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가람은 이쯤에서 하스펠에게 슬쩍 속삭였다.
“아까 마음에 들었어요?”
“예?”
하스펠의 얼빠진 대답에 가람은 어깨를 으쓱였다. 최근 성서 집필이 잘 되지 않는 것 같아 일부러 소재거리를 제공해 주었는데 반응이 영 시원치 않다.
처음에는 성서 따위 낯간지러울 뿐이었지만 어차피 저지르기로 마음먹은 이상 이왕이면 근사하게 만들어지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뒤늦게 가람의 말을 알아들은 하스펠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는 순간 가람은 드디어 오리에서 내려 문을 열었다.
교황과 장로들은 완전히 체념해 그저 가람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다.
어쩌면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표정만 보면 벌써 죽은 사람들 같았다. 노인들이라 더욱 그랬다.
문 안에는 검은 해골로 둘러싸인 붉은 제단이 놓여 있었다.
방의 벽에는 음각으로 어떤 주술적인 무늬를 가득 새겨 두었는데, 어떻게 봐도 신성한 대신전에 있을 만한 공간은 아니다. 패스는 붉은 제단의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흐음.”
제단으로 다가가 패스를 흡수한 가람은 음울한 표정의 신관들을 돌아보았다. 안쪽으로 들어오면서 점점 사람이 없어진다는 느낌을 받긴 했지만 이 방의 근처에는 아무도 없다.
아마도 이곳은 장로 이상만 출입할 수 있는 신전의 가장 은밀한 장소일 것이다.
“생각보다 굉장히 순순하군요.”
아무리 연출을 극적으로 했다곤 해도 부정하거나 마지막까지 발악하며 발버둥 치는 것이 보통이다.
이렇게나 간단히 진실을 말하고 순종적인 태도를 보여 줄 줄은 가람도 미처 예상치 못했다.
얌전한 모습이 꽤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가람은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장로 중 한 명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노인들 중에서도 가장 젊고 현명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가람이 이채 어린 시선을 보내자 그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2만의 군대가 그렇게 허무하게 패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이미 예감하고 있었지요.”
“흐음, 뭐 반성은 천천히 하시고, 일단 그 모종의 수단이라는 걸 들어 보고 싶은데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잖아요?”
가람의 심드렁한 말에 그는 입술을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투에 봉인된 괴물들을 교황의 사익에 따라 움직이게 한 그 수단. 가람은 그것이 궁금했다.
이 장소에 왔을 때부터 대충 어떻게 된 것인지 알 것 같았지만 확실하게 들어 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제단에 있는 검은 두개골은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마법사들입니다. 제단을 둘러싼 구십구 개의 두개골은 세상의 모든 마법력을 흡수해서 괴물들이 로투에서 나올 수 없도록 가두고 있지요.”
가람은 그의 말을 들으며 검은 두개골을 집어 들었다. 이 세계에 마법이 없었던 것은 이것이 원인이었나. 하스펠도 옛이야기에서나 들었다는 반응이었지.
주변을 둘러보며 펼쳐져 있는 진을 읽던 가람은 눈을 가늘게 떴다. 진은 구십구 개의 두개골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백 개가 필요해 보이는데. 하나 깨 먹었나 봐요?”
그 말대로 백 개가 아니면 봉인은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할 수 없다.
허술해진 봉인은 날뛰는 괴물들에 의해 열렸다가 다시 닫히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그것이 매일 밤 피어나는 로투의 정체였다.
“나머지 하나의 두개골은 교황의 방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교황은 두개골을 물려받은 뒤 그것으로 괴물들과 거래를 합니다. 봉인에서 풀어 주는 대신, 교황의 말에 따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보통은 이 비밀을 폭로하려고 한 사람들이 주로 할라트의 대상이 됩니다. 세상에 들켜 다시 봉인되는 것은 괴물들에게도 달갑지 않은 일이니 기꺼이 협조해 주는 편이지요.”
말을 마친 장로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가람을 바라보았다. 하스펠은 그가 말을 하는 내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제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등 돌린 곳이라지만 실체를 알게 되니 충격을 감당할 수 없는 모양이다.
