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평화로운 불펜생활-5화 (5/190)

5화. 관찰

혁준이의 직구 5개를 관찰해라.

사실 이 자체는 어렵다고 할 만한 건 아니다. 공 5개 보는 게 얼마나 걸린다고.

공 하나에 대충 20초 잡으면 100초, 채 2분도 안 걸리는 일이다. 로진 바르고 잠깐 코치님 얘기 듣는 등등의 잡다한 시간 포함해 봐야 넉넉하게 5분.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이 미션을 달성하기 어려운 이유가 두 가지 있다.

첫 번째는 앞서 이야기했듯, 내 캐치볼 상대가 팀 내 최고참 투수인 이효재 선배라는 것.

기타 다른 팀 메이트였다면 그냥 양해 좀 구하고 대놓고 구경해도 됐을 거다. 에이, 이래 봬도 나도 여기 야구판 구른 게 거의 10년째인데. 그 정도도 안 될까 봐.

다만 이 사람은 그게 안 통한다.

프로답게.

이 네 글자가 삶의 모토인 사람은 마흔 살에 닿은 지금에 와서도 아주 규칙적인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걸로 유명하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시간에 움직여서 같은 시간에 밥을 먹고 같은 시간에 시합을 뛰고 같은 시간에 운동하고, 마지막으로 같은 시간에 자고.

힘들지.

그게 사람이 할 짓은 아닌 짓을 25년 넘게 똑같이. 존경심이 무럭무럭 자라난다.

성적도 이번 시즌 끝나면 은퇴하는 게 아쉬울 정도로 A급은 아니더라도 B+ 정도의 성적을 냈으니.

더불어 인성까지 훌륭하니 모든 후배들의 귀감이 될 만한 사람인 게 당연하다…만…….

“야!”

아, 제발요.

띠링―

[몸을 움직이는 것만이 훈련이 아닙니다]

- 국내 최고의 강속구를 보유한 황혁준의 직구를 5개 관찰하세요. (1/5)

- 보상 ― 포심 +5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한눈판 덕에 다섯 개 중 하나는 채웠다. 이 짓을 네 번을 더 해야 한단 소린데…….

그리고…….

팡!

“커브냐?”

“어때요?”

“연습한 거 맞아?”

“별로예요?”

불펜 피칭이지 직구 피칭이 아니다.

그래, 암만 그래도 저 녀석도 프로인데, 변화구 몇 개는 가지고 있을 거다.

쓸 만한 변화구는 슬라이더 하나밖에 없는 녀석이긴 하지만, 그렇기에 지금 이런 시기에 다른 변화구들까지 던져보며 연습할 수 있는 거지.

즉? 직구만 주구장창 던지리란 법이 없다는 거다.

아쒸.

기껏 눈치 보며 공 하나를 더 봤는데, 작년부터 연습해 왔던 커브였다.

팡!

팍―

효재 선배와 공을 주고받으며 가볍게 어깨를 푸는 중에 ‘펑!’ 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내색은 못 하지만 속에선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저 지금 몇 개 던졌어요?”

“대충… 20갠가.”

“19개.”

“아, 감삼다.”

실전 피칭이 아니다. 경기가 아니다. 가벼운 테스트다. 몸풀기와 같다.

아마 많아 봐야 30개 언저리만 던지고 내려올 거다. 공 던지는 걸 워낙에 좋아하는 녀석이라 진상… 아니, 떼를 쓴다면 3개 정도 더 던질 수는 있겠지.

“야.”

“…예? 아, 예.”

또 슬쩍, 하고 혁준이를 보다가 효재 선배한테 딱 들켰다.

차라리 소리를 치면 나을 텐데, 저렇게 조용하게 부르니 더 무섭다. 마치 학교 끝나고 집에 갔는데 엄마가 한울아 잠깐 얘기 좀 하자, 하며 조용히 부르는 느낌.

고작 직구 스탯 2가 추가됐을 뿐이지만, 그 차이는 확실히 있었다. 드라마틱한 차이는 아니었지만, 내게 자신감을 가득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5다.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작년 막바지 상수전 등판에서 만난 뒤 몇 개월 만에 나타난 퀘스트.

