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253화 (253/256)

2화

“전쟁 중에 여동생 일가를 지키려다 전사했습니다. 그의 조카를 제가 돌보다가 얼마 전에 다른 곳으로 떠나보냈지요.”

가람은 어째서 뮐러가 웨이크의 조카를 돌보았는지 묻는 멍청한 행동을 하는 대신 짧게 침묵해서 그가 감정을 추스르도록 도와주었다.

웨이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동생 일가는 사망, 유일하게 살아남은 여동생의 자식을 뮐러가 거둔 것이리라.

“아직도 그 날이 어제 같군요. 얼룩덜룩 더러운 꼬맹이가 울며 필사적으로 찾아와서 너덜너덜한 편지를 내미는데, 얼마나 급하게 썼는지 휘갈겨 쓴 필체로 딱 한 마디. 부탁한다. 구구절절 말도 없고, 나머지 사실도 로빈에게 물어 겨우 안 겁니다.”

뮐러의 감정은 쉽게 추슬러지지 않았다. 결국 눈시울을 붉힌 그는 주름진 손으로 주름진 눈가를 쓸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가 그거라니. 정말로, 어쩔 수 없는 녀석입니다.”

침묵이 이어졌다. 노인의 회한 어린 눈물이 멈출 때까지 가람은 그가 만들어 준 차를 머금었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가 시작된 것은 뜨겁던 차가 미지근해진 무렵이었다.

“나이가 들면 감정을 추스르기가 힘들어져서, 별것 아닌 것에도 이렇게 눈물이 난다니까요. 게다가 가람까지 이렇게 앞에 있으니, 정말로 젊었던 때가 생각이 나서……. 또 눈물이, 이것 참. 가람은 어떻게 지냈습니까?”

가람은 대답 대신 찻물을 삼켰다.

차원을 넘어 기억하던 세상으로 넘어간 뒤의 시간은 이미 오래전의 것이지만 떠올리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달가운 것도 아니다.

적응은 어렵지 않았다. 모르드레드의 흔적에도 불구하고 형틀에 쏟아진 반죽처럼 가람은 자연스럽게 제 자리를 잡았다.

본래부터 무도한 성격도 아니었고, 다소 담백하기는 했지만 정신적인 이상을 겪고 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범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약 몇 년간은.

“뮐러의 말이 옳았어요.”

“무슨 말 말입니까?”

“그때, 지하 미궁에 다녀온 다음에 제게 한 말 기억해요? 또 다른 환경에 둘러싸이면 자연스럽게 변할 거라고 했던 그 말.”

“제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늙으니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했어요. 그리고 그 말대로였어요. 집으로 돌아가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 수 있더라고요. 비록, 처음뿐이었지만. 아, 미궁에서의 일이 저를 바꾸어 놓았다는 건 아니에요. 집으로 돌아간 후부터가 문제였죠.”

가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예전처럼 살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패스파인더가 되기 전에 지속했던 삶을 위해 해 왔던 힘겨운 일의 대부분이 별다른 노력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고, 가장 큰 변화는 가람이 그것들을 시시하게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사회의 틀에 맞추어 노력한다고 해도 두 달 동안 찾은 100패스로 얻은 초능력만큼 자신을 뛰어나게 만들어 줄 수는 없었다.

패스는 마치 마약처럼 가람의 인생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가람은 강박적으로 평범함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부모님과 식사하고, 가끔 일부러 다투고, 평범하게 직장을 다니며 그것들에 만족하려고 가람은 정말로 노력했다.

그러나 가람은 노력할수록 혼란스러워졌다. 점점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가짜 노력, 가짜 목표, 가짜 행복, 가짜 공감, 가짜 인생.

마음의 속삭임을 애써 무시하며 최대한 스스로가 생각하는 평범함을 연기하며 살던 가람에게 어느 날 한계가 찾아왔다.

살다 보면 열받는 일들이 조금씩 생기기 마련이다. 가람은 그런 일들에 화를 낼 필요가 없음을 알았고, 스스로도 초연하게 대처하고 있었지만 그럴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모든 분노는 진지함을 재료로 한다. 가람에게 있어서 평범한 자신의 삶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면 화를 낼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람은 자신의 평범함을 진지하게 생각했다.

억눌러 왔던 분노가 폭발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가람은 충동적으로 치근덕거리던 취객 하나를 사막에 던져 놓았다.

몰래 문을 열고 들어오던 도둑을 바다 한가운데에 던져 버리기도 했다. 평범한 삶을 위협하는 불한당들을 그렇게 하나둘씩 제거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괜찮았다. 가람이 가족들의 수명을 백 세가 넘도록 이어지게 만들었을 때도 괜찮았다.

그러나 마침내 가족들의 수명이 한계에 다다라 그들을 떠나보냈을 때는 괜찮지 않았다. 정말로 괜찮지 않았다.

가족들은 떠났지만 가람은 떠날 수 없다. 그녀에게는 그 뒤의 시간이 영원하게 남아 있었다.

가람은 마침내 그것을 실감했다.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 뒷부분이 또 있었던 것이다. 가람에게는 영원토록 남아 있을 뒷부분이었다.

영원. 그것은 막연히 생각만 하고 있을 때보다 훨씬 지독한 것이었다.

