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난 계속 달라질 거거든
2이닝 1실점 1피안타.
7회에 올라 8회까지 막았다. 2 대 0으로 지고 있다가 8회 등판이 끝나고 팀이 역전하며 승리 투수까지 되었다.
비록 시범 경기라고는 하지만, 승리라는 기록과는 크게 연관이 없던 투수 입장에선 기분이 좋아야 하는 게 분명한데…….
“왜 그리 기분이 뚱하셔.”
“남이사요…….”
그 1피안타라는 게 박해진한테 처맞은 솔로 홈런이라는 게 문제지.
“하…….”
머리를 쥐어 쌌다. 이겼는데 졌다라는 표현을 여기에 써도 되지 않을까.
아직도 생각난다.
지금의 내 공도 쳐봐라, 하며 초구 몸쪽 높은 언저리에 꽉 차게 제구된 공을 녀석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그대로 잡아당겨 좌측 폴대 살짝 옆으로 넘겨버렸다.
그때의 그 타격음은 진짜, 하루가 지난 지금에 와서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역대 맞았던 홈런들 중 가장 경쾌한 타구였기도 했고.
몇몇 열성 팬들의 그럼 그렇지, 왜 또 쟤를 올렸냐, 방출 안 하냐는 식의 말은 내게 아주 정확하게 들렸다. 그에 열 받은 내가 그다음 여섯 타자를 모두 깔끔하게 잡아냈고.
심판의 아웃 콜이 이어질수록 시끄러워지는 구장, 그리고 반대로 조용해지는 내 안티들.
그 애매한 어딘가에서 내 기분은 조금씩 하강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신경 쓰지 마, 걔는 원래 그런 애야.”
“아니이이!”
아니시에이팅 발동.
“아니, 저 새끼는 왜 메이저 안 간대요? 메이저 양키들은 보는 눈도 없대요? 아, 좀 꺼졌으면 좋겠는데, 진심! 으헝헝……!”
“쟤 몇 년 차인지는 알고 하는 소리지?”
“5년 차요, X발!”
나보다 한 살 위의 선배 투수인 한규진 형과 실없는 반농반진의 대화를 주고받았다.
이제 5년 차밖에 안 된 애송이의 FA 시기가 두려울 뿐이다. 진짜로.
“난 쟤 만나면 아, 안타만 쳐주세요, 생각해.”
“형, 그래 약한 사람이었어요?”
“홈런 처맞는 것보단 낫잖아.”
정답.
그래도 기분이 안 좋은 걸 어떡해. 아주 그지 같은걸.
아, 빡쳐.
“아니… 그래도요. 그래도 사람 성의라는 게 있잖아.”
“뭔 성의?”
“알잖아, 이번 시즌 나, 그 왜, 공 달라진 거.”
“알지.”
“…근데 그걸 보지도 않고 그냥 냅다 초구부터 갈기면…….”
“섭섭하냐?”
큭큭, 이 새끼 알고 보니 걔 좋아하는 거 아냐? 한울이 츤데레였네, 같은 쌉소리는 살짝 넘겨주시고.
“한울이, 준비해라.”
“예에에에…….”
그렇게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던 사이, 불펜행 명령이 떨어졌다. 무심코 전광판을 확인하니 8회 초 5 대 5 동점. 내 역할을 진하게 풀어낼 차례다.
* * *
팀당 8경기씩 펼쳐지는 시범 경기. 원하 챌린저스는 4승 4패로 무난하게 일정을 마무리했다.
그 와중에 난 1승 1홀드 1세이브로 쏠쏠한 활약…을 해놓고도 의아하다. 자연스럽게 나에 대한 기사도 몇몇 나왔다.
시범 경기든 정규 시즌이든 그렇게 얻어터지던 내가, 표본이 적기는 하지만 2점대의 준수한 방어율로 미니 시즌을 끝냈으니.
모 야구 채널의 투수 출신 해설가이자 전설적인 대투수 선배도 나에 대해 분석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무엇이 김한울을 특급 불펜으로 만들었나?
살짝 부끄러움에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은 기사 제목은 둘째치고 내용이 흥미로웠다.
