 하스펠을 흘긋 바라본 후 작게 대답했다.
“들어오세요.”
침대에 엎드린 자세 그대로 고개만 들어 영주를 맞이하는 모습에 하녀는 그러려니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사실 망루에서의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하인들 사이에 가람이 영주를 대하는 태도는 많은 비난을 받았다.
내색하지 않긴 했지만 제냐 또한 가람의 방자함을 대단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다른 도시민들이야 리베르튼의 영주를 욕하지만 리베르튼 사람들에게 영주는 존경받아 마땅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의 청렴한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가솔들의 충성심은 기사가 제 주군에게 바치는 것 못지않게 높았다.
그런 그들에게 둘의 관계는 납득 가지 않는 것이었다. 일부는 가람이 영주의 권위에 도전한다고 생각해 강하게 경계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재미있는 사실은 가람은 하인들이 무슨 말을 떠들든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스스로가 영주에게 무례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가람의 입장에서는 자신보다 영주가 한참 어린데도 그가 자신의 어려 보이는 외형에 현혹됨을 배려해 꼬박꼬박 존대를 사용해 줌으로써 대단히 존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린 평민 여자 나부랭이가 성의 주인에게 보여야 할 예의로는 크게 부족했고, 그 결과 하인들의 구설수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영주 또한 수백 년을 살아온 가람에게 초면부터 하대하는 등 그만한 예의를 갖추지 않고 있었으므로 피장파장이었다.
어쨌든 저주를 치료한 신비한 능력을 높이 산 영주가 그녀를 영입하려고 한다던가,
영주 성 근처에 불덩이가 타올랐던 무렵에는 가람이 델리움이 말한 대로 마녀라서 영주를 홀렸다는 등 의견이 분분했다.
게다가 후자의 경우 그 사건 직후 영주의 태도가 대단히 깍듯해져서 소문의 신빙성이 더욱 커졌다. 그렇게 온갖 억측이 난무하던 중, 망루에서의 일이 터진 것이다.
2만의 포로를 관리하려면 영주 성의 사람들을 모두 동원해도 힘들다.
하인들과 병사들은 밤낮없이 포로를 수용할 공간을 마련하느라 뛰어다녔다.
그사이에 이렇게나 많은 포로를 잡은 것이 누구의 공로인지 알려지기 시작했고, 망루에서 가람의 힘을 목격한 사람들이 떠들어 대는 동시에 영주 성 내부에서 숨죽이고 있던 가람의 추종자들이 우르르 들고일어났던 것이다.
가람을 비난했던 사람들은 저주가 발병하기 전에 가람에게 치료받은 하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멀쩡한 자신에게 빛 한 번 번쩍해 준 가람보다는 영주에 대한 충성심이 더욱 깊었던 것이다.
가람이 범상치 않은 인물임은 인정하지만 영주에 비할 바는 못 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발병한 후 치료받은 하인들은 가람을 더욱 좋아했다. 그러나 영주 성의 여론에 그저 가람에 대한 비난을 묵인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망루의 사건 이후로 하인들은 영주가 가람에게 보였던 태도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은 제냐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녀가 찻잔과 절인 과일이 놓인 트레이를 끌고 들어와 티타임을 준비하는 사이 영주가 자연스럽게 가람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었다.
“방에서 계속 나오지 않으신다는 말씀을 듣고 걱정이 되어 찾아왔습니다. 폐가 되지 않는다면 차 한잔 어떠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