“흠.”
모든 이야기를 들은 가람은 만지작거리던 두개골을 그대로 박살 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교황은 물론 장로들까지 경악했다.
가람의 행동은 그에 그치지 않았다. 짧은 순간 제단을 둘러싸고 있던 두개골이 모조리 가루가 되어 버린 것이다.
아주 잠깐 방 안은 폭사되는 빛에 하얗게 달아올랐다. 그들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제단 위로 사악한 기운을 줄기줄기 내뿜는 검은 구멍이 열리고 있었다.
“역시.”
홀로 무언가를 납득한 가람은 하스펠이 말릴 새도 없이 그대로 구멍 안으로 뛰어들었다. 망설이던 하스펠은 잠깐 쿠션과 이불을 돌아본 뒤 가람을 뒤따랐다.
그리고 질끈 감은 눈이 다시 뜨여진 순간, 하스펠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문을 마주하고 있었다.
“어쩐지 리베르튼을 가만히 둔다고 생각했더니 역시 마물이었군.”
서서히 열리는 문을 응시하며 가람이 중얼거렸다.
사실 신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람은 내내 궁금했다. 지금까지 정적을 제거해 온 그들이 어째서 가람과 하스펠, 리베르튼의 영주 등에게만 할라트를 내리지 않았는지.
그 이유는 지금 밝혀졌다. 바로 할라트의 정체가 어떤 마법적인 요소나 기적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 아닌 사악한 힘에 근거했기 때문이다.
저주를 치료하기 위해 가람은 리베르튼의 모든 주민들에게 축복을 내렸고, 영주 또한 축복을 받은 사람 중 하나였다.
그렇게 악몽과 악령을 퇴치하는 축복 덕분에 할라트의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덧붙여 야탈카의 왕들이 할라트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마물이 흘러나오는 문이 북부 델리움에 있었기 때문이다.
마물들의 힘이 거리의 제한 없이 유효했다면 야탈카는 매일 새로운 왕을 뽑아야 했을 것이다.
천천히 열리는 거대한 문의 안쪽에 또 다른 문이 보였다. 가람은 비로소 마물들이 봉인된 구조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늘에 떠 있는 듯 보이는 로투는 실제로는 다른 차원에 봉인된 봉인 문의 신기루를 비추는 것이었다.
실제로 봉인된 장소로 출입하려면 대신전의 문을 사용하는 방법뿐이다. 그리고 그 분리된 차원 안에는 거대한 봉인의 문이 겹겹이 마물을 가두고 있었다.
하늘의 로투가 마치 연꽃과도 같은 형태였던 것은 겹겹이 열리는 문의 사이로 스며 나오는 빛이 각각 한 장의 꽃잎처럼 보인 것이었다.
그렇게 마침내 모든 아귀가 맞아떨어졌을 때, 문이 완전히 열렸다.
“이건…….”
“로투예요.”
넋이 나간 하스펠에게 짧게 대답하며 가람은 그를 보호막으로 감싸 보호했다.
빛으로 가득한 문의 안쪽, 가장 깊은 곳에서 검은 무리가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역하고 거북한 기운은 가람이 익히 아는 마물들의 것이었다. 사악한 원념과 집착, 파괴 욕구만 남아 저주를 반복하고 살생을 즐기는 악귀들.
「영혼, 영혼의 냄새. 강한 영혼의 냄새가 난다.」
「먹고 싶다. 갖고 싶다.」
「원한다. 원해. 강한 영혼!」
오랜만에 들으니 반가운 기분마저 드는 음울한 목소리에 가람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간만에 제대로 힘을 방출했다.
강력한 파동이 봉인 문을 때리자 스멀스멀 기어 오던 마물들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강해. 너무 강해.」
「도망쳐라. 안으로 들어가.」
「기다리자. 약해질 때까지. 기다리자.」
우습게도 검은 마물은 뭘 하기도 전에 봉인의 문 안으로 뒷걸음질 쳐 들어갔다.
