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255화 (255/256)

4화

“……그런 셈이죠.”

뮐러는 어째서 먼저 인사하거나 말을 걸지 않았냐고 묻지 않았다.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 자신을 낯선 사람 보듯 보는 경험은 그렇게 달가운 것이 아니다.

그것이 망각에 의한 것이든, 아니면 정말로 모르든 간에.

뮐러에게도 그런 친구가 여럿 있었다. 시간이 총명함을 앗아가 백치가 되어 버린 늙은 친구들이. 그것은 정말로 슬픈 것이다.

뮐러는 가람이 헤매면서 받았을 수많은 상처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부탁드릴게요. 나는 정말로 오래 헤매었어요. 그러니까 이번에는 나와 함께 가 주세요.”

약간의 간격을 두고 가람이 다시 부탁했다. 뮐러는 쉽게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수락할 수도 없었다.

수락했을 때, 끝이 좋지 않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뮐러가 살면서 얻어 온 지혜와 경험이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뮐러가 다시 한 번 거절하자 가람은 오랫동안 침묵했다. 이윽고 다시 말문을 열었을 때 그 목소리는 잔뜩 녹이 슨 것처럼 잠겨 있었다.

“매번 같은 대답이네요.”

그 말에 뮐러는 가람이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한 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아연해졌다. 얼마나 많은 차원을 지나,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으며, 얼마나 많은 거절을 당해 왔던 것일까.

가람의 눈동자는 고통에 젖어 있었다. 뮐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로 입을 뻐끔거리다가 안타깝게 말했다.

“어째서 제가 젊을 때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젊은 저를 찾아왔다면 함께 갔을 텐데.”

그 말에 돌아온 것은 원망 어린 시선이었다. 시선의 의미를 알 수 없었던 뮐러는 멈칫했다.

“이미 갔어요.”

“제가 거절했습니까?”

뮐러가 침을 삼키며 질문했다. 가람이 슬픈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사실 말을 꺼내지도 못했어요. 젊은 뮐러는 자기 인생에 대한 계획이 가득 차 있어서 저 같은 이방인이 끼어들 만한 자리가 없었거든요.”

확연하게 느껴지는 존재의 가벼움. 미묘하게 불청객이 된 것 같은 그 어색한 공기는 떠올리기도 싫은 것이다. 가람은 눈을 꽉 감아 그 기억을 흩어 버렸다.

“제가 찾아다닌 건 젊은 사람도 아니고, 늙은 사람도 아니에요.”

“그러면 무엇을 찾아다닌 겁니까?”

가람은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약간의 망설임 끝에 자신 없는 어조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고독한 뮐러와 웨이크를 찾아다녔어요.”

두 사람이 동시에 살아 있을 때는 서로에 의지하여 고독하지 않았고, 수많은 차원에서 대부분의 경우에 웨이크가 뮐러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가람은 결국 늙은 뮐러와 마주치는 경우가 많았다.

뮐러가 고독하고 외로워서 자신을 성가시게 여기지 않을 때에 방문하면 비교적 따듯한 환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소용이 없었네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가람은 사라졌다. 공기 중에 녹아 버리기라도 한 듯이 흔적도 없었다.

뮐러가 의자를 끌며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스르륵 다시 주저앉은 뮐러가 거친 손바닥으로 주름을 쓸어내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가람은 다시 오지 않았고, 뮐러는 쓸쓸히 일어나 모처럼 준비한 음식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 * *

며칠 뒤, 아침부터 한껏 찌푸리고 있던 하늘이 결국 폭우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아침에 널어 두었던 빨래가 걱정된 뮐러가 황급히 뛰어나왔다가 그대로 멈칫했다.

시야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폭우 속에 흐릿하게 서 있는 인영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억수 같은 비를 다 맞으며 푹 젖은 상태로 서 있는 사람은 분명 가람이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그 손을 잡고 이끌었다. 빗속에서 차갑게 식은 손이 잠시 망설이다가 곧 못 이기는 척 끌려온다.

해가 들지 않아 어두컴컴한 집 안으로 가람을 밀어 넣은 뮐러는 마른 천을 가지고 와서 분주하게 가람을 닦아 주었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이 가벼운 마법으로 금세 뽀송한 모습이 될 수 있었지만 가람은 일부러 그를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세상에, 도대체 왜 그렇게 불쌍하게 구는 겁니까?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

물기를 조금 닦아 내어 적어도 젖은 생쥐 꼴은 면한 가람을 벽난로 앞에 앉게 한 뮐러가 꼬장꼬장하게 잔소리를 퍼붓는다.

덕분에 빨래도 다 걷지 못했지 않느냐고 타박하는 소리를 듣던 가람이 곧 손을 휘저어 마당에서 젖은 빨래를 소환해 뽀송뽀송한 모습으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게다가 그렇게 갑자기 혼자 토라져서 사라지면 어쩌라는 말입니까? 정말이지, 뭐 어쨌든 빨래는 고마워요. 덕분에 걷으러 가는 수고를 덜었군요.”