이전 시즌들의 시범 경기, 정규 시즌들의 내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여 올 시즌 시범 경기 때 무엇이 달라졌는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트랙맨을 기반으로, 단순 직구의 구속이 빨라졌음은 둘째치고 익스텐션이 앞으로 나왔고 공의 회전 수가 좋아졌다.
사실 수치들 자체만 보면 그렇게 대단하다고 할 만한 수치들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는 그 조막만 한 수치들로 결과를 보였다.
이미지는 참 무섭다.
오오라, 포스라고도 하지. ‘그’ 투수가 마운드에 서면, ‘그’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면.
아니, 그 이전에 ‘그’ 투수가 불펜에 있으면, ‘그’ 타자가 대기 타석에 있으면.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한 번 박힌 이미지는 벗겨내기 어렵다. 그 습관과도 같은 이미지 속에서 생겨난 작은 괴리는 생각보다 큰 결과의 차이를 가져온다.
때문에 그 기사의 댓글엔 그래 봐야 140km 안 되는, 시즌 들어가서 눈에 읽히고 체력 떨어지면 또 언제나처럼 처맞을 공이라는 댓글이 많았다.
그래도 수치가 좋아졌으니 성적이 좋아진 건 사실이고 올해는 다를 거라 응원하는 댓글이 더 많아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결과는 시즌 들어가 봐야 알겠지. 아니, 시즌 들어가도 모를걸?
띠링―!
[개막전 승리]
- 개막전의 승리를 이끄세요. (0/1)
- 보상 ― 포심 +1 슬라이더 +1
난 계속 달라질 거거든.
“한울아, 준비해라.”
“예.”
개막전 상대는 작년 시즌 정규 시즌 2위, 그리고 포스트 시즌에서도 한국 시리즈에 올랐지만 언제나처럼 상수 타이거즈한테 탈탈 털린 동성 호넷츠였다.
확실히 강팀이기는 하지만 상수 타이거즈한테 워낙 약해서 그랬는지, 비교적 해볼 만하지 않을까 같은 근거 없는 자심감이 문득 생겨난다.
스코어는 2 대 1, 한 점 차 리드 당하고 있는 상태의 9회 초. 타순은 6번부터. 투수 입장에선 썩 나쁘지도, 썩 좋지도 않은 상태 타순.
타자가 들어와 홈플레이트를 툭툭 치며 루틴을 시작했다. 왼쪽 귀 옆에 배트를 움찔움찔대며 대기하는 모습을 보고 규학이를 쳐다봤다.
초구는 카운트 잡는 슬라이더, 바깥에 걸치게.
“스트라이크!”
지켜보며 초구 잡고, 다음 사인은 같은 코스에서 빠져나가는 싱커. 볼이 돼도 좋으니까 아슬아슬하게.
부웅―!
“스윙.”
뭘 노리고 있었는지 배트가 강하게 돌아가며 구심이 스윙 콜을 냈다. 꽤 쉽게 카운트를 만들어는 냈지만, 배트 돌아가는 소리가 마운드까지 들릴 정도로 살벌할 스윙이었다.
무서워라.
왜 저렇게 바깥쪽에 집착할까, 하며 규학이의 사인을 몇 번 걸러내니 맘에 드는 사인이 나왔다.
몸쪽 직구.
고개를 끄덕이고 꽉 차는 곳을 향해 던졌지만, 반 개 정도가 빠진 거 같은데?!
빵!
“스츄라아악!”
뭐라고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는 우렁찬 콜과 함께 심판이 세 번째 스트라이크를 선언했다. 규학이의 프레이밍이 빛을 발한 순간.
타자는 순간 욱했는지 심판을 노려봤지만 한숨과 함께 삭히고 얌전히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멋지다는 뜻으로 따봉을 한 번 선사하고 라운딩된 공을 다시 받으니 다음 타자가 들어왔다. 여유로운 마음가짐으로 다시 사인을 기다렸다.
이번엔 우타자인 타자의 바깥쪽에 꽂히는 백도어 싱커. 볼이 돼도 좋다. 아니, 반 개 정도 빠지는 볼이 더 좋다.
빵!
“볼.”