심지어 문을 닫고 걸어 잠그며 가람을 피하기 위해 안간힘이었다. 먹잇감으로 보였던 가람이 위협적인 포식자라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이런, 안 되지.”
가람이 가볍게 손을 휘젓자 마물들이 걸어 잠근 문이 활짝 열렸다. 표정이 없어 정확히는 알기 힘들었지만 마물들은 황망한 느낌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들이 다시 문을 닫으려고 하자 가람은 아예 봉인의 문을 완전히 박살 냈다.
산산이 부서져 빛으로 흩어지는 수십 개의 문. 그 무도한 힘 앞에서 마물들은 마침내 공포에 질렸다.
「우리를 가두려고 한다.」
「더 확실한 봉인을 하려고 하는가.」
「봉인, 봉인을 한다.」
마물들이 마구 아우성친다. 뒤엉켜 엉망으로 떠드는 마물들 중 유독 차분하고 음험한 한 마리가 특유의 울리는 목소리로 나직이 킬킬 웃었다.
「봉인해도 소용없다. 우리를 필요로 하는 자가 나타나면 우리는 또다시 풀려날 것이다.」
마물의 목소리에 가람은 뜻밖이라는 얼굴로 부정했다.
“아, 내가 봉인할 줄 알았어? 아닌데.”
짧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적막이 혼란으로 변하기 직전, 호흡하듯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던 가람이 미소 지었다.
“왜 봉인을 해. 또 풀려나서 좋을 것도 없는데. 그냥 다 죽여 버릴 생각이야.”
무거운 침묵 후 마물 하나가 실소했다. 실소는 곧 비웃음으로 번져 마물 전체가 킬킬대며 웃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말했던 마물이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어지자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었다.
가람은 비명조차 허락하지 않은 채 무자비하게 힘을 뿌렸다. 오직 말살을 목적으로 하는 그 행동은 가람이 지금까지 해 왔던 어떤 방식보다 거칠었다.
그 칼날이 자신을 향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스펠은 눈앞의 지옥도에 뺨이 차갑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의 가람은 언제나 부드럽고 상냥한 사람이었다. 가끔 차갑고 날 선 모습을 보여 줄 때도 있었지만 이렇게나 무도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하스펠은 어렴풋이 가람이 예전에 말했던 실수를 저질렀던 때가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짐작했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더욱 이 땅의 인간들이 그녀의 분노를 사지 않도록 하는 일에 힘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모든 마물이 사라지고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어지자 가람은 가볍게 하스펠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돌아갈까요?”
* * *
“그리하여 로투의 시대는 저물고 마법의 달이 시작되었으니 기만으로 가득한 자들은 사라지고 진실의 세상이 도래했도다. 무엇이든 광신하지 말며 인간으로서의 스스로를 강하게 믿고 모든 이에게 친절하라. 그것은 그대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마법이니.”
손에 든 책을 소리 내어 읽은 가람은 탁 소리 나게 덮은 뒤 그것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시간은 오후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때, 가람은 홀로 대신전의 상층부에 있는 진실의 방에 서 있었다.
이곳은 주로 하스펠이 성서를 집필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방이자, 가람이 생활을 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델리움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지만 사실 아주 많은 것들이 변해 있었다.
가장 큰 것이 바로 델리움 교단의 몰락이었다. 그리고 할라트의 이름 아래 복종했던 제후국들이 향후 거취를 결정하느라 분주히 움직이고 있기도 했다.
몇몇은 가람을 봐서라도 델리움의 제후국으로 남고자 했고, 몇몇은 독립의 의지를 불태웠다. 가람은 이 문제에 관여할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 본다면 이것은 리베르튼에서 있었던 일의 반복 같은 것이다.
세간에 델리움의 심판이라고 알려진 사건 이후로 약 한 달이 지났다.
가람의 이름은 무시무시하게 높아져 그 무게가 신과 같은 것이 되어 버렸고, 우습게도 델리움 교도의 상당수가 가람을 섬기는 쪽으로 흡수되어 큰 혼란 없이 마무리되었다.
