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비를 내렸거든.”
“비?”
“그래. 가뭄도 그런 가뭄이 없었지. 바짝바짝 말라 죽는 작물을 손도 쓰지 못하고 보고만 있는데 그분이 비를 내려서 모두를 살려 주신 거야.
그리고 리베르튼의 성녀라고 자신을 소개하시더군. 상인이 대충 지나가는 말로 리베르튼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바로 그분이 우리 마을에 오실 줄은 정말 몰랐어. 비를 내리다니, 그 얼마나 대단한 힘이야?”
로우는 정말로 신실한 표정으로 성녀를 찬양하고 있었다. 어쩐지 하스펠이 겹쳐지는 느낌에 가람이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이끼 맛 술을 마시는데 빌런이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래도 나는 빨리 그 치료의 기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어. 알레인이 매일매일 말라 가는 게 보기 안타까울 정도야.”
“알레인?”
새롭게 등장한 이름에 가람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빌런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보스통의 아내야. 보스통은 나무꾼인데 1년 전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곰을 만나서 허리를 크게 다쳤어. 그 후로 서지도 앉지도 못하고 침대에서 골골거리고만 있지.
그걸 곁에서 보는 알레인은 얼마나 속이 타겠어? 사랑하는 남편이 오늘내일하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태이니. 그래서 그녀는 이 마을에서 성녀의 치료에 가장 매달리는 사람이야.”
“성녀가 치료를 안 해 주나요?”
“정성이 부족하다더군. 그래서 알레인은 집 안에 있던 재물도 다 바치고 성녀의 시녀처럼 그 말에 절대복종하고 있어.
그러면 자신의 믿음에 감동한 성녀가 반드시 남편을 치료해 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더군. 뭐, 우리 생각도 크게 다르지는 않아.”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혹시 성녀가 치료할 능력이 없어서 미루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느냐 질문하고 싶었지만 민감한 사항이었기 때문에 가람은 애써 수위를 조절했다. 빌런은 그저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치료할 가치가 있는 선한 사람인지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신 거지 뭐. 그리고 그만한 기적을 공짜로 바라는 건 너무 양심 없는 행동이 아닌가?
사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성녀님에게 비를 내려 주신 기적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 있어.
나도 매일매일 수확한 작물을 바치고 있지. 그래야 다음번 가뭄 때도 비를 내려 주시지 않겠나?”
사기꾼.
가람은 깔끔하게 결론 내렸다. 비를 내렸다느니 하는 말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기운을 퍼뜨려 훑어본 바에 의하면 이 마을에는 그 어떤 대단위 마법도 사용된 흔적이 없었다.
그 말인즉, 그저 마침 비가 내릴 때를 잘 맞춰 들어온 사기꾼 일행이 마을 사람들을 상대로 대범하게 가람의 이름을 팔아 사기를 치고 있다는 것이다.
뭐 처음 있는 사례도 아니다. 가람은 보통 조용하게 움직이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었지만 간혹 귀찮아지거나 하면 자연 파괴에 가까운 파격적인 행동을 저지르기도 했다.
화산을 두 쪽으로 갈라 안에 있는 패스를 찾아낸다거나 호수 안에 가득한 물을 통째로 하늘로 들어 올리는 식이다.
그리고 그대로 홀연히 사라지면 어디선가 자신이 일으킨 마법이라며 가람을 사칭하는 사람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나 재물이나 그에 맞는 직위를 달라고 떠들어 대곤 했던 것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사기는커녕 허언증 정도로 주변 사람들의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수준에서 끝나거나,
도가 지나친 경우 그 지역을 다스리는 자에게 알아서 처벌되곤 했기 때문에 가람이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애초에 사람은 누군가를 그렇게 쉽게 믿지 않는다.
하지만 이 힐가덴은 상황이 조금 특수했다. 보아하니 워낙 척박한 환경이라 정신적으로 믿을 무언가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 사기꾼에게 완벽하게 넘어가 버린 모양이었다.
게다가 로투까지 사라져서 불안에 떨고 있었으니 더욱 쉽게 당한 것이겠지.
어쨌거나 농부들이 아무리 작물을 바쳐도 다음 가뭄은 올 것이다. 그리고 알레인의 남편은 치료받지 못하고 죽을 테고, 사기꾼은 마을을 떠나겠지.
이렇게 실질적으로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면 그냥 내버려 두기도 곤란하다. 게다가 사기꾼이 계속 이름을 팔아 대는 이상 그 악행은 모두 가람의 것으로 포장되어 버릴 것이다.
쓸데없는 누명을 뒤집어쓰는 것도 귀찮고, 상대가 사기꾼이라면 예의를 지켜 줄 생각도 없는 가람이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확인해 보기로 했다.
“그 성녀라는 사람, 언제 어디로 가면 만날 수 있어요?”
실제로 눈으로 확인한 뒤에 저질러도 늦지 않는 것이다.
* * *
마을 중앙에 세워진 성녀의 집은 작은 마을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호화로운 크기였다.
게다가 최근에 지어진 모양인지 낡은 곳도 없었는데, 빌런의 말에 따르면 성녀에게 감사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그녀를 위해 지어 준 것이라고 한다.
대단하지 않느냐고 묻는 그 말에 가람은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사람들이 서 있는 줄이 짧아지는 것을 응시했다.
