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그건 아니고, 용을 살려 주는 대가로 대량의 보석을 받았거든요.”
상상을 초월한 대답에 뮐러는 다시 말이 없어졌다. 아마도 가람과 자신 사이에 나눌 이야기가 아주아주 많을 듯했다.
그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았다. 자신은 할 일 없는 늙은이인 것이다. 시간이라면 죽을 때까지 남아 있다.
하지만 가람의 여행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마지막 남은 차를 한 입에 삼키고 뮐러가 나직하게 질문했다.
“그래서, 밥은 먹었습니까?”
* * *
“벌써 일어났습니까?”
새벽녘, 뒤뜰을 돌아본 가람이 집 안으로 들어서자 아침 준비가 한창이던 뮐러가 놀란 얼굴로 돌아보았다.
반죽을 주물럭거리는 것을 보아 새 빵을 굽던 참인 것 같았다.
“네, 뭐 도와줄 것 없나요?”
“아뇨, 거의 다 끝났습니다. 굽기만 하면 돼요. 그런데 손에 그건 뭡니까?”
뮐러의 지적에 가람은 손바닥을 펴 잊고 있던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검지만 하게 뭉쳐진 검은 덩어리였는데, 가람도 사실 이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는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새벽 갑작스럽게 얻게 된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저도 잘 모르겠는데, 뒤뜰에서 만난 불도마뱀이 주더라고요.”
“아.”
뮐러가 짚이는 구석이 있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는 도마뱀이에요?”
“왜 모르겠습니까? 매일 아침마다 뒤뜰에서 한껏 신비한 척하면서 어수룩한 사람을 불러다가 제 똥을 쥐여 주는 도마뱀인데요.”
떨떠름한 뮐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람은 반사적으로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뮐러는 측은한 얼굴로 가람을 바라보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손 씻고 와요.”
그 말에 따라 뒤뜰의 우물에서 손을 씻고 들어오자 어느새 아침 준비가 끝나 있었다.
커다란 새 한 마리가 통째로 구워져 중앙에 놓여 있고, 그 주변으로 갖가지 음식들이 다양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아마도 꺼내 올 수 있는 음식은 다 꺼내 온 것 같았다.
“우와, 어제저녁이랑 너무 다른데요.”
뮐러가 권하는 의자에 앉으며 가람이 감탄했다. 구운 감자에 치즈 한 조각을 곁들였던 어제 저녁 식사에 비하면 정말로 진수성찬이다.
그 감탄이 싫지 않았는지 뮐러가 어깨를 으쓱이며 새의 다리를 뜯어냈다.
“손님이 왔으니 솜씨 발휘 좀 했지요. 자, 이거 들어요. 어제는 이야기하다 보니 시간이 늦어져서. 늦은 시간에 많이 먹으면 안 좋아요.”
“뮐러도 참, 할아버지 같은 말을.”
“할아버지니까요. 가람도 따지고 보면 할머니잖아요?”
“이렇게 동안인 할머니 봤어요?”
“네. 어제.”
가람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런 대화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짓던 뮐러가 새의 살을 발라 가람의 접시에 놓아 주기 시작했다.
마치 손녀를 챙기는 것 같은 모양새라 가람이 당황하며 권했다.
“저만 주지 말고 뮐러도 먹어요.”
“나이가 드니 이런 고기를 먹기 힘들어지더군요. 가람을 위해서 준비한 거니까 마음껏 즐겨요.”
솜씨 좋게 새고기를 발라 가람 앞에 쌓아 준 뮐러는 곧 감자수프를 끌어다 떠먹기 시작했다.
식탁 위에서 가장 부드러운 음식이다. 가람은 그런 뮐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세월이 닿은 얼굴은 깊은 주름으로 쭈글쭈글하지만 그래도 옛 모습을 찾기 어렵지는 않았다.
굽어지고 녹슨 손가락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앙상하다. 옷 아래로 가려진 체구도 바람이 빠진 것처럼 왜소했다.
“음?”
뒤늦게 가람의 시선을 눈치챈 뮐러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가람의 가라앉은 눈을 마주하고 의아한 얼굴로 눈썹을 까딱였다.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가람이 진지한 어조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뮐러는 가람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천천히 입 안의 뭉그러진 감자수프를 우물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꿀꺽 삼킨 뒤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전혀요.”
“어째서요? 젊음이 그립지 않아요? 젊었을 때처럼 여행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이런 늙은 몸보다 젊은 쪽이 좋잖아요.”
조금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가람이 집요하게 묻자 뮐러는 조금 난감한 얼굴로 어색하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리고 가람의 눈을 직시했다. 가람의 질문이 무엇을 향한 것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미안합니다.”
가람이 입술을 깨물었다. 천천히 일그러지는 그 얼굴에 뮐러가 다시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나는 갈 수 없어요.”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입술을 잘근거리던 가람이 초조한 기색으로 다시 묻는다.
“왜? 아, 여행이 너무 힘들었나요? 맞아요. 그때는 그랬죠. 하지만 이제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약속할게요. 재미있을 거예요.”
뮐러는 대답 없이 고개를 숙였다.
“좋아요. 나와 가지 않더라도 상관없어요. 젊은 몸이라도 가지고 싶지 않은가요? 죽음을 피하게 해 줄 수 있어요.”
