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알레인의 남편을 치료해 주세요.”
푸성귀를 바쳤던 마른 여자가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놀람과 기쁨에 찬 눈에 눈물이 맺힌다. 가람은 어렵지 않게 그녀가 알레인임을 알 수 있었다.
“안 된다. 그건 그녀의 문제야. 다른 청은 없느냐?”
성녀의 반응은 차가웠다. 가람은 동요를 감추며 의연한 척 연기하는 그녀에게 박수를 쳐 주고 싶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가람의 말에 크게 당황했음이 분명했는데 노련하게 그것을 감춘 것이다. 과연 보통은 넘는 사기꾼이다.
“그렇다면…….”
가람은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 자신의 팔을 그었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깊은 칼질이었다.
심약한 몇몇이 소리 내어 비명을 지르고 성녀의 눈동자가 덜컹 흔들렸다.
“무슨 짓이냐?”
차갑게 굳어진 성녀의 얼굴을 향해 가람은 길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이 상처를 치료해 주시죠. 그 기적이라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그게 제 청입니다.”
사방은 완전히 고요해졌다. 눈치 빠른 몇몇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닫고 성녀를 향해 반신반의하는 시선을 던졌고 나머지는 무례한 가람을 비난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가람의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에 감히 성녀와 가람 사이에 끼어드는 사람은 없었다.
서슴없이 팔을 그어 버리는 사람은 아무래도 꺼려지는 대상인 것이다.
“무, 무례한! 나를 시험하고자 하느냐!”
성녀가 애써 당황을 감추고 노성을 터뜨렸다. 그 와중에도 주변을 흘끔거리는 시선이 애처롭다.
가람은 피가 줄줄 흐르는 팔을 들어 올려 성녀의 앞에 내밀며 짧게 물었다.
“못하시나요?”
침묵.
무언가 대답하려던 성녀는 가람과 눈이 마주친 후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음을 깨닫고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어차피 이곳의 성녀는 자신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미 자신을 성녀로 믿고 있다.
어디서 굴러먹다가 왔는지 모를 이방인 하나가 모든 것을 망칠 수는 없을 것이다.
몇 번 호통치면 마을 사람들이 알아서 이 여자를 가둘 테고 오늘 밤 어둠을 틈타 그동안 모은 재물을 들고 도망치면 모든 것은 계획대로 끝날 것이다.
계산을 마친 성녀가 다시 입을 열어 소리치려는 순간, 그것보다 조금 더 빠르게 가람이 끼어들었다.
“저는 할 수 있는데.”
가람의 말과 동시에 갈라져 피를 줄줄 흘리고 있던 상처가 빛에 휩싸여 순식간에 아물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마을 사람들은 턱이 빠지도록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성녀, 아니, 사기꾼 또한 마찬가지로 얼빠진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새파랗게 질려 가람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눈앞의 여자는 세간에 알려진 성녀와 아주 닮은 꼴이었다.
설령 성녀의 머리색을 아는 사람이 나타난다고 해도 자신의 머리색 또한 비슷하니 속여 넘기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성녀 본인이 나타날 줄이야.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델리움의 신전에 있어야 할 사람이 어째서 여기에 있단 말인가?
“도대체 이게…….”
누군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가람은 사색이 되어 의자의 손잡이만 꽉 움켜쥐고 달달 떠는 사기꾼의 옷깃을 움켜쥐어 그대로 끌어 내렸다.
사기꾼은 반항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움찔하며 술렁이는 마을 사람들을 돌아보며 가람이 어깨를 으쓱인다.
“성녀님은 가짜였습니다. 비가 왔던 건 단순히 우연이었어요.”
깔끔한 결론이었지만 납득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특히 농부들이 더욱 그러했다.
성녀가 있으니 가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며 기뻐하던 그들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무언가 말하기도 전에 성녀였던 사기꾼이 가람의 바지를 붙잡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네? 정말 잘못했습니다. 제가 감히 리베르튼의 성녀님을 몰라뵈었습니다. 그 이름을 사칭한 죄는 죽어 마땅하지만 자애로운 마음으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제발요. 예?”
높은 의자에 앉아 턱짓으로 공물을 받아 챙기던 그 오만한 여자와 동일 인물인가 싶을 정도로 사기꾼의 행동은 일변했다. 그 행동은 자백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가람에게 따지려던 농부들도 그런 사기꾼의 행동에 깨닫는 바가 있는지 허망한 표정으로 침묵할 뿐이었다.
