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이미 준비를 다 해 놓고 이런 질문을 하다니. 가람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주는 하스펠에게도 같은 권유를 해 찻잔 앞으로 불러들였다. 가람도 참석하는 자리에 홀로 빠지겠냐는 말은 제법 그럴듯한 구실이 되었다.
가람 본인 앞에서도 개의치 않고 그 이름을 팔아먹는 당당함에 가람은 성도 리베르튼이나 세간에 나도는 성서에 대해 입을 열어 봤자 소용이 없겠다는 생각을 하며 어느새 하스펠에게 친근하게 구는 영주의 사교성에 감탄했다.
그러고 보면 두 사람은 초반까지만 해도 꽤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가.
물론 영주가 하스펠을 델리움의 첩자라고 생각한 나머지 과도하게 경계한 것이 그 이유였지만, 그가 첩자가 아니라는 결론을 얻자마자 껄끄러운 기색도 없이 시원하게 태도를 바꾼 것은 정말로 대단한 것이다.
하긴, 이만한 인물이니 그 격변하는 세력의 아귀다툼 속에서 자신의 도시를 지켜 낸 것이겠지.
“차는 야탈카풍으로 옅게 준비했습니다.”
테이블 세팅을 마친 제냐가 물러난 후 모두가 자리에 착석하자 영주가 손수 차를 따르며 말했다.
중앙 리베르튼을 경계로 북쪽 델리움은 남쪽에 비해 상대적으로 물이 귀하고 메마른 기후라서, 아주 작은 찻잔에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진한 차를 소량 부어 혀를 촉촉하게 적실 정도로만 머금는 차 문화를 가지고 있다.
반면 야탈카는 그 반대다. 한 꼬집 정도만 찻잎을 넣고 물을 흥건할 만큼 많이 넣는다.
야탈카의 식물들은 아주 조금씩이긴 했지만 독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진하게 우려내면 그 독에 의해 여러 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리베르튼의 경우 물의 양은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찻잎이 대단히 특이했는데, 주로 바위에 붙은 해초를 사용했다.
대륙의 수많은 도시 중에서 찻잎으로 해초를 우려먹는 도시는 리베르튼이 유일했다.
그 독특한 맛과 향 때문에 타지 사람들은 이 차를 대단히 싫어했는데, 덕분에 차의 수출은 번번이 무산되고 있었다.
리베르튼의 해초 차는 가람도 한 번 맛본 적이 있었다. 각국의 차 문화에 대한 책을 읽다가 흥미가 생겨 하녀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그렇게 맛보게 된 차는 책에서 말하듯 대단히 독특했다. 마치 아무런 간을 하지 않은 뜨거운 미역국에 주방 세제를 몇 방울 떨어뜨려 먹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주방 세제 같은 맛은 해초 특유의 향이라고 했지만 어쨌든 그리 유쾌한 맛은 아니었다.
“모처럼이니 리베르튼의 차를 준비할까 했는데 제냐가 싫어하실 거라 조언해 주더군요. 정말입니까?”
“맞아요.”
영주가 내미는 찻잔을 받아 들며 가람은 담담히 긍정했다. 그는 잠시 묘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뜻 아쉬워하는 기색이었지만 워낙 순식간에 지나간 터라 가람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성서의 집필은 잘 되어 가십니까?”
영주는 하스펠에게도 차를 따라 주며 슬쩍 물었다. 그 말에 가람은 다시 한 번 영주가 성서라는 명칭을 세간에 퍼뜨린 장본인임을 확신했지만 말없이 찻물을 머금었다.
“예.”
둘 사이에 있던 초반의 투닥거림은 이제 완전히 사라진 분위기였다. 그 둘을 중재하고 있는 것이 자신이라는 것이 가람은 어쩐지 묘한 기분이었다.
“포로들 처분으로 바쁜 모양이더니 이제 시간이 좀 나셨나 봐요.”
드물게 가람이 먼저 말을 건네자 영주가 눈을 반짝였다. 그 새파란 눈동자에 도사리던 냉엄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다.
“예. 포로들을 수용할 공간을 짓는 일도 오늘로 끝났습니다.”
그렇게 말을 맺긴 했지만 영주는 어쩐지 석연치 않은 기색이었다. 그에 가람이 의아한 시선을 던지자 조금 망설이며 고민을 토로했다.
“렉시온이 가람 님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가람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하스펠을 향했다. 그는 벌써 차 한 잔을 훌훌 마시고 빈 잔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델리움 출신의 그에게는 차가 너무 연했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하스펠. 렉시온이 왜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거죠?”