그 이전 호크스전 등판 때 올린 스탯이 4, 그중 직구는 2. 아주 작은 미세함에도 크게 반응하는 프로 씬에서 스탯 2는 컸다. 근데 5야. 그 큰 스탯 2의 2.5배라고.

“야. 뭐 하냐.”

“예?”

“집중 안 해?”

“아, 그…….”

“야구하기 싫어? 어디 아파?”

“아닙니다.”

“아님 내가 못마땅하냐?”

“아닙니다.”

“말을 해봐. 뭐가 문젠데.”

“…….”

제가 퀘스트를 깨야 하는데요.

순간 그 말이 목까지 찼다가 어거지로 밀어 넣었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슬쩍 들어 올려 효재 선배의 눈빛을 보았다.

화가 났다고 해야 하나, 기분 나빠 하는 모습이 지금 감정이 대부분을 차지하고는 있지만 아주 약간이나마 호기심과 걱정이 보인다.

음…….

“그… 선배.”

“어.”

“작년 저 막바지에 기억하십니까.”

“작년 언제.”

“그… 9월쯤에, 호크스할 때입니다.”

“그때 왜.”

“그때 2이닝 3삼진 잡지 않았습니까.”

“그래.”

“사실 그때, 폼을 살짝 바꿨었습니다.”

“어떻게.”

“그… 릴리스 포인트를 조금 더 앞으로 가져가 보려고 했는데, 그게 잘 먹혔습니다. 실제로 구속도 평소보다 빠르게 나오지 않았습니까.”

“음…….”

기억이 잘 나지 않는 듯, 고개가 기울어진다. 빨리 좀 기억해 내세요.

펑!

“나이스 볼!”

혁준이 공 던지잖아요.

“그래. 그랬던 거 같아.”

“그게 사실 혁준이 폼을 참고했었습니다.”

“혁준이를?”

“예. 해서… 올 시즌부터 좀 본격적으로 대입해 볼 예정인데 생각이 잘 나질 않아서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그건 나중에 봐도 되잖아.”

“저 투수 2조이지 않습니까. 바로 써먹어 보려 했습니다.”

음…….

선배는 내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됐다. 그러면 그냥 캐치볼 말고 가서 혁준이 공 뿌리는 거 계속 보고 참고해. 어차피 너 그렇게 몸 많이 푸는 스타일도 아니니까.”

“가,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선배. 아시죠? 선배 결혼할 때 축의금 저 많이 낸 거?

속으로는 별의별 쌉소리가 이어졌지만 겉으로는 절대 내색하지 않으며 얼른 혁준이에게 달려갔다.

“뭔데.”

“아, 잠시 혁준이 피칭 좀 보러 왔습니다.”

“뭐하러?”

펑―!

띠링―

[몸을 움직이는 것만이 훈련이 아닙니다]

- 국내 최고의 강속구를 보유한 황혁준의 직구를 5개 관찰하세요. (2/5)

- 보상 ― 포심 +5

“작년 그때, 기억하세요? 저 릴리스 포인트가 어쩌고 했던 그거.”

“어.”

“그게 사실 혁준이를 좀 참고한 거라서요.”

“뭐… 그래. 몸은 풀어놨고? 다음 바로 너 올라오잖아.”

“아, 그럼요.”

펑―!

띠링―

[몸을 움직이는 것만이 훈련이 아닙니다]

- 국내 최고의 강속구를 보유한 황혁준의 직구를 5개 관찰하세요. (3/5)

- 보상 ― 포심 +5

어깨를 이리저리 돌려대며 준비 만반임을 알렸다. 이렇게, 코치님과 대화하는 사이에 직구 2개를 더 보며 남은 퀘스트는 2개.

그나저나, 얘 몇 개 던졌지?

이번에는 직구가 아닌, 내가 평소 보내던 사인과 같이 글러브 낀 손을 아래로 까딱인다. 커브를 던지겠다는 사인.

팡!

커브가 내 직구보다 빠르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인가.

“아니지. 너 자꾸 무의식적으로 손목 꺾잖아. 꺾지 말라니까? 그러니까 스핀도 안 먹고, 스핀 안 먹으니까 공 뜨고, 뜨니까 꺾이지도 않고. 행잉으로 가잖아.”

“아, 네.”

“하나 더 해봐.”

다시 커브 사인.