거듭된 가람의 권유에 뮐러는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잠깐 동안 뮐러는 더 나이가 든 것 같았다. 어둡고 주름진 얼굴에 씁쓸함이 그림자처럼 내려앉는다.
“가람, 나는 죽음을 피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지쳤어요. 몸이 아니라, 여기가.”
가슴에 손을 얹은 뮐러가 부드럽게 말하자 가람의 꾹 다문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격정을 내리누르는 얼굴을 앞에 두고 뮐러가 다시 말을 잇는다.
“내 삶을 두 번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두 번 살라는 게 아니에요, 그냥 젊어져서…….”
“무슨 말인지 알아요. 하지만 이미 살아온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나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보다 듣는 것이 좋군요.
이제 옛날이야기를 해 줄 손자도 없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가람과는 달라요. 가람은 어디든 갈 수 있지만, 저는 좋든 싫든 여기에 남아야 하지요.
이것보다 더 오래 살아서 아는 사람이 죽는 것을 더 보고 싶지는 않아요. 이미 충분히 많이 봤으니까요.
그래서 가람에게는 정말 미안합니다. 거절하는 것도,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저도 뮐러의 죽음을 보는 게 싫어요. 그냥, 그냥 딱 한 번만 그러겠다고 해 주면 안 되나요? 정말로 오랫동안 헤맸어요. 그런 저에게 주는 상이라고 생각하고 한 번만…….”
“헤매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가람은 갑자기 입을 딱 다물었다. 그리고 식탁 위의 음식들로 시선을 돌렸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음식은 미지근한 온도로 식어 있었다. 손을 들어 그것들을 뜨겁게 데우면서 가람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아마 뮐러가 알던 가람이 아닐 수 있어요.”
“예?”
“이곳도 아마 제가 알던 곳과는 많이 다를 수 있겠죠.”
“그게 무슨 말입니까?”
가람이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을 그렇게 보낸 뒤에 저는 제 집과 가장 비슷한 차원으로 이동했어요. 전에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패스파인더는 패스라는 것으로 소원을 빌 수 있는 능력 외에도 스스로가 생각한 차원으로 이동할 수 있는 능력도 있어요.”
“소원을 빌 수 있다는 이야기는 헤어지기 전에 밤새 이야기할 때 들었던 것 같은데, 다른 것은 처음 듣는 이야기군요.”
“아마 그럴 거예요. 저도 두 사람과 헤어진 다음에 알게 된 거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이동한 차원은 패스파인더가 차원 문을 열 때 떠올린 것 외의 요소들에 한해서 그 전의 차원과 다를 수 있어요.
제가 알고 있던 모든 사실은 같을 수 있지만, 반대로 제가 몰랐던 것들은 그 차원과 다를 수 있는 거죠. 이곳이 제가 알던 곳과 많이 다를 수 있다는 이야기는 그런 이야기예요.”
“예를 들어서 말하자면, 가람이 몰랐던 제 집 마당에는 개미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는 이야긴가요?”
“정확해요.”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뮐러가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나이 들었다곤 해도 학자 특유의 분위기가 어디로 간 것은 아니라서 그 행동이 제법 잘 어울린다.
“사실 그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어차피 제가 몰랐던 일이니 어떻게 된다고 해도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죠. 진짜 중요한 건 이거예요. 패스파인더가 갈 수 있는 차원은 한 번에 하나뿐이라는 것.”
“한 번에 하나? 당연한 이야기 같은데요. 동시에 두 개의 차원에 갈 수는 없을 테니.”
“아, 설명을 조금 잘못 했네요. 그러니까 베이스캠프를 제외한 다른 차원과의 연결 고리를 하나만 가질 수 있는 거예요.
우리가 헤어진 뒤 제가 살던 곳과 비슷한 차원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저는 그 전에 뮐러와 웨이크가 있던 차원과의 연결 고리를 잃어버린 거죠. 그쪽으로는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었어요.”
“그렇군요. 하지만 가람은 자신이 떠올린 차원으로 이동할 수 있잖아요? 헤맬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또 한 가지가 더 있어요. ‘패스파인더는 패스파인더에 관한 소원을 빌 수 없다.’라는 조건이 있죠.
다른 패스파인더에 관한 소원은 어떤 것도 빌 수 없고, 자신에 대한 소원도 그것이 정신을 다루는 것이라면 빌 수 없어요.
몸이나 능력 같은 것은 그냥 도구와 같은 것이라 상관없지만, 패스파인더의 정신과 마음은 패스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거든요.”
“흠.”
“그게 차원을 이동할 때도 적용이 되더군요. 그러니까, ‘가람이라는 패스파인더를 알고 있는’ 뮐러와 웨이크가 있는 차원은 불가능한 거예요.
그냥 뮐러와 웨이크가 있는 차원은 가능하지만요. 그래서 저는 수없이 많은 차원을 이동하면서 저를 알고 있는지 직접 확인하고 다녔어요.”
담담하게 말하고 있긴 했지만 그 기억을 떠올리는 가람의 눈가는 고통에 젖어 있었다. 뮐러가 한껏 처진 눈으로 작게 혀를 찬다.
“이런. 그래서 처음에도 먼저 인사하지 않고 문밖에서 서성거리면서 저를 훔쳐봤던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