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그렇게 가람과 하스펠은 밤을 틈타 리베르튼의 성벽을 넘어 북쪽으로 향했다.
2만의 포로와 그 이상의 추종자,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무용담과 전설을 남기고.
Chapter 8
리베르튼을 떠나온 지 열흘. 바늘은 끝없이 북쪽을 가리켰다. 두 사람이 연합국의 북쪽 국경을 벗어난 것은 오늘 정오였다.
길이 있든 없든 가리지 않고 무조건 북진했기에 가능한 속도였다. 물론 오리 걸음이라는 것을 감안한 이야기다.
튼튼한 말로 가람이 지나온 곳을 전력으로 달린다면 약 5일 정도 걸리리라.
그렇다곤 해도 사람이 걷는 것보다는 빠른 속도이니 가람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속도를 중시했다면 이런 식으로 이동하지도 않았겠지만.
해 질 녘 내내 걸어 국경 지대를 벗어난 덕분에 가람은 지금 델리움이 지배하는 땅에 서 있었다.
동쪽으로 한나절 정도 가면 델리움의 제후국인 아란틴이 있었지만 가람은 굳이 노숙을 고집했다.
며칠 전 땅속에 파묻어 버렸던 사람들과 같은 진영에 속한 도시에 머무는 것이 꽤 찜찜하기도 했고, 가람은 원래 패스를 찾을 때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 외로 움직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가람이 도시를 지척에 두고도 그냥 지나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 사실 리베르튼을 떠나온 후 가람은 어떤 도시에도 들르지 않았다.
그 말은 따듯한 잠자리와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한 지 열흘 정도 지났다는 이야기다.
이 정도 일이야 가람에게는 고생스러운 것도 아니었지만 아마 하스펠에게는 이야기가 다를 것이다.
실제로 그는 벌써 얼룩덜룩한 수염으로 꽤 지저분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면도를 하는 것 같았지만 여의치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길바닥에서 누워 자는 상황에 면도를 하는 것만 해도 어딘가.
대부분의 남자들이 오줌 묻은 바지와 100년쯤 수염을 깎지 않은 것 같은 몰골로 돌아다니는 것에 비해 그는 매우 깔끔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힘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야영이 익숙한 사람이라곤 해도 어디 지붕과 벽이 있는 공간에 비할쏘냐.
그래서 가람도 거듭 텐트 안으로 들어가서 자는 것을 권했지만 하스펠은 완강히 거절했다. 가람이 함께 들어가지 않는다면 싫다는 것이다.
실로 갸륵한 충성심이었지만 가람은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본인이 싫다는데 더 말할 수도 없어서 가람은 그냥 그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기로 했다.
몸도 튼튼한 기사님이 야영 좀 했다고 앓아눕지는 않겠지.
조금 불편하기야 하겠지만 본인이 좋다고 하는 일이니 그러려니 할 뿐이다.
하지만 음식을 부실하게 먹으면 몸이 축날 것 같아 가람은 스스로가 먹지 않아도 됨에도 불구하고 끼니를 반드시 챙겼다.
그런 이유로 야영지의 모닥불 위에는 스튜 열매가 걸쭉하게 녹아 가고 있었다.
불꽃이 열매의 겉을 그을리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던 가람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묘한 느낌의 달. 로투라고 부르는 달이 오늘도 만개해 있었다. 하얗게 빛나는 그 꽃과 같은 달을 한참 바라보던 가람이 툭 내뱉었다.
“그 여자.”
“예?”
이불의 푹신한 오리털에 기대어 무언가를 끄적이던 하스펠이 고개를 들었다. 가람은 잠시 망설이다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처음 하스펠을 만났을 때 죽어 있던 그 여자 말이에요.”
가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은 하스펠의 표정이 굳어졌다. 가람과 하스펠이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무수한 시체 사이에 홀로 살아 있었다.
배에는 두 자루의 검을 꽂고. 그런 그의 근처에는 잘 차려입은 아가씨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가람이 말하는 그 여자라는 것은 그녀를 가리키는 것이다.
