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평화로운 불펜생활-8화 (8/190)

8화. 무엇이 베테랑을 바꾸는가

[김형철의 돌직구 ― 무엇이 베테랑을 바꾸는가]

고졸 1차 1지명. 매년 딱 한 명밖에 가질 수 없는 타이틀을 가진 투수가 곧장 프로에 데뷔하여 남긴 성적은 다음과 같다.

8년 동안, 6승 52패 21홀드 2세이브 방어율 6.51.

그 투수가 속한 팀, 그리고 그 투수의 사정을 모르고 당장의 이 성적만을 본다면 당장에 방출되어도 이상할 게 없는 그런 성적이다.

그 투수의 9년 차 시즌의 성적은 어떨까.

2승 0패 4홀드 1세이브 13이닝에 평균 자책점은 2.08.

아직 시즌이 시작되고 한 달여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놀랄 만한 성적임에는 그 누구도 이견을 달 수가 없다.

이 투수는 누구일까? 이렇게 극적인 변혁을 일으킨 투수라면 올 시즌 딱 한 명, 원하 챌린저스의 불펜 투수 김한울이다.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김한울 투수]

원하 챌린저스는 전통적으로 불펜진이 약한 팀이었다. 선발진은 어떻게든 살림새를 잘 꾸려왔지만 그 선발진의 흥행을 불펜진은 매년 힘들게 뒤엎어왔다.

뒤엎어왔다는 표현이 과격한가? 사실 이것도 조금 수위 조절해서 결정한 단어임을 유의하자.

그런 원하는 김한울에게 특급 불펜의 모습을 기대하며 1차 1지명이라는 커다란 타이틀을 안기며 데려왔다.

고졸 투수임을 감안해도 느린 편에 속하는 구속은 프로에 입단하면 빨라질 것이라 모두 예상했고, 다양한 변화구를 쉽게 던지는 손의 감각은 더욱 날카롭게 제련될 것이라 모두 예상했다. 제구는, 메카닉적인 부분은 이미 완성형이었으니 더더욱.

하지만 구속은 늘지를 않았고 변화구는 성장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김한울은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이 때문이라고 해야 할지, 이 처참한 성적을 유지함에도 팀에 남아 있었다.

팀의 제일 궂은 역할을 계속 이어오며. 솔직히 필자로선 경의가 절로 표해지는 정도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달라졌다. 그것도 아주 확. 좋은 의미로. 무엇이 달라졌을까.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건 구속. 평균 130km가 될까 말까 한 아주아주 느린 구속의 올 시즌 평균 구속은 137km. 프로에 입단해 최고로 빨랐던 135km의 본인 최고 구속도 거기에 2km나 경신해 보였다.

평균의 한참 아래를 밑돌았던 직구의 회전 수 또한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변화구들의 상향 또한 존재하지만 거창하게 언급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요소가 섞여 만들어진 시너지는 분명 거창하다 이야기할 수 있다.

다른 일반적인 투수들이라면 그냥 그런 좋은 변화에 그칠 수도 있지만 그에겐 조금 더 커다란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무려 10년이라는 길고 긴 세월을 그저 그런 선수로 지내다, 이제 막 특급 선수가 되려고 하고 있으니까.

‘혁준이 덕이라 말하고 싶네요.’

비결을 물어보니 그는 본인의 노력이나 아이디어가 아닌 같은 팀 투수 황혁준 투수의 투구 폼을 참고했다고 하며 팀 후배에게 공을 돌렸다.

직접적으로 폼 자체를 가져온 것은 아니고, 황혁준 투수의 폼 안에서 릴리스 포인트를 조금 더 앞으로 가져오는 이미지를 현실로 가져오는 것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손을 뻗으며 릴리스 포인트에 대해 설명하는 김한울 투수]

이 글을 읽을 정도의 독자라면 릴리스 포인트가 무엇인지 알 테고, 또 그 릴리스 포인트가 앞으로 당겨졌을 때의 이점이 무엇인지 또한 알고 있을 테니 이 부분은 과감하게 생략.

릴리스 포인트, 릴리스 포인트.

투수 코치들과 방송 중계진, 그리고 투수 당사자들 또한 그렇게 노래를 부르는 단어지만 실제로 이를 앞으로 가져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프로에 입단한다는 것은 최소한의 완성형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

완성된 것을 더 완성시킨다?

