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우리 마을에 리베르튼을 정화하고 죽은 사람도 되살리는 성녀가 오셨다는 소문 말이야. 자네도 살리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온 것 아닌가?”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긴데.
가람은 눈을 가늘게 떴다.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기에 리베르튼의 성녀에 대한 소문을 전혀 듣지 못한 줄 알았더니. 그보다,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자신에 대한 소개가 전혀 다른 사람의 것으로 탈바꿈되어 있는 것을 보면 흥미롭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보아하니 성녀의 인상착의와 같은 자세한 이야기까지 닿지는 않은 모양이고, 그 틈을 타서 자신을 사칭한 작자가 활개 치고 있었던 것인가.
“마을 중앙의 집이 그 성녀의 것이라는 말인가요?”
“그래. 아, 혹시라도 성녀님이 우리 마을을 떠나게 할 생각은 하지 말라고. 그분은 우리 마을에 비를 내려 주셔야 하니까.”
엄한 표정으로 으름장을 놓은 주인은 문득 기척을 느끼고 반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벌써 해가 진 모양인지 취하고 싶은 표정의 농부들이 앞다투어 선술집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소란스럽게 자리를 차지한 농부들은 제각각 흙 묻은 농기구들을 아무렇게나 기대어 놓고 거친 목소리로 술을 재촉했다.
“제길, 로투는 언제 돌아오는 거야? 무서워 죽겠어. 저 불길한 작은 달들을 보라고. 빛이라도 쬐면 재수 없게 무슨 일이 있을지.”
가람의 옆 테이블에 턱하니 걸터앉은 남자가 두꺼운 팔뚝이 무색할 정도의 겁먹은 목소리로 푸념했다.
그 말을 받아 주는 것은 친구로 보이는 다른 농부였다. 둘 다 텁석나룻이 난 데다 정리되지 않은 머리로 썩 잘생긴 외모는 아니었다.
“나도 소름이 끼쳐. 저 동그란 모습이 꼭 사람 눈알 같지 않아? 색도 누런 것이. 마녀의 눈깔 같다고.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지 원.”
한껏 우는소리를 한 농부는 문득 가람을 발견하고 그쪽을 돌아보았다. 가람은 눈앞의 빵이 얼마나 맛이 없을지 기대하며 조심스럽게 베어 먹는 중이었다.
예상대로 마치 마른 모래를 씹는 듯한 느낌에 인상을 찌푸리는데, 내내 그 모습을 바라보던 농부가 툭 말을 건네었다.
“외지인인가?”
가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드물게 먼저 통성명을 시작했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
주인은 몰려든 손님들에게 술을 내어주느라 바빠 보이니 이 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가람이라고 해요.”
“야탈카 쪽 이름 같군. 얼굴은 그래도 델리움 사람 같은데. 혼혈인가? 나는 빌런, 이쪽은 로우.”
확실히 하스펠의 외모를 따라갔더니 델리움 계통의 얼굴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델리움 출신이 아니었던 가람은 대답을 대충 얼버무렸다. 그러자 두 사람은 더 캐묻지 않았다.
“그래도 여기 오다니 돈이 많나 보네.”
로우라고 소개된 남자였다. 그는 커다랗고 유순한 눈으로 가람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돈이요?”
“여기 말이야. 외지인한테는 값을…….”
로우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빌런이 맹렬한 시선으로 노려보며 테이블 밑으로 그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꼬집었기 때문이다. 대충 앞부분만으로도 그가 하려던 말을 충분히 이해한 가람은 싱겁게 웃어 버렸다.
확실히 모래 맛 빵과 소금 맛 맹물 수프, 이끼와 돌 맛이 나는 술에 20만 슬링이라는 가격은 눈이 튀어나올 만큼 비싼 것이다. 솔직히 1천 슬링도 아까울 지경이다.
“뭐 어쩔 수 있나요. 비싸도 여기밖에 음식을 파는 곳이 없는데.”
가람의 말에 두 남자는 어색한 표정으로 주위를 훑어보았다. 시선을 피하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히 엿보였지만 가람은 굳이 책잡지 않았다.
척 보기에도 이곳은 식량의 대부분을 상인에게서 수입하는 것으로 해결하고 있었다.
그마저도 없으면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할 마당이니 상인이 아무리 비싼 값을 불러도 모두 사는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니 기회를 봐서 외지인에게라도 돈을 긁어모으려고 드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해 줄 수 있었다.
“두 사람 먼저 왔군그래.”
훅 하고 바깥 공기가 끼친다 싶더니 누군가가 날렵한 움직임으로 두 남자 사이에 끼어들었다.
조끼 밖으로 드러난 굵은 팔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여기저기 베였다가 아문 잔흉터가 얼굴과 몸을 가리지 않고 빼곡하다.
