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256화 (외전 완결) (256/256)

5화

“음, 딱히 재미있는 이야기는 없는데. 뮐러를 찾아다니다가 그것도 너무 질리면 충동적으로 아무 차원에나 가서 패스를 찾아다니거나 했거든요. 패스를 찾고, 이동하고. 다시 찾고, 이동하고.”

“그 용의 목숨을 구해 주고 받았다는 보석 이야기나 해 줘요. 그 동네는 용이 보석도 가지고 다닙니까?”

“어, 그렇더라구요. 말도 하고 마법도 대단하고 크기도 이곳의 용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어요.

따지고 보면 제가 그 용의 집에 불법 침입해서 패스를 찾느라 뒤지고 다녔던 거였는데, 비천한 쥐새끼가 숨어들었네 어쩌네 하는 걸 듣고 있으니 갑자기 화가 나서 때려눕혔거든요.

그러고 나니 저에게 경의를 표한다면서 제 보물 창고를 내어주더군요.”

“가람도 참 무도하군요.”

“그 용의 입장에서는 깡패가 따로 없었겠죠.”

“그걸 챙겼습니까?”

“그럼요.”

가람이 천연덕스럽게 응수하며 허공에서 이것저것 음식을 꺼내어 놓기 시작했다.

뮐러는 아무렇지도 않게 허공에 떠 있는 부드러운 케이크와 온갖 처음 보는 요리들을 즐거이 맛보았다.

“자, 이제 다음 이야기를 해 주시지요.”

뮐러가 즐거워하며 재촉했다. 가람은 선선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또 뭐가 있더라. 아, 어느 차원에서는 저를 신으로 모시는 종교도 하나 있었어요.”

그 말에 뮐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젊었던 시절 뮐러는 가람이 하는 허무맹랑한 소리에 자주 저런 표정을 짓곤 했다.

가람은 세월에 낡아 버린 소중한 물건을 꺼내어 어루만지는 듯이 그리운 감상에 빠졌다.

“에이, 설마요. 농담이겠죠. 아니. 진짜입니까?”

의심을 담은 시선에 가람은 어깨만 으쓱했다.

“아니, 어쩌다가? 어떻게요? 좀 더 이야기해 보세요.”

흥미진진해서 못 견디겠다는 그 얼굴에 가람은 자신이 갔던 온갖 신기한 세상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개중 심각한 것도 있고, 어처구니없는 것들도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가람이 두 번 다시 뮐러에게 여행을 권하는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 * *

가람이 뮐러의 집에 머무는 동안 어느새 계절이 바뀌었다. 비와 천둥, 그리고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이 물러가고 낙엽이 떨어지는 시기가 온 것이다.

뮐러의 집에 머무는 내내 가람은 손수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다. 간혹 마법을 쓰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가람은 몸을 직접 움직이는 쪽을 선호했다.

뮐러가 그것에 대해 질문하면 너무 편하면 안 된다는 둥의 알 듯 모들 듯 한 말을 할 뿐이다.

소담하고 평화로운 나날이 흘러갔다.

가람은 벽난로 앞에서 조는 뮐러에게 왕이 찾던 영원의 성배를 깨뜨린 이야기와 폭풍을 잠재워 도시를 구한 이야기, 자신을 붙잡기 위해 왕이 왕자들을 앞세워 유혹해 온 이야기들을 해 주었다.

그리고 어느 날, 바람이 시원하고 햇살이 청명하던 날 아침 가람은 곧 다가올 운명을 예감하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새벽을 맞이한 것은 두 명이지만 잠드는 것은 하나가 될 것이다.

“가람.”

가슴을 움켜쥐고 무릎을 꿇은 뮐러가 고통스럽게 가람을 불렀다. 마른 빵을 뜯어 수프에 적시던 중이었다.

뮐러가 입에 넣으려던 그것은 바닥을 더럽히며 아무렇게나 구르고 있다. 가람은 그것을 줍는 대신 뮐러의 곁으로 다가갔다.

말할 힘도 없어 속삭이는 것이 고작인 그를 위해 귀를 가까이 하고 마른 몸을 품에 안자 곧 깨질 듯한 기침이 터져 나왔다.

뮐러의 눈동자가 점점 힘을 잃어 간다. 그는 필사적으로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듯했지만 그의 몸은 나무토막처럼 생기를 잃어 가고 있었다.

그의 육신이 허락된 시간을 모두 사용한 것이다. 가람은 그의 몸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살고 싶나요?”

돌아올 대답을 익히 예상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람은 나직하게 물었다.

그 결심이 아무리 확고하다고 해도 막상 죽음 앞에 서면 평소보다 더 삶을 갈구하게 되기 마련이다. 뮐러의 숨은 점점 가늘고 거칠어져 갔다.

가람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푸르게 빛나는 손을 들어 가까이 하자 뮐러가 늘어지는 머리를 추슬러 가로저었다.

“그러지 마, 말아요.”

