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사용하지도 않고 모아 두기만 한 패스가 잔뜩 있으니 그리 아깝지도 않았다.
게다가 사려는 능력은 약 3천 패스로 그렇게 비싸지도 않다. 가람이 구입한 것은 어떤 물건의 형태와 재질을 변경하는 능력이었다.
돌도 보석으로, 금도 물로 바꿀 수 있는 능력.
그 능력으로 가람은 감옥을 모조리 새로 지었다. 제대로 된 지붕과 돌벽, 그리고 철창으로 된 한쪽 벽에는 철문까지 제대로 달린 데다 열쇠로 열 수 있는 자물쇠까지 달려 있었다.
구석에는 간이 화장실로 사용할 수 있는 뚜껑이 덮인 구덩이도 있다. 덧붙여 친절하게도 열쇠는 죄수들의 손이 닿지 않는 감옥 외벽 오른쪽에 걸려 있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이 놀라운 일에 행인 모두가 경악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그 웅성거림을 들으며 가람은 뿌듯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적어도 얼굴로 밥을 먹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녀가 추가적으로 포로들의 손발을 자유롭게 해 주는 사이 이 일의 원인이 누구인지 깨달은 영주가 놀란 얼굴로 다가섰다.
“이건 설마…… 가람 님께서 하신 일입니까?”
“네.”
상큼하게 긍정한 가람은 조금 의도적으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렉시온이 멍하게 자신을 보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가람은 일부러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대기하고 있던 하스펠과 함께 귀빈실로 돌아온 가람은 갑자기 영주에게 폭탄을 떨어뜨렸다.
“포로의 일도 이 정도면 마무리되었으니 슬슬 떠나려고 해요.”
사실 진작 떠났어야 했다. 패스의 충전은 이미 이틀 전에 끝났기 때문이다. 여느 때의 가람이라면 패스가 충전되자마자 리베르튼을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만은 예외였다. 어째서인지 바늘이 다음 패스를 가리키는 순간이면 구름처럼 일어나는 조급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가람조차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의아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곳에 머물 수는 없다. 슬슬 가람을 만나고 싶다고 쇄도하는 요청을 거절하기도 버거워지고 있는 데다 리베르튼에서의 생활도 지겨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주는 가람이 아주 눌러앉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엄청나게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뭔가 아쉽게 하거나 서운하게 한 것이라도 있습니까?”
가람은 초반에 영주가 보여 줬던 태도를 나열함으로써 그를 놀려 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보다 수백 살이 어리긴 해도 일단 외형이 훨씬 나이 들어 보이는 그를 상대로 도저히 짓궂어질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얌전히 고개만 저었다.
“아니요. 떠날 때가 되었으니 떠날 뿐이에요.”
점잖지만 단호한 가람의 태도는 말을 붙이기 힘든 구석이 있었다.
가람의 결심이 확고하다는 것을 깨달은 영주는 몹시 당혹스러운 기분이었다. 마냥 침대에 늘어져 뒹굴거리더니 언제 저런 마음을 먹었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 떠나시면 델리움에서 후속으로 보내오는 군대를 막을 길이 없습니다. 당신이 구하신 도시를 버릴 생각이십니까?”
영주의 간절한 호소에 늘어놓은 물건들을 챙기러 돌아다니던 가람이 그를 힐긋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언제 시선을 주었냐는 듯 가방을 정리하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애가 단 영주가 다시 입을 여는 순간, 가람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섣불리 덤비진 못할 거예요. 2만의 군사가 어떤 식으로 포로가 되었는지 알고 있다면 고민을 좀 해야 할걸요. 그리고 군대를 통째로 사로잡았으니 소식통도 없는데 어떻게 결정을 내리겠어요? 패전의 소식이 닿는 데만 꽤 걸릴 거예요.”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이거 줄게요.”
가람은 영주에게 보라색의 반투명한 구슬을 내밀었다. 엄지손톱만 한 크기에 보잘것없는 빛깔을 지닌 구슬이다. 얼떨결에 받아 든 영주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가람이 덧붙였다.
“혹시라도 감당 못 할 군대가 쳐들어오면 부숴요. 망치로 내리치든, 발로 밟든. 그러면 내가 리베르튼으로 올게요.”
영주는 이 구슬이 어떻게 그런 역할을 하는지 묻지 않았다. 가람이 그렇다면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일말의 불안이 치미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떤 신물이라도 가람 본인이 리베르튼에 머무는 것보다 나을 리가 없다.