빨래를 받아 들며 뮐러가 감사하자 가람이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가람의 사과에 뮐러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칼칼하게 말하고 있긴 하지만 며칠 동안 속이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비에 푹 젖은 모습이 보통 불쌍한 것이 아니라 그는 치밀어 오르는 잔소리를 애써 집어삼켰다.

“아쉬운 것도 없고, 세상에 못 가질 것도 없는 사람이 왜 그렇게 불쌍한 척하고 있는 겁니까?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그랬습니까?”

“그렇지는 않아요.”

가람이 말하는 순간 그녀의 옷이 보송보송하게 말랐다. 언제 젖었냐는 듯이 깨끗한 모습이었다.

뮐러도 왕년에는 할 수 있었던 마법이지만 그래도 저렇게까지 깔끔하게 하는 것은 무리였다.

감탄을 속으로 감추며 뮐러는 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마른 팔로 가람을 감싸 안고 등을 토닥였다.

“어쨌든 잘 왔어요.”

조금 어색하게 그 포옹을 받은 가람이 묘한 얼굴로 뮐러를 응시했다.

“뮐러는 정말 신기해요. 어떻게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어요?”

“내 나이쯤 되면 그 사람이 아무리 이상하고 악한 사람이라고 해도 아는 사람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기뻐지곤 하니까요. 나머지는 사소한 문제예요.”

어깨를 으쓱한 뮐러가 능청스러운 표정을 짓고 젖은 천을 벽난로 앞에 널어 말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벽난로 위에 놓여 있던 뜨거운 주전자에서 차 두 잔을 따라 가람의 손에 쥐여 준 뒤 옆에 앉았다.

“어쨌거나 갑자기 사라져서 정말 놀랐습니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세요. 가더라도 좀 평범하게 가요. 문도 있는데. 어떻게 되기라도 했나 싶어서 심정이 말이 아니었어요.”

“그런 것치고는 아까 아무렇지도 않게 빨래를 걷으러 나오던걸요.”

“옷은 입어야 하니까요.”

“쳇.”

가람이 입술을 삐죽거리자 뮐러는 슬쩍 웃었다. 분위기가 한결 풀어지자 그는 본격적으로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궁금한 것이 많았다.

“그러고 보니 가람은 수많은 저를 만났다고 했었지요? 어떻습니까? 그들도 저와 같던가요? 결혼은 했습니까? 저는 이 나이까지 홀아비인데.”

“음, 신기하긴 한데 모두 결혼은 안 했어요.”

“저런.”

뮐러가 혀를 차자 가람이 작게 웃었다.

“위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웨이크도 결혼을 못 했더라구요.”

“아, 그 녀석은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답답한 성격이니 어떤 여자가 데려갔겠습니까? 물론 여기 웨이크도 못 했지요. 저야 제가 싫어서 안 한 것이지만.”

한껏 젠체하는 뮐러를 가람이 어색하게 긍정했다.

“어, 음. 그렇다고 해 두죠. 아, 어떤 차원은 두 사람이 같이 살고 있기도 했어요. 웨이크의 여동생이 그를 쫓아내는 바람에 뮐러의 집으로 찾아와서 같이 살고 있었더라고요. 안타깝게도 두 사람은 저를 모르는 눈치였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들이었어요.”

“으음, 그렇군요.”

“그리고 바로 직전에 보았던 뮐러는 시종일관 저를 어린아이 보듯이 했어요. 심지어 손에 간식을 들려 주기까지 했다니까요.”

“그래서 제가 존대를 쓰는 것이 신기하다고 했군요.”

“네, 같은 듯하면서도 성격들이 조금씩 다르더군요. 아마 그 후로 어떤 시간을 보내었느냐의 차이겠죠.”

그쯤에서 두 사람은 적당히 식은 차를 마셨다. 뮐러는 가람이 보내었을 시간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조금 고민하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죽고 싶습니까?”

갑작스러운 말에 가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협박, 위협의 의도도 없는 순수한 그 문장은 대단히 기묘한 것이었다.

잠시 생각해 보던 가람이 힘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랬던 적이 없었다면 거짓이겠죠. 그것만큼 절대적인 안식이 없으니까요.

가끔은 즐거움이나 행복함도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 때가 있거든요. 몸이 아니라 정신적인 피로예요.

가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을 때면,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것도 나중에는 지치더군요. 숨 쉬고, 무언가를 보고, 듣고 있다는 것 자체가 지긋지긋했어요.”

뮐러는 이제 70년을 살았다. 그런데도 너무 많이 슬펐고, 너무 많이 행복했다. 그런 그도 가끔 삶이 너무 길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시간이 각별한 것은 언젠가 죽음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람에게는 그 찾아올 죽음이 없다.

“어두운 이야기는 이쯤 하죠. 이 뮐러는 거절했으니 다른 뮐러나 찾아보기로 하고, 즐거운 이야기나 하자구요.”

가람이 갑자기 힘찬 어조로 말하자 뮐러가 웃으며 동조했다. 그녀가 자신을 배려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 이 늙은이에게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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