그 중심에는 다방면으로 노력을 아끼지 않는 하스펠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문제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렉시온의 자살 같은 것이다.
그 외에도 진실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다수의 정예 집행자들이 번민 속에서 목숨을 끊었다.
정의를 행했다고 생각하며 느껴 왔던 자랑과 긍지가 도리어 독이 되어 그들을 죽인 것이다.
“쓸데없는 짓을 한 걸까.”
잠시 독백한 가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몇 번이나 자문해도 대답은 언제나 같다.
로투의 안에 봉인되어 있던 마물들의 말대로 내버려 두었다면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먼 훗날에는 할라트의 비극이 우스울 정도로 심각한 일이 닥쳤을 것이다.
차원의 여기저기에 흩어져 살고 있는 마물들은 악귀, 악령 등 그 명칭과 형태가 다양하지만 한 가지 공통적인 것은 그들이 끝없이 파괴를 갈망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먼 옛날 혐오했던 누군가와 닮은 성질에 가람은 정말로 그 마물들을 싫어했다.
손쓰기를 망설이던 가람이 그렇게나 홀가분하게 처리한 것도 어느 정도는 그 감정에 기인한 것이다.
렉시온과 그 휘하 집행자들의 자살은 안타까운 일이긴 했지만, 비록 그들이 마물과 결탁한 교단에 속아 왔다고 해도 그들의 손속이 매서웠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되도록 좋은 방향으로 살아남아 주었으면 했지만 감당할 수 없어 죽음을 택한다면 가람에게 그것을 막을 권리는 없다.
그리고 모든 집행자들이 죽음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인정하고 이 혼란한 세상 속에서 가람을 따르며 반성하는 삶으로 남은 생을 이어 가기로 결정한 기사들도 상당수였다.
그들은 끊임없이 부지런하게 봉사하며 델리움 교단이 알게 모르게 갉아먹은 세상을 다시 일구어 내려고 열심이었다.
비록 아직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뚜렷한 성과는 없지만 점점 나아지리라는 확신과 희망은 있었다.
“정말 안 갈 거예요?”
창문을 내다보는 자세 그대로 가람이 질문을 던졌다. 혼잣말은 아니다. 아까부터 계단을 오르는 익숙한 기척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방문을 열고 들어오던 하스펠은 별달리 놀라는 기색도 없이 두 손 가득 들고 온 책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예. 할 일이 많으니까요.”
할라트가 사라진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악행을 하면 지옥에 간다는 말이 인간의 양심에 스며들어 약간이라도 제재 효과를 발휘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눈앞에 실제로 집행되는 할라트가 얼마나 많은 예비 범죄자들을 계도했는가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할라트가 모조리 거짓이라는 것이 밝혀진 지금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악한들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들을 처벌하는 것도 일이지만 그 외에도 문제는 산적해 있었다.
크게는 앞으로 바뀔 힘의 구조를 대비하는 것부터 작게는 가람의 이름으로 다시 세워질 종교를 정비하는 등 하스펠이 할 일은 정말로 많았다.
게다가 가람교의 최초의 신자이자 유일한 대신관이니 그는 신전에 남아 중심을 지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너무 단호한 것 아니에요?”
농담조로 말하긴 했지만 가람의 말에는 미처 숨기지 못한 섭섭함이 배어 나왔다. 하스펠은 그저 미소로 대답할 뿐이다.
가람은 짧게 입맛을 다시고 발치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집어 들었다. 패스는 충전되었다. 이제 떠날 뿐이다.
하스펠이 함께 가 주었으면 해서 그가 오기를 기다렸는데 거절당한 이상 더 머물 이유도 없었다.
“쿠션은 데려가실 겁니까?”
하스펠이 책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질문했다.
“아뇨. 혼자 갈 거예요.”
혼자.
그 말이 주는 느낌에 하스펠의 표정이 설핏 불안으로 흐려졌다. 여유로운 척하고 있긴 하지만 하스펠은 본능적으로 가람이 언제든지 모든 것을 뒤로하고 이 세계를 떠날 수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떠난다면 어디로, 다시 돌아오기는 할지, 돌아온다면 언제 오는지 기약도 없다.