가람을 제외하고 가장 상황 파악이 빠른 사람은 아무래도 사기꾼 성녀인 것 같았다.
그녀는 순식간에 가람의 정체와 향후의 방향, 그리고 앞으로의 분위기를 보아 가람에게 달라붙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리라는 것까지 알아챈 것이다.
과연 사기꾼을 할 만한 눈치라고 감탄해야 할까.
그래도 아직까지 오만하게 말하던 여자의 얼굴이 아른거렸기 때문에 가람은 매달리는 여자를 툭 걷어차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공물의 제단은 여자의 집 앞마당에 마련된 것이었기 때문에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그동안 얼마나 받아 챙긴 것인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많은 재물들이 쌓여 있었다.
잘도 이만큼이나 모았구나 싶어 대충 휘휘 둘러보며 걷는데 허겁지겁 쫓아온 사기꾼이 가람의 뒤로 따라붙었다.
“하, 하하하.”
뭔가 싶어 가람이 돌아보자 여자는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하긴, 정체가 다 드러난 마당에 마을 주민들 사이에 서 있는 것은 매타작을 받고 싶다고 온몸으로 외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일이다.
“무언가 찾는 게 있으신가요?”
방문을 벌컥벌컥 열고 뒤지는 가람에게 여자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두 손을 모아 잡고 초조한 듯 비비고 있는 모습이 대단히 간사한 모습이다.
가람은 대꾸도 하지 않고 한 손으로 가볍게 침대를 들어 올린 뒤 패스를 손에 넣었다.
먼지와 함께 뒹굴고 있던 패스는 120이라는 비교적 높은 금액이었다. 평범한 곳에 있던 것치고는 놀라울 정도다.
패스가 썩을 만큼 많이 있다고 해도 많은 패스를 얻었을 때는 역시 기분이 좋았다.
아니, 기분이 좋은 것과는 조금 다른, 영혼까지 뿌듯해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좋아. 모처럼 패스를 많이 얻었으니 좋은 일이나 할까.
침대를 내려놓은 가람은 다시 집 밖으로 걸어 나갔다. 가람이 안으로 들어갔을 때보다 주민의 숫자는 더욱 늘어 있었다.
아무래도 성녀가 가짜라는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갔던 사람들까지 모여든 모양이다.
손에 든 곡괭이와 쟁기 따위의 쇠붙이가 흉흉한 분노를 품고 번쩍이고 있었다.
“저년이다! 저년이 사기꾼이다!”
“이 나쁜 년! 감히 사기를 쳐!”
가람과 사기꾼이 모습을 드러내자 마을 사람들이 앞다투어 욕설을 쏟아 내었다.
삿대질을 하며 금방이라도 후려칠 듯이 흥분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모든 욕설의 틈바구니에서 가람은 묘한 기분이었다.
사기꾼은 떨어지면 죽기라도 할 듯이 가람의 옆에 바짝 달라붙어 떨고 있었고, 둘 사이의 거리가 제로에 가까웠기 때문에 사기꾼을 향한 분노는 동시에 가람에게도 쏟아졌던 것이다. 최소한 모양새로는 그렇게 보였다.
어쨌거나 흥분한 마을 주민들은 사기꾼이든 뭐든 가리지 않고 외지인이면 무조건 잡아다가 죽여 버릴 기세였다.
흥분을 조금 가라앉힐 필요를 느낀 가람은 잠시 고민하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북쪽은 비가 제대로 내리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가 쨍쨍하지도 않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이 흐린 날씨가 계속될 뿐이다. 하지만 구름은 여간해서는 비를 뿌리지 않는다.
아마도 로투를 봉인하기 위해 오래도록 끌어다 쓴 마법의 힘이 자연을 어지럽힌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흐트러졌던 자연이 대충 자리 잡혀 가고 있어 이대로 내버려 두면 흐리긴 하지만 적어도 가뭄을 부르지는 않을 날씨가 지속되겠지만, 가람은 그 시간을 조금 앞당기기로 했다.
눈에서 불을 뿜을 듯이 벌겋게 자신을 바라보는 주민들에게 찬물을 쏟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주문도, 어떤 상징적인 행동도 없었다.
가람은 비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몇 방울의 물방울이 흙 위에 점을 찍다가 곧 폭우가 되어 미친 듯이 쏟아졌다.
