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252화 (외전) (252/256)

1화

노을의 심지가 짧아질 무렵 밤이슬을 피해 낡은 지붕 아래로 여행자가 찾아드는 것은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다.

마을에 자리한 있으나마나 한 작은 여관이 여행객을 다 수용할 수 없을 때면 여행자들은 심심찮게 민가로 찾아와 묵기를 청하곤 했다.

그러나 그것도 이젠 다 옛말이다. 야수들판이 불타고 중립지를 잃은 베록을 향해 칼날을 겨누는 영지들이 없었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잿더미가 되어 버린 야수들판에 야수는 사라지고 남은 것은 주인 없는 들판뿐이다.

지정학적으로는 응당 베록의 소유가 되어야 옳았으나 베르하르트는 야수를 몰아낸 공을 앞세워 자신의 지분을 주장했다.

아마도 그렇게 베르하르트와 베록이 땅을 나누어 가지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면 이후 이어진 30년간의 전쟁은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수들판은 나누어 가지기에는 너무나 비옥하고 거대한 땅이었다. 재정난을 겪고 있는 바랄라인이 침을 흘렸고 게르하론, 팔탐, 아하른 등이 뒤늦게 참가했다.

균형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바랄라인이 군사를 보내고 그에 뒤질세라 다른 영지들도 앞다투어 군사를 일으키자 비옥한 땅은 순식간에 전쟁터로 돌변했다.

그렇게 30년.

휴전의 기간은 있었으나 결코 종전은 없는 세월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긴 전쟁에도 불구하고 영주들 중 누구도 승리자가 되지 못했다.

최후의 승리는 이 사태를 관망하다 쇠약해진 바랄라인을 집어삼키며 아래로 남하한 크페타인 여공작의 것이었다.

남부의 전쟁에는 무심한 척하던 그녀는 눈 폭풍 속에 몸을 감추고 은밀히 발톱을 갈고 있었던 것이다.

지루할 정도로 긴 전쟁은 야수들판을 흡수한 베록이 크페타인에 종속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스스로 무너진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빠른 몰락이었다. 긴 전쟁으로 지친 영주들은 이미 죽을 나이가 되어 있었고, 개중에는 이미 죽은 자들도 있었다.

많은, 아주 많은 죽음을 삼키고서야 전쟁은 만족해하며 사그라졌다.

언뜻 보기에는 모든 전쟁이 끝난 것으로 보였지만, 그것은 정치적인 부분일 뿐 아직도 길 위에는 전쟁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앙상해진 아이들은 볼이 터져라 울음을 삼키고 마을 사람과 여행자는 서로를 경계의 눈으로 응시한다.

고단한 여행자를 위해 뜨거운 음식을 내어주는 인심 같은 것은 전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그런 마당이니 이 시대에는 홀로 다니는 여행자란 거의 없다시피 했다. 탈주병과 피난민으로 이루어진 도적 떼가 들끓는 길 위에서 혈혈단신으로 여행을 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아니, 집을 떠나는 것 자체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어지간하면 보금자리를 떠나지 않으려고 했고, 피치 못할 사정으로 떠나올 경우에는 커다란 상단에 끼어 이동하곤 했다. 그렇게 적당한 정착지를 찾을 때까지 떠도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것은 여행이라기보다 부랑에 가까운 모양새였다.

대부분 더럽고 냄새나고 가난한 작자들이었는데 주로 마을 근처에서 서성거리다가 치안대에게 쫓겨나곤 했다.

인심이 야박하다고 욕할 것도 못 되는 것이, 그들 대부분은 여행자라는 이름을 뒤집어쓰고 도적질을 겸업하는 부랑자들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들렀던 마을에 닭과 빵 주머니가 하나씩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화젯거리도 되지 못하는 수준의 흔한 이야기였다.

그렇게 여행자들을 향한 경계와 이웃의 안부를 살피는 데 인색한 그 시대에, 간신히 아슬아슬한 평화로움을 유지하고 있는 어느 작은 마을에서 늙은 뮐러는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늙는다는 것은 젊은이에게 도전을 강요할 수 있고 자신의 젊었던 시절을 과장할 수 있는 특권이 생기는 것을 의미하지만, 뮐러는 그 특권을 행사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대신 마음에 꼭 드는 낡은 흔들의자에서 흔들리며 이따금씩 농작물을 돌보거나 굶주림에 우는 아이들에게 음식을 건네어 주는 것을 선호했다.

그런 덕분에 뮐러는 마을에서 제법 인기가 있는 노인이었다. 물론 예전에 비해 미약해지긴 했으나 그의 텃밭 정도는 가물지 않게 할 수 있는 물의 마법에 쏟아지는 존경도 그 인기에 한몫했다.

매일 한 통의 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주인 덕분에 그의 텃밭은 가무는 일 없이 늘 싱싱한 작물이 영글었다.

이따금씩 그것을 노리고 찾아드는 불한당들이 있긴 했지만 얼굴에 커다란 물방울을 뒤집어쓰고 버둥거리다가 엉엉 울며 도망치기 일쑤였다.