마음 같아서는 가람을 붙잡아 두고 싶었지만 영주는 애써 자제했다. 자신은 리베르튼의 영주였다.
죽음도 불사하며 맞서 싸우기를 망설이지 않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기댈 곳이 생겼다고 꼴사납게 매달리려고 드는가.
가람은 할 만큼 해 주었다. 영주는 그저 그 사실에 감사하기로 했다.
자신이 지금 해야 하는 일은 가람을 붙잡고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는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감사하고 최대한의 편의로 그 호의에 보답하는 것이다.
사실 짐을 싸면서 가람은 곁눈질로 영주의 심경이 굳어지는 과정을 모두 보았다. 정말로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최근 만난 지배자들 중 이 사람보다 나은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흐뭇한 기분으로 배낭의 입구를 단단히 여미는데 영주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 왔다.
“그런데 어디로 가십니까?”
스윽 시선을 돌려오는 가람에게 영주가 당황한 얼굴로 얼른 변명했다.
“딱히 가시는 곳을 캐묻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험한 길이면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드릴까 해서…….”
가람은 잠시 고민했다. 사실대로 말할까. 하지만 그랬다가는 영주가 오해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마냥 오해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결국 가람은 진실을 말했다.
“북쪽.”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영주는 아마도 이 말을 북쪽의 델리움으로 향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리라.
가람의 추측대로 순간 영주의 표정에 의미심장한 빛이 감돌았다. 그는 깊게 고개를 숙이며 한층 공손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먼 길이 될 테니 필요한 여장을 꾸려 드리겠습니다. 마차와 마부를 준비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보통은 그러지 않지만 가람은 자신도 모르게 영주의 머릿속을 읽었다.
그리고 그가 훈련된 기사들이 호위하는 십수 대의 호화로운 마차와 마부를 생각하고 있음을 알고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
부랴부랴 방을 떠나려던 영주가 주춤하며 돌아섰다. 그는 진지하게 고개를 저어 보이는 가람을 바라보며 도리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북부로 행진하는 여신의 행렬입니다. 화려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여신의 행렬이란 말인가. 가람은 두통을 느끼며 강하게 거절했다.
이번에 정리해 두지 않으면 영주의 오해는 끝없이 깊어져 결국 돌이킬 수 없어질지도 모른다.
적은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내부의 적이 더욱 골치 아플 때도 있는 것이다.
“저는 델리움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리고 저는 여신이 아니니 여신의 행렬이라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죠.
어쩌다 보니 상황이 이렇게 되긴 했지만 일을 더 악화시키지는 말아 줬으면 해요. 그저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북쪽으로 가는 거니까 기대하지도 말아 주세요.”
완강한 표정으로 말하는 가람에게 영주는 어물어물 말꼬리를 흐리다가 가람이 한 번 더 강조하자 그제야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가람은 그가 정말로 알아들었는지 의심스러웠다.
분명 방을 떠나는 그에게 자신들의 두 마리 오리, 쿠션과 이불만 내어 달라고 했는데 눈앞에 마련된 여장이 너무나 호화로웠기 때문이다.
여장이 마련된 곳은 성의 뒷문에 위치한 공터였다. 동일 오리인가 싶을 정도로 화려하게 꾸며진 쿠션과 이불이 가람과 하스펠을 알아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고급스러운 천을 망토처럼 두르고 금과 보석으로 치장한 작은 왕관까지 쓴 모습이었다.
그러나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오리의 옆에서 커다란 가방을 챙기고 있는 요리사였다.
즐겨 쓰는 조리 도구가 빠지기라도 했을까 연신 가방을 확인하는 그의 곁에는 어리버리한 얼굴로 눈을 끔뻑이는 짐꾼 세 명이 딸려 있었다.
짐꾼들이 슬쩍 수줍게 눈인사를 건네어 오는 것을 대충 받아 주며 가람은 어처구니없는 기분으로 영주를 불러 세웠다.
“동행자는 필요 없어요.”
짐꾼과 요리사가 들을 수 있을 만한 목소리로 말한 가람은 영주의 머릿속으로 빠르게 덧붙였다.
「사방에 제가 떠난다고 알리고 싶기라도 한 거예요? 제가 떠났다는 걸 최대한 늦게 알리는 게 영주님에게는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리는 기이한 느낌에 영주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는 놀란 얼굴로 굳게 다물린 가람의 입을 확인한 뒤 자신의 귀를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뜻이 그러하시다면 알겠습니다.”
