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음.”
동료는 놀란 얼굴로 가람에게 시선을 던졌다. 확실히 인상착의가 비슷하긴 하다.
두 사람이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길고양이 한 마리가 가람의 다리에 몸을 비비며 애처로운 목소리로 울었다.
몹시 굶주려 보이는 터라 가람은 동정심을 발휘하여 먹고 있던 새를 집어 들고 한 손으로 살점을 조금 뜯어 고양이에게 내밀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얌전하던 고양이가 본색을 드러낸 것은 두 병사의 생각이 수상함으로 기울어질 무렵이었다. 고양이는 쏜살같이 가람의 손에서 새고기를 낚아채었다.
그러나 고양이가 노린 것은 가람이 조금 뜯어 내민 살점이 아니라 반대편에 들고 있던 본체인 통구이였다.
순식간에 허전해진 손에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은 가람이 망연히 멀어지는 고양이를 응시했다.
“아닌 것 같네.”
“그러게. 아닌 것 같군. 그 대단한 마녀가 저럴 리가 없지.”
수상함으로 기울었던 병사들의 의심의 추가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았다.
고양이의 절도 행각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남자는 못 본 척 순찰을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시당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가람은 황당한 기분으로 다시 추가 주문을 넣어 가판대 주인을 기쁘게 해 주었다.
“철혈의 기사 렉시온이 리베르튼에서 탈출했다더군.”
익숙한 이름에 가람이 저도 모르게 돌아보았다. 목소리의 주인은 새의 몸통을 잡고 이를 박아 넣고 있었다. 그 말에 그의 동행으로 보이는 남자가 픽 웃으며 대꾸했다.
“소문이 느리군. 난 벌써 일주일 전에 들었어.”
“쳇.”
입가에 번들거리는 새 기름을 쓰윽 문질러 닦으며 남자가 짧게 혀를 찼다.
기분이 상했는지 그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고, 대신 앞에 있던 남자가 시답잖은 이야기를 떠들어 댔다. 여자와 술에 대한 한심한 소리다.
렉시온의 이름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하스펠은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그에게 델리움은 여러모로 의미 있는 장소일 텐데 무언가를 떠올리는 기색도 없다. 그저 자연스럽게 새고기를 먹으며 가람에게 질문할 뿐이다.
“이제 어디로 가실 겁니까?”
가람은 고기를 우물거리며 이채 어린 시선으로 하스펠을 응시했다. 어느 정도는 떨쳐 냈다는 건가.
기특한 마음을 내색하지 않으며 가람은 바늘이 가리키는 건물을 응시했다.
키 작은 건물들 뒤로 위엄 있는 모습을 자랑하는 거대한 성. 금과 은으로 장식되어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눈이 부실 정도의 화려함을 발산하는 델리움의 심장. 교황이 기거하는 대신전이다.
“그렇군요.”
가람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확인한 하스펠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담담히 끄덕였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다는 반응이라 가람은 그가 무언가를 오해하고 있음을 깨달았지만 그 오해를 바로잡아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조금 멈칫했다.
델리움과 야탈카, 그리고 리베르튼.
세 개의 힘이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지배 구조에 자신이 끼어든 상황이다. 이제 와서 발을 빼는 것도 힘들었다.
지금 가람이 갑자기 빠진다면 델리움은 명분을 무기로 리베르튼을 잡아먹으려 으르렁댈 것이고 그 결과는 별로 아름답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가람은 그런 결과를 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좋든 싫든 자신을 떠미는 흐름에 올라탈 수밖에 없었다. 이미 일은 시작되었고, 외면하려 했지만 가람 또한 델리움에 의혹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패스까지 대신전에 있으니 이쯤 되면 어떤 운명 같은 걸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실 델리움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조용히 패스를 찾아 도시를 떠날 생각이었지만 보란 듯이 대신전을 향하는 바늘을 보니 그 생각은 흩어져 버렸다.
이렇게나 적극적이라면 원하는 대로 해 주마 하는 오기가 생기는 것이다.
내내 회피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결정을 해야 한다. 리베르튼을 버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자신을 지워 버리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가람은 눈앞의 하스펠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기억을 지우는 것을 꺼리게 된 이유의 상당 부분을 이 남자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벌써 정이 들어 버렸다. 모른 척하고 그냥 떠나기 힘들 만큼.
두 가지 선택지가 사라진다면 남은 것은 하나뿐이다.
“교황의 이름이 어떻게 되죠?”
“올바입 디푸스트입니다.”
하스펠이 얼떨결에 대답하자 가람은 고개를 끄덕이고 선언했다.
“일단 그 사람을 만나 보죠.”
“예?”
당황한 하스펠이 어느새 가판대를 떠나 저 멀리 걷고 있는 가람을 따라붙으며 반문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거대한 북부를 지배하고 있는 자를 만나는 것은 정말로 쉽지 않은 일이다.