그런 이유로 뮐러에게 자신의 작은 담장을 어슬렁거리는 그림자는 그렇게 낯선 것이 아니었다.

마침 나날이 알이 튼실해지는 감자를 노린 나쁜 놈들이 어제도 찾아와 한바탕 혼쭐이 나 도망쳤던 것이다.

아까부터 집 근처를 맴도는 수상한 인기척에 이번에는 어떻게 혼내 줄까 즐거운 고민을 하던 뮐러는, 생각보다 불한당의 인내심이 길다는 것에 놀라고 있었다.

정오가 좀 지난 시간쯤에 포착한 기척이 노을이 깔리고 푸르게 식을 때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밤이 되면 숨어들려는 건가?’

저렇게나 공을 들일 정도면 밭의 작물이 보통 탐이 나는 게 아닌 모양이다.

어쩌면 굶은 지 오래되었을지도 모른다. 불한당들에게는 따끔한 맛을 보여 주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굶주림으로 인한 것이라면 자비를 베푸는 것이 좋으리라.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인색해서 좋을 게 있을까.

그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얼굴을 한번 볼까 싶어진 뮐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담장으로 다가가자 수상한 인물이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로브를 걸치고 있어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기웃거리던 움직임이 자신을 바라보며 딱 멈춘다.

그것이 마치 다가오라는 뜻 같아서 뮐러는 기꺼이 가 주기로 했다.

가까이 다가가면서 뮐러는 수상한 인물이 도둑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로브를 덮어쓰고 있어서 자세한 차림은 알 수 없었지만, 로브의 천이 대단히 고급스러웠던 것이다.

거적때기가 아니라 도톰하고 부드러운 질감의 깨끗한 물건이다. 요즘 이런 것을 걸치고 다니는 여행자나 도적은 거의 없다.

“아까부터 우리 집을 엿보던데, 목적이 뭔가?”

뮐러가 직설적으로 질문했지만 눈앞의 인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를 무시하는 것 같은 태도는 아니었다.

뮐러는 그가 대단히 긴장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한참 동안 묵묵히 서 있던 인물이 마침내 결심한 듯 천천히 후드를 끌어 내린다. 천을 잡은 희고 작은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침내 드러난 얼굴이 기대와 두려움으로 물들어 어정쩡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뮐러는 탄성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오, 맙소사.”

절대 잊을 수 없었던 얼굴. 뮐러가 살면서 만난 사람들 중 가장 특이했던 인물.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 얼굴이 기억 속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상태로 자신을 찾아왔다.

“가람, 세상에. 정말로 가람인 거요?”

뮐러의 목소리가 경이로움으로 떨렸다.

“할아버지가 다 됐네요.”

전혀 나이 먹지 않은 얼굴의 가람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 * *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저녁과 밤 사이에 걸쳐져 있던 시간이 급히 기울자, 짙어지는 어둠을 피해 서둘러 가람을 집 안으로 들인 뒤 의자에 앉히고 찻잔을 쥐여 준 뮐러가 꺼낸 첫 질문이었다.

얼굴에 가득한 주름에도 불구하고 뮐러의 눈동자는 흥분으로 번쩍거리고 있었다.

“음, 저에게 존댓말을 하시네요.”

단정하게 정돈된 뮐러의 집을 둘러보던 가람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뮐러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그는 실망하는 대신 성실하게 대답하는 쪽을 선택했다.

“고민하긴 했는데, 가람이 정말 가람이라면 저와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날 테니까요. 아니, 어쩌면 저보다 많을지도 모르겠군요. 잠깐. 설마 그때도 나이가 저보다 많았던 거 아닙니까?”

의식적으로 젊었던 시절의 말투를 사용하며 뮐러가 눈을 크게 떴다.

젊은 얼굴의 가람은 아무리 보아도 그 시절과 거의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 앞에서 홀로 늙은이가 돼 있는 것은 그다지 내키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건 아니에요.”

가람이 엷게 웃었다.

“정말입니까?”

“지금은 모르지만, 적어도 그때는 뮐러보다 어렸어요. 제 기억으로는요.”

뮐러는 가람의 마지막 말이 묘한 어감을 가지고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질문할 정도로 구체적인 이유를 댈 수 없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런 사소한 것에 집중하기에는 지금 일어난 일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었다.

전혀 변하지 않은 가람을 눈앞에 두니 마치 자신이 서른 즈음이던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묻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아 뮐러는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질문들이 앞다투어 입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아우성을 치는 통에 입술은 질문의 첫마디만을 계속해서 뻐끔거렸다.

결국 먼저 말을 한 것은 가람이었다.

“어떻게 지냈어요?”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 나누어야 하는 가장 당연한 질문. 이 간단한 질문조차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뮐러는 당황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질문을 하는 것보다 가람의 말에 대답하며 그 질문을 되돌려 주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평범하게 지냈습니다. 바로 전쟁이 나서 제 한 몸 챙기느라 결혼을 못 해 이렇게 늙어 가고 있지만요.”

“그래요? 웨이크는요?”

뮐러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기억을 더듬기도 싫다는 듯 그가 혀 위로 말을 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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