영주는 순순히 물러나며 턱짓으로 짐꾼과 요리사들을 돌려보냈다. 그들은 의아한 표정을 짓기는 했으나 아쉬운 듯 기쁜 듯한 얼굴로 공터를 떠났다.
아무리 그 유명한 리베르튼의 여신과 함께하는 여정이라고 할지라도 노숙을 하는 것은 달갑지 않았던 모양이다.
가람은 오랜만에 만난 쿠션의 뺨을 두 손으로 긁어 주었다. 영주가 잘 먹였는지 오리들의 깃에는 윤기가 흘렀다. 잠깐 안 본 사이 엉덩이가 좀 더 통통해진 것도 같았다.
새카만 눈동자를 지그시 감으며 어깨에 턱을 문지르는 쿠션을 쓰다듬고 도닥이며 가람은 한껏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사실 성에 머무르는 내내 오리들을 반쯤 잊고 있었기 때문에 가람은 약간의 미안함을 갖고 쿠션이 만족할 만큼 충분히 쓰다듬어 주었다.
가람과 쿠션이 훈훈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는 것과 달리 하스펠과 이불은 한껏 기 싸움을 하고 있었다.
하스펠이 이불이 머리 위에 쓰고 있는 꼴사나운 왕관을 벗기려고 한 것이 그 싸움의 시초였다.
당연히 반짝거리는 근사한 물건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이불은 부리를 딱딱 부딪치며 하스펠을 위협했다.
하스펠로서는 까마귀도 아닌 주제에 보석에 집착하는 오리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검을 뽑는다면 이기지 못할 것도 아니었으나, 이런 문제에 검을 뽑는 것도 우습다.
고민하던 하스펠은 결국 포기하는 척 이불의 등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이불이 방심한 사이 재빨리 손을 뻗어 등 뒤에서 왕관을 습격해 빼앗았다. 이불의 입장에서는 실로 극악무도한 짓이 아닐 수 없었다.
영주와 가람은 하스펠과 이불의 투닥거림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왕관을 빼앗고 의기양양하게 이불을 내려다보던 하스펠은 조금 뒤늦게 그 시선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결국 무언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이불의 머리에 왕관을 돌려주었다.
두 사람이 오리에 올라타 떠날 채비를 마치자 영주가 슬쩍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가람 님,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가람 님이라는 호칭도 슬슬 익숙해지는 느낌이라고 생각하며 가람이 영주에게 허락하는 시선을 던졌다. 그는 잠깐 하스펠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새벽의 기사는 어째서 동행하는 겁니까?”
두 사람이 영주 성에 머문 시간은 짧지 않았다. 영주가 하스펠과 가람이 어떤 식으로 만나게 되었는지 알게 되기 충분한 시간이기도 했다. 하스펠과 가람이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마치 처음부터 함께였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붙어 다니고 있었다.
물론 하스펠 홀로 가람을 따라다니는 쪽에 가까웠지만 가람의 동의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영주는 하스펠이 따르는 것을 어째서 가람이 내버려 두는지 궁금했다.
“글쎄요.”
뜻밖의 질문이라 가람이 묘한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녀는 곧 명쾌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그가 저에게 특별한 걸지도 모르겠네요.”
“특별하다도 아니고 특별한 걸지도 모르겠다니…….”
애매한 대답에 영주가 황당해하는 사이 어깨를 으쓱해 보인 가람은 그대로 오리들을 날아오르게 만들었다.
감격한 얼굴로 가람을 바라보던 하스펠은 발밑이 부웅 하고 멀어지는 느낌에 기겁해 이불의 목을 틀어쥐었다.
꽥 하고 짧게 소리를 내지른 이불도 발밑이 허전해지는 감각에 당황해 날개를 파닥거렸다.
날개가 달려 있긴 하지만 오리는 날 수 없다. 기껏해야 높은 지대에서 아래로 떨어질 때 날개를 펼쳐 반 활공함으로써 충격을 줄이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오리들은 가람의 능력에 힘입어 엄연히 비행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곧 신이 나서 날개를 파닥거리는 두 마리 오리는 그대로 리베르튼의 성벽을 넘었다.
작별 인사도 없이 순식간에 멀어져 가는 모습에 영주는 당황하다가 곧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가람이 향한 방향으로 의미심장한 시선을 던졌다.
가람은 부정했지만 그는 강한 예감을 느꼈다. 앞으로 커다란 파도가 쳐 올 것이다. 그 크기는 가히 세상을 뒤집을 만한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