이마에 떨어지는 물방울에 설마 하는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던 사람들은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하자 얼떨떨한 얼굴로 기뻐했다.
믿을 수 없는 일에 분노는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알레인.”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가람은 바닥에 앉아 넋을 잃은 마른 여인 앞에 섰다.
믿었던 성녀가 사기꾼이었다는 사실에 완전히 절망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어깨는 빗방울에도 부서질 것처럼 가냘프다.
가람은 고개를 들지 않는 알레인의 앞에 쭈그려 앉아 시선을 맞췄다.
“알레인.”
가람은 되도록 상냥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람이 자신의 팔을 그어 피 흘리고 그 상처를 치료했던 사실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필사적으로 매달리던 것이 모두 헛수고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충격받을 만도 하다.
그러나 비록 이곳의 성녀는 사기꾼이었지만 진짜 성녀로 추앙받던 사람 또한 여기에 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알레인 또한 그 사실을 천천히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누구인지 천천히 인식했다.
“성녀님!”
눈앞의 존재를 깨닫자마자 알레인은 몸을 던지듯이 가람에게 매달렸다. 가람이 붙잡지 않았다면 벌써 진흙탕이 되고 있는 바닥에 코를 박고 말았을 것이다.
그녀는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가람에게 매달려 빌었다.
“제 남편을 살려 주세요. 불쌍한 제 남편을! 착한 사람입니다. 좋은 사람이에요. 제발 살려 주세요. 제가 뭐든 할 테니…….”
당황스러울 정도로 매달리는 알레인을 마주 안아 주며 가람은 잠시 사기꾼을 노려보았다.
이렇게나 절박한 사람을 상대로 사기를 쳤다니 새삼 화가 치밀었던 것이다.
그 시선에 사기꾼은 찔끔한 얼굴로 괜스레 고개를 돌렸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래요.”
“네?”
애원하던 알레인이 흠칫 고개를 들었다. 가람의 선선한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가람은 재차 확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가자고요. 치료하러.”
* * *
알레인은 꿈인지 생시인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얼떨떨한 표정으로 가람을 안내했다.
그녀의 집은 마을 외곽에 있는 자그마한 통나무집이었는데 남편의 직업이 나무꾼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여기저기에 도끼와 땔나무가 쌓여 있었다.
목수 일도 겸하는 모양인지 대패와 작은 손칼 따위도 보였다. 어쨌거나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어수선한 모습이다.
“누추한 곳에 모시게 되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알레인은 혹시나 가람이 돌아가겠다고 말할까 봐 불안한 얼굴로 작게 입을 열었다. 가람은 그 마음을 그대로 읽고 픽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게 불안한 표정 할 것 없어요. 제가 설마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겠다고 하겠어요? 게다가 이래서야 돌아가는 것도 불가능하죠?”
가람이 알레인의 남편을 치료해 주겠다는 의사를 밝힌 후 그 뒤로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따라붙었다. 그 결과 의도치 않게 가람의 퇴로를 막게 된 것이다.
주민들의 눈에는 사기꾼인지 아닌지 단단히 감시하겠다는 결의와 기적을 구경하고 싶다는 바람, 두 가지 생각이 넘실거렸다.
“죄송합니다.”
깊이 고개를 숙이는 알레인에게 가람이 어깨를 으쓱였다.
“뭘요. 안쪽인가요?”
“예.”
알레인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서자 미처 정리할 여력이 없었는지 물건들이 너저분하게 놓여 있는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바깥만큼 어수선한 모습이었다.
알레인이 급하게 주변을 정리하는 모습에 가볍게 미소 지은 가람은 집의 안쪽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병자의 냄새를 맡고 걸어 들어갔다.
그런 가람의 뒤로 몰려온 사람들 중 일부가 슬금슬금 따라붙었다.
알레인의 작은 집은 순식간에 구경꾼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했고 들어오지 못한 나머지는 집 밖에서 소식을 기다렸다.
마을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 쾌유를 바랄 정도라니, 알레인 남편의 사람됨이 보통이 아닌 모양이었다.
작게 난 창문으로 딱 좋을 정도의 햇살이 비치는 작은 방. 집 안에서 유일하게 깨끗이 청소된 방의 작은 침대에 앙상하게 마른 남자가 신음하고 있었다.
분명 꿈쩍도 할 수 없다고 들었는데 수염도 깨끗하고 체취도 거의 없다. 지극정성으로 돌본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앞에 날듯이 달려간 알레인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