사실 하스펠은 대외적으로 가람의 대변인으로 통하고 있었다. 2만의 포로를 단숨에 확보하는 무시무시한 능력에 그녀에게 주목하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접견 요청만 하루에 수십 건에 달하는데, 그들을 모두 만나는 것은 가람의 성미에 맞지도 않는 일이거니와 그녀는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호기심을 채워 줄 의무는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예 귀를 틀어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하스펠이 간혹 그들을 만나 동태를 살피는 역할을 해 왔던 것이다.
게다가 벽창호 같은 렉시온과 대화하는 것을 가람이 좋아할 리가 없으니 당연히 그에 대한 일도 하스펠에게 일임하게 되었다.
그 후로 가람은 렉시온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듣지 못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스펠이 빈 찻잔을 감싸 쥐며 대답했다.
“망루에서의 그날 이후로 렉시온을 만난 적 없어요?”
“있습니다.”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했어요?”
“진실을 이야기했습니다.”
영주는 눈치를 살피며 하스펠의 찻잔을 채워 주었다. 가람은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골수까지 신앙심으로 가득 차 있는 그에게 하스펠이 말하는 진실이라는 것은 씨알도 안 먹힐 소리였다.
“그래서 뭐라고 하던가요?”
“저를 처음 봤을 때 굉장히 충격받은 표정이더군요. 처음에는 저를 회유하려고 했지만 제가 진실을 거듭 말해 주자 배신자라고 소리치며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진정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그 후로는 찾아가지 않았습니다만…….”
차라리 조금 있으면 풀어 주겠다든가 하는 말로 어르는 것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렉시온에게 있어서 하스펠의 말은 광신에 빠진 리베르튼에서 배신한 옛 동료가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 신념에 먹칠을 하는 행위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 저주를 이제 저에게 퍼붓고 싶어진 모양이군요.”
가람이 대충 짐작을 말하며 찻물을 마시자 영주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그런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만.”
“음?”
“분명 처음에는 분노와 불신으로 가득했지만 리베르튼 안의 포로수용소로 옮겨진 후부터는 비교적 고분고분한 태도였습니다.”
가람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영주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동안 심중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 모양이었다.
솔직히 렉시온을 만나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가람은 어쩐지 그를 만나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기 때문이다.
“좋아요. 만나러 가죠.”
결론 내린 가람은 렉시온이 수감되어 있는 포로수용소로 안내되었다. 오랜만에 받는 햇살에 가벼운 현기증을 일으키며 가람은 포로수용소를 둘러보았다.
수용소는 급조된 기색이 역력했다. 나무를 여러 개 덧대어 조임쇠로 감옥의 형태만 잡아 둔 것이 있는가 하면 얼기설기한 고물을 주워다가 대충 감옥을 만들고 안에 사람을 넣어 둔 것도 보였다.
어설픈 감옥을 부수고 나올까 봐 그런지 포로들은 하나같이 결박되어 있었는데, 렉시온도 마찬가지로 손과 발을 모아 묶어 둔 상태였다. 보기만 해도 팔다리에 쥐가 날 것 같은 자세였다.
어쨌거나 그런 꼴로 옛 후배를 보게 된 그의 처지를 깊이 동정하며 가람은 하스펠을 물리고 홀로 렉시온에게 다가섰다.
“저를 보고 싶어 했다구요?”
가람은 렉시온의 옆에 쭈그려 앉아 그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감옥 안쪽의 바닥에는 죽 그릇 같은 것이 놓여 있었는데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모양인지 한 그릇이 통째로 말라붙어 있었다.
손발이 묶여 있으니 죽을 먹으려면 누군가 먹여 주는 수밖에 없는데 현재 성안에서는 손발이 모자라 잠을 줄이며 일하는 상황에 그런 한가로운 일을 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결국 개처럼 죽 그릇에 얼굴을 박고 핥아 먹는 수밖에. 결국 손도 안 댄 채 말라붙은 죽 그릇을 보아 렉시온은 내내 굶은 모양이었다. 그 탓인지 그는 꽤 수척해져 있었다.
“왔군.”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 사이로 거칠거칠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갑옷이 벗겨지고 신비감을 더해 주던 흰 망토가 사라지자 같은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위엄을 느낄 수 없었다.
며칠 사이에 완전히 폐인이 된 렉시온을 마주하며 가람은 처음 하스펠을 주웠을 때와 같은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 부른 이유가 뭐죠?”