팡!

“아니, 아니. 이렇게 해봐. 그냥 아예, 꺾어둔 채로 던져봐. 시작부터. 그래.”

“네.”

자꾸 손목을 비틀며 릴리스가 되니 스핀이 제대로 먹지 않고 뜨는 모양이다.

그래서 코치님은 극약처방으로 비틀지 못하도록 커브의 그립으로 손목을 꺾어둔 채 세트 포지션에 들어가게 했다.

“유지해. 손목 각도.”

“네!”

팡!

“그렇지!”

그제야 커브다운 변화가 조금 보인다.

“하나 더 해봐.”

“네!”

150km 중후반을 상회하는 빠른 공, 그리고 세컨드 피치로는 예리하게 떨어지는 슬라이더.

피지컬이 워낙 압도적이어서 그리 완벽한 제구가 안 돼도 힘으로 윽박지르는 게 가능한 혁준이였다.

하지만 얘도 연차가 쌓여감에 따라 분석되고, 또 그럼에 따라 슬슬 맞아가기 시작하니 서드 피치의 필요성을 느낀 모양이다.

직구와 슬라이더, 빠른 공 일변도에서 커브라는 완급 조절을 위한 공을 연습하고, 또 제대로 장착해 낸다면 혁준이는 정말 우리 팀에서 완벽한 1선발이 되어줄 것이다.

팡―!

“그렇지. 이번에 직구 던져봐.”

“네.”

그렇지!

퍼엉―!

띠링―

[몸을 움직이는 것만이 훈련이 아닙니다]

- 국내 최고의 강속구를 보유한 황혁준의 직구를 5개 관찰하세요. (4/5)

- 보상 ― 포심 +5

“던져봐서 알겠지만, 직구랑 손목 각도가 아예 달라. 나중에 캐치볼 때도 커브 많이 던져봐. 그래야 감 안 잃어. 새삼 얘기하지만 커브가 제일 어려운 구종이야.”

“네, 감사합니다.”

현역 시절, 솔직히 성적은 그저 그랬지만 커브 하나만큼은 예술이었던 신영준 코치님의 말이니 이건 진리와 다름없다.

“그래, 내려가 봐.”

예?

“아, 코치님, 저 몇 개만 더 던지면 안 돼요?”

예, 예!

“시간 없어. 우리 빨리 이동해야 돼. 뒤에 많이 밀렸다.”

예?!

“그… 세 개만요.”

“안 된다니까.”

“아아앙, 코치니이이임~”

괴물 같은 피지컬과는 다르게 깜찍하게 생긴 녀석이 애교를 떠는 모습은 꽤나 귀여웠다. 그 귀여움에 코치님, 제발 하나만 더요…….

“…하나만 해.”

“넵!”

허가가 떨어지자 녀석은 기쁘게 웃으며 플레이트를 밟고 오른발을 뒤로 뺐다. 그리고 포수를 향해 커브 사인을… 예?!

팡―!

“좋네. 감 잃지 마.”

“네!”

네?!

혁준이는 글러브까지 벗고 규학이에게 고생했다는 인사를 던진 뒤 마운드에서 내려갈 준비를 마쳤다.

“야, 야!”

안 돼!

“네?”

“…하, 하나만. 직구 하나만 더 던지면 안 돼?”

“갑자기요?”

“어. 하나만.”

“어… 그…….”

본인도 내심 피칭이 아쉬웠는지, 시선이 마운드로 가긴 하지만 거기엔 코치님이 있다.

“코치님!”

“빨리 와. 혁준이 넌 거기서 뭐 해.”

“저기, 혁준이 직구 하나만 더 보면 안 될까요.”

“뭐?”

깐깐하기로 유명한 신영준 코치님이라면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 아까 말씀드렸던 거 있잖아요!”

여기서 더 갔다간 코치님이 화를 낼 수도 있지만, 그럴수록 그냥 밀어붙이는 게 정답이다.

“뭐? 릴리스 포인트?”

“네. 아직 좀 아리까리한 부분이 있어서요.”

“영상 봐. 영상으로.”

“바로 다음 저잖아요. 영상 확인할 시간이 어딨어요.”

“아님 3조에서 던지든가. 그사이에 보고.”

논리 보소.