그 시점에서 남은 것은 패스파인더와 평범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구입했던 패스와 텅 비어 버린 목적뿐이었다.

목적도 욕망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 것만큼 쉬운 일이 없으니. 패스는 가람에게서 욕망을 상실하도록 만든 것이다.

무엇 하나 욕망하지 않는 삶이란 그 얼마나 무료한가.

하물며 그것이 무한하다면 끔찍하다는 수사가 그보다 잘 어울리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제야 가람은 편리에 의해 능력을 구입하는 것이 얼마나 경솔한 행동이었는지 깨닫고 후회했다.

“저는 고독했어요.”

평범한 삶을 연기하는 내내 가람은 고독했다.

누구와도 스스로의 진짜 삶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도 없고, 공감받을 수도 없으며, 그들의 시시한 화제에 공감할 수도 없었다.

허공에 붕 뜬 것 같은 부유감 속에서 가람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집으로 돌아갔는데도 말입니까?”

“네. 집으로 돌아갔는데도.”

가족들에게 패스파인더에 대해서 말할 수는 없었다.

그것을 말하는 순간 가람이 정교하게 유지하고 있던 평범한 삶은 박살 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독하지 않을 때까지 그 삶을 반복했죠. 수십 번이나. 집착일지도 몰라요. 아니, 집착이겠죠. 아마도.”

다시 차원을 찾고, 가족들을 만나고, 평범한 삶을 살고, 실패하고.

그리고 또다시 차원을 찾고, 가족들을 만나 노력해도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모든 삶은 거의 비슷한 형태로 끝났다. 그리고 반복적인 삶의 끝에서 가람은 자신이 미쳐 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었다.

아무리 반복해도 고독감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가람은 결론을 내렸다.

아무리 노력해도 헛도는 바퀴처럼 공허함이 떠나지 않는 이유는 그곳이 자신의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애초에 평범한 삶을 한 번 살았을 때 멈췄어야 했던 것이다. 패스파인더가 아닌 가람의 삶은 처음 막을 내렸던 그런 형태로 끝났어야 했다.

반복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망가진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가람은 오랜 집착을 내려놓고 패스파인더로서의 자신을 직시했다.

처음이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은 거죠. 미련하다고 웃어도 좋아요. 사실이니까.”

자조적으로 말한 가람은 다 식은 차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뮐러는 웃지 않았다.

혼자서 마른 웃음을 터뜨리던 가람은 조금 머쓱하게 웃음을 수습했다. 그리고 뮐러의 찻잔이 아주 오래전에 비었음을 깨달았다.

“아, 이번에는 제가 차를 대접할게요. 아마 마음에 들 거예요.”

가람의 말이 끝나자 허공에서 고급스러운 찻주전자가 나타나더니 스스로 기울어져 잔을 채웠다.

금방 끓은 듯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거운 차였다. 조심스럽게 맛을 본 뮐러는 지금까지 맛본 적 없는 놀라운 향에 두 손으로 찻잔을 소중하게 감싸 쥐었다.

“아주 좋군요.”

“좋아해 주시니 기쁘네요.”

“이렇게 좋은 차는 처음입니다. 그래서 깨달음 뒤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이처럼 좋아하며 차를 맛보는 뮐러를 바라보며 미소 짓던 가람이 그 말에 가볍게 대답했다.

“아. 처음 든 생각이 뭐였냐면, 내 왼손에 나침반이 있어서 다행이다. 최소한 어디로 가야 할지 방황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였죠. 어디에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면 정말로 당황스러울 것 같았거든요.”

“있을 곳이 없지는 않았을 텐데요.”

“몸이야 아무 곳에나 내버려 둘 수 있죠. 하지만.”

잠깐 말을 끊은 가람이 제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눈을 찡긋했다.

“이게 있을 곳이 없더라고요.”

“아.”

“아주 오래 방황했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뮐러가 생각나더군요. 갈 곳이 없으면 오라던 말. 생각해 보면, 저에게 그런 말을 해 준 사람은 뮐러밖에 없었어요.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말이에요. 가족조차도 하지 않았죠.”

“가족들은 가람이 당연히 본인들에게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을 테니까요.”

가람은 대답 대신 찻물을 삼켰다. 한 모금의 침묵이 지난 후 조금 긴장한 어조로 가람이 말문을 열었다.

“그래서, 갈 곳이 없으면 오라던 그 말. 아직 유효한가요?”

뮐러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가람을 바라보았다.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가람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찻잔을 잡고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나 비스듬하게 비껴 나는 시선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

“무슨 그런 말을 합니까? 당연하지요. 마침 로빈이 나가서 빈방도 있으니 얼마든지 있어요.”

뮐러의 말에 가람의 얼굴이 한결 풀어졌다. 그리고 그를 만난 후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고마워요.”

“아, 집세는 선불입니다.”

당당하게 손을 내미는 뮐러에게 잠시 당황하던 가람이 허공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뒤적거리자 뮐러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에요. 세상에, 정말로 돈을 내려고 했단 말입니까?”

“돈은 아니고…….”

말끝을 흐리며 가람을 꺼내 든 것은 어른 주먹만 한 푸른 보석이었다. 뮐러는 입을 딱 벌리고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들을 말이 많을 것 같군요. 황궁이라도 털고 다닌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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