비교적 프레이밍하기 쉬운 위치에 공이 들어갔음에도 빠지는 게 보였는지 볼 사인이 나왔다. 1~2cm만 들어갔어도 규학이의 프레이밍이면 잡아줬을 것 같기도 한데.
이번엔 같은 코스에서 빠지는 슬라이더를 던졌다. 바깥쪽 직구처럼 보이지만 결국 볼이 되는 코스.
타자의 배트가 나오다 빠져나가는 걸 보고 배트가 멈췄다. 가까스로 살았다고 느꼈는지 안도의 한숨을 쉬자 규학이가 1루심을 가리킨다.
와아아아―!!
돌았다는 판정으로 카운트는 1-1. 당연히 타자의 기분은 썩어들어갈 수밖에. 2-0라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카운트에서 1-1라는 애매한 카운트가 됐으니.
아아, 이게 특성 ‘불편’의 힘인 것인가.
타자의 표정이 굳어지자 반대로 내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것도 잠시, 다시 규학이의 사인대로 그립을 고쳐 쥐고 몸쪽 직구를 던졌다.
틱―
“파울!”
공의 아랫부분을 때려 구심의 위로 날아가는 파울볼.
구심이 볼보이에게 공을 가져다 달라는 사인을 보내고 본인의 주머니에서 공을 꺼내 내게 직접 던져주었다. 감사의 의미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구심이 볼보이에게 공을 몇 개 받는 덕에 조금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플레이!”
다시 플레이 콜이 나오고 본 사인은 타자 몸쪽으로 들어가는 슬라이더.
평소라면 위험함에 고개를 저었을 사인이지만 조금 전의 타자의 반응을 본 규학이가 무언가 생각을 낸 듯한 사인에 고개를 끄덕이고 직구 그립에서 공을 살짝 비껴 잡았다.
직구와 다름없는 팔 스윙이지만 그립과 압력의 차이로 날아간 공은 타자의 몸쪽으로 파고들다 어느 순간 존 안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게 정말 A급 슬라이더라면 움찔거리며 삼진 같은, 그런 움짤에서나 볼 법한 공이었겠지만 솔직히 내 공이 그 정도는 아니고.
뒤늦게나마 존에 들어온다고 무의식 속에 나온 배트 안쪽에 맞은 공은 힘없이 3루수 앞으로 굴러갔다. 평범한 수비의 3루수라면 잡을 수 있는 이 공을 우리 팀의 수비 요정 성훈이 형이 못 잡을 리가 없지.
성훈 선배가 쉽게 잡아 1루에 던졌고 반대로 수비 못 하는 우리 기성이가 받기 쉽게 딱 가슴 쪽에 꽂혔다. 그렇게 2아웃.
야수들이 라운딩하는 사이 들어온 8번 타자는 내가 생각했던 타자가 아니었다. 아니, 예상대로라고 해야 할지 대타가 나왔다. 작년 시즌 팀의 건실한 3번 타자로 활동했던 고명현.
메인 3번 타자였지만 캠프에서 당한 경미한 부상으로 올 시즌은 출발이 늦다.
타격 스타일은 전형적인 중장거리 타자. 펀치력만 언급해 보자면 한 시즌에 대략 20개 언저리의 홈런을 기대할 수 있는 파워.
점수 차도 있고, 이닝도 이닝이고. 컨택도 3할에는 충분히 걸쳐주니 여기선 한 방이 위험하다.
이놈아를 어찌 상대해야 하나.
내 기분을 읽었는지 규학이가 타임을 부르고 올라온다.
“어떡할까.”
“직구랑 체인지업 가죠.”
“오케이. 싱커도 섞어.”
“네.”
거창하게 타임을 부른 것과는 다르게 짧은 대화가 오간 후 규학이는 내려갔고, 대화 내용대로라 해야 할지, 의외라고 해야 할지 초구부터 체인지업 사인이 나왔다.
살짝 놀랐지만 놀란 티를 내지 않고 중지와 약지로 직구 그립을 잡고 던졌다.
부웅―!
존에서 두어 개 정도 떨어지는 체인지업에 나온 스윙은 아까 6번 타자보다 훨씬 무서운 스윙이었다. 방금 전이 살벌한 스윙이었다면 요 스윙은 살발한 스윙.