“예.”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가람은 비난하는 어조로 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하스펠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그러니까 하스펠이 집행자라는 것을 몰랐을 때는 하스펠이 지키던 아가씨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지금 문득 생각하니 그게 아니더군요. 누구인지 물을 생각은 없어요. 물을 필요도 없이 분명하니까.”
집행자인 하스펠은 가람이 아는 종류의 기사가 아니었다. 그가 모시는 것은 아가씨도, 주군도 아닌 신이었다.
그는 신의 검으로서 존재했던 것이다. 불안으로 떨리는 하스펠의 얼굴 위로 가람이 내린 결론이 내리꽂혔다.
“아마도 그 아가씨는 델리움의 기사들에게 죽은 거겠죠. 어쩌면 하스펠이 죽인 것일 수도 있고요.”
모닥불의 붉은 빛에도 불구하고 하스펠의 얼굴은 채색되지 않은 그림처럼 잿빛으로 흐려졌다.
가람의 말이 그를 갈가리 찢는 것만 같았다. 입술을 잘게 떨던 하스펠이 가람의 다음 말을 막듯 급하게 입을 열었다. 혹여 비난이라도 흘러나오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제가 죽인 것이 맞습니다. 추측하신 바도 맞고요. 그녀는 할라트의 인척으로서 척살령에 따라 집행자들이 집행한 것입니다.”
이를 악물고 뱉어 내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스스로를 칼로 저미는 듯 고통에 젖어 있다.
하스펠은 그것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자신의 죄책감을 쏟아 내었다. 용서받았다곤 해도 그가 돌아보는 과거는 핏빛이었다.
한때 아름다웠던 추억조차도 자신의 죄 앞에서는 붉게 바스러질 뿐이다.
“이제 막 성년이 되어 그 미모가 여럿의 입에 오르내리던 아름다운 여자였죠. 벨루스 백작의 둘째 딸이자, 장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차기 가주로 지목될 정도로 현명하기도 했습니다.
백작이 할라트를 받아 죽자 기사들은 망설임도 없이 그녀부터 챙겨 남쪽으로 도주했습니다.”
떨리는 주먹을 천천히 펴 손바닥의 땀을 옷자락에 닦아 낸 하스펠은 잠시 숨을 고르다가 한숨처럼 말했다.
“좋은 기사들이었습니다.”
하스펠에게 과거는 아직도 바라보기 힘든 상대였다. 자신의 과오를 마주할 때마다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괴물을 만나고 있는 것 같았다. 가람은 차분하게 그의 거친 호흡이 정리되기를 기다렸다.
자신이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반응했다는 것을 깨달은 하스펠은 조금 어색한 얼굴로 가람을 응시했다. 그가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었음을 확인한 가람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살아남은 가족들은 없나요? 있다면 그들에게…….”
“없습니다. 차녀 델리아나 벨루스를 제외한 모든 인척은 저녁에 죽어 다음 날 광장에 효수되었습니다.”
음. 하고 가람이 입을 다물었다. 이런 어두운 분위기로 흘러갈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자신의 생각보다 하스펠은 섬세한 사람이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무신경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문득 생각이 나 꺼낸 화젯거리로 분위기가 파탄 직전까지 가니 가람은 다시 입을 열기가 꺼려졌다. 그러나 아직 정말로 궁금한 것을 묻지 않았다.
“아직도 할라트를 믿어요?”
툭 튀어나온 가람의 질문에 하스펠은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예상외의 반응에 가람은 조금 놀랐다.
신에 대한 믿음을 저버린 사람이 그 신이 내리는 징벌은 믿는다는 것이 모순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잘 모르겠습니다.”
하스펠이 스스로의 죄를 반성하긴 했지만 어디까지가 거짓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이었는지 그 경계는 확실치 않았다.
할라트의 인척들을 교황의 명에 따라 척살한 것은 확실히 잘못된 일이라 인지하고 있었지만 할라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그것은 인간들의 영역에서는 불가능한 신비로운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교리는 인간이 만든 것이니 부정할 수 있었지만 할라트는 진짜였다.
