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C급, 패전 처리조, 좋게 쳐봐야 추격조
따악―
“간다, 간다, 간다아아아!! 넘어간다! 호오오옴런! 박해진, 시즌 47호! 오늘만 두 방! 그것도 연타석!”
“강력해요. 오늘 네 타석 모두 잘 맞은 타구였죠. 첫 타석이야 야수 정면으로 갔다고 하지만…….”
또 맞았다.
이젠 보기만 해도 그냥 시워언하다. 내가 던진 공이 쭉쭉 뻗어 나가 담장을 시원스레 넘어가는 걸 보고 있자면 뭐, 이젠 통쾌함마저 든다.
“고생했다.”
“…죄송합니다.”
툭툭.
이례적으로 투수 코치님이 아닌 감독님이 직접 올라와 공을 가져간다. 힘내라는 뜻으로 등까지 툭툭 쳐주시고. 과분하게끔.
덕아웃으로 들어가니 선후배, 동기들 모두 고생했다며 박수를 쳐준다. 머쓱하게 웃고 덕아웃 뒤로 들어간다.
* * *
28세의 시즌.
올 시즌은 내게 있어서 시즌이 끝나고 난 뒤 FA 계약이 가능한 해다.
FA, 프리 에이전트.
일단 여기까지만 온다면 성공한 야구 선수로 분류할 수 있지 않을까. 입단하고, 1군 땅 한 번 못 밟아보고 스러져간 선수가 몇 명이던가.
입단하고 9년.
버텨냈다. 어떻게든. 이 악물고. 그게 운빨이든, 팀빨이든, 악착같이. 왔다. 여기까지. 아니, 오기는 왔다. 오긴 왔는데…….
“염병.”
오면 뭐 하나.
문제는 FA 계약, 그다음이었다.
우리 구단에서 잡아준다면야 좋지만… 글쎄, 감히 니가? 같은 마음으로 버림받지 않을까.
타 구단은? 나 같은 투수를 다른 팀이 잡으러 올까? 로스터 한 명까지 내주면서? 어디 미친 구단주가 그러겠어.
뾰롱― 뾰롱― 뾰롱―
인기 야구 게임 ‘풀카운트’.
게임 내에 있는 스카우트 기능을 이용하여 세 명의 선수들을 데려왔다. 이름, 소속 팀, 해당 연도, 등급 등등 아무것도 모른다.
나를 향해 뒷면을 보이는 카드 세 장 중 내가 뒤집을 수 있는 건 단 한 장뿐.
파워가 강력하다는 타자 한 명, 직구가 좋다는 투수 한 명, 그리고 수비가 좋다는 야수 한 명.
폐급 투수인 나는 무언가에 마치 홀린 것 마냥, 직구가 좋다는 투수를 클릭하여 카드를 뒤집었다.
따란―
“음…….”
나타난 선수를 보고 미간이 좁아진다.
놀리는 건가.
직구가 좋대서 뒤집었더니 나타나는 김한울이라는 이름 세 글자.
직구 좋다매. 아까 그 좋은 직구 시원하게 처맞고 담장 너머로 날아간 거 못 봤나.
그래도 이 게임 몇 년째 하면서, 게임 내에서 내가 내 이름을 내 팀으로 본 건 사실 처음이다.
크게 맘먹고 질러본 현질 100만 원어치 카드깡에서도 보이지 않았었고 하루에 한 번씩 무료로 보낼 수 있는 스카우터들 또한 내 이름을 찾지 못했다.
영입이라는 단어를 클릭하자 뜨는 ‘영입하시겠습니까?’라는 메시지.
할 거야. 할 거라고. 말리지 마.
뾰롱~ 하는 효과음과 함께 사라지는 선수 영입 금액 중 최하 금액인 13만9천 포인트.
“에휴…….”
그래도 딴에 짬은 좀 찼다고 특이 폼 구현은 해줬다. 음, 멋있기만 하구만.
실제 경기에서의 구위는 형편없고 그에 따라 성적은 더더욱 형편없지만 투구 폼 하나만큼은 정말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멋진 폼이라는 평가가 자자하다. 하여 그 폼 하나만 보고 영입을 했다는 후기가 꽤 많다.
그리고 폼만 보고 썼다가 영혼까지 탈탈 털리고 나서 곧장 방출시켰다는 후기가 앞선 후기와 비슷한 정도의 양이고.
그래도 처음으로 ‘나’를 뽑아봤는데, 한번 봐야지.