동행자를 버리지는 않을 사람이니 쿠션을 데려가면 그 오리 때문에라도 돌아올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혼자 간다니.
“일단은 북쪽으로 갈 거예요.”
하스펠의 불안을 읽은 가람이 가볍게 입을 열었다. 먼저 행선지를 알려 주는 적이 없었던 가람의 말에 하스펠의 눈을 크게 떴다. 가람은 놀란 표정의 그에게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되도록 빨리 돌아올게요. 내가 한 적도 없는 말씀이 어떻게 퍼져 있을지도 궁금하니까요. 그때쯤 제 성서 신간도 나와 있겠죠.”
하스펠이 집필하고 있는 가람교의 최초 성서는 벌써 다섯 권이 완성되었고 여섯 권째가 만들어지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낯간지러워서 도저히 읽지 못하던 가람이었지만 반복해서 접하는 과정 중에 점점 무뎌지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 마치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느껴져 그럭저럭 읽을 수 있게 되었는데, 제법 재미가 있었던 탓에 가람도 자신의 성서를 즐겨 읽기 시작한 것이다.
“최대한 많이 써 두도록 하겠습니다.”
훨씬 가벼워진 표정으로 대답하는 하스펠에게 가람은 짧게 손을 흔들어 준 뒤 그대로 창문을 통해 뛰쳐나왔다.
고층의 바람을 타고 북쪽으로 훨훨 날아가며 슬쩍 뒤돌아보니 하스펠이 창가에 달라붙어 뚫어져라 응시하는 것이 보였다.
풍속이 빨랐던 탓에 순식간에 손가락만 한 크기가 되어 버렸다. 그 모습에 짧게 실소하던 가람은 다시 북쪽을 향해 날기 시작했다.
차가운 바람과 함께 쓸쓸함이 가슴속으로 스며든다. 하스펠의 존재는 가랑비처럼 가람을 푹 적셔 놓았다. 예상치를 훨씬 웃도는 그 외로움에 가람은 쓴웃음을 지었다.
“다시 혼자가 되는 연습이라고 생각하자.”
힘주어 말했지만 가람은 그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어째서 날아서 북쪽으로 가고 있는가 생각하다가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서둘러 패스를 찾고 돌아가고 싶었는가.
가람은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빨리 돌아가게 될 것임을 예감하며 비행에 속도를 더했다.
Chapter 9
델리움의 북쪽은 황폐한 곳이다. 강수량은 부족하고 땅은 간신히 얼어붙지 않을 정도로 차다.
수확할 수 있는 작물은 추위에 강한 작은 무나 당근, 호박이나 귀리 따위가 전부이다.
바다와 닿아 있는 지역은 물고기라도 잡아먹을 수 있으니 사정이 나았지만 그 외의 도시는 비참하기 짝이 없는 식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이 델리움 북쪽 대부분의 지역은 만성적인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다. 남쪽 야탈카의 부빵도 이곳에서는 호화로운 식사로 보일 정도다.
그나마 팔렘시아나 그룬셀 같은 큰 도시는 델리움과 같은 대도시와 꾸준한 왕래를 유지하며 부족한 식량을 보충할 수 있었지만, 작은 마을의 식량 사정은 간간이 아사자가 나올 정도로 심각했다.
그러나 힘없는 농부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저 비가 오기를 기원하며 애끓는 심정으로 하늘만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뿐이다.
리베르튼을 경계로 북쪽 지역은 대체적으로 미신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델리움의 북쪽 땅은 그 정도가 심했다.
사람들은 믿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막무가내로 믿으려 들었고, 그것이 설령 거짓이라도 믿고자 했다. 어리석다고 한들 그것에라도 기대지 않으면 버티기 힘든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에게 어느 날 로투가 사라진 것은 무시무시하게 불길한 일이었다.
로투의 빛에 가려져 있던 작은 달 몇 개가 하늘에 빠끔히 걸리긴 했으나 만물을 휘황찬란하게 밝히던 거대한 꽃에 비하자면 슬플 정도로 초라한 모습이었다.