그건 가짜가 아니었다. 심지어 하스펠은 할라트가 내려지는 것을 실제로 목격하기까지 했다.
“저 수상한 달이 진짜로 죄인을 심판한다고 믿는단 말이죠.”
달을 한 번 올려다본 가람이 가늘게 뜬 눈으로 하스펠을 응시했다. 하스펠은 불편한 얼굴로 그 시선을 받아 내다가 결국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닥불이 약해지는군요. 장작을 좀 주워 오겠습니다.”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검은 숲속으로 사라지는 하스펠의 등 뒤로 가람의 시선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가람은 턱을 괴고 심드렁한 한숨을 내쉬었다.
신과 교황은 믿지 않지만 징벌은 믿는다. 혹시 하스펠은 신을 배신한 죗값을 치르게 될까 두려워 자신에게 귀의한 것일까.
그것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그것을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약한 자들이 두려움에 젖어 자신을 구해 줄 사람을 찾는 것은 비난받을 만한 일이 아니다.
그가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신비한 현상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든 믿는 것에 대해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조금 염려될 뿐이었다.
사실 가람은 할라트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다. 처음에는.
하지만 영주 성에서 역대 할라트로 죽은 인물에 대해 서술한 책을 읽은 후로 약간의 흥미를 가지게 되었는데, 지난 50년간 일어난 대부분의 할라트가 델리움의 귀족에게만 내려졌기 때문이다.
물론 권력도 힘도 없는 평민들보다야 나쁜 짓을 저지르기 쉽다는 점에서 납득할 수 있는 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꽤 이상하다.
게다가 적은 수이긴 하지만 할라트를 당한 타국의 귀족들은 모두 델리움의 영토 안에서 죽었다는 점이 의미심장한 느낌이다.
하스펠의 말에 따르면 사악한 짓을 저지르고 있는 자를 찾아내어 징벌하는 것이 할라트라고 했다.
그렇다면 사악한 짓의 기준은 대체 무엇인가? 어째서 살인이나 강도 같은 범죄자들에게는 할라트가 내리지 않는가? 어떤 죄가 더 사악하고 덜 사악하다는 것은 무슨 기준으로 갈리는가?
만약 기준이 있다면 할라트를 내리는 지성체가 어딘가에 있다는 뜻이다.
아마도 저 연꽃 모양으로 빛나는 달이 그 대답이 될 수 있겠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들이 로투라고 부르는 달도 사실 수상한 구석이 한둘이 아니었다.
꾸준히 지켜본 바에 의하면 이 세계 사람들이 달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듯한 저 아름답고 괴상하면서 거대한 발광체는 절대로 달이 아니었다.
물론 만월과 각월을 반복하며 빛나는 둥근 구체라는 보편적인 형태에 어긋나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상한 모양의 달은 다른 차원에도 꽤 많다. 가람이 돌아다닌 차원 중에는 하트 모양이나 세모 형태의 달도 있었으니까.
일단, 로투는 대기권 밖에 있는 달이 아니었다. 가람이 처음 느꼈던 묘하게 가까운 감각도 이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달이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몇 가지 더 꼽자면, 로투가 열릴 때마다 가람은 아주 묘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아주 옅은 덕분에 처음에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어쩐지 기분 나쁜 기운이었다.
만약 정말로 로투가 할라트로 사람을 징벌하고 있다면 그 징벌에 대한 신빙성이 의심될 정도로 어두운 기운이었다.
가람의 가설은 할라트가 로투와 전혀 관계가 없는 자연 현상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죽은 사람들도 어쩌면 그저 질병에 걸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하스펠이 할라트를 과신하지 않았으면 했던 것이다. 하지만 말을 꺼낸 시기가 지나치게 빨랐던 모양이다.
“흠.”
가람은 마지막으로 남은 나뭇가지를 불 속으로 던져 넣으며 고개를 들었다. 언뜻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스펠은 아니었다. 그는 이런 식으로 큰 소리를 내며 다니지 않는다.
동물인가 하고 가람이 생각하는 순간 눈앞의 수풀이 흔들리더니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