말로만 들어도 어렵지 않은가? 릴리스 포인트를 앞으로 당긴다는 것은 이에 충분히 포함될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를 성공시켰다. 성공시키는 것도 모자라 그 성공으로 성적이라는 또 다른 성공을 만들어냈다. 어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끝이 아니다. 완성형이 되어 프로에 입단한 것이 아닌, 구단이 본인을 1차 1지명으로 선택한 것에 대해 10년이나 기다려준 것에 대해 보답하기 위해 그는 지금도 변화하고 있다.

이 글을 쓴 오늘의 그와 여러분이 이 글을 읽고 있을 내일의 그는 또 다른 투수가 되어 있을 테니. 올 시즌이 마무리되었을 때 그가 어떤 투수가 되어 있을지 너무 기대가 된다.

―hhha****

└확실히 달라진 게 느껴짐. 단순히 공의 느낌이나 그런 걸 떠나 상대 타자들의 반응(?)부터 달라진 게 보임. 올 시즌은 진짜 기대해볼 만할 듯

추천 735 비추천 21

―adgq****

└애증 그 자체…….

추천 614 비추천 67

―ujs****

└진짜 얘 뽑아올 때 물건이다 싶었는데 던질 때마다 욕했지……. 그리고 내려가면 괜히 미안하면서도 고맙기도 하고. 원래 작년 시즌 끝나고 은퇴하려 했는데 구단에서 막았다더라 ㅋㅋㅋㅋㅋ

* * *

- 아들!

“예예예.”

- 밥은 먹었고?

“내 걱정 말고 엄마 걱정해요.”

- 엄마는 잘 먹고 잘 있으니까 걱정 말고. 아픈 데는 없고?

“없어요. 너무 상태 좋아서 오히려 걱정될 지경이야.”

- 그래도 아프면 구단에 꼭 얘기하고. 알지?

“내가 신인도 아니고 뭘, 다 알지.”

- 그래, 고생하고. 올라오면 전화해.

“예예. 김 여사도 잘 챙겨 먹어요.”

부산에 내려와 있다. 꽤나 강팀이기도 하고 아주 열정적인 응원 열기로 유명한 KP 스타즈의 홈구장. 작년엔 3위로 시즌을 마감했는데 올 시즌은 한 단계 오른 2위로 시즌을 진행하고 있다.

타격!

KP 스타즈를 상징하는 단어다. 팀의 구성을 투수, 수비, 타격, 주루 이 네 가지 요소로 나눈다면 스탯을 타격 쪽에 몰빵한 팀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

작년 팀 타율 3할 2푼 8리.

개인이 저만한 타율을 가져도 최고의 타자라 칭함에 부끄러움이 없는데, 무려 팀 단위가 저런 타율을 만들어냈다.

팀 스탯을 타격에 몰빵한 만큼 당연히 극명한 단점 또한 존재하고 있다.

공격의 범주에 포함되는 주루는 리그 평균 수준이지만 고만고만한 투수진들, 그리고 거기보다 구멍이 여기저기 뻥뻥 뚫린 수비진들.

때문에 리그 최상위권의 팀이라기엔 부족함이 있어 중상위권 정도로 분류한다.

그렇다고는 하나 우리 팀과의 상성이 썩 좋은 팀은 아니다.

선발 싸움에서야 아무래도 우리가 우위에 있고, 저쪽 투수진과 수비가 썩 좋지 않으니 경기 초반에 몇 점 정도 내서 이기다가 불펜진에서 죄다 말아먹는 그림은 이제 지겨울 정도.

엄마의 전화를 마치고 시합이 끝난 지 좀 지난 전광판을 보았다. 4 대 8, 승리. 참고로 이 승리는 홈구장 기준이니까, 우리 팀 기준으로 하면 패배다.

야구는 팀 게임이다. 내가 어떻게 머리채를 잡고 끌고 가려고 해도 그게 안 되는 스포츠다.

애초에 그럴 깜냥도 안 되지만.

원정 3연전은 스윕. 오늘 경기의 패배와 스윕이라는 단어를 합쳐보면 우리 팀이 3판 다 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똑같은 패턴이었다. 무난하게 선취점 얻어내고, 무난하게 뒤집힌 다음 무난하게 그대로 끝났다.