바라만 봐도 가슴이 뿌듯해지던 로투에 비해 너무나 빈약한 그것들을 달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농부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해가 지면 달빛을 피해 선술집에 모여들어 서로의 두려움을 나누었다.
델리움의 제후국이었던 대부분의 땅에는 어떤 연유로 로투가 사라졌는지 알려지고 있는 상태였지만, 세상에 아무리 떠들썩한 소문이 돌아다니고 있다고 해도 그 소문이 닿지 않는 지역도 있는 법이다.
델리움 북쪽에 있는 작은 마을인 힐가덴이 그러했다.
북서쪽에 있는 팔렘시아보다 델리움과 더 가까운 위치였지만 한 달에 두어 번 들르는 상인이 외부와 연결된 유일한 끈인 이 작은 마을은 오히려 팔렘시아보다도 소식이 더 늦었다.
그래서 가람은 오랜만에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마을에서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주문한 식사 나왔네.”
가람은 주인이 내려놓은 접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시선의 의미를 깨달았는지 주인은 조금 면구스러운 표정으로 얼른 자리를 떴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빵과 맹물에 가까운 수프 한 그릇을 식사랍시고 내어놓고 나면 누구라도 그러고 싶을 것이다.
그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가람은 어떤 어처구니없는 식사가 나온다고 해도 환불을 요구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워낙 입맛이 당기지 않는 모양이었기 때문에 음식 대신 술로 마른입을 적시기로 했다.
한 모금 마신 가람은 미간을 찌푸리고 술잔을 내려놓았다. 술에는 노골적으로 물맛이 났다.
이끼와 흙 맛이 옅은 술 냄새 사이로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물을 타도 여간 많이 탄 것이 아닌 모양이다.
가람은 짧은 고민 끝에 모든 음식을 포기했다. 뭐, 어차피 음식이야 아무래도 좋다. 음식을 먹으려고 온 것이 아니었으므로.
오후 늦게 이 작은 마을에 도착한 가람은 가장 손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이유로 패스의 위치를 확인한 뒤 제일 먼저 선술집을 찾아왔다.
주정뱅이들이 떠드는 이야기가 넘쳐 나는 곳.
평소라면 쉽게 풀어놓지 않을 이야기도 술에 취하면 웅변하듯 외치게 되니 이야기를 듣기에 이보다 좋은 곳은 없다.
그리고 술을 마신 사람들은 붙임성이 좋아지기 때문에 낯선 사람이라고 해도 쉽게 친밀한 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막상 도착한 선술집은 이른 시간 탓인지 손님이 거의 없어 가람을 실망시켰지만 그건 그것대로 장점이 있는 법이다. 예를 들자면 술집 주인과의 오붓한 대화 같은 것.
“저기.”
가람이 슬쩍 입을 떼자 주인이 초조한 얼굴로 어색하게 눈을 마주쳐 왔다.
그의 입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돈을 내어주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의로 굳어져 있었다. 오랜만의 외지인이니 뽑아낼 수 있을 만큼 돈을 뜯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고만고만한 작은 마을에 고만고만한 선술집. 그 수입의 수준이야 뻔하다. 이런 식으로 외지인의 주머니를 털지 않으면 가게를 이어 가기 힘들었다.
“혹시 마을 중앙에 있는 집의 주인이 누군지 아세요?”
주인은 노골적으로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잠시 의아한 얼굴로 무언가 생각하다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 참 빠르군. 벌써 외지에 말이 퍼졌나?”
가람은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그저 바늘이 마을 중앙에 있는 집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에 집주인을 찾아내어 방문의 협조를 구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냥 투명화하고 들어가서 패스를 손에 넣는 방법도 있었지만 좀도둑처럼 숨어드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 방식이다.
물론 최악의 경우에는 그 수밖에 없긴 하지만 당연한 듯이 남의 집에 불법 침입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 술집 주인이 말하는 소문 같은 것은 가람으로서는 당연히 금시초문이었다.
“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