리베르튼의 마녀라고 불리고 있는 가람이라면 정상적인 알현 자체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가람에게 그런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들에 불과할 뿐, 가람이 마음먹은 이상 어려울 것은 하나도 없었다.
“왜 놀라요? 예상한 것 아니었어요? 으음, 교황 본 적 있어요? 엘리베이터로 찾아가면 간단할 것 같은데.”
애석하게도 하스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름 높은 집행자이긴 했지만 교황을 가까이서 볼 정도로 높은 지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외부 일은 주로 장로라고 불리우는 고위 신관이 담당하고, 오직 그들만이 교황을 만날 수 있었다.
하스펠의 고갯짓으로 앞으로 델리움에 일어날 일이 결정되었다.
“음, 그럼 어쩔 수 없나.”
하스펠이 교황을 모른다고 해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긴 했지만 가람은 이번에는 좀 화려하게 일을 벌여 보기로 했다.
이미 힘의 구조를 바꾸기로 마음먹은 이상 거리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게다가 아무리 명분을 만들고 싶었다지만 죄 없는 사람을 마녀 운운하며 몰아붙인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어차피 이렇게 막 나가게 될 것을, 괜히 숲에서 시간을 보냈다 싶다.
“내가 지금 뭘 하려고 하는지는 알고 있죠?”
가볍게 흥얼거리며 걷던 가람이 문득 질문했다.
“저는 그저 따를 뿐입니다.”
묵묵히 대답하는 하스펠에게 가람은 짧게 혀를 찼다. 한때 삶의 근간이 되었던 것이 오늘 송두리째 사라질지 모르는데도 자신만을 보겠다는 건가.
하긴, 미련은 이미 한참 전에 사라진 모양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대신전은 도시를 관통하는 드넓은 길의 끝에 위풍당당히 서 있었다. 가람은 사양하는 기색도 없이 그 길의 정중앙을 가로질러 걸었다.
지나가던 행인 몇몇이 미심쩍은 시선을 던졌으나 가람이 빠르게 활보하자 굳이 집요하게 따라붙는 사람은 없었다.
북부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머물고 있는 곳이니만큼 대신전의 입구는 무장한 기사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가람이 굳게 닫힌 정문 앞으로 걸어가자 사방에서 날카로운 시선이 날아들었다. 몇몇이 하스펠을 알아보았는지 웅성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밤이긴 했지만 그래도 주변에 켜진 횃불로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 시작하죠.”
그렇게 말한 가람은 민첩한 몸놀림으로 쿠션의 등에 올라탔다. 나중에 교황이 나타났을 때 그를 내려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람은 교황을 찾아다닐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교황을 불러낼 생각이었다.
하스펠이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이불의 등에 올라타는 것을 확인한 가람은 웅성거림이 더 번지기 전에 시작하기로 했다.
오리를 타고 신전으로 돌진하기라도 할 생각인가 추측하던 하스펠은 다음 순간 자신의 얼굴이 어디에 있는지 잊어버릴 만큼 놀랐다.
아마 주변 기사들은 그보다 더 놀랐으면 놀랐지 덜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사태에 완전히 넋이 나가 버렸다.
가람을 중심으로 강한 돌풍이 분다 싶더니 웅장한 소리와 함께 하늘이 쪼개어졌다. 밤의 하늘을 부수고 낮의 하늘을 불러낸 것만 같은 풍경이었다.
뾰족하게 고개를 들이민 밝은 하늘은 그대로 선명한 빛을 지상으로 내쏘았다. 한 줄기 빛이 내리쬔 곳은 다름 아닌 가람이 선 곳이다.
새하얀 오리의 깃털이 빛을 반사하며 은은하게 빛난다.
그와 함께 빛무리에 휩싸인 가람은 성스럽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옆에 선 하스펠도 덩달아 빛을 받아 고고한 자태를 자랑했다.
여기서 끝나면 시시하지. 속으로 중얼거린 가람은 기사들과 행인들이 충분히 동요하는 것을 확인한 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것은 다분히 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가람에게 이목을 집중하던 사람들은 덩달아 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올바입 디푸스트.”
찢어진 밤하늘 사이로 웅혼한 목소리가 교황의 이름을 부른다. 델리움 도시민들은 모두 집 밖으로 뛰쳐나와 이 놀라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몇몇은 벌벌 떨며 벌써 땅에 머리를 박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기사들마저도 가람을 잡을 생각은커녕 멍청한 얼굴로 망연히 서 있을 뿐이다.
사방에서는 동요하는 목소리로 소란스러운데 막상 대신전은 잠잠하다.
인근 도시까지 들릴 정도로 거대한 이 소리가 들리지 않을 리는 없다. 버텨 보겠다는 뜻인가.
가람은 흥미로움을 느끼며 다시 하늘이 교황을 부르도록 만들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분노를 담아.
“올바입 디푸스트는 계시를 받으라.”
콰르릉 울리는 천둥과 하늘에 번져 나가는 불길은 부수 효과다. 과연 이쯤 되자 대신전 안에서도 소란이 번지는 것이 느껴졌다.