가람은 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고요한 얼굴로 헐떡이는 뮐러를 내려다보았다.

슬픔도 절망도 없는 밤의 호수처럼 가라앉은 눈동자는 몹시도 차갑고 건조해 보였다.

만일 누군가 이 광경을 목격한다면 변명의 여지도 없이 가람을 뮐러를 죽인 범인으로 지목했을 것이다.

“가람,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내 시간이 허락할지 모르겠군요.”

“원한다면 늘려 드릴게요.”

“아니, 그러지 말아요. 그냥 나를 내버려 둬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람에게는 그게 필요하니까.”

가람이 멈칫하자 뮐러가 엷게 웃었다.

“원하는 것을 제지당해 본 적이 언제인가요. 무언가를 원한다는 느낌도 이제 없다고, 그랬었지요. 내가 가람에게 그 느낌을 선물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했어요. 만났을 때부터 내내 선물하고 있었어요. 뮐러는 늘 저에게 그걸 선물해요. 그래서 여기 찾아오는 걸 멈추지 못하는지도 모르죠.”

잠깐의 침묵 후 훨씬 약해진, 그러나 편안해진 숨을 내쉬며 뮐러가 작게 말했다.

“다행이군요. 그래도 이 늙은이가 줄 수 있는 건 하나 있었…….”

순간 가랑가랑 이어지던 뮐러의 숨이 멎었다. 가람은 고요한 얼굴로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수많은 죽음을 겪어 온 경험이 눈앞의 생명이 아직 이곳에 남아 있음을 알려 주었다.

체감상으로는 아주 긴 시간이었으나 실제로는 몇 초간에 지나지 않는 동안 눈도 깜빡이지 않고, 숨도 쉬지 않았던 그가 갑자기 바람이라도 빠진 듯이 길게 숨을 내쉰다.

“가람.”

“네.”

“울지 않는군요. 매정하긴. 그렇게 울지 않게 될 때까지 내가 죽는 것을 몇 번이나 봤습니까?”

뮐러의 어떤 가르침도 필요 없이 가람은 마치 처음부터 이 집에 살았던 사람처럼 그를 도와 집안일을 해 주었다.

그녀가 맛보여 준 음식이나 차 중 입맛에 맞지 않았던 것은 하나도 없다. 해 준 이야기들도 전부 아주 재미있는 것들이었다.

아마도 몇 번이나 또 다른 자신들을 방문하며 그 취향에 익숙해지고,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가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뮐러도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닌 모양인지 다시 말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나 의미 없는 반복을 계속하며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가람이 그리워하는 것은 아마도 제가 아닐 겁니다. 본인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아마도 가람이 그리워하는 건 본인일 거예요. 저와 여행하던 그 시절의 가람.”

정적 속에서 뮐러의 숨이 헐떡이는 소리가 배경처럼 울린다. 날카로운 절벽을 통과하는 바람처럼 뮐러의 목구멍이 쇳소리를 냈다.

그는 점점 멀어져 가는 신체의 감각 속에서 어쩌면 가람이 벌써 자신을 뉘어 놓고 떠나 버렸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어쩌면 벌써 죽어 버린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말했다. 말해야 했다. 설령 가람이 이미 떠났더라도 죽음을 앞둔 자신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으므로.

“사람은 누구나 과거의 자신을 그리워해요. 과거는 미화되기 마련이니까요. 그러니 술만 먹으면 왕년에 대해서 떠들어 대는 것 아니겠어요?

가람만 그런 것이 아니에요. 하지만 과거가 그립다고 거기에 멈춰 있는 건 한심한 짓이에요.

그러니까, 이제 한심한 짓 그만하고 날 좀 그만 찾아와요. 이 노인에게 한적한 노년을 선물해 줘요.”

농담처럼 마지막 말을 한 뮐러가 설핏 웃었다.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

동시에 들뜨는 것 같은 환락과 행복함이 밀려온다. 안식을 향해 가고 있음을 직감하면서 뮐러는 그 달콤한 해방감을 맛보았다.

“그 약속은 못 하겠어요. 뮐러.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지킨 적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약속을 못 지키는 대가로 보내 드릴게요. 저는 절대로 갈 수 없는 곳으로 절 버리고 떠나는 걸 허락해 드릴게요.

살리려면 얼마든지 살릴 수 있지만, 그러지 않을게요. 뮐러가 지금 너무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요.”

가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뮐러는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가람은 한참 동안 그를 안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따듯함이 사라지고 천천히 굳어 무겁고 차가운 고깃덩이 같은 감촉이 될 때까지 그를 안고 있었다.

그리고 해 질 녘 뮐러의 작은 집에는 작은 무덤이 생겼다.

꽤 긴 시간이 지난 뒤 집을 떠나 있던 로빈이 돌아와 뮐러의 무덤을 만들어 준 사람을 찾았지만, 오랫동안 비어 거미줄이 가득한 그 집에서 그가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외전 나그네의 이야기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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