렉시온은 조금 이채 어린 눈으로 가람을 응시했다. 만나고 싶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녀가 정말로 자신을 찾아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가람이 모든 접견을 거절하고 있다고 영주가 말한 바 있었기 때문에 그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어쨌든 와 주었으니 렉시온은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기적을 보여 줘.”
뜻밖의 말에 가람은 황당해졌다. 기적이라면 이미 그때 질릴 만큼 보지 않았는가?
비록 자신에게는 평범한 일이었지만 이들에게는 충분히 기적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 기적에 의해 포로가 된 신세라면 기적의 기 자만 들어도 학을 떼고 질릴 만도 한데 자처해서 보여 달라니?
“그때 본 것으로는 부족한가요?”
가람의 말에 렉시온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 있는 동안 델리움이 모시는 로투가 거짓 신이며 할라트도 허구라고 떠드는 사람이 많더군.”
“화났겠군요.”
“그래. 포로의 신세가 아니었다면 이미 목을 비틀어 버렸을 거야. 그런 모독을 그냥 넘길 수는 없지. 하지만 네가 한 말이 걸리더군. 우리를 학살자라고 불렀던 그 말. 처음에는 그저 불쾌할 뿐이었는데 곱씹을수록 그게 옳을지도 모르겠다는 미친 생각이 들더군.”
“흐음. 그래서 자기반성을 하셨나요?”
그는 잠시 큭큭거리며 웃었다. 우는 듯 찡그리는 듯 기묘한 웃음이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아니. 그 징벌은 온당한 것이었어. 하지만 한 가지가 걸리더군. 리베르튼의 시민들을 치료했다고. 살이 썩고 문드러진 것을 씻은 듯이 낫게 했다는 말을 매일같이 듣다 보니 조금 흥미가 생겼지. 사실 이곳으로 올 때까지만 해도 리베르튼은 산 제물과 미개한 숭배가 판치는 지옥도로 변해 있을 줄 알았어. 하지만 뜻밖에도 행복해 보이더군. 그 모습을 보니까 말도 안 되게…….”
“내가 리베르튼에 현신한 여신이라는 말이 믿어지기 시작했다?”
가람은 스스로가 말하고도 순간 낯부끄러움에 얼굴을 굳혔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델리움에서 말하는 존재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
렉시온은 픽 웃었다.
가람은 새삼 세뇌의 위대함을 느끼고 있었다. 감옥에 갇혀 내내 똑같은 종류의 소리만 들으면 이만한 벽창호도 생각을 돌리게 되는 건가.
렉시온은 더 이상 말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의 수염 난 얼굴은 상처와 더러움으로 얼룩져 있었다.
찢어진 입술과 멍은 수감되는 것에 반항하다가 입은 상처인 모양이다. 반발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상처 입지도 않았을 텐데.
실제로 렉시온을 제외한 다른 포로들은 비교적 멀쩡한 모습이었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가람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렉시온은 움찔했지만 가람의 손이 찢어진 얼굴의 상처에 닿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이 가볍게 닿았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욱신거리는 통증이 씻은 듯이 가시는 것을 느꼈다.
더러움도 완전히 사라졌다. 팔과 발바닥에 긁힌 상처들이 지워져 간다. 그 광경을 렉시온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응시했다.
가람은 굳은 렉시온을 내버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쭈그려 앉아 있었지만 덕분에 다리가 찌르르하게 저려 왔다.
저림이 가시기를 기다리며 말라붙은 죽 그릇에 시선을 던지던 가람은 문득 한 가지 문제가 걱정되었다.
화장실은 괜찮은가.
식사조차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상황이니 화장실을 신경 쓰는 것은 사치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포로들이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함을 생각하면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가람은 이들조차도 피해자라고 느껴졌다.
아니, 오히려 이들이 이 상황의 가장 큰 피해자다. 비록 델리움이 야욕을 드러내 일어난 일이지만 신호탄이 된 것은 가람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리베르튼을 정복하도록 내버려 둘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이런 개방된 장소에서 손발이 묶인 채 지내게 하는 것도 내키지 않는 일이다.
적어도 이 어설픈 감옥을 제대로 된 것으로 만들면 그나마 낫지 않을까. 어쨌든 부지는 확보가 되었으니 감옥만 지으면 되는 문제였다.
하지만 가람에게는 아직 그런 능력이 없었다. 지금까지 물질에 대한 욕구를 느낀 적이 드문 데다 베이스캠프는 과도할 정도로 가람의 물욕을 충족시켜 주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패스로 어떤 물건을 만드는 능력을 사는 것 자체가 불필요했다.
가람은 아주 오랜만에 패스로 능력을 구입하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