선술집의 빈방에서 밤을 보낸 가람은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매일 아침 공물을 바치러 성녀의 집에 모인다는 세 사람의 말을 듣고 그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그리고 대충 주머니에서 아무 물건이나 꺼내어 들고 공물을 바치는 줄에 끼어 선 것이다.
가람이 마련한 공물은 대량으로 구매해 냉동해 두었던 스튜 열매였다.
마법으로 해동시키긴 했어도 얼어 있던 터라 냉기가 손을 시리게 했지만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는 없었다.
“그렇다곤 해도 대단한 줄이네요.”
“그렇지? 마을 사람들이 이만큼이나 성녀님을 사랑한다는 증거지.”
로우의 자랑스러운 대답에 가람은 짧게 혀를 찼다. 성녀인지 뭔지 하는 그 작자, 정체가 탄로 나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어 보인다.
신뢰가 두터울수록 배신감도 큰 편이니 마을 전체의 분노를 사서 맞아 죽지 않을까.
꽤 비극적인 일이므로 그것만은 막아 주자고 생각하며 가람은 주욱 늘어선 공물들을 둘러보았다.
뿌리채소와 새의 알, 손질된 고기, 생선 등 주로 바쳐지는 물품은 먹을 것이었지만 간혹 금속이나 광석, 또는 가죽과 제법 귀해 보이는 질 좋은 나무와 장신구 등이 보이기도 했다.
아마 집에 남아 있는 물건들 중 가장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을 바치려고 들고 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열매는 갑자기 어디서 구한 거야? 이런 북부에서는 귀한 건데. 그거 스튜 열매 맞지?”
내내 가람이 손에 든 열매를 흘끔거리던 빌런이 슬쩍 질문했다.
그런 것을 가지고 있었으면서 어째서 선술집의 참혹한 음식을 참고 먹었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가람은 뺨을 긁적이다가 대충 적당히 둘러댔다.
“비상식량으로 아껴 둔 거예요.”
아껴 두기는커녕 마법 창고 안에 넘쳐 나고 있는 열매였지만 가람의 거짓말은 천연덕스러웠다.
빌런은 그럭저럭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람도 귀한 것이 있으면 성녀님에게 일단 바치는 게 좋아. 그러면 운 좋게도 기적을 베풀어 주실 수도 있잖아?”
빌런의 당연하다는 듯한 말에 가람은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줄은 점점 짧아져 어느새 육안으로 성녀를 확인할 수 있는 거리까지 가까워졌다.
성녀는 금과 가죽 등 온갖 귀한 잡동사니를 모아다가 쌓은 것 같은 화려하고 너저분한 의자에 앉아 오만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가에 찍힌 점이 조금 고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긴 했지만 딱히 미녀는 아니다.
머리색은 전체적으로 갈색에 바랜 느낌의 잿빛이 조금씩 섞여 있었는데 어두운 데서 보면 가람의 머리색과 비슷하게 보일 것도 같았다. 어쨌든 옆에서 보고 있자니 행태가 아주 가관이었다.
“성녀님께 바칩니다.”
손목이 앙상하게 마른 여자가 푸성귀를 한 바구니 내려놓았다. 그 모습에 가짜 성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코웃음 쳤고 여자는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물러났다.
그다음으로는 말린 생선이 바쳐졌지만 마찬가지의 반응이었다. 성녀는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다음 사람을 향해 턱짓했고, 가람은 천천히 걸어 나가 스튜 열매를 내려놓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군.”
가짜 성녀가 이채 어린 표정으로 가람을 응시했다. 그리고 노골적으로 가람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꼼꼼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대단히 무례한 시선이었으나 가람은 담담한 표정으로 성녀의 행동을 방치했다.
솔직히, 앞으로 생길 일을 생각하면 성녀에게 동정을 표하고 싶은 마음마저 들 정도다.
“그 가방에는 뭐가 들었지? 열어 보아라.”
성녀 행세를 한 지 얼마 안 되었다고 들었는데 하대가 입에 짝짝 달라붙는 느낌이다.
자연스럽게 명령한 성녀는 가람이 당연히 가방을 열어 보여 줄 거라는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언뜻 가람의 굼뜬 행동에 대한 짜증도 엿보였다.
게다가 성녀뿐만이 아니라 마을 주민 모두가 당연히 따라야 한다는 듯 가람에게 무언의 압박을 보냈다.
어처구니가 없는 기분이었지만 가람은 순순히 가방을 열어 보여 주었다. 보여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물건을 꺼내어 늘어놓기까지 했다.
돈주머니와 보석이 들어 있는 주머니를 펼쳐 놓은 것은 반쯤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가람의 도발에 넘어간 성녀가 탐욕이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입을 열었다.
“좋아. 괜찮은 공물이군. 받아 주마.”
바친다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당연히 가람이 알아서 바쳐 올 거라고 생각하는 태도였다. 가람은 조금 더 놀려 줄까 하다가 시간을 더 끌고 싶지 않아졌기 때문에 슬슬 가짜 성녀를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공물을 바치는 것은 문제없지만 대신 들어주셨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가람의 똑바른 시선이 성녀를 날카롭게 꿰뚫었다. 그 기세에 잠시 움찔한 성녀는 웅성거리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마지못한 기색으로 대꾸했다.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