농사꾼은 절대로 아니었다. 가람은 그가 어깨에 멘 기다란 활로 정체를 대충 유추했다. 사냥꾼인가 보군.
“어, 깁슨. 오늘은 좀 잡았어?”
로우의 말에 깁슨은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끌어내어 들어 올렸다.
아직 살아서 바르작거리는 작은 새 몇 마리였다. 빌런은 혀를 찼고, 로우는 그래도 기쁜 얼굴로 축하해 주었다.
“영 허탕은 아니군그래.”
“그래도 허탕이나 마찬가지지. 고기는 별 볼 일 없고, 깃털이나 뽑아서 팔아야겠어. 그것도 몇 푼 안 되겠지만. 로투만 다시 나타나면 밤 사냥을 나설 텐데. 저 작고 둥근 것들이 불길해서라도 사냥을 못 가겠다.”
남자는 차마 그것을 달이라고 부르지 못하겠는지 애매한 명칭을 사용했다.
“맞아. 그래서 우리도 해가 진다 싶으면 밭에서 나오잖아. 무서워 죽겠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
로우가 깁슨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와 동시에 헐레벌떡 나타난 주인이 음식과 커다란 술잔 세 개를 내려놓았다.
양이나 그 내용물의 충실함이 가람의 테이블에 있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그럴듯하다.
맛도 제법 훌륭한 모양인지 깁슨은 단숨에 술을 벌컥벌컥 마시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길게 트림했다. 그리고 자신이 뱉어 놓은 트림 사이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우리 마을은 성녀님이 있어서 다행이야. 그분이 없었다면 불안해서 살 수 없었을 거라고.”
성녀라. 아무래도 이 마을 사람들은 그 성녀라는 사람을 굉장히 신봉하는 모양이었다.
가람은 그를 거의 사기꾼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근거 없이는 믿음이 성립하기 어려운 법이다.
가람은 성녀라는 사람이 어떤 수단으로 그 믿음을 얻어 낸 것인지 매우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쯤, 깁슨도 옆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서 몸을 틀어 거의 이쪽 테이블에 안착하고 있는 가람을 발견했다.
“외지인?”
“아, 가람이라는군. 이봐. 그렇게 불편하게 있지 말고 아예 이쪽에 앉아. 이제 더 올 사람도 없고 한 사람 앉을 자리 정도는 되니까. 모두 괜찮지?”
빌런이 가람 대신 그녀를 소개하며 슬쩍 좌중을 둘러보았다. 로우와 깁슨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에 가람은 의자를 들고 테이블에 본격적으로 합세해 대화에 끼어들기 시작했다.
“어, 이름이 가람이라고? 야탈카 사람인가?”
“그건 아닌 것 같아. 아차. 그러고 보니 어디에서 왔는지 확실히는 못 들었군.”
깁슨의 질문에 대답한 로우가 의아한 얼굴로 가람을 응시했다. 가람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델리움에서 왔어요.”
델리움이라는 말에 세 사람은 동시에 탄성을 터뜨렸다. 그들에게 있어서 델리움은 그야말로 꿈속의 도시, 세상에서 가장 멋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제법 나이가 있는 그들이었지만 델리움에 가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럴 줄 알았어. 델리움에서 이 시골에는 무슨 일인가?”
“아, 혹시 우리 마을의 성녀에 대한 소문을 들은 건가?”
자랑스러운 듯 우쭐거리는 것 같은 시선이 가람에게 모여든다. 가람이 고개를 젓자 세 사람은 노골적으로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 반응에 가람은 더욱 성녀에 대한 호기심이 끓어올랐다.
“아까 술집 주인도 그러던데 성녀라니, 대체 무슨 말이에요?”
가람의 질문에 깁슨이 씨익 웃으며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소문이 느린 아가씨군그래. 죽은 사람도 살리는 리베르튼의 성녀 이야기를 듣지 못했나? 지금이야 여기 힐가덴에 계시니 힐가덴의 성녀라고 부르는 게 옳지만.
아주 대단한 기적을 일으키는 분이라고. 가람도 만나면 그분의 신비함에 섬기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길 거야.”
세상의 그 어떤 기적이라고 해도 그녀 앞에서는 조잡한 마술에 불과할 테지만 가람은 내색하지 않고 다시 질문했다.
“기적? 지금 그 성녀가 힐가덴에서 사람들을 치료하고 있다는 말인가요?”
“으음, 그건 아니지만. 하지만 곧 해 주시겠지.”
로우가 태평하게 대답했다. 대체 무엇이 성녀에 대한 믿음을 이렇게나 확고하게 만든 것인가.
그 성녀라는 사람이 정말로 사람을 치료하기라도 했나 싶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다행히 성녀에 대해 캐묻는 것에 거부감을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가람은 조금 더 파고들기로 했다.
“사람을 치료해 준 적도 없는데 어떻게 성녀라고 믿을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