건조한 표정으로 전광판에서 시선을 떼어내고 스포츠백을 왼쪽 어깨에 걸치고 걸음을 옮겼다. 빨리 대전으로 올라가야지. 올라가서 우석이 얼굴이나 보자.

* * *

직전 시리즈인 KP와의 경기들 이전부터 며칠 동안 등판이 없었다. 그사이 팀은 아주 롤러코스터를 탔다. 화끈하게 이기든가, ‘롸’끈하게 던져서 지든가.

지금의 내가 딱히 던질 만한 상황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는 하지만 컨디션 점검차 등판이라도 해볼 만한데, 일주일 째 등판이 없다.

“한울아.”

“아, 네. 감독님.”

그러다 마주친 감독님. 시합 직전이라 살짝 분주한 타이밍임에도 굳이 나를 찾아오셨다.

“어깨는 어때?”

“멀쩡하죠.”

“아픈 데 없고?”

“너무 좋아서 탈입니다.”

그러니까 좀 올려주세요.

“요즘 잘하더라. 혁준이 폼이 뭐 어쩌고가 아니라, 그건 네가 노력해서 얻어낸 결과물이야. 너무 겸손만 보이는 것도 좋지 않아. 자신감 가져도 돼.”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격려해 주시는 게 보인다. 10년이 헛되지는 않았구나, 하는 마음에 가슴이 벅차오르기까지 한다.

“요즘 등판 없어서 몸이 근질근질하지?”

“그…….”

갑자기 그렇게 훅 들어오시면…….

“…예.”

“하하하!”

머쓱하며 대답하자 감독님이 괜히 빵 터졌다.

“등판 안 한 지 얼마나 됐지?”

“어… 일수로 따지면 한 5일 정도 된 거 같은데요.”

“길긴 기네.”

“그렇긴 하죠.”

“던지고 싶지?”

“네. 오늘 대기할까요?”

“아냐. 내일 선발 올라갈 거니까, 오늘 괜히 힘 빼지 말고 준비 잘하고 있어.”

“예… 뭐…….”

“완봉해라.”

“예. 예? 예?”

예?

“왜?”

“예, 아니, 그, 저기, 선발이요?”

“어. 선발.”

“저요?”

“그래, 너.”

“…….”

뇌 정지가 왔다.

“…저요?”

“그래, 너.”

“제가요?”

“너 맞다니까.”

“왜요?”

“응?”

“아니…….”

너무 당황스러워서 이상한 말까지 나오네.

“내일 규진이 선발인데, 물집 잡힌 게 안 빠지네.”

“아니, 근데 저를 올린다구요?”

“말고 딱히 다른 투수가 없어.”

“아니…….”

아, 뭐라 해야 하지.

“일단 내일 너 선발인 건 확정이니까, 준비하고 있어.”

“…예.”

통보한 뒤 떠나는 감독님의 뒷모습을 보고도 난 그냥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뭐 하고 계십니까?”

“…주호야.”

지나가던 주호가 멍청히 있던 날 깨웠다.

“예, 선배님.”

“나 내일 선발이라는데.”

“오.”

그에 주호도 놀란 듯하다.

“완봉하시면 됩니다.”

쌉소리인 게 분명한데, 이게 드립으로 받아줘야 하는데.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상태라 입이 움직이질 않는다.

* * *

“그럼 이번엔 잠실로 가볼까요? 1선발 황혁준을 내세워 연패를 끊으려는 원하에 비스코는 마찬가지 1선발 임호택으로 맞불을 놓았습니다. 보기 드문 1선발들의 대결, 지금 바로 확인하시죠!”

아나운서를 비추던 화면은 VCR로 넘어가며 오늘 게임의 굵직한 줄거리들이 비췄다.

선두 타자 볼넷, 번트 실패로 병살을 잡아냈지만 3번 타자의 홈런으로 1회 말부터 선취점을 가져간 원하.

비스코도 선두 타자가 볼넷을 얻어낸 뒤, 다음 타자의 기습 번트로 무사 1, 2루를 만들었지만 아주 보기 드물게 5-4-3의 삼중살이 나오며 그대로 이닝 종료.

이후는 전형적인 투수전의 흐름이 이어지다가 7회 말, 원하가 힘이 빠진 구원진으로부터 솔로 홈런 하나를 추가하여 점수 차를 두 점 차로 벌렸다.

8회 초는 쉽게 막았지만 9회 초 등판한 투수가 2아웃을 잘 잡아놓고 볼넷, 안타, 사구로 만든 만루.