곧장 연습장에 들어가 내 캐릭터를 선택한다.
“직구가… 24…….”
1부터 100까지의 능력치.
평균을 대략 50으로 잡아본다면 내 직구가 평균의 절반도 안 된다는 것인가.
아니… 딱히 틀린 말 같지는 않아도 그래도 좀, 응? 좀 너무하지 않아? 요즘 보니까 S급 투수들 기본 직구가 막 50, 60대 이러던데. 너무 심하잖아.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 스탯을 뒤로하고 직구를 선택해 던져 보았다. 게임 화면에 보이는 스트라이크 존의 가장 정중앙. 가장 강한 강도로 던져 본다.
슈우웅― 폭―
“…….”
음.
퍽! 펑! 팡! 꽝! 콰앙!
뭐 그런 것도 아니고 폭, 미트에 안기는 그런 느낌을 표현한 건가. 아주 잘 구현해 냈구만. 완벽해.
직구를 제외하고 변화구는 4개가 더 있었다. 커브, 슬라이더, 체인지업, 스플리터.
실제로는 여기에 투심성 싱커도 던지기는 한다만, 이 게임 안에서 한 투수가 가질 수 있는 최대의 구종은 5개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도 이 정도면 나름 후하게 쳐줬다. 어느 점심 나가서 사 먹는 게임사가 C급 투수한테 5구질을 찍어주겠어.
그래, 구종을 5개나 줘야 했으니까 그 디플레이션으로 인해 직구가 24밖에 안 된다고 생각하자. 그러자.
근데 그 반대급부라고 해야 할지,
폭― 폭― 폭― 폭―
“…….”
형편없다. 좀 심하게. 그냥 어디 가서 느린 직구라고 해도 될 정도로 변화가 형편없다. 브레이킹도, 낙폭도, 구속도.
디플레이션은 직구뿐 아니라 변화구에서도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최소한 제구력만큼은 상으로 맞춰줬다는 것 정도.
최상이 아닌 게 아쉽긴 하지만 만족한다. 5구질 특이 폼에 제구 상(上). 잘만 키우면 쓸만한 투수지만 굳이 이런 선수까지 써야 하나…가 중론이다.
멋쩍음에 머리를 긁적거리고선 자유 연습장에서 나와 연습 게임에 들어갔다. AI와 짧게 3이닝짜리의 경기를 치르는 짧은 모드.
연습 게임일 뿐이지만 가끔 퀘스트가 튀어나오고, 또 이 퀘스트를 완료한 선수는 퀘스트 보상으로 능력치가 약간 성장한다.
굳이 이럴 필요까지는 없지만 게임에서나마 내가 잘던지는 모습을 한번 보고 싶었다.
“…음.”
어림도 없지!
탈탈 털렸다. 여윽시, C급 투수답다. 아니, 나답다고 해야 하나. 소름이네.
그 판을 종료하고 나와서 내 이름 옆에 있는 방출 버튼을…….
“하아…….”
누를까, 말까, 몇 분 고민하다가 그냥 놔두기로 했다. 얘 있다고 문제 될 것도 아니고, 그래도 기념인데. 가지고만 있자, 일단은.
* * *
8개의 구단 중 6위. 애매한 하위권. 시즌 막바지에 들어선 지금은 별 의미가 없을지라도 선수 개개인들에겐 다르다.
시즌의 끝은 그 해의 마지막이고 마지막을 잘 마무리해야 다음 시작이 좋지 않겠어? 올해까지만 야구할 거 아니잖아.
“한울아, 준비해라.”
“네.”
7회 말 돌입. 점수는 11 대 4. 지고 있다.
우리 선발진의 막내 준혁이는 6이닝 1실점으로 호투하고 내려갔지만 6회 등판한 계투진이 ‘롸’끈하게 불장난을 시전한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점, 현재 진행형이다. 즉 오늘 게임 또한 이길 확률이 적다는 이야기.
굳이 이런 경기에서 몇 있지도 않은 1인분 하는 투수를 올릴 필요가 없다. 그럼 누구? 나.
모자를 쓰고 글러브를 끼고 불펜으로 향한다. 9년째 같은 덕아웃, 같은 불펜. 이젠 대충 눈감고 가도 뭐가 어디 있는지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다.
불펜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제 선발이었던 혁준이가 앉아 있다.
“형님 또 올라가십니까?”
“그러게.”
눈이 살짝 동그래진 혁준이의 눈을 뒤로하고 어깨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스트레칭을 시작한다.