“그, 그치만!”

“그치만 뭐.”

“영상이랑 실제로 바로 앞에서 보는 거랑 다른걸요. 예? 코치님이 제일 잘 아시잖아요?”

“…….”

상욕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표정이다.

“아, 전 괜찮아요.”

“빠른 공 필요 없고 그냥 가볍게라도 괜찮아요. 실마리가 잡힐 거 같아요.”

“…혁준이 올라와.”

“옙!”

이놈도 아쉬웠던 게 맞다. 글러브 낄 생각도 안 하고 곧장 마운드에 올라가 코치님이 건네는 공을 받는다. 의아해하는 규학이를 어거지로 앉히고 곧장 와인드업 자세에 들어갔다.

와인드업이라 해봐야 별 건 없다. 포수를 정면으로 보고 발을 빼는 나와는 다르게 1루를 보고 오른발을 살짝, 한 족장 정도만 빼고 다리를 올린다. 그리 높게도 아니고 그냥 허리선 정도까지만. 찬찬히 골반이 이동하고 나서…….

퍽!

이렇게 꽂히는 공. 신기하다. 저 간결한 폼에서 어떻게 저런 구위가 나오는지.

“됐냐?”

“아, 예!”

그래도 덕분에,

따라란―

퀘스트 완료!

[몸을 움직이는 것만이 훈련이 아닙니다]

- 국내 최고의 강속구를 보유한 황혁준의 직구를 5개 관찰하세요. (5/5)

- 보상 ― 포심 +5

“스탯.”

작게 스탯 창을 소환했다.

띠링―

[선수 능력치]

제구 ― 최상

구위 ― 최하

체력 ― 하

직구 ― 27+5=32

커브 ― 31

슬라 ― 19

스플 ― 23

체인 ― 29

싱커 ― 25

특성 ― 해탈

이젠 직구가 가장 높은 스탯을 가진 구종이 되었다. 아직도 형편없는 스탯이기는 해도, 그나마.

“혁준아.”

“넹?”

“고맙다. 형이 진짜, 어? 사랑하는 거 알지? 어?”

“뭘요. 제가 더 고맙죠.”

새끼.

녀석은 해맑게 웃으며 불펜을 빠져나갔고, 그대로 혁준이의 자리를 내가 밟게 되었다.

“2조! 움직여라!”

우연인지, 효재 선배는 내 바로 옆 마운드를 쓰게 됐고.

“그래서, 좀 실마리는 잡혔냐?”

“예. 그럼요.”

“릴리스 포인트 끌고 가는 건 좋은데, 무조건 앞이라고 좋은 게 아니야. 밸런스야, 밸런스. 아무 생각 없이 끌고 나가다 제구 망가진다. 너 제구는 좋잖아.”

“아, 그럼요.”

‘제구는’이라는 표현이 걸리긴 하지만 상관없다.

“규학아, 직구!”

“예, 직구!”

말로 구종을 얘기하긴 했지만 버릇이 무섭다고, 자연스럽게 글러브 낀 왼손으로도 수신호를 건넸다.

포수를 바라보며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왼발이 한 걸음 뒤로 빠지며 규학이를 보던 시야와 내 양손의 위치가 교차된다.

미세한 허리 반동 이후에 왼무릎이 가슴께를 향해 움직이며 양손과 시야가 또 한 번 교차된다.

골반을 살린 채 오른 다리가 살짝 굽어지며 왼쪽 엉덩이가 포수를 향해 빠르게 전진한다.

떨어질 줄을 모르던 양손이 천천히 분리되기 시작하며 양 견갑골이 좁게 모여들었다.

파워 포지션이 완성될 때쯤 왼발이 땅에 닿았고, 그제야 골반이 회전하기 시작한다.

골반이 조금 열리고 나서야 답답했던 어깨선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강력한 전진력은 왼 무릎이 펴지며 브레이크가 걸렸다.

브레이크로 생긴 강한 관성과 온몸의 회전력은 이윽고 손끝의 미세 혈관이 터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느끼게 하며 공이 쏘아져 나갔다.

빵!

“오! 나이스 볼, 형님!”

팔로우 스로가 다 끝나기도 전에, 미트에 꽂혀있는 내 직구를 보며 확신했다.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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