거기서 나온 안타성 타구에 유격수 이명진이 시즌 전체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다이빙 캐치를 보이며 게임 종료.

VCR이 끝난 뒤 스튜디오에선 아나운서가 해당 게임의 줄거리를 요약하고 터닝 포인트가 되었던 지점을 콕콕 집으며 두 명의 해설 위원과 대화를 이어갔다.

야구 중계를 많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그런 내용.

1회 말과 2회 초 공격의 희비가 엇갈린 지점과 7회 말 추가점, 그리고 9회 초 동점, 혹은 역전 찬스에서 터져 나온 유격수의 말도 안 되는 호수비를 언급하며 잠실 경기의 리뷰는 종료되었다.

이후 부산에서 열린 KP 스타즈와 성운 호크스의 경기 리뷰가 비슷한 흐름으로 언급되며 4개 구장에서 열린 모든 경기 리뷰가 종료되었다.

이어지는 다음날 경기의 선발 예고.

“…그리고 서울 잠실 구장에선 김한울 투수와 김지수 투수가 선발 대기를 하고 있습니다.”

CG 화면이 끝난 뒤 다시 스튜디오. 이에 직설적인 말투로 컬트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김수찬 해설 위원 한 명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운을 뗀다.

“이거, 제가 잘못 본 거 아니죠?”

“어떤 부분 말씀이신가요?”

“여기 원하 선발이 김한울 선수라고 나와 있는데요.”

“제대로 보셨습니다.”

물론 사전에 짜여진 대화 내용이었다. 해당 방송사에서 내일 중계할 예정인 경기의 프리뷰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시작되는 것이다.

“무슨 의미일까요?”

“한규진 선수의 물집 상태가 나아지지 않아 한 차례 등판을 거르게 되어 대체 선발로 출전하게 되었는데요.”

“근데 원하가 선발진이 이렇게 없나요? 이럴 팀이 아닌데.”

“저도 좀 의아하네요. 김한울 투수가 올해 대단한 시즌을 보내고는 있지만 지금까지 선발 등판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이번 시즌이 아니라 통산 전체로요. 이영진 위원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이해가 가는 선발 예고라고 봐요.”

이영진 위원의 첫 마디 이후 자연스럽게 화면이 VCR로 넘어가며 김한울의 시합 화면이 나온다.

“일단 선발진은 나름 탄탄한 원하입니다만 고정된 선발진 이외엔 좋다고 할 만한 투수가 없는 게 아주 큰 약점입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원하의 로고, 그리고 그 옆에 환하게 웃는 김한울의 프로필 사진이 보인다.

“선발진 로테이션은 건드리고 싶지 않을 테고, 그렇다고 2군에도 마땅한 투수가 현재로썬 보이지가 않으니까요. 모처럼 4위 싸움을 하고 있는 원하는 복권처럼 다른 투수를 올리는 것보단, 통산 등판이 모두 구원 등판이기는 했지만 올 시즌 반전을 만들어낸 확실한 투수를 올려서 확실한 한 경기를 만들겠다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김한울 투수 또한 최근 5일, 오늘까지 6일을 쉬었으니 체력은 충분할 거구요.”

올 시즌의 투구 모습. 다양한 구종으로 삼진과 땅볼을 양산하여 아웃 카운트를 잡아낸 뒤 주먹을 불끈 쥐며 세리머니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앞서 이야기했던 본인의 이야기에 설득력을 얻기 위해 한마디 더 거든다.

“사실 김한울 투수가 불펜 체질은 아닙니다. 구속이 아주 느린 편이기는 하지만, 아주 좋은 제구, 다양한 변화구. 딱 선발감이라는 생각 안 드세요?”

“오, 그렇네요.”

“앞서 말한 팀의 상황과 같이 생각해 보면 지금 상황에서 원하는 김한울 투수가 제격이라 판단한 것 같습니다. 다만 말씀처럼 첫 선발이기에 체력 안배를 어떻게 하느냐가 관건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그럼 김수찬 위원께선 비스코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비스코 또한 김한울 선수가 선발로 나온다는 거에 많이 당황했을 테죠. 지금까지 김한울 투수에 강했다고는 하지만 올해는 다르기 때문에…….”

뜬금없는 한 선수의 선발등판은 두 해설 위원의 끝장 해설로 인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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