몸이 빨리 풀리는 편이기에 대충 스트레칭을 해준 뒤 마운드에 선다. 3년째 불펜에서 고생해 주는 불펜 포수 건영이가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앉아 있다.
“마스크 쓰지?”
“에이.”
“개쉑.”
찰진 욕 한마디에 불펜의 분위기가 좋은 의미로 확 올라간다. 그에 건영이도 재밌는 듯 웃으며 마스크를 쓴다.
글러브 낀 손의 손등을 하늘을 보게 한 상태에서 포수를 향해 한 번 까딱여 주곤 글러브 안에 공을 쥔 손을 넣어 그립을 잡는다.
왼 다리를 살짝 뒤로 빼준 뒤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려 와인드업을 취한다. 보일 듯 말 듯 약한 허리 반동이 이루어진 후 왼 다리가 높게 올라간 뒤, 왼쪽 엉덩이가 포수를 바라보며 전진한다.
왼쪽 발의 엄지발가락 부분이 마운드 끝에 닿고 한참을 있고 나서야 돌아가기 시작하는 골반, 그리고 상체, 그리고 어깨, 그리고 하박.
왼쪽 무릎이 펴지며 몸에 브레이킹이 걸리고 그 관성은 온몸을 타고 손끝으로 전달된다. 그 모든 힘이 한 지점에 모였다고 생각되는 순간, 손끝을 강하게 때린다!
폭―
“129km.”
에라이.
이번엔 글러브 손의 손바닥이 하늘을 보게 한 뒤 아래쪽으로 까딱였다. 그리고 같은 동작의 시작.
거의 마지막까지는 아주 똑같다. 다른 점이라고는 공을 쥔 그립의 차이뿐.
손날과 손등의 중간 어딘가가 포수를 보며 전진한다는 느낌으로, 손가락으로 튕기는 게 아닌 빠진다는 듯한 느낌으로.
그렇게 날아간 공은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고 포수가 대고 있던 미트에 정확하게 들어갔다. 이왕이면 꽂혔다, 같은 표현을 쓰고는 싶지만 양심상 그렇게는 못 하겠다.
그렇게 몇 구를 던졌을까… 양손을 머리 뒤로 올린 와인드업 상태에서 슬쩍 포수를 바라보았다.
“…응?”
잘못 봤나?
“형, 왜 그래요?”
“아, 아냐. 눈에 뭐가 들어갔나 봐.”
마운드에서 발을 풀고 글러브를 빼고 왼손으로 눈가를 살살 비볐다. 오른손엔 로진 잔뜩 묻어 있으니까 안 되고. 그러고 나서 다시 건영이를 봤다.
…뭔데.
내 시선 상에서 건영이의 왼쪽, 좌타자가 들어갈 정도 되는 공간.
[투구의 첫걸음, 제구]
- 포수가 원하는 곳에 투구하세요. (0/5)
- 보상 ― 포심 +1
어제 게임을 너무 많이 했나.
어제 했던 야구 게임의 인터페이스가 보인다. 그래, 마치 어제 내가 했던 그 연습 모드의 퀘스트 같은, 그 인터페이스, 그리고 그 말투.
아니지? 아니지? 하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옆으로 몇 걸음 옮겼다. 하지만 사라지지 않고, 그 글자들은 오히려 회전하며 나와 정면을 유지했다.
“형!”
“아, 아냐. 미안.”
이상하다.
이상한 기분을 느끼며 다시 플레이트를 밟았다.
원래 와인드업 때 포수를 보지 않는다. 마운드 끝이라고 해야 하나, 내 살짝 앞을 내려보다가 리프팅, 왼 다리를 올리는 동작과 함께 고개가 올라가며 포수를 바라본다.
하지만 자꾸 느껴지는 이질감에 슬쩍 눈만 올려 다시 포수를 보았다. 정확하게는 포수의 왼편. 여전하게 떠 있는 그 퀘스트.
다시 숨을 고른 뒤, 20년간 거의 매일 반복해 왔던 동작을 다시 시작한다. 그리고…….
폭―
“야, 형 진짜. 다른 건 모르겠는데 제구는 와…….”
띠링―!
[투구의 첫걸음, 제구]
- 포수가 원하는 곳에 투구하세요. (1/5)
- 보상 ― 포심 +1
건영이가 가져다 댔던 우타자 몸쪽, 좌타자 바깥쪽의 하나 낮은 곳으로 싱커는 정확하게 들어갔다. 그와 함께 들리는 효과음.
음…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