예상했던 게 아닌지 헛스윙을 하고 난 타자는 고개를 갸우뚱거린 뒤 몸쪽 싱커로 두 번째 스트라이크를 구경했다.
이어진 사인은 아예 바운드되는 체인지업.
직구로 셋업하고 갈 줄 알았더니, 바로 체인지업이네.
다시 그립을 잡고 던진 공은 꽤 싱겁게, 2루수 앞 큰 바운드로 아웃을 잡으며 이닝을 마무리시켰다. 뚜벅뚜벅 마운드에서 걸어 내려와 덕아웃으로 들어갔다.
팀 동료들의 격려를 받으며 내 자리로 가 앉아 점퍼를 어깨에 걸쳤다. 불펜에 아무도 없는 걸 보니, 혹시 이번 공격에서 한 점으로 끝나면 또 내가 올라가지 않을까 싶었다.
첫 경기부터 연장은 피곤한데…….
그렇게 생각하던 사이 시작된 9회 말.
따악―!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어?”
선두 타자였던 기성이가 안타를 치고 나갔다. 발이 더럽게 느린 기성이는 당연히 대주자 기범이와 교체되며 홈 응원석에서의 함성을 만끽했다. 하지만 4번 타자 진형이가 삼진을 당하며 1사 1루.
“어……?”
그리고 5번 타자인 지명 타자 승주. 0-2의 불리한 카운트부터 시작했지만 침착하게 볼들을 잘 골라내며 볼넷으로 걸어 나가 1아웃에 1루, 2루가 되었고 다음 타자인 6번 성훈 선배가 안타를 쳤다.
와아아―!!
이게 끝내기의 함성이라면 참 좋을 텐데.
다소 당겨져 있던 외야수들 때문에 홈에 들어오지는 못하고 어정쩡하게 만루인 상태로 재시작되었다.
다음 타자인 성문이가 초구부터 공략했지만 내야 뜬공으로 다소 허무하게 물러난 뒤 맞이한 우리의 포수 규학이.
“규학아… 제발…….”
우리의 주전 포수, 문규학. 수비적인 측면에선 리그에서 누구나가 제일가는 포수로 인정하지만 타격은…….
감독님 대타 안 돼요?
그런 표정으로 감독님을 쳐다보아도 감독님은 뭔 생각인지 규학이로 이어갔다.
모든 베이스가 다 채워져 있기는 하지만 2아웃이기 때문에 투수 입장에서의 부담은 덜하다. 수비 입장에서도 모든 누에서 포스 아웃이 가능하니 비교적 쉬워지고.
게다가 타자는 리그에서 멘도사 라인에 걸치는 타율의 규학이.
상대 팀 마무리는 자비 없이 150km 초반의 공을 몸쪽으로 훅 꽂아 넣었다. 그리 꽉 차게 들어오는 공도 아닌데 규학이는 움찔거리며 피하는 모션을 취했다.
허허… 퀘스트야…….
반쯤 포기하며 본 2구째. 높은 직구에 여지없이 딸려 나오는 배트. 반 박자, 한 박자가 아닌 두세 박자는 늦은 듯한 스윙에 우리 팀 관객들의 탄식이 덕아웃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난 못 보겠다… 싶은 마음으로 상대 투수가 다리를 들자 고개를 떨궜다.
틱!
와, 와아아아아아―!!
“어?!”
하지만 이대로 끝나리란 건 없는지, 힘없이 빗맞은 타구가 내야수의 키를 살짝 넘겼다.
당연히 3루 주자 기범이는 쉽게 득점. 그리고 2루 주자였던 승주가 이를 악물고 뛰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보다는 살짝 더 빨라 보이는 외야수의 다이렉트 송구.
그치만 조금 삐졌어!
살짝 빠진 송구를 얼른 홈플레이트로 가져와 주자를 태그하는 모습이 아주 느릿하게,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그 덕에 제대로 보았다. 주자의 손이 먼저 플레이트에 닿고 그다음에 포수의 미트가 주자의 등에 닿은 것을.
세이프!!
“우오아롸알!!”
정신을 차렸을 때 난, 뭔 소린지도 모를 괴성을 지르며 그라운드로 뛰쳐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