“올바입 디푸스트가 죄를 고하지 않으면 오늘은 델리움 멸망의 날이 될 것이다.”
그렇게까지 심한 짓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가람은 적당히 허세를 떨어 주었다.
그러자 잠시 후 황망한 얼굴의 늙은이들이 주춤주춤 신전 밖으로 기어 나왔다.
몸을 사리는 기색이 역력한 그들은 아귀다툼 끝에 누군가를 툭 내어 놓았다.
너무나 맥없이 떨쳐지기에 설마 했는데, 노인은 달달 떨며 가람의 앞으로 다가와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했다.
“제가 올바입 디푸스트입니다.”
눈앞의 노인은 그 교황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초라한 행색이었다.
고목처럼 쪼그라든 손목이 고급스러운 옷감 사이로 얼비친다. 맨발로 길바닥에 엎드린 그 모습에는 위엄도 권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을 잠시 훑어본 바에 의하면 그는 정말로 교황이었다.
하긴, 가람이 보여 준 치유력에 하스펠이 얼마만큼의 반응을 보여 주었는지 생각하면 지금 교황이 보여 주는 태도도 무리는 아니다.
기적에 약한 종교인. 게다가 갑자기 하늘이 쪼개지며 천둥이 제 이름을 부르는데 두려움에 질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찔리는 구석이 있다면 더하겠지.
“죄를 고하라.”
머릿속을 훑어보면서 대충 모든 정황을 알게 된 가람이지만 그녀는 일부러 교황이 제 입으로 스스로의 죄를 고백하도록 만들었다.
교황은 크게 뜬 눈으로 가람을 올려다본 후 체념 어린 표정을 지었다. 주름진 뺨에는 벌써 굵은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저는 봉인된 악마와 계약하여 그 힘을 사익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교황의 고백에 충격적인 침묵이 내려앉았다. 웅성거림조차 없는 완벽한 침묵이었다.
몇몇이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뭐?’라고 되묻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경악한 상태였다.
기사들 중에는 현실 도피를 하며 꿈이라고 중얼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교황의 한마디는 그만큼이나 충격이었던 것이다.
“계속 고하라.”
하늘의 울림에 교황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절망과 두려움, 후회가 뒤섞인 그 표정은 무시무시한 압박감으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리베르튼 저 멀리에서 가람이 기적을 일으킬 때는 담담하기만 하더니 막상 눈앞에서 비현실적인 일이 벌어지자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어진 모양이다.
그 후 교황의 입에서 흘러나온 진실은 델리움 사람들을 집단으로 현실 도피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가람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의혹을 말끔히 해소해 주었다.
할라트라는 것은 가람의 예상대로 사악한 사람에게 내리는 징벌이 아니었다.
그것은 교황이 델리움의 이익에 반하는, 혹은 자신의 정치적인 이익에 반하는 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사용한 악마의 힘이었다.
교황은 악마가 봉인된 문을 열어 그 힘을 끌어다가 쓴 것이다.
그 문이라는 것은 예상할 수 있다시피 사람들이 로투라고 부르는 달이었다.
사실 진짜 달도 아니었지만. 정리하자면 모종의 수단으로 로투에 봉인된 괴물들을 부려 델리움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사람을 죽여 온 것이 델리움 교단의 실체였다.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알게 된 진실에 가람은 시시한 기분마저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교황을 내려다보며 질문했다.
“그 모종의 수단이라는 것이 뭐지?”
줄줄이 진실을 내뱉던 교황은 이번에야말로 망설이며 입을 다물었다. 슬쩍 사방을 둘러본 가람은 시민들이 감당할 수 없는 진실에 패닉을 일으키고 있음을 깨닫고 일단 자리를 피하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이것만으로 델리움은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다. 믿음이 깨어진 이상 와해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지.”
가람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쪼개어진 하늘이 다시 달라붙고 가람의 곁에 감돌던 빛도 사라졌다.
너덜너덜한 눈빛으로 혼란에 가득 찬 기사들을 제치고 가람은 앞장서서 신전 안으로 들어섰다.
지금이야말로 패스를 찾을 때인 것이다. 가람이 신전을 마음대로 돌아다닌다고 해도 막아설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신전은 내부가 훨씬 화려했다. 그러나 그 모습이 무색하도록 사방에는 흐느낌과 충격에 빠진 신관들이 즐비하다. 쿠션의 흙 묻은 발이 오리 발자국을 마구 남기고 있는데도 아무도 지적하지 못했다.
아예 인식을 못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신전 안을 돌아다니는 가람의 뒤로 하스펠과 교황, 그리고 장로들이 줄줄이 따라붙는다.
안쪽, 더 안쪽으로.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기운이 줄줄 흐르는 거대한 문 앞에서 가람은 멈춰 섰다.
바늘이 잔뜩 짧아져 서서히 황금빛으로 빛났다. 아마도 이 문 안에 패스가 있는 것이 확실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